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선을 기다리는 믿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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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54회 작성일 2009-11-07 1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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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엘하 16:5-12 하나님의 선을 기다리는 믿음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32세 때 영국 해외복음선교회(SPG) 선교사로 미국 조지아 주로 파송 받았는데 그 때 선교의 목표는 마음이 순수한 인디언들에게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하지만 조지아 주에 도착한 뒤 만난 인디언 부족들은 웨슬리의 환상을 깨뜨리고 말았습니다. 웨슬리의 눈에 그들은 순수한 영혼이 아니라 부모와 자식까지 미워하고 살인하는 야만인 이었습니다. 그래서 환멸을 느끼고는 목회 대상을 인디언이 아닌 조지아 주의 영국 이민자들로 바뀌었지만 지나치게 엄격한 규율을 강조했던 탓에 교인들은 웨슬리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중에 웨슬리는 교회에서 매력적인 여성을 사귀게 되어 사랑에 빠져 결혼을 진지하게 생각하며 시간을 끄는 사이 그 여인은 다른 남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습니다. 이에 큰 충격에 빠진 웨슬리는 자신의 심정을 이렇게 일기장에 적었습니다. 나는 졌다. 다 망가졌다. 전부 틀려 버렸다.배신감으로 고통스러워하던 그는 이내 복수심으로 잘못된 행동을 회개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그녀를 수찬정지라는 벌을 내려 성만찬에 참여하지 못하도록 제외시켜버렸습니다. 그녀의 가족들은 웨슬리를 법정에 고소하고 온갖 유언비어와 고소에 시달리던 웨슬리는 선교를 위해 조지아로 온 지 1년 9개월 만에 이 상황을 견디지 못하고 영국으로 야반도주를 하고 맙니다. 그는 돌아가는 배에서 이렇게 자신의 목회를 탄식을 하며 이 불신앙의 악한 마음에서 나를 구원할 자가 누구인가? 하며 영국으로 돌아왔지만 집도 돈도 없던 그는 런던에 살고 있던 자신의 동생 찰스의 친구 집에서 업혀 먹는 신세가 되었습니다.지독한 배신감과 절망감에 사로잡혔던 그는 누가 봐도 실패한 목회자, 선교사였지만 그것은 그에게 나쁜 것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이 사실을 잘 감당하였을 때에 위대한 경건주의자 감리교의 창시자 존 웨슬리가 탄생하는 진정한 출발점이 되었습니다.
오늘 본문에도 인생의 실패자로 비칠 수 있는 한 인물 다윗 왕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쿠데타를 일으키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하여 군사를 몰고 오는데 아들 압살롬과 부자간에 피 흘림을 보며 싸울 수 없어 떠나는 아버지의 심정이 어떠하였겠습니까?
얼마나 부정적인 생각이 그를 괴롭혔겠습니까?
그런 와중에 베냐민 지파의 원로인 시므이가 피신을 하여 가는 그에게 하는 말이 그를 더욱 슬픔에 빠지게 할 수 있었습니다.
저주하며 피를 흘린 자여 사악한 자여 네가 행한 대로 보응을 받는 거여 잘 가거라 잘됐다 하는 것입니다.
네가 한 짓이 있으니 하나님이 이 나라를 네 아들 손에 넘긴 거야
네가 화를 자초한 것이 아닌가 하며 돌을 던지고 티끌을 던져 먼지를 내게 하며 저주를 하는 것입니다.
이때에 저주를 하는 이 시므이를 어떻게 하면 좋겠습니까?
그 해답을 다윗의 경호대장이 말해 주고 있지 않습니까?
인간적으로의 해결책 목을 베 버리면 됩니다.
9절 스루야의 아들 아비새가 왕께 여짜오되 이 죽은 개가 어찌 내 주왕을 저주하리이까 청하건대 내가 건너가서 그의 머리를 베게 하소서 ...
이게 통상 사람들의 해결법입니다. 네가 죽든지 내가 죽든지 하자입니다.
그런데 다윗왕의 해답은 그것이 아니었습니다.
