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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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1829회 작성일 2009-06-27 2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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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서 4:18-25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
버락 오바마 대통령이 제44대 미국 대통령에 공식 취임식 때에 1861년 아브라함 링컨 대통령이 취임식 때 사용했던 성경에 손을 얹고 나는 미국 대통령의 직무를 성실히 수행하고 최선을 다해 미국 헌법을 보존하고 보호하며 지킬 것을 엄숙히 맹세합니다고 선서를 했습니다.이같이 오마바는 아브라함 링컨의 삶을 모토로 삼을 정도로 열정이 대단하여 사람들은 링컨이 없었으면 지금의 오마바는 없을 것이라는 말을 합니다.
사실 그렇습니다.
미국인에게 미국의 역대 대통령 중 누가 가장 위대하냐고 물으면 대답은 모두 한결같은 답을 하기를 아브라함 링컨을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는다고 합니다.
무엇이 링컨으로 하여금 시대의 인물 아니 역사적인 인물로 만들었습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링컨은 사실 눈으로 바라보이는 것에서는 더 이상 바랄 수 있는 것은 없었습니다.
집안이 바라 볼 것이 없었습니다. 외딴 오두막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 토머스 링컨은 가난한 농부였고 어머니 낸시 행크스 링컨은 미혼모의 딸이었으며 그의 부모는 둘 다 문맹이었습니다.
사실 그의 어머니는 9살 때에 독초를 먹은 소의 우유를 먹고 죽습니다.
정말로 바랄 수가 없습니다. 인간적인 그 무엇을 기대 할 수가 없습니다.
그는 결혼 생활 중 아들을 3명이 있었는데 이 아이들마저 어렸을 때에 다 죽었습니다.
그런데 바랄 수없는 가운데 바랄 수 있는 것이 생겼습니다.
그의 어머니가 남겨준 성경이었습니다. 그의 어머니 유언이 부자나 높은 사람이 되려고 하기보다 성경을 읽는 사람이 되라는 유언을 따라 어머니가 남겨준 성경을 읽고 또 읽었습니다.
그는 이 성경 속에서 바랄 수없는 가운데 바랄 수 있는 것을 붙잡았습니다. 할렐루야!
그는 유명한 명언을 많이 남겼는데 그의 명언들을 보면 그가 무엇을 바라보았는지를 알 수가 있습니다.
나는 승리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오직 진실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나는 성공에 사로잡힌 사람이 아니라 오직 내 안에 빛에 사로잡힌 사람이다
나는 노예가 되고 싶지 않는 것처럼 다른 사람의 주인의 노릇도 하고 싶지 않다
링컨의 정적 스티븐 더글러스는 남부와 서부의 표를 모두 잃지 않기 위해 노예제를 주민투표에 부치는 캔자스-네브래스카 법을 제정하였을 때 링컨은 스프링필드에서 노예제를 정면으로 비판한 피오리아 연설을 하는데 노예제도는 인간의 이기심이 낳은 산물이다. 노예제도에 반대하는 것은 정의를 실현하는 것이다.그는 역사를 이끄는 이는 하나님이며 자신은 그의 도구에 불과함을 잊지 않았습니다. 링컨은 남북 전쟁 중 때때로 국가 금식일을 지정했습니다. 유명한 게티즈버그의 연설에서도 우리는 하나님의 가호 아래 새로운 자유를 탄생시키는 과제, of the people, by the people, for the people 국민의, 국민에 의한, 국민을 위한 정부를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도록 하는 이 위대한 과제에 헌신해야 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분명히 바라 볼 수 있는 것이 있었습니다.
그것이 그의 삶의 힘이요 삶의 의미였습니다.
본문에서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사람 아브라함을 소개합니다.
19절 나이 100세나 되어 자신의 몸이 죽은 것 같고 아내 사라 역시 태가 죽은 것과 같음을 알았지만 오히려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하였다고 했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봄 이었습니다.
생산 능력이 없는데 생산 할 수 있음을 바라보았다는 것입니다.
마른 뼈들 즉 사망 가운데서 생명 있는 큰 군대를 보았습니다.
오늘의 시대는 분명히 세상이 어떤 세상임을 잘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불확실한 시대라는 말입니다.
여러분이 내 삶에서 이것만은 확실해 하고 말 할 수 있는 것이 있습니까? 하나도 없습니다.
오늘 또한 부정적인 시대를 살고 있지 않습니까? 무엇이든지 부정적입니다.
바라 볼 수 없는 시대라는 것입니다.
이렇게만 살아간다면 당연히 이 시대의 불행의 산물이 되고 말 것입니다.
나라가 그렇고 교회가 그렇고 가정과 개인도 그럴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살아 갈 수 없지 않습니까?
한번 밖에 없는 인생의 기회가 아닙니까?
그렇다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 볼 수 있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면 무엇이든지 긍정적인 삶이 전개가 되고 무엇인가 이룰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어떻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 볼 수 있습니까?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바라봄입니다.
