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드릴 유일한 고백 나를 보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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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32회 작성일 2010-02-24 11:51본문
이사야 6:1- 8 주께 드릴 유일한 고백 나를 보내소서
1905년 20세기 인류의 박애자, 성자로 추앙받는 알버트 슈바이처가 30세 되던 해에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잡지에서 콩고 지방에서 선교사를 부르고 있음. 누구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임. 이런 내용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는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의지를 드리고 나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20살 되던 해에 내가 30세까지는 학문과 나를 위해서 살고 30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지. 예수님이 30세까지 사적으로 사시고 30세부터 공적으로 사신 것처럼 살아야지 하고 목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며 그가 30세까지는 철학박사, 음악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교수로서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해 이 부르심을 입고 의술로 선교를 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6년 동안 공부를 한 후에 그는 콩고 지방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며 선교사로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백인의 묘지라 불리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너 많은 명예와 지식과 실력은 어떠할 것인가? 했지만
그러나 그는 주의 부르심을 입고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떠나 아프리카 식인종들을 위하여 거기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원전 700년 전의 사람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8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음성입니다.
이사야 역시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주께 드릴 유일한 대답이요 고백입니다.
왜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1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고백한 그 해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이걸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 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다가 죽는 가 입니다.
안 죽으려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용 되는가 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죽은 후의 삶이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후의 천국과 지옥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육신의 몸을 가진 삶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식을 누리고 있지만 부자는 지옥 유황불에서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에 대한 결과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살아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살아서도 천국 같은 삶, 죽어서도 천국에 가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옥 가는 죽음은 결코 기쁘게 맞이할 수 없지만 천국 가는 죽음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남방 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 바로 웃시야 왕은 기원전 791-739년 약 50 여 년간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집권 초기에는 유다의 영토 확장을 위해서 또한 농업 개발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지 마는, 나라가 번영하게 되자 교만하게 되어 말년에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제 마음대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다가 제사장이 행해야 할 분향을 제 마음대로 왕이라는 이름으로 향단에 분향하려 다가 하나님이 치시므로 나병이 들고 별체에서 평생 격리되어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왕이 지만 그 삶은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민심은 들떠 있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무서워하고, 국가의 내일의 운명에 대해서 불안과 공포가 더해갔습니다.
날이 더해 갈수록 정치, 경제, 교육, 사상, 도덕, 종교는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기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에 대한 불안은 더해만 가고, 좌우를 살펴보아도 소망을 둘만한 곳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웃시야 왕이 죽던 때 일어난 것입니다.
소이 세상에서의 기대감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구원의 소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망 가운데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셨는데 천사들이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반해 자신의 처한 나라와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살다가는 다 망하고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망하고 죽게 생겼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삶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개 여태까지 살았던 방법과 다른 새로운 삶이 요구되어 짐을 아셔야 합니다.
이때에 천사가 숯불로 자신의 부정함을 다 제하여 주었습니다.
이제 죄사힘 받는 자의 새로운 삶의 고백이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사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지금이구나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죽은 자에게 메여있습니다. 세상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살아 있는 아직도 죽지 않고 생명이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느니라 할렐루야!
죽은 자에게 아무 것도 해서 안 되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누가 추도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고 묻기에 사실은 죽은 자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추도예배라는 말도 실상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습관이 있으니 기독교식으로 해서 추도예배라 붙인 것입니다.
음식 차리지 말고 그냥 식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명절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죽는 자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한식집에서 음식을 들다가 장모님이 한식을 잘 만드시는데 그 때 한식 장사를 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하다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 지금 편히 천국가 계시는 분을 왜 불러......
내가 가기가 힘들고 떠나보내기가 남아 있는 자들이 힘드지만 일단 믿음 안에서 가신 분은 편안 합니다.
죽은 자 걱정 말고 그래도 살아 있는 내가 중요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왕이라도 죽으면 그만 이요 살아 있는 이사야가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들 다 출가시키지 못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 막내 동생이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겠다고 미국 신학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전도사로 섬기다가 간이 좋지 않아 30대 초반에 하나님이 불러가셨습니다.
그때 저도 미국까지 가서 병간호를 하고 병났기 위하여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루에 몇 천 달라 병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몇 백만 원이나 하는 병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로 가기까지 힘이 들었어요 물론 보내는 자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가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 이분들은 다 편안하게 계십니다.
믿음 안에서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아내, 남아 있는 자녀가 즉 살아 있는 자가 해야 할 일 뿐입니다.
