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삶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삶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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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765회 작성일 2009-06-2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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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14 : 6 - 9 당신의 삶은 살아도 죽어도 주를 위한 삶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헤밍웨이의 소설이며 영화로도 잘 알려진 제목입니다.1936년부터 시작된 스페인 내전을 그린 전쟁과 사랑을 그려낸 소설입니다.미국인 좌파 지원병 로버트 조단(Robert Jordan)은 러시아에서 온 좌파 지도라 골츠의 명령을 받고 지정 된 다리를 3일 안에 정해진 시간에 폭파해야 하는 임무를 수행하게 됩니다.그가 현지 산악 게릴라의 캠프에 도착해서 정해진 날짜에 다리를 폭파하기까지의 3일 동안에 일어난 일들을 그리고 있는데, 조단은 그 게릴라 캠프에 얹혀사는 마리아라는 여인과 사랑에 빠지는 것이 핵심 내용입니다. 다리를 성공적으로 폭파하고 탈출하는 과정에서 조단은 쓰러지는 말에 깔려 다리가 부러지게 되고 더 이상 탈출이 불가능하게 된 것을 알고 사랑하는 여인 마리아를 떠나보내면서 "I'm you. If you go, I go, too." "나는 바로 당신이며, 당신이 가면 내가 가는 것과 마찬가지다." 라고 하면서 동지들과 빨리 떠나게 하고 조던은 남아서 죽음의 길을 택합니다. 그 마지막 장면에서는 마침 교회의 종이 울립니다. 그때 울리는 종은 사람이 죽었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습니다.
교회당에서 울리는 조종은 과연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 것입니까?삶의 허무를 알리는 종소린가요? 조던을 애도하는 종소린가요? 아니면 산자들로 하여금 죽은 자를 생각하라는 종소린가요?조던이 죽었다는 것은 사실이며 이 사실을 종소리가 알리지만 누구를 위한 종소린지는 알 수 없습니다.
지금도 그 종소리는 누구를 위하여 울리는지 알 수가 없습니다.
죽음의 길을 택할 수밖에 없는 조단과 또 조단을 버리고 살기 위하여 돌아 가야하는 동료와 그의 사랑이었던 마리아의 삶이 과연 누구를 위함이라고 하겠습니까?종은 그렇다하더라도 나는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사람들은 말합니다.
나 자신을 위하여 사는 것이라고 살았지 만은 결국은 자신을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을 것입니다.
제 자신도 내가 누구를 위하여 사는가? 라는 의문이 생기기도 합니다.
자식을 위하는 것도 같고 아내를 위하는 것도 같고 때로는 성도들을 위하는 것 같기도 하고 .....
더욱이 확신 하는 것은 그 누구도 자신을 위하여 아무 것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하나님은 사람을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자로 만들지 않았습니다.
그러니 자신을 위하는 인생으로 알고 그렇게만 살려고만 하니 얼마나 엉터리 같은 인생을 살고 있습니까?
세상을 크게 무서워하고 불안해하는 자들의 특징은 모두가 자기 자신을 위하는 삶을 살고 있음을 알 수 있었습니다
정신 불안의 큰 원인은 자기 자신 만을 위하는 데에서 기인하는 것입니다.
사람의 불행하게 됨은 자기 자신 만을 위하겠다는데 불행의 싹이 터기 시작합니다.
7절 우리 중에 누구든지 자기를 위하여 사는 자가 없고 자기를 위하여 죽는 자도 없도다고 하였습니다.
그러면 누구를 위하여 사는 자입니까?
8절 살아도 주를 위하여 죽어도 주를 위하여 사는 자입니다.
모든 일은 주를 위 할 때에 가치가 있기 때문입니다.
아니 주를 위하여 존재하는 것입니다.
여기 어떤 물건이 있습니다. 좋은 것일까요? 아니면 나쁜 것일까요?
좋을 수도 있고 나쁠 수도 있습니다.
왜요 똑같은 물건도 사용하는 목적에 따라 전혀 다른 가치를 지니게 됩니다.