제가 제주 총회 교직자 수련회 중에 지난 화요일 우리 교회 인테리어를 한 김 실장이 기도부탁이 문자로 왔습니다. 10시에 웨딩홀 최종미팅에 들어가는데 기도 부탁합니다.
그 것이 성사되는 것을 기대하는 말이 아니겠습니까?
갑자기 밑도 끝도 없이 어떻게 하라는 말입니까?
그러나 하나님은 언제든지 바라볼 수 있게 하셨습니다.
어떤 결과도 은혜라고 답장을 보냈더니 목사님 진심으로 감사합니다고 왔습니다.
어떤 상황도 부정이 아니라 긍정이요 바랄 수 없는 것이 아니라 바라봄입니다.
아브라함에게 네 후손이 네 상속자가 되리라는 그 약속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 본 것이었습니다.
자기 몸이 죽은 것 같고 아내의 태가 죽은 것과 같을지라도 그 약속을 의심하지 않고 능히 이루 실 줄로 확신 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게 주신 약속의 말씀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히려 어두움 가운데 빛이 더욱 빛나듯이 바른 믿음은 어두운 가운데 더욱 진가를 발휘하는 것입니다.
1952년 7월 4일 30세의 플로렌스라는 여성이 카타리나 섬에서 캘리포니아까지 헤엄쳐 가기로 하였습니다. 빠른 배로 가도 40분은 걸리는 거리입니다. 잠도 못자고 열여섯 시간을 헤엄쳤습니다. 그런데 목적지를 얼마 남겨두지 않고 포기하고 말았습니다.
목숨을 건 도전을 어떻게 그리 쉽게 포기했느냐 하는 것이 당시 언론의 관심이었습니다.
그래서 기자가 그녀에게 물었습니다. 조금만 더 앞으로 나아가면 목적지가 있는데 왜 그렇게 쉽게 포기하였습니까?
그녀가 대답하였습니다. 제가 포기를 하게 된 것은 힘이 모자라서가 아닙니다. 물이 차가워서도 아닙니다.
안개로 인하여 앞이 보이지 않으니까 마음이 무거워지고 이어서 몸도 점점 뻣뻣해져서 도저히 더 이상 나갈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갑자기 안개가 끼어서 앞을 분간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안개가 걷히고 나니까 불과 500m을 남겨두고 포기한 것입니다.
앞을 보지 못한다는 것이 마음과 육체까지도 그렇게 연약하게 만든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입니다.
고지가 바로 저긴데 바랄 수 없으니 못 간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도들에게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말씀으로 바랄 수 있습니다. 할렐루야!
시119:105 주의 말씀은 내 발에 등이요 내 길에 빛이니이다
왜 죽음을 두려워하는가에 대하여 설문조사를 하였는데 많은 사람들의 대답이 죽음을 두려워하는 이유가 죽음 자체가 고통스럽다거나,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때문이 아니라 죽음 후에 어떻게 될 것인가를 몰라서 두렵다고 하였답니다.
앞을 내다볼 수 없으니까 두려운 것입니다.
말씀이 없으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남편도 아내도 부모도 자식도 사업도 직장도 인간관계도 건강도 모든 것이 앞이 보이지 않습니다.
그러나 말씀으로 바라 볼 때에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바라 볼 것이 없습니까?
주의 말씀으로 바라보는 눈이 열리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음은 능히 이루실 것을 확신(確信)했습니다.
미국에 유명한 신학교 중에 하나인 달라스 신학교가 1924년경에는 빚 때문에 폐교의 위기에 처해 있었습니다.
그러나 언제나 마찬가지로 이 학교를 설립하신 루이스 쉐퍼 박사와 직원들은 학장실 문을 잠그고 이 학교를 처분할 것이냐는 문제를 두고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때 쉐퍼 박사 옆자리에 해리 아이언사이드 라는 직원이 다음과 같은 기도를 했습니다.
주님, 당신은 모든 산과 모든 언덕과 그리고 모든 가축들을 소유하고 계시는 부자가 아니십니까? 그 가축들 중 얼마를 팔아서 돈을 보내주셔서 이 학교의 빚을 무사히 갚고 학생들을 계속 양육할 수 있도록 도와주시옵소서.
이러한 기도가 계속되고 있는 동안에 달라스 카우보이의 모자와 구두를 신은 어떤 사람이 서무실에 들어오더니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습니다.
저는 달라스의 카우보이입니다. 오늘 마차 두 대분의 가축을 가득 싣고 시장에 가서 그 가축들을 다 팔았습니다. 그 돈을 가지고 저는 다른 데 투자할 생각이었습니다. 그런데 왠지 모르게 제 마음속에 이것을 더욱 보람 있는 일에 써야 한다는 생각이 떠올랐습니다. 그래서 이 돈을 신학교에 기부하기로 결심하였습니다. 이 돈을 받아주세요.