자녀는 그때 3-4살이 되었는데 이제 10여년의 세월이 되어 중학생이 되고 아내는 남편 뒤를 이어 신학을 해서 몇 년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아 남편의 뒤를 이어 목회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안타깝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여튼 웃시야 왕도 죽었습니다.
이때에 이사야는 새로운 결심이 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는 하나님을 만난 자의 고백입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는 폭군 같은 지휘자였다고 합니다. 단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는지. 그 결과 베토벤 교향곡 N0. 9을 연주를 하는데 청중들이 일어나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열광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멋지게 연주를 하고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기에 단원들은 지휘자의 칭찬의 변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토스카니가 무대에 오르더니 내가 누굽니까? 여러분은 누굽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니지요.
Only Beathoven is everything - 베토벤만이 모든 것이요 베토벤만이 영광 받아야 될 분이며 그분이 노래를 손상 입히지 아니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음악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자의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외에 내가 세상에서 뭘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왜 자꾸만 세상적인 일에 염려하고 시험에 들어있는 이유가 무엇 인 줄 아십니까?
그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기 보다는 나를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국가적인 어려움을 앞에 두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특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1-4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5절 자기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6-7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8절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보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할 수 있음은 오직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세상을 3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첫째는 쫓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운명이다 내 팔자다하면서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모든 삶을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득불 하는 것입니다. 소가 코에 코뚜리를 꿰인 것처럼 끌려가는 삶입니다.
두 번째는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늘 뜬구름 잡듯이 사는 인생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지막까지 잘 될 줄로 믿고 실망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면서 앞으로 좇아가는 이른바 이상지향형인 자입니다.
현실이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뭔가 앞에 놓인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허황되게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과 경륜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과거도 하나님께 있었고 미래도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맡깁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고 무엇인가 그분의 뜻을 헤아려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생명을 걸고 좇아가는 인생입니다.
나의 사사로운 일은 주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큰 수술을 마친 집사님에게 주시는 말씀이 이것 이었습니다.
찬송은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그리고 말씀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큰 수술을 마친 자에게 …….
저도 이 말씀을 전하면서 왜 이렇게 하실까? 이 말씀이 소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몸의 모든 것은 주님이 합당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있어야 할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니 너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모든 일을 주께서 아십니다.
비록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나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걱정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문제투성이고 내일이 불확실하고 세상의 짐이 너무 무거운데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소명을 감당할 그 한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깨끗하고 용모가 단정한 외모가 수려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세상적으로 내 세울 것이 없더라도 내 몸에 중병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내가 하겠습니다고 하는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원하면 주님은 정결케 하고 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한한 기회요 절호의 찬스요 그리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부모님들이 먼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 한 사람을 여기까지 있게 함은 배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고, 때로는 죽어야 했습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수 없는 세월 속에서 많은 계획과 일을 했던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누군가가 너무나도 귀한 값을 치루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제는 내가 그 부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하여 죽음도 멈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한다면 천지도 순응 합니다.
사명을 위한다면 내 삶을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고백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절대로 기피하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에는 유익이 될 것 같지만 나중에는 크게 후회가 될 것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나 삶에 기적을 가져 올 것입니다.
1905년 20세기 인류의 박애자, 성자로 추앙받는 알버트 슈바이처가 30세 되던 해에 아버지 책상 위에 놓여 있던 잡지에서 콩고 지방에서 선교사를 부르고 있음. 누구든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고 응답하는 자가 바로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임. 이런 내용으로 쓰여 있었습니다.
하나님이 필요로 하는 자는 내가 하겠습니다 하고 의지를 드리고 나서는 자라는 것입니다.
그는 20살 되던 해에 내가 30세까지는 학문과 나를 위해서 살고 30세 이후에는 다른 사람을 위해서 살아야지. 예수님이 30세까지 사적으로 사시고 30세부터 공적으로 사신 것처럼 살아야지 하고 목적을 두고 열심히 공부하며 그가 30세까지는 철학박사, 음악박사, 신학박사 학위를 받고 유명한 교수로서 명예를 다 얻었습니다.
그가 30세 되던 해 이 부르심을 입고 의술로 선교를 하기 위해 의과대학에 입학해서 6년 동안 공부를 한 후에 그는 콩고 지방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며 선교사로 갑니다.
그때 많은 사람들이 당신은 미쳤다고 했습니다.
당시만 해도 백인의 묘지라 불리는 아프리카에 들어가서 어떻게 살아남을 것이냐?
너 많은 명예와 지식과 실력은 어떠할 것인가? 했지만
그러나 그는 주의 부르심을 입고 드디어 가족을 거느리고 떠나 아프리카 식인종들을 위하여 거기에서 일생을 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해서 갈꼬 라는 하나님의 음성을 외면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원전 700년 전의 사람인 이사야가 하나님의 음성을 듣게 됩니다.
