기도의 빠른 응답은 무엇을 구함보다 무엇을 하리이까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60회 작성일 2009-06-27 11:00

본문

누가복음 3:10-14 기도의 빠른 응답은 무엇을 구함보다 무엇을 하리이까입니다.
조국이 당신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지 묻지 말고, 당신이 조국을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 지 물으라(Ask not what your country can do for you, ask what you can do for your country)” 는 말은 존 F 케네디가 미국 대통령의 1961년 1월 취임연설에 담긴 문구 중에 하나였습니다.
당시에 모든 사람들이 새 대통령을 선출해 두고 과연 대통령이 나라가 무엇을 해 주기를 상당히 기대를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나라가 아니라 당신들이 나라를 위하여 라는 새로운 국가관을 제시해 주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마찬가지입니다.
세례 요한이 예수 그리스도에 관한 소식을 전한다는 말을 듣고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그들은 한결같이 자신들의 요구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며 죄 사함을 받는 세례를 받기 위하여 잔뜩 기대가 컸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이 들려주는 소리는 그들의 기대치가 아니라 이 대로 나오면 우리 모두가 다 망한다는 것입니다.
나의 기대치가 아니라 내가 기대하는 만큼 내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호기심으로 나온 사람, 친구 따라 나온 사람. 정말로 말씀이 그리워 나온 사람, 각양각색 이었습니다.
요한의 소리를 듣기 위해 모여든 군중들 속에는 공무원도 있었고 세무서 직원도 있었고 군인도 있었고 유대교의 교사 랍비들도 있었고 종교인도 있었고, 일반 서민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상관이 없습니다. 다만 내가 어떤 마음의 가짐을 갖는 것인가? 가 중요한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어떤 모양으로 주께 나아왔다 할지라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다만 이 시간부터 내 마음의 자세가 바뀌는 것이 중요합니다.
세례 요한이 군중들을 향해서 이대로 가다가는 우리 모두 망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에 그들은 한결같이 하는 대답이 있었습니다.
10절 그러면 우리가 무엇을 하리이까 할렐루야!
하나님은 성도들의 사정을 모르시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 사정 때문에 아무 일도 할 수 없는 자가 되기를 원하시지 않습니다.
비록 내 형편이 그러하다 할지라도 내가 할 일이 있다고 하십니다.
이게 희망이요 가능성입니다. 내 자신의 요구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을 향한 나의기도 제목만이 있지 않습니까?
물론 기도 제목은 있어야 합니다.
그러나 그 기도 제목만이 나의 신앙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나의 신앙은 내가 어떻게 기도 제목에 합하게 들어져야 하는가? 입니다.
저는 목회 생활을 하면서 요사이 새롭게 깨달은 것이 있습니다.
과거의 스타일은 성도들의 문제에만 초점을 맞췄다는 것입니다.
당신의 문제에 하나님이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반드시 하나님이 더 나은 길을 열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이 이루어지기 위하여 열심히 기도합시다. 이었습니다.
이 같은 말씀에 모두가 좋아하고 위로를 받고 소망을 가지고 축복을 받은 기분이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으로 무엇인가? 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결실이 없고 그리고 변화가 없고 발전이 없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사람이 만들어 지지 않는 다는 것입니다.
성전 미문에서 금품을 구하는 앉은뱅이에게 돈을 구한다고 동전이나 몇 푼을 던져 주었다고만 하십시다.
그 사람 그것 가지고 의식주는 해결 되었다 할지는 모르지 만은 앉은뱅이 자리에서 일어나 걷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또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인물은 되지 못하였을 것입니다.
이게 아닙니다. 비록 금은은 없지만 내게 있는 것
아니 금은이 구원이 아니라 구원의 예수 그리스도가 더 필요한 것이고 우선인 것입니다.
사도 요한과 베드로의 보는 눈은 예수 그리스도이었습니다.
제 역시 스타일이 바꿔졌는데 당신의 형편과 사정 참으로 아타깝다 그리고 잘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꿀떡같다 그러나 그렇게만 가지고는 안 되는 것입니다.
내 사정이 이러하지만 이 사정에서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이 있다 그것을 내가 하여야 한다
그래야만 거기에서 일어나고 더 나은 결과를 보게 되고 더 큰 일을 이루어 낼 수가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를 지실 것에 대하여 고민하고 힘들어 할 때에 수제자 베드로가 예수님께 나아와 위로하는 말을 하였습니다.
책임도 지지 못하고 그렇게 되지도 않을 일인데 순전히 인간적인 것이었습니다.
예수님 십자가 진 일이 생기지 않을 것입니다. 그거 지실 필요 없을 것입니다.
십자가를 벗어나는 것이 이게 믿음입니까? 이게 축복입니까?
만약에 그대로 하였다가는 온 인류는 죄에서 자유함을 얻지 못하고 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은 베드로의 그 말에 깜짝 놀라하시며 너는 나를 시험들게 하고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바로 이게 사탄의 짓이야
하나님의 뜻을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생각을 하는구나 라고 꾸짖지 않았습니까?
