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은 행동하나도 구원을 가져오는 큰 믿음이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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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46회 작성일 2009-06-27 20: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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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 15:21-28 작은 행동하나도 구원을 가져오는 큰 믿음이 됩니다.
유태인 철학자인 마틴 부버는 나와 너라는 책에서, 이 세상을 살아가는 사람들이 맺고 있는 인간관계에는 두 가지가 있다. 라고 말했습니다.
하나는 서로 인격체로 존중해 줌으로써 사랑과 신뢰를 가져오는 나와 너의 관계이고, 다른 하나는 상대방을 이용 가치나 상품 가치로 취급하는 나와 네가 아닌 나와 그것의 관계라고 합니다.
본문에서 나오는 가나안 여인과 예수님과의 만남은 나와 그것의 관계가 나와 너의 관계로 인격이 바뀌어 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믿음은 하나님과 나의 극히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가나안 여인은 예수님에 대해서 인격적으로 교제를 나누기 위함이 아니라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한 그것으로 여겼습니다. 그리고는 소리를 지릅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내 딸이 흉악한 귀신에 들렸나이다. 라고 외쳤습니다.
자신의 목적을 이루기 위하여 예수를 찾으니 오직 예수는 자신의 그것을 위함이었습니다.
예수님은 인격적인 만남 즉 믿음을 원하시는 것입니다.
알파를 하면서 아니 성도들 가운데서도 그렇습니다.
예수를 자신의 그것을 만족시키기 위함으로만 원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꿈적도 안하십니다. 서로가 인격적으로 교제를 원하시는 것입니다.
딸의 병의 치유가 문제라고 하지만 실상은 이 여인의 믿음이 문제입니다.
믿음이 인정 될 때에 그 여인의 문제는 더 이상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28절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하시니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니라 할렐루야!
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이 꿈쩍도 아니하십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감동시키십니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합니다.
그러나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면 그 마음의 소원을 이루시는 것입니다.
믿음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이 여인에게 믿음을 원하시고 계십니다.
믿음은 인격적인 관계입니다. 믿음 없는 종교행위는 묵묵부답이었습니다.
그렇게 소리를 질러도 한 말씀도 대답하지 않으셨습니다.
믿음을 원하시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당신의 목적을 채우기 위한 예수가 아니었습니다.
그래서 이 여인이 자신의 목적만을 이루기 위한 예수에서 이게 아니구나 예수님의 의지를 기다리는 자세로 바뀌었습니다.
주여 저를 도우소서 할렐루야! 이게 믿음의 발전입니다.
아직도 내 목적 쟁취만을 위한 예수를 생각해서는 안 됩니다.
어떡하든지 주의 뜻을 원하는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그제야 비로소 예수님께서는 여인과의 대화가 됩니다.
신앙생활을 하지만 아직도 예수님과 대화가 되지 않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보아도 참으로 답답합니다. 이게 무슨 신앙생활을 하고 있는가? 제 성질 부르고 있는가 입니다.
예수님을 내 목적으로 보지 말고 인격으로 보셔야 합니다.
이제 이 여인은 주의 말씀에 전적으로 자신을 의탁하지 않습니까?
주께서 무슨 말씀을 하셔도 주여 옳소이다
부스러기라도 좋습니다 할렐루야! 그 고백을 주님은 믿음으로 보셨습니다.
크도다 는 말은 헬라어 메카스(메가- 100만이라는 뜻)에서 나왔는데 메가 100만이라는 말이니 너 믿음은 메가톤급이다 100만 불짜리라는 말입니다. 그 때로부터 그의 딸이 나으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100만불짜리 메가급 믿음이 성경에 또 한 사람이 있습니다. 이방인 이탈리아 군대의 장교입니다.
이 사람도 자신의 목적을 위한 예수가 아니라 예수님의 인격을 최대로 인정하는 것입니다.
종더러 이리와라 저리와라 이것 해라 저것해라 하지 예수님은 말씀만 하시면 제가 듣겠습니다.
메가급의 믿음이라고 주님은 칭찬했습니다.
말 한마디에 그의 믿음이 들어 납니다.
메가급의 믿음이 어떤 믿음입니까?
주의 긍휼을 바라는 것입니다. 주의 선한 처분을 바라는 것입니다.
내가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 왔다 할지라도 개의치 않으시고 주를 향하여 온 사실 하나 만이라도 주의 은혜를 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사실 지금까지 살아온 내 모습은 너무나도 못나서 주의 은혜 받을 수 없는 자라는 소리입니다.
당연히 자신이 은혜 받을 수 있다고 여기는 교만이 없습니다.
통상 나는 어떻습니까?
왜 이래 나에게는 은혜를 주지 않느냐고 교만을 떨고 있지 않습니까?
주의 선한 처분을 바라는 긍휼을 바라는 자세는 가장 겸손한 자세입니다.