8절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라는 음성입니다.
이사야 역시 대답하기를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하였습니다.
주께 드릴 유일한 대답이요 고백입니다.
왜 이런 대답을 할 수 밖에 없었을까요? 인생은 유한하기 때문입니다.
1절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고백한 그 해가 웃시야 왕이 죽던 해라고 하였습니다.
인생은 누구나 죽는다는 사실 이걸 받아 드려야 합니다.
그러므로 나도 죽는 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언제 어떻게 죽을지는 모르지만 그러나 다만 확실한 것은 내가 무엇을 하다가 죽는 가 입니다.
안 죽으려고 버티는 것이 아니라 죽는 순간까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사용 되는가 입니다.
누가복음에 보면 거지도 죽고 부자도 죽었는데 죽은 후의 삶이 성경에 유일하게 기록되어 있습니다.
죽은 후의 천국과 지옥을 확실하게 보여 주고 있습니다.
이 내용은 지금 죽지 않고 살아있는 자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또한 육신의 몸을 가진 삶도 중요하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삶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죽음은 끝이 아니라 또 새로운 시작이 있음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거지 나사로는 천국에서 아브라함의 품에 안식을 누리고 있지만 부자는 지옥 유황불에서 고통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들이 무엇을 하며 살았는가에 대한 결과를 보여 주는 장면입니다.
살아서 지옥 같은 삶을 살았는데 죽어서도 지옥에 간다면 이것이야 말로 너무 비참하지 않습니까?
살아서도 천국 같은 삶, 죽어서도 천국에 가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지옥 가는 죽음은 결코 기쁘게 맞이할 수 없지만 천국 가는 죽음은 참으로 영광스러운 순간입니다.
남방 유다 왕국의 열 번째 왕이 바로 웃시야 왕은 기원전 791-739년 약 50 여 년간 유다를 통치하였는데 집권 초기에는 유다의 영토 확장을 위해서 또한 농업 개발을 위해서 많은 노력을 했었지 마는, 나라가 번영하게 되자 교만하게 되어 말년에는 여호와의 전에 들어가 제 마음대로 교회를 어지럽게 하다가 제사장이 행해야 할 분향을 제 마음대로 왕이라는 이름으로 향단에 분향하려 다가 하나님이 치시므로 나병이 들고 별체에서 평생 격리되어 살다가 생을 마감하였습니다.
왕이 지만 그 삶은 지옥같이 살았습니다.
이 일로 말미암아 민심은 들떠 있고, 백성들은 하나님의 징계를 무서워하고, 국가의 내일의 운명에 대해서 불안과 공포가 더해갔습니다.
날이 더해 갈수록 정치, 경제, 교육, 사상, 도덕, 종교는 안정을 되찾지 못하고 민심이 흔들리고 사회기강은 말이 아니었습니다.
외적에 대한 불안은 더해만 가고, 좌우를 살펴보아도 소망을 둘만한 곳은 한군데도 없었습니다.
이러한 상황이 웃시야 왕이 죽던 때 일어난 것입니다.
소이 세상에서의 기대감이 다 사라져 버렸습니다.
바로 웃시야 왕이 죽던 해에 이사야가 성전에서 보좌에 앉아 계신 하나님의 모습을 보게 되었습니다.
절망 가운데 구원의 소망을 보게 된 것입니다. 사망 가운데 생명을 보게 된 것입니다.
하나님이 보좌에 앉으셨는데 천사들이 경배하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거기에 반해 자신의 처한 나라와 모습은 너무나도 초라함을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세상적으로 살다가는 다 망하고 자신도 죽게 될 것이라고 생각이 들었습니다.
나는 망하고 죽게 생겼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무엇인가 새로운 삶이 필요로 한 것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내개 여태까지 살았던 방법과 다른 새로운 삶이 요구되어 짐을 아셔야 합니다.
이때에 천사가 숯불로 자신의 부정함을 다 제하여 주었습니다.
이제 죄사힘 받는 자의 새로운 삶의 고백이 내가 여기있사오니 나를 사용해 달라는 것입니다.
기회는 죽지 않고 살아있는 지금이구나 그냥 살다가 죽으면 끝장이라는 것입니다.
세상의 문화는 죽은 자에게 메여있습니다. 세상의 결국은 죽음입니다.
기독교 문화는 살아 있는 아직도 죽지 않고 생명이 있는 나에게 있습니다.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느니라 할렐루야!