11절 내 몸에서 난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이 베냐민 사람이랴 여호와께서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여기에서 베냐민 사람이라고 한 것은 사울 왕이 베냐민 사람이기 때문에 유다 사람 다윗이 왕의 자리를 빼앗아 갔다는 지역감정이 깔려 있는 것입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이해하고 당연히 세상사에서 있을 수 있는 일로 받았을 아니라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할렐루야!
오히려 하나님의 선을 기다리는 믿음을 나타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있을 것으로 여겼습니다.
우리의 삶 가운데 어떤 문제를 두고 피차간에 정죄의 저주를 하기도 하고 정죄의 저주를 당하기도 하며 참으로 힘들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오늘 본문의 다윗의 믿음의 모습을 보며 아름다운 선을 만드는 축복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나님의 선을 기다릴 수 있었습니까?
세상의 정죄를 하나님의 음성으로 들었습니다.
성 어거스틴이 이런 고백을 하였는데 그의 이웃에 하나님을 믿지 않는 무신론자가 살고 있었는데 이 사람은 기회만 있으면 하나님과 예수님을 비판했다고 합니다.
그런 그의 말과 행동에 마음이 상한 어거스틴이 하나님께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저 나쁜 사람은 빨리 데려가시는 것이 여러 사람을 위해서 좋지 않겠습니까? 라고 말입니다.
그렇게 기도하는 순간 그의 귀에 강한 음성이 들렸는데 누가 나쁜 사람이냐?
데려가려면 너를 먼저 데려가야겠다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고서는 어거스틴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죄인인데 다른 사람을 함부로 판단하고 정죄했음을 깨닫고 스스로의 교만을 크게 회개했다고 합니다.
온 땅에 여호와의 신이 충만하십니다.
만물이 여호와의 능력과 신성을 드러내고 있지 않습니까?
다윗은 시므이가 자신을 저주하는 것은 시므이 개인의 문제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여호와께서 시므이에게 시키신 일로 여겼습니다.
남을 정죄 잘하고 판단을 잘하는 시므이를 통하여도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아무도 시므이에게 네가 왜 다윗을 저주하느냐? 고 말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여호와께 왜 다윗을 저주하십니까? 라고 원망하는 것과 같음을 다윗이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다윗의 믿음의 모습입니다.
어떤 설교를 듣는 중에 이런 내용을 들었습니다.
사람이 사람에게 화를 내는 것은 하나님께 대하여 화를 내는 것이라는 말입니다.
사람이 사람을 욕하면 그 지으신 하나님을 욕하는 것입니다.
사람은 그 속에 있는 것을 들어내고 말하고 행동을 합니다.
시므이는 자신의 속에 어떤 것이 들어 있음을 다윗이 피신가는 힘든 자리에 처했을 때에 드러내는 것입니다.
아마 다윗이 왕의 자리에 있을 때에는 한마디도 못했으며 실제적으로 왕권을 회복하고 돌아 올 때는 다윗에게 아부를 하는 사람이었습니다.
다윗이 보여주는 것은 진심으로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믿는 것이 어떤 것이며, 내게 일어나는 모든 일의 배후에 하나님이 계심을 믿는 믿음이 무엇인가를 보여주는 것입니다.
분명한 것은 살아계신 하나님이 날마다 일하고 계심을 믿는 믿음이 있다면 다윗과 같은 고백이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당연하다는 것으로 받아드리는 모습이 너무나도 아름답지 않습니까?
하지만 다윗이 시므이의 저주를 단순히 하나님이 하신 것으로 알고 넘어갔다고 볼 수는 없습니다.
즉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분노가 있었지만 하나님이 하신 일이기 때문에 참고 넘어가는 차원이 아니었다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하신 일임을 믿고 억지로 참고 넘어갈 수는 있지만 그 속에 있던 분노까지 해소되는 것은 아니란 것입니다.
분노는 있지만 참는 것도 좋은 일입니다.
분명 다윗은 분노가 있지만 참는 수준이 아니라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였다는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합당합니다.
