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의 성공은 하나님 마음에 들면 됩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95회 작성일 2010-02-24 11:53본문
사도행전13:21-23 인생의 성공은 하나님 마음에 들면 됩니다.
지난 2007년도에 세상을 떠난 미국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헴슬리라는 할머니는 자신의 애완견 트러블에게 유산으로 1200만 달러(약 140억원)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헴슬리 호텔 등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부동산 재벌이었는데 손자들과 남동생에게는 조금씩 주고 자신의 애완견에게 더 많은 유산을 남김으로 애완견 트러블은 일약 거부가 되어 헴스리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 개를 개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공주라고 부르게 하며 반드시 호텔의 전문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만을 먹였다고 했으니 개가 평생 사람이 먹어보지도 못한 것을 먹고 사람이 평생 대접 받지 못한 대접을 받고 아마 죽어서도 명당자리 공원묘지에 넓은 평수에다가 멋있는 묘비에 다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고 죽었다는 칭송하는 글을 남길 것이고 매일 매일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개 팔자 상팔자요 사람 팔자 아니 내 팔자 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 개는 과연 어떤 개이기에 그 많은 액수를 유산으로 받았을까?
AP통신에 따르면, 생전에 헴슬리는 괴팍하고 치사한 악명 높은 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애완견 트러블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할머니께 복종하고 따름으로 할머니를 즐겁게 하고 외롭게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 함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말 못하는 개도 아무리 악명 높은 할머니의 마음에 들고 보니 자신의 유산을 손자들보다 남동생들을 제키고 많은 유산을 주었다는 말이니 누군가의 마음에 들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최고의 비즈니스가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최고의 비즈니스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다윗 왕이 마음에 들었다고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22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윗을 통하여 다 아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40년 동안이나 참아 기다리며 하나님이 마음을 맞춰 보려고 했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울의 가문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21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패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왕은 그 집안이 그렇게도 잘되고 싶어 했습니다.
떠나는 사무엘을 붙잡고 제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고 울며 복을 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 마음 한번 싸보지 못하고 결국은 비극의 왕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의 빌보아 전쟁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를 하는데 혹은 자결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칼에 죽었다는 수치를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패하는 사울이 있는 반면에 세우시는 다윗이 있습니다.
지는 해가 있고 뜨는 해가 있습니다.
나의 가문은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뜨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면 그 가문은 뜨는 가문입니다.
지금 제 아무리 갖추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삐끗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호흡이 맞으면 지금 비록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인물입니까?
사람의 욕심과 정욕대로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의 요구는 패망의 시작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우리 조상이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것을 보세요 살아 갈수록 죽음입니다.
집집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왕이 되었기에 망하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왕을 두고 행하는 것을 보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쫓아 세상적인 왕을 세우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운 왕입니다.
사울은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인물입니다.
외모가 준수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 같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때때로 망치는 이유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인간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 같은 자를 세우다가 실패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도가 교역자를 볼 때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충족하려고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닙니다.
사실 사울 왕을 볼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불의한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울 왕만한 사람없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에 그 인물이 등장 할 때에 그는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몇날며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흠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는 인간적으로 반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아니 장로가 아니 집사가 아니 목사가 왜 저러지 하고 판단을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을 가리키는 맹자 공자를 말하는 인간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감ㅅ없이 주시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죄인을 위한 종교입니다.
♬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 정치하려고 합니다.
윤리 도덕으로 어찌 통치가 됩니다. 이 세상에 윤리 도덕을 완성한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 아무리 도를 닦아 보십시오
제 아무리 고행을 하고 평생 누워서 잠을 자지 말았다고 선이 완성이 됩니까? 아닙니다.