이 십자가로 말미암아 온 인류가 구원을 받고 나 같은 자도 십자가로 구원함을 받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제 스타일은 당신이 처한 형편에서 내 형편만을 말하지 말고 내 형편에서 행해야 할 주의 일을 찾는 것입니다.
저는 심방을 청하는 가정마다 정말로 복을 빌고 빕니다.
그러나 문제 해결만을 위한 것만이 복이 아니라 문제 가운데 내가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가 찾아서 행하는 것이 진정한 복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나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사람이 아무도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제 눈에는 문제가 보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이 관심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보이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 최대의 관심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야만 무슨 역사가 일어납니다. 그래야지 큰일을 할 수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돌릴 수 있습니다.
문제만을 보고 있으면 당신은 문제 때문에 죽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붙잡으면 살게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래서 저는 하나님이 원하시는 일만을 전하기로 원하는 스타일로 제 자신의 목회 스타일이 바뀐 것이 저에게 목회 성장을 가져온 가장 큰 재산이 되었습니다.
3년간의 긴 가뭄 끝에 아들 하나 데리고 있던 홀로된 여인이 있었는데 견디다가 이제 더 이상 날품 팔 일도 없고 양식도 다 떨어져 마지막 한 끼의 양식을 해 먹고 죽기를 기다려야 할 지경에 놓였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이 주의 종 선지자 엘리야를 그 곳으로 보내시는 것입니다.
쌀 한가마하고 밀가루 2포대하고 라면 3박스 하고 용돈 얼마를 보내시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가서 그들의 먹고 죽을 양식을 대접 받으라는 것입니다.
자신들이 다 먹어도 모자라고 굶어 죽을 지경인데 이걸 대접하라는 것입니다.
이걸 대접하였더니 가루 독에 가루가 떨어지지 않고 기름병에 기름이 다하지 않고 가뭄 흉년이 지날 때까지 굶어죽지 않고 잘 살아 남는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만약에 밀가루 한포 사주고 라면 한 박스를 주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했다면 그들은 대접하지도 않았을 것이고 욕을 한바가치나 하고 내어 쫓았을 것이며 결국은 굶어 죽었을 것입니다.
세례 요한에게 나아오는 무리들을 볼 때에 그들의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었다가는 사는 것이 아니라 망하는 길이라 그래서 믿음은 당신들이 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이라고 일러 준 것입니다.
이제 나의 진정한 믿음을 보일 때가 된 줄로 믿습니다.
이것은 내 형편에서 자신들을 내어 놓는 일입니다.
'옷 두벌 있는 자는 옷 없는 자에게 나눠 줄 것이요 먹을 것이 있는 자도 그렇게 하라'고 대답했읍니다.
즉 여유 있는 사람은 그 여유를 자기만을 위해 축적하지 말고 없는 사람들을 위해 주라는 얘깁니다.
'주는 자가 받는 자보다 복이 있다 고'했습니다.
잠언 11장 24-25를 보면 '흩어 구제하여도 더욱 부하 게 되는 일이 있나니 과도히 아껴도 가난하게 될 뿐이니라 구제를 좋아하는 자는 풍족하여 질 것이요 남을 윤택하게 하는 자는 윤택하여 지리라'고 했습니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나눌 수 있는 것이 엄청 많습니다.
받을 것만 계수하는 자가 아니라 내 자신을 드려지기를 하나님이 원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부자라고 가난하게 사는 자가 잇고 가난해도 부유하게 사는 자도 있지 않습니까?
세리에게는 정한 세금 외 에는 징수하지 말라고 대답했습니다.
세리들은 로마정권과 결탁해서 주어진 권한과 재량을 총동원하여 세금을 과대히 징수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인 사회에서는 세리와 창녀를 동급으로 취급하기까지 했던 것입니다.
다시 군인들이 물었습니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되겠는가'
요한은 '사람들에게 강요하지 말라. 고자질하지 말라, 돈을 탐하지 말라'고 답변했습니다. 군인이 폭력을 쓰고 돈을 탐하게 되면 그 군은 부패하고 타락한 군이 됩니다.
모든 각계각층의 인물들은 다 자신들이 요구가 아니라 자신들이 내어 놓아야 하는 것이 있을 뿐입니다.
그것은 자신의 처한 환경에서 그대로 행하면 되는 것입니다.
세리직을 그만 두라는 것 아니요 군속직을 그만하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가운데서 새로워지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요한의 대답은 '모든 유대 민증은 자기들의 직업에 층실 하라, 백성은 백성의 위치에서 좋은 백성이 되어라. 세리는 좋은 세리 가 되어라, 군인은 군인다운 올바른 군인이 되어라. 그리고 그 장소에 서 자기 맡은 일에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었습니다
죄의 온상이 되고 있는 세리의 세계를 속히 떠나라고 권면하지 않았습니다. 현재 처한 자리에서 방향 전환을 명하였습니다.