내 아들도 내 생명을 해하려 하거든 하물며 시므이야 당연하겠지
하나님이 그에게 명령하신 것이니 그가 저주하게 버려두라
그렇다고 시므이가 의롭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사용되지만 악하게 사용됩니다.
다윗은 끝까지 그에게 선을 베풀고 살려 두었지만 결국은 아들 솔로몬 시대에 스스로 법을 어겨 처형을 당하여 죽게 됩니다.
다윗은 시므이의 정죄하고 판단하는 성격을 들어 자신을 책망하시는 하나님을 보았던 것입니다.
다윗은 자신을 돌아볼 때 저주받아 마땅한 자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이게 큰 믿음이요 큰 은혜입니다.
남의 아내 밧세바를 범하고 자신의 죄를 감추기 위해 그 남편 우리아를 위험한 전쟁터로 보내어 죽인 것이야 말로 용서받을 수 없는 악한 죄임을 깊이 통감하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더군다나 하나님이 말씀하신 대로 집안에 재앙이 일어나 아들 압살롬에 의해 쫓기는 신세가 된 상황에서 하나님이 자신의 죄를 묻고 계심을 알았을 것입니다.
당연합니다. 합당합니다.
결국 다윗은 시므이를 통하여 죄에서 저주 받아 마땅한 자신을 보게 되고, 그러므로 시므이의 저주를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기에 분노가 없게 된 것입니다.
만약 다윗이 자신이 저주 받아 마땅한 존재임을 생각하지 않았다면 시므이의 저주에 대해 분노가 있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아비새처럼 시므이를 죽이고자 하는 인간적 반응을 보이게 되었을 것입니다.
결국 아비새는 자신의 존재성에 대해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을 보여줍니다.
자신의 존재에 대해 생각하지 않기에 항상 자기중심적인 악한 본성으로 반응하는 것만 보이게 될 뿐입니다.
믿음은 우리를 다윗과 같은 존재로 만들어 갑니다.
다윗과 같은 일을 하는 사람만 되려고 하기 전에 다윗처럼 하나님 앞에 자신이 저주 받아야 할 존재임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이런 마음이라면 누군가가 나를 저주한다고 해도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겠습니까?
다윗이 선을 기다리는 믿음을 가질 수 있음은 하나님의 선한 뜻에 맡겨 버리자
내 뜻대로 마옵시고 주 뜻대로 하옵소서 할렐루야!
12절 혹시 여호와께서 나의 원통함을 감찰하시리니 오늘 그 저주 때문에 여호와께서 선으로 내게 갚아 주시리라 하고
10-11절 저 사람이 나를 저주하도록 하나님께서 허락하셨다면 누가 그를 탓할 수 있겠는가?
내 아들도 나를 죽이려고 하는 판인데, 저 베냐민 사람이야 말해 무엇하겠는가?
혹시 내가 무고하게 저주 당하는 것을 하나님이 보시고 다음에 좋은 것으로 복을 주실지도 모르지 않겠느냐?
나는 나 스스로 입증해 낼 수 있는 무고함을 당하면 무슨 수단과 방법을 써서라도 해결할 수 있는 권리가 있다고 믿어서 얼마든지 흥분하고 소리 지를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도 달라보이지는 않습니다.
사53:7 예수님도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얼마나 변명하고 싶고 변호하고 싶겠습니까?
그렇지만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다윗을 다윗답게 한 일은 그가 하나님을 하나님으로 예배한다는 데 있습니다.
어쨌거나 하나님이 허락하셔서 일어난 일들에 대해서 ...
하나님 제가 이렇게 억울하게 당했으니까 꼭 갚아주셔야 해요. 라는 결과에 대한 하나님과의 거래 비슷한 간구가 우리가운데에 많은데 비해서 다윗은 그 일이 어떤 방향으로 결과 되어 질 것에 대해서도 하나님을 신뢰하고 있다는데 그 큰 차이가 있습니다.
혹시 하나님이 ... 그리 아니하실지라도 하나님은 하나님이심을 알고 있는 겁니다.