죽은 자에게 아무 것도 해서 안 되고 할 이유도 없습니다.
누가 추도 예배를 어떻게 드리느냐고 묻기에 사실은 죽은 자를 위하여 해 줄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추도예배라는 말도 실상은 있을 수 없다
사람들이 제사를 드리는 습관이 있으니 기독교식으로 해서 추도예배라 붙인 것입니다.
음식 차리지 말고 그냥 식구들이 좋아하는 음식을 만들어 먹고 살아있는 사람을 위하여 하나님께 예배를 드리라고 하였습니다. 명절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죽은 자는 아무 것도 할 수 없고 죽는 자를 위하여 아무 것도 해 줄 수 없는 것입니다.
한식집에서 음식을 들다가 장모님이 한식을 잘 만드시는데 그 때 한식 장사를 해봤으면 좋았을 것을 하다가 괜히 쓸데없는 소리 지금 편히 천국가 계시는 분을 왜 불러......
내가 가기가 힘들고 떠나보내기가 남아 있는 자들이 힘드지만 일단 믿음 안에서 가신 분은 편안 합니다.
죽은 자 걱정 말고 그래도 살아 있는 내가 중요한 것입니다.
웃시야 왕은 왕이라도 죽으면 그만 이요 살아 있는 이사야가 정신을 차린 것입니다.
저희 부모님들은 자식들 다 출가시키지 못하고 가정 형편이 어려운 가운데에 돌아 가셨습니다.
그리고 제 막내 동생이 한국에서 대학을 나오고 목사가 되겠다고 미국 신학대학원에 유학을 가서 공부를 하고 전도사로 섬기다가 간이 좋지 않아 30대 초반에 하나님이 불러가셨습니다.
그때 저도 미국까지 가서 병간호를 하고 병났기 위하여 애를 많이 썼습니다.
하루에 몇 천 달라 병실에서 생활을 했습니다. 하루에 몇 백만 원이나 하는 병원입니다.
참으로 하나님께로 가기까지 힘이 들었어요 물론 보내는 자 형제자매 그리고 아내가 힘이 들었습니다.
이제 이분들은 다 편안하게 계십니다.
믿음 안에서 가셨기 때문입니다.
이제 남아 있는 아내, 남아 있는 자녀가 즉 살아 있는 자가 해야 할 일 뿐입니다.
자녀는 그때 3-4살이 되었는데 이제 10여년의 세월이 되어 중학생이 되고 아내는 남편 뒤를 이어 신학을 해서 몇 년 전에 목사 안수를 받아 남편의 뒤를 이어 목회 일을 돌보고 있습니다.
돌아가신 분이 안타깝고 불쌍한 것이 아니라 남은 자들이 어떻게 살아가느냐? 가 중요한 것입니다.
하여튼 웃시야 왕도 죽었습니다.
이때에 이사야는 새로운 결심이 선 것임에 틀림이 없습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죽지 않고 지금 살아 있는 자의 고백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 는 하나님을 만난 자의 고백입니다.
지휘자 토스카니는 폭군 같은 지휘자였다고 합니다. 단원들에게 얼마나 혹독하게 연습을 시키는지. 그 결과 베토벤 교향곡 N0. 9을 연주를 하는데 청중들이 일어나서 우뢰와 같은 박수를 치며 열광을 했습니다. 너무너무 멋지게 연주를 하고 관중들의 환영을 받았기에 단원들은 지휘자의 칭찬의 변을 기대하고 있었는데 토스카니가 무대에 오르더니 내가 누굽니까? 여러분은 누굽니까? 나는 아무 것도 아닙니다. 여러분도 아무 것도 아니지요.
Only Beathoven is everything - 베토벤만이 모든 것이요 베토벤만이 영광 받아야 될 분이며 그분이 노래를 손상 입히지 아니하고 우리가 최선을 다해서 보여주기를 원했던 것 외에 뭐가 있습니까?
그렇습니다. 제대로 된 음악가입니다.
하나님을 만난자의 고백이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영광 외에 내가 세상에서 뭘 드러내느냐 하는 것이지요.
왜 자꾸만 세상적인 일에 염려하고 시험에 들어있는 이유가 무엇 인 줄 아십니까?
그 가운데 하나님을 드러내려고 하기 보다는 나를 드러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이사야는 국가적인 어려움을 앞에 두고 성전에서 하나님께 특별 기도를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1-4절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습니다.
5절 자기 자신을 바로 보게 되었습니다.
6-7절 하나님의 특별하신 은혜를 경험하게 됩니다.