똑같은 칼도 사람을 살리기 위한 수술용 칼이 될 수도 있고 사람을 죽이기 위한 살인용 칼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물건은 무엇을 위해서 사용되느냐가 그 물건의 가치가 결정됩니다.
목적이 중요합니다.
사람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에게도 목적이 있습니다.
장로교 신조 웨스트민스터 신앙 고백 제일장 일조에 보면 사람의 제일 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하나님을 영원토록 즐겁게 해드리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곧 인생은 하나님을 위하여 라는 것에 그 존재의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이 무엇을 위해, 누구를 위해 사느냐에 따라 의인이 될 수도 있고 죄인이 될 수도 있습니다.본문에 보면 ‘위하여’란 말이 네 번 나옵니다.
‘위하여’란 말을 두고 볼 때에 성경에서는 누구를 위하느냐? 가 매우 중요한 단어입니다.
사람들은 둘 중에 하나의 목적을 위해 산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자기를 위하느냐, 아니면 주를 위하느냐 하는 것입니다.
예수 믿기 전과 후의 큰 차이점은 ‘위하여’가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전에는 나를 위하여 살았지만 이제는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합니다.
주를 위하는 삶이 될 때에 놀라운 일이 일어 날 수 있습니다.
다윗의 모토는 무엇입니까?
그의 공적인 출발선인 골리앗을 상대 할 때도 주의 이름을 위하여 물론 왕의 자리에서도 그가 가장 슬픔의 순간이라고 할 수 있는 아들의 쿠데타를 피하여 가는 그 자리에서도 그를 움직이게 한 원동력은 주를 위하여 라는 것입니다.
기드온과 함께 미디안과의 전쟁터에서 외친 300명의 용사들의 전쟁 수행의 근본적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기드온을 위하여 주를 위하여 한 목숨을 기꺼이 들릴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미디안 병사 10만을 이기는 큰 승리는 역시 그들이 외치는 모토 주를 위함에 있었습니다.
주를 위하여 사는 사람이 그리스도인입니다.
카를 힐티의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라는 책에서 행복의 원천을 다음과 같이 말했습니다.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날은 자신에게 주어진 사명을 발견하는 날이다.자신에게 주어진 인생의 값을 발견하는 삶이 가장 행복한 삶입니다.실존주의 철학자 키르케고르는 22세 때  그의 일기에 이렇게 써놓았습니다.온 세계가 무너지는 종말이 온다 해도 내가 꽉 붙들고 놓을 수 없는 이념, 내가 그것을 위해서 살고 그것을 위해서 죽을 수 있는 사명을 나는 기필코 찾아야 한다. 고 했습니다.
나만을 위하겠다는 엉터리 같은 삶을 살아 왔음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그렇게 살아가겠다고 계획을 세웠다면 과감하게 버리셔야 합니다.
주를 위하여 라는 삶의 목적을 세우시기를 바랍니다.
아마 이 시간부터 여러분의 삶에 기적이 일어 날 것입니다.
왜 내가 주를 위하여 살아야 하나 내가 주께 속해져 있기 때문입니다.
주께 내 모든 것이 다 있습니다.
사도요한은 그의 글에서 너무나도 멋있는 말을 했습니다.
주안에 있으면 모든 것이 있고 주를 떠나면 아무 것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마치 원 줄기에서 잘려나간 가지같이 말라 아무 짝에도 쓸 수가 없어 갖다 버리든지 태워 버린다고 합니다,
사실 주를 위하여 살아 라고 하니 자신 것을 다 가져 가는 줄 알고 야단법석인데 실은 그게 아닙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하는 것은 주를 부정하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주로 말미암아 오는 그 어떤 은혜도 차단을 시키는 결과가 됩니다.
오히려 주를 위함이 나를 가장 위하는 것임을 아셔야 합니다.
각종 은혜는 다 받을 수 있습니다. 주님을 송두리체 받을 수 있습니다.
나를 위해 피 흘리신 그 엄청난 은혜를 다 받는 것입니다.