큰 스님이라고 하는 성철 그분도 마지막 열반 송과 그의 유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해석은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운명전 깨달음의 시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여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 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이들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수행의 수고가 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허무의 종교가 아닙니까?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학자들이 인생을 논 할 때에 장래를 말 할 때에 모두가 부정적인 예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맬더스존은 인간론에서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식량위기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감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쳐 습니다. 이런 맬서스의 예언에 따라 70~80년대 한국을 포함한 여러 개발도상국, 후진국들은 인구감축정책을 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둘도 많다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식의 구호가 잘 먹혀 들어가서 이제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멜더슨이 말 할 때에 인구 10억이었는데 지금은 60-70억이지 않습니까?
결코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즉 말씀이 없어서 곧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 인간을 죽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가정과 삶을 봅니다. 왜 죽게 생겼을까요?
외형적으로는 돈을 말하고 질병을 말하고 다른 이유들을 말하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만 해결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가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것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제일 좋아하지? 곤충 채집은 하니? 하고 묻는 일은 없고, 그 애는 몇 살이지? 형제는 몇이나 있니? 몸무게는 키는 얼마나 되니? 공부는 몇 등이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라고만 물어댄다. 어른들은 그런 숫자를 통해서만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그 창가에는 아름다운 허브 향을 내는 제라늄 꽃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라고 말하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20억 원짜리 집을 보았다고 라고 하면, 어른들은 아, 참 훌륭한 집이구나! 하고 그제야 감탄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인간적인 계산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로 바꿔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성공의 시작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미련하게도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코 기독교는 인간의 의로운 그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인 됨을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선행을 하지 못한 살인강도도 예수 공로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은혜만을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을 덮기 위하여 살인도 했습니다.
집안에 자녀들이 서로 죽이기도 하고 간음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축출하였고 아버지의 여인들을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비참히 부하의 손에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무엇이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울 왕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울에게 호감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마음이 들었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울은 언제든지 자신 인간적인 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울은 한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긴 적이 없고 끝까지 자신의 의를 변호한 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고 다윗은 하나님만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내가 의롭다 누가 의롭지 안하도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잘하고 못하고의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절실히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끝까지 자기의 의에 기준을 둔 가륫유다는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한 베드로는 복음의 사도로 귀하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없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의인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 병든 자가 필요합니다.
참으로 주님이 없이는 잠시라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할렐루야!
지난 2007년도에 세상을 떠난 미국 부동산 재벌 리오나 헴슬리라는 할머니는 자신의 애완견 트러블에게 유산으로 1200만 달러(약 140억원)를 남겼다고 합니다. 이 할머니는 헴슬리 호텔 등 많은 부동산을 소유한 부동산 재벌이었는데 손자들과 남동생에게는 조금씩 주고 자신의 애완견에게 더 많은 유산을 남김으로 애완견 트러블은 일약 거부가 되어 헴스리 할머니가 살아 있을 때에도 그 개를 개라고도 부르지 못하게 하고 공주라고 부르게 하며 반드시 호텔의 전문 요리사가 만들어준 음식만을 먹였다고 했으니 개가 평생 사람이 먹어보지도 못한 것을 먹고 사람이 평생 대접 받지 못한 대접을 받고 아마 죽어서도 명당자리 공원묘지에 넓은 평수에다가 멋있는 묘비에 다가 사랑을 주고 사랑을 하고 죽었다는 칭송하는 글을 남길 것이고 매일 매일 아름다운 꽃다발이 놓이게 될 것입니다.
이 정도면 개 팔자 상팔자요 사람 팔자 아니 내 팔자 보다 낫지 않습니까?
그 개는 과연 어떤 개이기에 그 많은 액수를 유산으로 받았을까?
AP통신에 따르면, 생전에 헴슬리는 괴팍하고 치사한 악명 높은 여인으로 소문이 나 있었기에 아무도 그녀를 다정하게 대해 주는 사람이 없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녀에게 친구로부터 선물 받은 애완견 트러블은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절대적으로 할머니께 복종하고 따름으로 할머니를 즐겁게 하고 외롭게 하지 않고 무슨 일이 있더라도 끝까지 떠나지 않고 함께 함으로 할머니의 마음을 사로잡은 것입니다.
