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는 믿음 안에서 사셔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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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52회 작성일 2009-12-24 10: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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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서 2:20-21 이제는 믿음 안에서 사셔야 합니다.
1476년 교황 식스토 4세는 천국행 티켓을 팔았는데 심지어 이미 죽은 사람들의 죄까지 사해준다는 면죄부를 만들어 로마 케토릭 성당에서 팔았는데 자신의 돌아가신 부모가 천국행이냐 지옥행이냐는 것이 그 종이 한 장에 달려 있다고 설교하는 소리를 듣는다면 순진한 신자들은 믿고 사지 않겠습니까? 면죄부는 싼 것에서부터 비싼 것에 이르기까지 종류가 다양했습니다. 죽은 부모, 형제, 자매, 친인척을 위한 면죄부, 자기 자신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면제 받을 수 있는 면죄부 등등입니다.
지금 이런 면죄부를 판다면 황당해 보인다고 할지모르나 당시 중세 신자들에게는 결코 황당한 일이 아니라 오히려 심각한 일이었습니다.
개혁자라 하는 마틴 루터조차도 선행으로 구원 받는다는 중세 신앙에 익숙한 사람이었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랄 때부터 구원이란 자신이 쌓은 선행에 의해 좌우된다고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가 수도사의 신분으로 로마에 방문했을 때, 아무런 거리낌 없이 자신의 부모를 위해 면죄부를 사기도 하였다는 것입니다.
루터가 수도사가 된 것도 고향인 만스펠트에서 자신이 공부하던 에르푸르트 대학으로 돌아가는 길에 천둥번개가 그와 함께 걸어가던 친구가 벼락을 맞아 그 자리에서 즉사를 하는 것을 보고 공포에 질려 기도하기를 성 안나여, 저를 도와주소서. 제가 수도사가 되겠나이다. 라고 겁에 질려 외쳤던 자신의 맹세를 지키기 위하여 수도사가 될 정도로 율법적이었습니다.
루터는 자신의 맹세를 지키지 않으면 당장이라도 하나님의 진노의 날벼락이 떨어질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에, 당시 화려한 출세를 보장하는 법대생의 길을 포기하고 세상과 등진 수도사의 길을 가기로 결심했던 것입니다. 루터는 수도사가 되어 당시 가장 엄격하다고 소문난 에르푸르트에 있던 어거스틴 수도원의 수도사가 되었는데 루터는 혹 덜 엄격한 수도원에 들어갔다가 자신의 마음이 변할까 봐 염려스러웠기 때문에 가장 엄격한 수도원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거기서 수도사로서 자신의 덕을 쌓기 위해 수도원에서 누구보다 엄격하고 금욕적인 생활을 했습니다.
루터는 로마서 1:17절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말씀을 대할 때마다, 믿음에 관심을 갖기 보다는 하나님의 의와 인간의 선행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의로워지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는 의인이 되기 위해 수도사로서 쌓을 수 있는 선행이 있다면 어떤 것도 마다하지 않았습니다.
루터는 온 밤을 새우며 철야기도도 하고, 일주일 동안 물 한 모금 마시지 않는 금식도 했습니다.
그런데 그의 마음에는 나도 이제 의인이 되었구나하는 만족감이 찾아오지 않았습니다.
만족감은커녕 불안한 마음만 점점 커져 가고 있었습니다.
하나님의 의를 얻기 위해 그렇게 수고하고 노력했는데, 왜 내게는 만족함이 없는 것일까?’
얼마나 더 고행을 감내하고 덕을 쌓아야 하나님의 의를 얻을 수 있단 말인가?
이렇게 자신을 괴롭히는 하나님의 의가 짐이 되었고 결코 사랑의 하나님으로 느낄 수 없었고 무서운 진노와 형벌의 하나님, 심판의 하나님으로만 느껴졌습니다.
여러분들도 그렇지 않습니까? 내가 의롭게 사는 것이 힘이 들어 차라리 개판을 치고 살지 않습니까?
의가 엄청난 짐이 되어 있습니다. 예수 믿으라고 하니 의가 짐이 되지 않습니까?
그런 영적인 갈등과 번민 가운데 그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로마서를 강의하기 시작하면서부터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게 되리라는 말씀을 통해 그 믿음이란 도대체 무엇인지 의문을 품기 시작했습니다.
로마서 강의를 끝낸 후 갈라디아서 강의를 하다가 본문 2:15-21을 접했을 때, 그는 지금까지 자신이 생각한 믿음이 잘못된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지금까지 그는 자신의 행위로 하나님의 의를 획득하는 것이 믿음이라고 생각했으며, 그런 믿음을 가진 자가 의인으로 불린다고 생각했습니다.
16절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는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율법의 행위로서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느니라. 고 말씀합니다.
19절 심지어 율법을 향해 죽었다고 선언합니다.
루터는 이제 의인이 되는 길은 자신에게 속한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루터는 지금까지 스스로 살기 위해 발버둥 치며 살았는데, 그럴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 자신의 의로운 행동이 믿음을 가져다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하나님의 의가 된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왜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상에서 죽으셨기 때문입니다.
예수께서 나의 죄를 대신 짊어지시고 십자가에 달리시어 온 몸의 물과 피를 다 쏟으시고 죽으셨습니다.
요 3:14-16 모세가 광야에서 뱀을 든 것 같이 인자도 들려야 하리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께 모든 것을 의지하여 사는 것입니다.