8절 자신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나의 문제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나를 보고 은혜를 받고 그리고 하나님의 의지를 따르는 의미 있는 삶이 되는 것입니다.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라고 할 수 있음은 오직 성도들만이 할 수 있는 고백입니다.
세상을 3가지 유형으로 사람들이 살아갑니다.
첫째는 쫓기며 사는 사람들입니다.
운명이다 내 팔자다하면서 질질 끌려 다니는 모습으로 사는 사람들입니다.
내가 원치 않는 삶을 사는 것입니다.
가정도 직장도 모든 삶을 팔자소관으로 여기며 자기의 뜻과는 상관없이 부득불 하는 것입니다. 소가 코에 코뚜리를 꿰인 것처럼 끌려가는 삶입니다.
두 번째는 쫓아가는 사람입니다. 늘 뜬구름 잡듯이 사는 인생입니다.
오늘이나 내일이나 마지막까지 잘 될 줄로 믿고 실망과 절망 속에서도 스스로 그것을 극복하고자 몸부림치면서 앞으로 좇아가는 이른바 이상지향형인 자입니다.
현실이나 객관적 사실을 무시하고 뭔가 앞에 놓인 좋은 일이 있을 것이라 생각하고 허황되게 사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는 부름 받은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높은 뜻과 경륜 속에서 내가 존재한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현실 속에서 부르시는 하나님의 뜻을 압니다. 과거도 하나님께 있었고 미래도 하나님의 뜻에 있다는 것을 알고 맡깁니다.
모든 것은 내가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 수 밖에 없다는 것을 생각하고 그분의 뜻을 추구하고 무엇인가 그분의 뜻을 헤아려 그분의 뜻을 이루는 일이라면 생명을 걸고 좇아가는 인생입니다.
나의 사사로운 일은 주께서 책임지시기 때문입니다.
큰 수술을 마친 집사님에게 주시는 말씀이 이것 이었습니다.
찬송은 이전에 주님을 내가 몰라 영광의 주님을 비방했다 주님께 죽도록 충성하면 생명의 면류관 얻으리라
그리고 말씀은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이것이 무엇입니까? 큰 수술을 마친 자에게 …….
저도 이 말씀을 전하면서 왜 이렇게 하실까? 이 말씀이 소화가 되었는지 모르겠다
나의 몸의 모든 것은 주님이 합당하게 해 주시겠다는 것입니다.
나의 있어야 할 것을 주님께서 아십니다. 그러니 너는 그 나라와 그의 의를 위하라는 것입니다.
오늘 나의 모든 일을 주께서 아십니다.
비록 내가 지금 어떤 처지에 놓여 있다 할지라도 그것은 주께서 알아서 하실 일이고
나는 하나님의 일에 사용이 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걱정 한다고 될 일이 아닙니다.
오늘 주님은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문제투성이고 내일이 불확실하고 세상의 짐이 너무 무거운데 죽을지도 살지도 모르는데 그럼에도 나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라고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도 그 소명을 감당할 그 한사람을 찾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이 찾는 사람은 깨끗하고 용모가 단정한 외모가 수려한 사람이 아니라 능력과 재력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 비록 죄인이라고 할지라도 아무런 세상적으로 내 세울 것이 없더라도 내 몸에 중병을 가진 자라 할지라도 내가 하겠습니다고 하는 그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원하면 주님은 정결케 하고 할 수 있도록 하실 것입니다.
내가 아직까지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은 무한한 기회요 절호의 찬스요 그리고 감사해야 할 일입니다.
나 한 사람을 이 세상에 보내시기 위하여 부모님들이 먼저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나 한 사람을 여기까지 있게 함은 배후에 수많은 사람들이 고생을 했고, 때로는 죽어야 했습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해서 창세전부터 하나님은 수 없는 세월 속에서 많은 계획과 일을 했던 것입니다. 나 한 사람을 구원시키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달렸습니다.
이제 내가 이렇게 살아 있는 것이 누군가가 너무나도 귀한 값을 치루고 있다는 것을 아시고
이제는 내가 그 부름에 합당한 모습으로 살아야 할 때임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하여 죽음도 멈춘다는 사실을 아시기 바랍니다.
사명을 위한다면 천지도 순응 합니다.
사명을 위한다면 내 삶을 주님이 이끌어 주실 것입니다.
이제 고백하십니다. 내가 여기 있사오니 나를 보내소서
절대로 기피하고 외면하지 마십시오
그 순간에는 유익이 될 것 같지만 나중에는 크게 후회가 될 것입니다.
나를 보내소서 하십시오 바로 이것이 나 삶에 기적을 가져 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