말 못하는 개도 아무리 악명 높은 할머니의 마음에 들고 보니 자신의 유산을 손자들보다 남동생들을 제키고 많은 유산을 주었다는 말이니 누군가의 마음에 들게 한다는 것은 무엇보다도 최고의 비즈니스가 되는 일이지 않습니까?
내 인생의 최고의 비즈니스가 무엇이겠습니까? 하나님의 마음에 들게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나님이 다윗 왕이 마음에 들었다고 이렇게 증언하셨습니다.
22절 내가 이새의 아들 다윗을 만나니 내 마음에 맞는 사람이라 내 뜻을 다 이루리라 하시더니 하나님이 약속하신 대로 이 사람의 후손에서 이스라엘을 위하여 구주를 세우셨으니 곧 예수라
하나님 마음에 들어서 하나님이 하고자 하는 것을 다윗을 통하여 다 아루시겠다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을 약속하셨습니다.
다윗의 가문을 통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선물로 받는 것입니다.
한편으로는 40년 동안이나 참아 기다리며 하나님이 마음을 맞춰 보려고 했던 사울왕은 결국 하나님의 마음에 이르지 못하여 안타깝게도 뜻을 이루지 못하고 그 사울의 가문은 망하고 말았습니다.
21절 그 후에 그들이 왕을 구하거늘 하나님이 베냐민 지파 사람 기스의 아들 사울을 사십년간 주셨다가 패하시고 라고 하셨습니다.
사울왕은 그 집안이 그렇게도 잘되고 싶어 했습니다.
떠나는 사무엘을 붙잡고 제발 하나님의 복을 받고 싶다고 울며 복을 달라고 하였지만 하나님 마음 한번 싸보지 못하고 결국은 비극의 왕조가 되고 말았습니다.
블레셋과의 빌보아 전쟁에서 아들과 함께 전사를 하는데 혹은 자결을 하였다고 합니다.
이방인의 칼에 죽었다는 수치를 면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짧은 본문이지만 여기에는 분명히 패하는 사울이 있는 반면에 세우시는 다윗이 있습니다.
지는 해가 있고 뜨는 해가 있습니다.
나의 가문은 지고 있습니까? 아니면 뜨고 있습니까?
바로 그것은 하나님의 마음에 맞추면 그 가문은 뜨는 가문입니다.
지금 제 아무리 갖추었다고 해도 하나님과 삐끗되면 아무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과 호흡이 맞으면 지금 비록 힘이 들더라도 하나님이 세우시는 희망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세우시는 하나님 마음에 드는 사람은 어떤 인물입니까?
사람의 욕심과 정욕대로 일에서 벗어나야 합니다.
사람의 요구는 패망의 시작입니다. 육신의 소욕은 사망입니다.
이것은 이미 에덴동산에서 우리 조상이 경험하였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이 사는 것을 보세요 살아 갈수록 죽음입니다.
집집마다 사망의 그늘에 앉아 있습니다.
사울이 어떻게 왕이 되었기에 망하게 되었습니까?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 왕을 두고 행하는 것을 보고 이방인들의 풍습을 쫓아 세상적인 왕을 세우기를 원하였습니다.
하나님으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생각으로 세운 왕입니다.
사울은 인간적으로 호감이 가는 인물입니다.
외모가 준수하고 윤리적이고 도덕적으로 의로운 자 같아 사람들이 좋아하는 그런 인물입니다.
우리나라 정치가 때때로 망치는 이유가 윤리적 도덕적으로 인간의 요구를 충족하는 것 같은 자를 세우다가 실패를 합니다.
교회도 마찬가지라고 생각합니다.
성도가 교역자를 볼 때에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면을 요구하고 그것으로 충족하려고 합니다.
이것만이 하나님의 요구가 아닙니다.
사실 사울 왕을 볼까요?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불의한 것을 찾아보기가 쉽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사울 왕만한 사람없습니다.