주를 위해 살 수 있음은 9절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하여 죽으셨다가 다시 나를 위하여 살아 나셨기 때문입니다.
그 구속의 은혜가 주를 위하여 살게 만들고 그렇게 살므로 그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살지 못하기 때문에 구속의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여 예수를 믿지만은 그 사람의 삶에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입니다.
주를 위하여 살아 보십시오 그 보혈의 은혜가 충만 할 것입니다.
화가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와의 사이에 있었던 이야기입니다.그들은 화가 지망생들이었지만 너무나 가난하여서 그림 공부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알베르트와 그의 친구는 오랫동안 궁리한 끝에 한 방법을 찾았습니다. 한 사람이 먼저 그림 공부를 하고, 그 동안 다른 한 사람은 돈을 벌어서 그림 공부를 하는 친구를 돕자는 것이었습니다.몇 년이 지났습니다. 드디어 알베르트는 이름 있는 화가로 성장했습니다. 이제 알베르트의 친구가 공부해야 할 차례입니다. 친구는 기쁜 마음으로 그림 공부를 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그에게 새로운 실망과 좌절이 찾아왔습니다. 그는 너무나 오랫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고 일만 해왔기 때문에 손이 굳어져 세밀한 그림을 그리는 데는 이제 쓸모없이 되어버린 것입니다. 그는 실망 속에서 하나님을 원망하고 친구도 원망하였지만, 결국 그는 신앙으로 슬픔을 이기고 하나님께 오히려 그의 친구를 위하여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어느 날 알베르트는 그림 공부를 하고 있는 친구를 만나러 친구의 화실에 들어가려 할 때, 화실 안에서 들려오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듣게 되었습니다. 흐느끼면서 자신의 현실을 안타깝게 하나님께 호소하며, 그러나 알베르트를 용서하고 오히려 알베르트를 위하여 하나님께 간구하는 친구의 기도 소리를 들으며 알베르트는 큰 감동을 받았습니다.그는 집으로 돌아와 문틈으로 보이던 친구의 거친 손을 생각하며 그림을 그렸습니다. 그 그림이 유명한 '기도하는 손'이라는 알베르트의 대표작입니다.
그러나 오늘날까지 이 기도하는 손의 주인공의 이름을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주님만 바라보는 삶은 하나님 아버지가 인정해 주십니다.
모든 것의 주인은 주님이십니다.
직장 사역 연구소 소장 방선기 목사는 자신의 책 "5분의 축복"을 통해, 유학 시절 자신에게 참으로 인상적인 가르침을 주었던 한 교수를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 교수는 "예수 믿는 사람들은 일단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것이다"라고 말할 때는 강단 위에 벌렁 누워 버렸습니다. 그리고 누운 채로 계속 강의하던 교수는 하나님을 위한 일에 대해서 말할 때는 벌떡 일어났습니다. 그렇게 죄와 관련된 이야기를 할 때면 눕고, 하나님을 위한 일에 대해서 이야기 할 때는 일어나기를 반복하던 교수는,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인들의 삶이 되어야 한다고 강조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자녀로 거듭난 그리스도인들은 죄악과 관련된 일이 발생하면 죽은 사람처럼 되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는 것과 관련된 일에 대해서는 반드시 살아 움직여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보다도 자기 자신의 안위와 장래를 더 걱정하는 사람은 엄밀한 의미에서 진실한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기쁨의 얼굴을 하고 있는 지 아십니까? 주의 일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어떤 사람의 얼굴이 험악한지 아십니까? 자기 자신만을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라고 생각이 됩니다.
어떤 성도는 자기 자신을 생각하기보다는 주의 교회를 생각하는 사람이 있고요 어떤 사람은 교회는 교회고 나는 나라고 하며 자기를 더 위하는 사람도 있습니다.
교회는 나 보다 교회를 생각하는 자들을 통하여 이루어져 가고 있었습니다.
왜 그렇게 살아야 합니까?
예수께서 피 값을 주고 나를 사셨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나나 하여 예수와 상관이 없는 자로 남아야 하겠습니까?