프랜시스(St. Francis,1181-1226)의 제자가 환상 중에 하늘나라에 갔습니다. 많은 보좌들이 있었는데 그 중 한 보좌는 눈에 띄게 높은 보좌(寶座)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천사에게 물었습니다. 저건 누구 것입니까? 천사가 대답했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겸손한 성 프랜시스가 앉을 보좌이지요. 그 말을 듣고 그는 부러워하는 마음이 들었습니다. 그러다 환상을 깼습니다. 그 제자가 어느 날 프랜시스에게 물었습니다. 선생님, 선생님께서는 자신이 어떤 분이라고 생각하십니까? 그러자 스승은 주저 없이 대답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못된 놈이라고 생각하지 그 말을 듣고 제자는 선생님! 그렇게 말씀하시는 것은 교만입니다. 그건 바로 위선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선생님을 성자라고 부르고 있지 않습니까?
세상에는 수많은 강도, 살인자 등 온갖 악인들이 득실거리는데 어떻게 선생님께서는 스스로 가장 악하다고 말씀하십니까? 그게 바로 위선이 아닙니까? 그러자 프랜시스는 빙그레 웃으면서 그건 자네가 나를 몰라서 그래. 정말 나는 악한 놈이지. 하나님께서 내게 이렇게 많은 은혜를 부어주셨으니까 오늘날 내가 이만큼 된 것일 뿐이라네. 만약 내게 주신 은혜를 다른 사람에게 주었더라면 그 사람은 나보다 몇 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을 것일세. 하고 진심에서 우러나는 말로 이야기했습니다. 그 제자는 그 때에야 스승을 제대로 알아보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무릎을 꿇어 큰 절을 했습니다. 그렇습니다. 주님은 오직 겸손한 자들에게 은혜를 주십니다.
하나님의 은혜는 오직 겸손한 자들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입니다.
왜 나는 아직도 얼마나 교만한지
교만을 떨면서 은혜를 안 준다고 투덜투덜 거리고 있으니 말입니다.
내가 가장 의로운 자라고 생각하고 그리고 다른 사람을 판단하는 데는 빠르고 말입니다.
의로운 자를 주님의 구원의 대상이 아닙니다. 자기 의로 구원을 받으면 됩니다.
자기 의가 없는 죄인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주님은 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죄인이라는 말을 할 수 있음은 은혜가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신약 성경의 성자라 일컫는 만한 사도 바울도 그는 자신을 가리켜 말하기를 죄인의 괴수라고 하였습니다.
다른이가 당신은 성자입니다 라고 해도 나는 죄인입니다.
나는 다른 사람이 당신은 죄인입니다 라고 말을 하는데도 끝까지 나는 의롭다고 하고 있으니 어찌 주의 은혜가 함께 하실 수 있습니까?
자신의 의를 부각하면 할수록 자존감만 점점 커져갑니다.
자존감의 상처를 모두 가지고 있습니다. 믿음은 이것을 극복해야 합니다.
모세를 보고는 문둥이라고 했고요 야곱은 지렁이같은 놈아라고 했고요 이 여인을 보고는 개라고 하였습니다.
예수님도 세상에 계실 때에 죄인같이 벌레같이 취급을 받았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자존감의 상처를 받는 일은 비참한 일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상처를 받을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두 가지 유형을 볼 수 있습니다.
가장 전형적인 반응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해 오히려 자신을 합리화하고 상대를 공격하는 일입니다.
그러나 그 보다 훨씬 바람직한 건강한 반응은 현실을 인정하고 자신을 살펴 자신의 유익과 성숙을 도모하는
일입니다.
가나안 여자가 보여준 반응이 바로 그런 반응이 아니었습니까?
26절의 예수님의 의외의 말을 들어보십시오. 충분히 상처받을 말이 아닙니까?
대답하여 이르시되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
이 때 이 여인에게 기대할 수 있는 반응이 무엇입니까?
내가 개라고, 지금 내게 상처 주는 너야말로 개가 아니냐? 하고 대들 수 있는 상황이 아닙니까?
그런데 이 여자의 응답이 무엇입니까? 27절을 읽어 보십시오.
여자가 가로되 주여 옳소이다 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무슨 말입니까?
맞습니다. 나는 개입니다. 나는 개 같은 인생을 살아왔고 나는 하나님을 몰랐던 이방 여자입니다.
그러나 지금 나는 당신에게 개들에게 던지는 부스러기 은혜를 구하나이다.
이것도 제에게는 황송합니다. 안 주시면 어떡하겠습니까? 할 말이 없는 것이지요
부스러기라도 감사한 것입니다.
주의 구속의 은혜가 무조건 필요하지 않습니까?
맨 날 자존심이 상한다고 하고만 있습니까? 내 자존심따라 갔다가 굶어 죽습니다.
하나님 앞에 자존심을 세워 뭐하겠습니까?
한 흑인 신학생이 하나님의 말씀을 너무나 배우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성경학원에 갔지만 원장선생님은 그가 흑인이라고 받아주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정 배우고 싶으면 교실이 아닌 창밖에서 배우라고 말했습니다.