또한 군인들을 향하여서는 손에서 무기를 버리고 군복을 벗으라고 말하지 않았습니다. 폭력을 의지하여 살기 쉬운 세계니 어서 손을 털고 그만두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여전히 군인의 길을 걸어가라고 하였습니다.
다만 그 자리에서 삶의 방식이 바뀌어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옷 두 벌 가진 자나 혹은 먹을 것을 가지고 있는 자에게도 가난해 지라고 하시지 않았습니다.
다만 새로워지라는 것입니다.
현재 처한 상황에서 주의 나라와 의를 위해 유용하게 사는 방법을 제시하였습니다.
이러한 원리는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자리는 현재 서 있는 곳입니다.
우리가 은혜의 주님 구원의 주님을 만나 주님께 나아와 마음을 찢으며 회개합니다.
이제부터 주를 위해 살겠다고 고백합니다.
이제부터 주님만 의지하고 살겠다고 다짐합니다.
그렇다고 다니던 직장에 사표를 내고 하던 사업을 깨끗이 정리할 필요는 없습니다. 계속 하십시오. 대신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현재의 삶의 방식을 진지하게 살펴보시고 양심에 찔리는 부분이 발견되면 즉각 시정하시기 바랍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할 자는 다른 사람이 아니고 바로 자신이고 또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환경을 내 자신의 환경입니다.
소금이 제 역할을 하려면 부패하기 쉽고 냄새나기 쉬운 자리에 놓여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리는 이 세상이고 또한 자신들이 현재 삶의 기반을 두고 활동하는 곳입니다.
주님께 돌아왔다고 하여 세상을 정리한 뒤 보따리 달랑 메고 깊은 산 속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습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삶의 바른 가치관과 바른 목표를 찾았으니 그 가치관 그 목표를 자기 자신에게 철저하게 적용하고 아울러 현재 자신의 환경에 적용하는 실천적인 행동이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진정한 모습입니다.
회개한 내용은 공중에 붕 떠 있던 것이 아니고 현재의 삶 속에 뿌리를 내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진정 회개한 믿음의 고백이 거짓이 아님을 현재의 삶의 환경에서 실제적인 변화를 통해 증명하기를 원하십니다.
우리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자리는 바로 지금 우리가 서 있는 자리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지 않으면 우리는 주님의 심판을 피하지 못합니다.
우리 주님은 현재 우리들이 활동하고 있는 삶 속에서 우리가 얼마나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고 있는 가를 지켜보고 계십니다.
그것이 우리네 신앙이요 신앙생활입니다.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고 했습니다. 회개엔 열매가 있어야 합니다.
글자 그대로라면 뉘우치고 고친다는 뜻입니다.
그러니까 회개에는 두 가지 동작이 따르게 됩니다.
감정적으로 잘못된 것을 느끼고 뉘우쳐야 합니다. 그리고 뉘우친 후에는 고쳐야 합니다.
예를 들면 찢어진 양복을 보면서 안되었다, 보기 흉하다, 기워 입어야겠다고 생각하는 것은 뉘우치는 감정입니다. 뉘우치는 것이 회개는 아닙니다. 뉘우쳤으면 즉시 옷을 벗어서 기워 입어야 합니다. 즉 결과가 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헬라 말에서는 회개란 말을 '메타노이아'라고 합니다.
이 말의 뜻은 방향전환이란 뜻을 가진 말입니다. 주님을 떠났던 사람의 회개는 뉘우치는 맘으로 주께 로 돌아오는 것입니다.
참 회개는 고쳐야 합니다. 나쁜 행실이 있으면 고쳐야 합니다. 나쁜 습관이 있으면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불의한 생활이 있으면 그것을 고쳐야 합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 눈물은 회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잘못을 고치지 않는 죄의 고백 역시 회개의 고백이 아닙니다.
열 번 눈물을 흘리는 것보다는 한 번 고치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루터의 종교 개혁의 95개조 첫 조항이 참회, 회개에 관한 것임을 다시 기억해 봅니다.
"우리 주시요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 "회개하라"는 등으로 말씀하셨을 때, 그 분은 신자의 전 생애가 회개이어야 함을 가르치시려 하셨습니다" - 이것이 그 첫 번째 조항입니다.
이로 보면 종교개혁은 참회에서 비롯되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신자의 전 생애는 회개이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다메섹에서 주님은 만난 바울의 첫 반응은 "주여, 무엇을 하리이까?"였습니다. 지금까지 자기가 핍박해 온 예수님이 자신의 주인이심을 인정한 반응이었습니다. 당신은 주님께 어떤 반응을 보이며 살고 있습니까?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구체적인 행동으로 나타납니다.
그래서 삶의 내용이 회개 이전하고 이후는 확연히 구분됩니다.
죄악과 불의를 떠났다는 확실한 물증을 제시합니다. 죄악에서 돌이켰다는 실제적인 내용이 따릅니다.
회개한 이후에도 이전의 불의한 삶을 돌이키지 않는다면 아직 참된 회개에 이르지 아니한 것입니다.
회개는 시작이고 열매로 그 시작이 진실이었음을 확증합니다.

Total 914 건 | 1 / 92 page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