아니며 사나 죽으나 주를 위하여 라는 삶으로 내가 남아 있어야 합니다.
성경 어디에서도 나를 위하여 라는 고집을 꺾지 않은 사람을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라고 인정하지 않고 있습니다.
필립모리스(Philip Morris)가 사각치즈를 생산하는 회사로 알려진 식품회사 그래프트(Kraft)를 인수하면서 지불한 129억불 가운데 재료, 제품, 설비 등과 같은 유형 자산의 가치는 총액의 약 10%에 해당하는 13억 달러에 불과했습니다. 반면 나머지 116억 달러는 브랜드 가치와 지적 소유권 등 무형의 자산에 대한 대가였습니다.
사실 자산의 일반적 개념은 누군가 소유하고 있는 것 또는 것들 곧 무형의 것들입니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자산의 개념은 개인이나 법인이 소유하고 있는 경제적 가치가 있는 유, 무형의 재산입니다.
또 유형 자산의 가치보다는 그것과 연결된 무형자산의 가치가 빠른 속도로 높아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앨빈 토플러(Alvin Toffler)는 무형화의 실패는 곧 파국을 의미한다고까지 주장했습니다.
그리고 우리 그리스도인들 역시 무형의 가치 주를 위한다는 생각을 가지지 않으면 나는 망한다는 사실을 가슴 깊이 새겨둘 필요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오늘 저와 여러분의 무형자산 곧 자신의 가치는 얼마나 된다고 생각하십니까?
주를 위하여 순교하는 것은 매우 귀한 일입니다. 평생 주를 위하여 사는 것 역시 아름답습니다. 그것보다 자신을 가치 있게 만드는 삶은 없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으로 주를 위하십시오. 마음으로 주를 위하십시오. 행동으로 주를 위하십시오. 가진 모든 것으로 주를 위하십시오. 예배로 주를 위하십시오. 삶 전부를 주를 위해 투자하십시오.
하나님으로 충만해지는 것만이 우리의 무형의 가치를 높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 때문입니다.
덴마크의 철학자 키에르케고르는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의 고향인 덴마크에 있는 큰 상점에 침입한 도둑이 들었습니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아침에 점원이 문을 열었는데, 모든 물건이 그대로 있는 것이었습니다. 도둑은 물건을 한 개도 훔쳐가지 않았습니다. 잠시 뒤에 손님들이 들어오면서 점원은 도둑이 무슨 짓을 했는지 알았습니다. 도둑들은 그 상점의 모든 물건의 가격표를 뒤바꾸어 놓았습니다. 다이아몬드 목걸이에는 2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고, 가죽 신발에는 50센트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그러나 연필의 가격은 자그마치 75달러나 되었고, 아기의 딸랑이 장난감에는 5천 달러의 가격표가 붙어 있었습니다.
도둑들은 아무 것도 훔쳐 가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도둑은 더 중요한 것을 훔쳐 갔습니다. 물건의 가치를 훔쳐간 것입니다.
키에르케고르는 현대인이 정체성을 상실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서 이 이야기를 사용합니다. 정체성이 상실되면 자기 자신을 알지 못합니다.
자기가 원래 누구인지를 모르기 때문에 현재 자신의 모습이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지금 자신이 어떤 처지에 놓였는지를 알 수가 없습니다.
내가 내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정확히 보지 못하는 때가 많습니다.
내 존재가치의 혼란을 가져 오는 이 시대에 내 정체성을 오늘 찾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어제 오전 7시에 올림픽 파크텔에서 미국 워싱턴에서 목회하는 친구를 만났습니다.
이야기 중에 부모의 근황을 묻는 제 질문에 92세인 아버지와 88세인 어머니가 지금도 오트바이를 타시고 새벽 기도회를 다니시고 5-6개의 구역을 돌보고시고 담임 목사님이 교회를 비우시면 새벽 기도회까지 인도하신다 는데 저는 입이 다물어지지 않았습니다. 그의 일생이 얼마나 아름다운 삶인가 얼마나 가치있게 살아 오셨는가가 지금의 그의 모습에서 볼 수 있지 않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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