우생마사, 말은 홍수를 만나면 다 죽지만 소는 산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은 성격이 급하고 빨리 뛰기 때문에 헤엄을 쳐서 홍수를 피하다 제힘에 지쳐서 그냥 빠져 죽습니다. 그러나 소는 헤엄을 칠 줄 모르기 때문에 홍수가 나면 그냥 떠내려갑니다. 떠내려가다가 나중에 집에 걸린다든지 언덕에 걸린다든지 낮은데 걸리면 살아서 걸어 나오는 것입니다. 십자가도 한가지입니다. 내 힘으로 십자가를 저항하고 밀어내고 안 짊어지려고 발버둥을 치면 나중에 그 때문에 아주 신경쇠약에 걸리고 신앙도 잃어버리고 악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맡겨버리면 나중에는 십자가가 나를 변화시키고 오히려 십자가가 축복의 근원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내 운명으로 받아들여야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루터는 이렇게 말합니다.
그분은 자신의 의를 나의 의로 만드셨고 나의 죄를 자신의 죄로 삼으셨다.
그래서 만일 그분이 나의 죄를 자신의 죄로 만드셨다면 나는 이미 죄가 없으며 자유로운 사람이다.
그리스도는 죽으셨고 나는 살게 되었습니다. 할렐루야!
그리스도의 죽으심으로 나는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
이런 예수님의 사랑을 받으며 사는 것입니다.
죄 없으신 예수님은 죽음의 고통을 홀로 감당하셨습니다.
왜 그렇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나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20절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 누구를 사랑하셨다고요? 바로 나 같은 죄인입니다.
누구를 위해 자신의 몸을 버리셨습니까? 바로 나 같은 죄인 아닙니까?
의인이 아닙니다.
그러면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이요 율법을 향해 죽는 것입니다.
믿는다는 것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리스도를 믿는다는 것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혀 죽는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말입니다.
기독교의 진리가 무엇입니까?
살고자 하는 자는 죽고 죽고자 하는 자는 산다는 것 아닙니까?
죽지 않고 부활할 수 있습니까? 죽은 자만이 부활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지금 나의 십자가는 나에게 맞춤으로 주셨습니다. 자꾸 남의 삶을 보시지 마시기 바랍니다.
리차드 범브란트는 십자가에 대해 이런 이야기를 했습니다. 가게를 운영하는 한 크리스천이 하나님께 자신이 지고 있는 십자가가 너무 무겁다고 불평을 했습니다. 하나님, 내가 짊어지고 있는 십자가는 너무 무거우니 다른 십자가를 주십시오 그래서 하나님이 여러 십자가를 내놓고 난 다음 네가 고르라고 했습니다. 하나는 옥으로 만든 십자가로 참 보기는 좋은데 무거워서 걸머질 수가 없었습니다. 또 다른 십자가는 아름답게 보이지만 표면이 너무 거칠어서 고통스러워 걸머질 수 없었습니다. 그런데 마음에 드는 십자가가 하나 있었습니다. 이것을 짊어지겠습니다 하니까 하나님이 그 십자가를 다시 한 번 자세히 보아라고 하여 보니 그것은 바로 자기가 짊어지고 있는 그 십자가였습니다.
고린도전서 10:13절 사람이 감당할 시험 밖에는 너희가 당한 것이 없나니 오직 하나님은 미쁘사 너희가 감당하지 못할 시험 당함을 허락하지 아니하시고 시험 당할 즈음에 또한 피할 길을 내사 너희로 능히 감당하게 하시느니라고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는 감당할만한 십자가를 주십니다.
토마스 드레이크는 십자가는 하늘의 사닥다리다고 말했습니다.
영국의 신학자 사무엘 러더포드도 십자가 없는 믿음은 곧 없어져 버린다고 말했습니다.
세례교인 되는 자에게 십일조 이야기 했습니다. 이것 감당하지 않으면 절대로 믿음 안 생긴다고
벗으려고 애쓰지 마시고 십자가를 통하여 은혜를 받기 바랍니다.
영국 속담에 믿음이 없다는 것은 고삐 없는 말과 같다는 말이 있습니다.
말의 입장에서 보면 고삐란 어지간히 자기를 괴롭히는 물건입니다. 고삐를 잡아챌 때마다 그 긴 턱이 얼마나 아프겠습니까? 그 때문에 몸집이 큰 말인데 작은 어린아이에게도 순순히 끌려 다니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어쨌든 말고삐란 말한테는 몹시 고통스러운 애물단지입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 생각해 보면 그 고삐가 말을 인도합니다. 자기가 전혀 모르던 길도 그 고삐에 끌려가다보면 어느새 푸른 초장이 나타납니다. 그 고삐가 잡이끄는데로 달리다가 영광을 얻을 수도 있습니다.
말이 고삐의 인도를 받듯 믿음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중요합니다.
아마도 가장 행복한 사람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또한 가장 불행한 사람은 믿음이 없이 사는 사람, 세상에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전혀 믿음을 가지지 못하고 사는 그러한 사람일 것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못 박혀 죽은 죄인은 더 이상 죄 가운데 살지 않습니다.
이제 죽을 죄인이 영원한 생명의 소유자가 된 것입니다.
이보다 더 큰 기쁨과 행복이 있겠습니까?
왜 죄를 짓겠습니까?
내 삶이 나 자신의 것이 아님을 인정하고 산다면, 세상적인 욕심에 그렇게 집착하며 살겠습니까?
그 욕심 때문에 짜증과 신경질로 삶을 허비하겠습니까?
주를 위하여 얼마든지 믿음으로 사는 자가 될 것입니다.
믿음으로 살아도 얼마든지 당신의 삶은 육신의 욕심을 가지고 살았던 삶보다 훨씬 축복이 될 것입니다.
이런 믿음의 삶으로 축복된 삶을 사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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