사무실의 직원은 그 돈을 가지고 황급히 학장실로 뛰어 가니까 막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그 수표를 받아든 쉐퍼 박사는 아이언사이드 박사의 어깨를 툭 치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목사님, 주님께서 방금 가축을 팔아서 이 수표를 보내주셨습니다.
믿음은 전혀 바랄 수 없는 가운데 바라는 것입니다.
이 시간 함께 하나님의 약속을 믿으신다면 그 일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향하여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을 드리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오늘 새벽에도 다윗은 그의 많은 약속들이 기도를 통해서 이루어짐을 찬송하지 않았습니까?
시65:2 기도를 들으시는 주여 할렐루야!
기도를 하려 왔을 때에는 바랄 수 없는 중에서도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것이며, 전혀 소망이 없는 죽은 것과 같은 것 가운데도 믿음이 약하여 지지 않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루게 됨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약5:16-18 위하여 서로 기도하라 의인의 간구는 역사하는 힘이 큼이니라 엘리야는 우리와 성정이 같은 사람이로되 그가 비가 오지 않기를 간절히 기도한즉 삼 년 육 개월 동안 땅에 비가 오지 아니하고 다시 기도하니 하늘이 비를 주고 땅이 열매를 맺었느니라
단9:20-23 내가 이같이 말하여 기도하며 내 죄와 내 백성 이스라엘의 죄를 자복하고 내 하나님의 거룩한 산을 위하여 내 하나님 여호와 앞에 간구할 때 곧 내가 기도할 때에 이전에 환상 중에 본 그 사람 가브리엘이 빨리 날아서 저녁 제사를 드릴 때 즈음에 내게 이르더니 내게 가르치며 내게 말하여 이르되 다니엘아 내가 이제 네게 지혜와 총명을 주려고 왔느니라 곧 네가 기도를 시작할 즈음에 명령이 내렸으므로 이제 네게 알리러 왔느니라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 그런즉 너는 이 일을 생각하고 그 환상을 깨달을지니라
바랄 수없는 중에 바라고 능히 이루실 것을 믿는다면 기도로 응답 받기를 축원합니다.
이 같은 은혜와 복은 아브라함에게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 주시는 은혜와 복입니다.
나에게도 임하신 은혜와 복이 신 줄 믿습니까?
그러면 가만히 있으면 되지 않습니다.
거기에 맞은 사고를 가지십시오 링컨과 같이 아브라함과 같이 말입니다.
무지 무지하게 공급하시는 하나님의 은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풍성하게 임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저는 우리 교회가 어떤 모양으로든지 크게 될 것을 믿습니다.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물론 이 자리에 함께 모든 성도들은 그러한 줄로 믿습니까?
어떤 책의 제목이 당신의 하나님은 너무 작다(Your God is Too Small)였습니다.
그런데 몇 십 년 후에 다시 책을 쓰면서 책의 제목을 당신의 하나님은 지금도 너무 작다(Your God is Still Too Small)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은 너무나도 크신 하나님이신데 그는 능치 못함이 없으신 분이신데 말입니다.
내가 당한 문제에는 언제든지 별 볼일 없는 분으로 여기지 않습니까? 종교 개혁자 마틴 루터는 하나님으로 하나님 되게 하라고 하였습니다.
하나님을 제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전능하신 창조주 하나님을 그대로 믿으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믿지를 못합니다. 자신의 상식을 내세우고 경험을 내세우며 하나님을 믿을 수 없다고 합니다. 이것이 문제입니다.
하나님께서 쓰시기 가장 어려운 사람은 상식을 내세우고 자신의 조건을 말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아무 일도 하지 못합니다.
아무 일도 그 사람 주위에는 일어나지 않습니다.
저는 때때로 경험합니다.
제게 주어진 조건들을 바라 볼 때에 참으로 바라 볼 수 없는 것 같습니다.
만약에 제가 여기에 갇혀 버렸다면 사람에 갇히고 환경에 갇히고 물질에 갇혔더라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오늘도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앞으로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보는 눈을 가졌습니다.
죽은 것과 같지만 생명이 바닷가의 모래알과 같이 하늘의 별과 같이 일어날 것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을 믿어야 합니다.
상식을 초월하고 인간의 경험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을 믿어야 바른 신앙입니다.
하나님은 죽은 자도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으로 부르시는 하나님이십니다. 3세기에 유명한 랍비 가운데 시말리아라는 사람은주의 백성들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가르쳐주시기 위해서 주님은 구약의 613개의 계명을 주셨는데 그 중에 365개는 무엇을 하지 말라 이고, 248개는 무엇을 하라 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그것을 더 함축성 있게 줄여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는데 그것이 십계명이고 이사야 선지자는 그것을 6개의 교훈으로 요약하였고, 미가는 다시 3개의 교훈으로 함축시켰습니다.
그리고 하박국 선지자는 한마디로 믿음으로 표현하기를 믿음으로 살아 라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치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식물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를 인하여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을 인하여 기뻐하리로다고 하였습니다.
바랄 수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이야 말로 여러분의 삶을 참으로 행복하게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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