다니엘 3:15-18 이제라도 너희가 준비하였다가 나팔과 피리와 수금과 삼현금과 양금과 생황과 및 모든 악기 소리를 들을 때 내가 만든 신상 앞에 엎드려 절하면 좋거니와 너희가 만일 절하지 아니하면 즉시 너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 던져 넣을 것이니 능히 너희를 내 손에서 건져낼 신이 누구이겠느냐 하니 사드락과 메삭과 아벳느고가 왕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느부갓네살이여 우리가 이 일에 대하여 왕에게 대답할 필요가 없나이다 왕이여 우리가 섬기는 하나님이 계시다면 우리를 맹렬히 타는 풀무불 가운데에서 능히 건져내시겠고 왕의 손에서도 건져내시리이다 그렇게 하지 아니하실지라도 왕이여 우리가 왕의 신들을 섬기지도 아니하고 왕이 세우신 금 신상에게 절하지도 아니할 줄을 아옵소서
모든 일을 하나님의 선한 뜻에 맡겨 버립시다.
갚아 주시는 이는 하나님 이십니다.
진주가 어떻게 생기는지를 잘 아실 것입니다. 조개 안에 모래나 이물질이 들어가면 조갯살에 상처가 납니다. 그러면 조갯살은 모래알이 박혀 생긴 상처를 치료하기 위해서 분비물을 만들어내기 시작합니다. 하루아침에 다 낫는 상처가 아닙니다. 한두 달에 해결되는 상처도 아닙니다. 일 년 이년 조갯살은 그 모래알을 품고 상처를 이겨갑니다. 그래서 만들어지는 것이 바로 진주입니다.
내 주변에는 내가 탄식하며 기도로 품어야 할 사람들이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에게 그런 영혼들을 맡겨셨습니다.
내가 미워서 맡기시는 것이 아니라 나를 사랑하셔서 그 영혼들을 맡기신 것입니다.
그들을 내뱉거나 아니면 그들을 떠나버리면 가장 쉽습니다.
그러나 그렇게 해서는 진주가 만들어지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내가 그들을 품고 계속해서 탄식하는 중보기도의 삶을 살기 원하십니다. 물론 그들이 변화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한 영혼을 붙잡고 탄식하며, 때로는 고통으로 인하여 눈물 흘리며, 그렇게 중보기도의 삶을 살다보면 어느새 내 마음에는 하나님의 놀라운 은혜가 진주같이 임하게 될 것입니다.
혹시 이 말씀을 듣고 두려움이 생길 분들이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러다가 내가 무너지면 어떻게 합니까, 그렇다가 내가 지쳐 쓰러지면 어떻게 합니까?
하나님은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이 사람을 붙여주실 때에는 내가 감당할 수 있는 사람만 붙여주십니다.
하나님은 내가 이길 수 있는 시험만 허락하시는 분입니다.
고전10:13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
기독교인이 성숙한 성도가 되려면 고난의 학교에서 4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했습니다.
첫째 단계는, 나는 고난을 견딜 수밖에 없다는 말을 배우는 단계로, 고난에 대해 불평하면서도 견디지 않으면 안 되는 필연적인 십자가를 배우는 단계요,
두 번째 단계는, 나는 참고 견딘다.고 하면서 고난은 힘들지만, 자진하여 하나님의 이름으로 십자가 고난을 떠맡는 단계요,
세 번째 단계는, 나는 고난을 견딜 수 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말씀과 능력을 믿고 고난을 이기는 단계입니다.
마지막으로 네 번째 단계는 나는 고난을 겪을 필요가 있다고 말하는 단계로, 여기서는 고난이 짐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녀임이 나타나는 표적이 되고 시험이 오면 오히려 기뻐하는 위치까지 이르는 단계라고 했습니다. 광야를 간다는 것은 괴로운 것이나 거기를 지나면 가나안 땅이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를 지나면 더 좋은 초원이 기다리고 있는 것같이, 시련의 강을 건너면 더 좋은 날이 기다리고 있는 것을 성도들은 믿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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