이 청년은 창밖에서 배우는 것도 너무 감사하였습니다.
당시 사도행전을 공부했는데 사도행전을 통해서 성령을 받으면 방언을 하게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는 그에게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귀하게 여겼습니다.
그리고 이 은혜를 사모했습니다.
결국 그는 오늘날 오순절 성령운동의 창시자인 윌리암 시무어가 되었습니다.
부스러기를 귀하게 여긴 그는 20세기 기독교역사를 바꾸었던 것입니다.무슨 은혜를 주시든지 받겠습니다.
자녀의 떡은 하나님이 주실 축복을 말하는 것이며, 개는 그것을 받아먹을 수 없는 자들을 말하는 것입니다.하나님의 축복은 아무나 받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는 사람만이 받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하나님의 축복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그런 사람은 축복이 축복인줄 모릅니다.
따라서 아무리 좋은 것을 주어도 개는 그것을 우습게 여깁니다.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면 개는 그것을 거룩하게 취급하지 못합니다.
자녀의 떡을 개에게 주면 개는 그것의 가치를 모릅니다.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게나 취급합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자녀의 떡을 먹을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했습니다. 아마도 이 여인의 머릿속에는 지나간 자신의 삶이 스쳐지나갔는지 모릅니다.
이 여인은 자신의 적나라한 존재가 예수님께 드러나는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지 않았습니다.
이 여인은 자신이 모습을 예수님께 드러내었습니다.개들도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이 여인은 자신이 주인의 떡 상에 참여할 것을 기대하지 않고 자신이 기대한 것은 주인이 먹다가 남긴 부스러기입니다.
쓸테없는 자존심 예수님 앞에 버리시기를 축원합니다.
꼭 주실 것을 믿는 믿음입니다.
마 7:7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는 찰스 윌리암스(Charles B. Williams)의 번역에는 Keep on
asking......, keep on seeking......, keep on knocking......
다시 말하면 계속해서 구하십시오. 계속해서 찾으십시오. 계속해서 문을 두드리십시오 라고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하란 말입니까? 기도의 응답이 없으셔도 버티셔야 합니다.
기도 응답의 징조가 없어도 기다리셔야 합니다. 그래도 여전히 응답을 믿으셔야 합니다.
믿고 여전히 기도를 계속하셔야 합니다.
버림받음의 감정이 자신을 괴롭히시거든 그 심정을 직고하십시오.
왜 나를 버리시는가? 라고. 예수님도 그렇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예수님도 버림받음의 감정을 경험하신 것을 아십니까?
십자가에서 그가 마지막으로 절규하신 외침을 기억하십니까?
엘리 엘리 라마사박다니-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하여 나를 버리시나이까?
그는 제자들에게 버림받으셨고, 자기와 같은 동족들에게 버림받으셨으며, 이제 심지어 하늘 아버지조차 그에게
서 얼굴을 돌리시는 순간, 하늘 아버지께서도 자신을 버리심을 느끼신 것입니다. 얼마나 외로우셨을까요?
얼마나 아프셨을까요? 얼마나 힘드셨을까요?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것으로 예수님이 모든 것을 포기하신 것이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십자가에서 그 다음에 무슨 기도를 하셨습니까?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하지 않으셨습니까?
그는 외로우셨지만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아프셨지만 포기하신 것은 아닙니다. 그는 아직도 기도를 믿고 계셨습니다.
그래서 다시 하늘을 향해 고개를 들고 외치십니다.
아버지여, 내 영혼을 부탁하나이다. 라고. 그리고 사흘 후 모든 것은 달라졌습니다.
그러나 그 부활의 날, 주일이 있기 위해서는 버림받으심의 금요일을 지나셔야만 하셨습니다.
기독교 작가 필립 얀시(Philip Yancey)는 그의 명저 하나님 당신께 실망했습니다. 라는 책의 첫 장에서
애니 딜라드(Annie Dillard)의 시를 인용하는 것으로 그의 글을 시작하고 있습니다.
어두운 바깥에 앉아 있지 않아도 됩니다. 하지만 별을 보기 원한다면 어두움이 필요합니다.
비록 별은 어두움을 필요로 하지도 요구하지도 않지만
인생을 사시면서 꼭 버림받으심을 체험하실 필요는 없으십니다
하지만 주의 품에 안기는 은혜를 맛보아 알기 원하신다면 버림받으심의 체험이 필요하십니다
그러면 이제 상황적인 냉대를 극복하고 일어서십시오. 자
자존감의 상처를 변명하지 말고 자신의 정직한 모습에 직면하십시오.
그리고 당신의 인생의 주인이시고 치유 자이신 그분 앞에 다시 엎드리십시오. 그리고 은혜를 달라고 기도하십
시오. 부스러기 은혜라도 달라고 부르짖어 구해 보십시오. 그가 내 인생의 테이블에 남기시는 부스러기가 새
인생의 소망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반드시 이런 주님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아들아, 딸아, 네 믿음이 크도다. 네 소원대로 될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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