처음으로 성경에 그 인물이 등장 할 때에 그는 아버지에게 효도하는 청년이었습니다.
아버지의 잃어버린 나귀를 찾아 몇날며칠 여기저기 뛰어다니고 있습니다.
인간적으로 볼 때에 윤리적으로나 도덕적으로는 흠이 될 것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무엇이 잘못되었다는 것입니까?
그는 인간적으로 반듯하게 보일지 몰라도 하나님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때때로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는 사람과 교회를 도덕적으로 윤리적으로 바라보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예수 믿는 사람들이 왜 저래 아니 장로가 아니 집사가 아니 목사가 왜 저러지 하고 판단을 합니다.
우리는 확실히 아셔야 합니다.
기독교는 윤리 도덕을 가리키는 맹자 공자를 말하는 인간적인 종교가 아닙니다.
윤리 도덕보다 더 중요한 하나님의 감ㅅ없이 주시는 은혜를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의인을 위한 종교가 아니라 죄인을 위한 종교입니다.
♬ 죄인 오라 하실 때에 날 부르소서
♬ 죄짐 맡은 우리 구주 어찌 좋은 친군지 걱정 근심 무거운 짐 우리 주께 맡기세
하나님은 하나님이 이스라엘을 통치하시기를 원하시는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인간의 윤리 도덕으로 정치하려고 합니다.
윤리 도덕으로 어찌 통치가 됩니다. 이 세상에 윤리 도덕을 완성한 자가 어디에 있습니까?
제 아무리 도를 닦아 보십시오
제 아무리 고행을 하고 평생 누워서 잠을 자지 말았다고 선이 완성이 됩니까? 아닙니다.
큰 스님이라고 하는 성철 그분도 마지막 열반 송과 그의 유언에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生平欺狂男女群(생평기광남녀군)하니 彌天罪業過須彌(미천죄업과수미)라.
活陷阿鼻恨萬端(활함아비한만단)이여 一輪吐紅掛碧山(일륜토홍괘벽산)이로다.
해석은 한평생 남녀무리를 속여 미치게 했으니 그 죄업이 하늘에 미쳐 수미산보다 더 크다
산채로 지옥 불에 떨어지니 그 한이 만 갈래나 된다 한 덩이 붉은 해가 푸른 산에 걸렸구나
운명전 깨달음의 시
석가는 원래 큰 도적이요 달마는 작은 도적이다
西天(서천)에 속이고 東土(동토)에 기만하였네 도적이여 도적이여 !
저 한없이 어리석은 남여를 속이고 눈을 뜨고 당당하게 지옥으로 들어가네
한마디 말이 끊어지니 일천성의 소리가 사라지고 한 칼을 휘두르니 만리에 송장이 즐비하다
내 죄는 산보다 높고 바다보다 깊은데 내 어찌 감당하랴.
내가 80년 동안 포교한 것은 헛것이로다.
우리는 구원이 없다. 죄 값을 해결할 자가 없기 때문이다.
딸 필히와 54년을 단절하고 살았는데 죽을 임종 시에 찾게 되었다.
필히야, 내가 잘못했다. 내 인생을 잘못 선택했다. 나는 지옥에 간다.
이들을 비판하기 위함이 아니라 인간의 수행의 수고가 이 얼마나 허무한 것임을 이야기 하고 싶은 것입니다.
사실 허무의 종교가 아닙니까? 사람의 생각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말해 줍니다.
역사적으로 모든 학자들이 인생을 논 할 때에 장래를 말 할 때에 모두가 부정적인 예만을 말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18세기의 맬더스존은 인간론에서 인간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하고 식량은 산술급수적으로 증가하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인간은 식량위기에 직면할 것이며 이것을 막기 위해서는 인구감축이 필요하다는 논리를 펼쳐 습니다. 이런 맬서스의 예언에 따라 70~80년대 한국을 포함한 여러 개발도상국, 후진국들은 인구감축정책을 펴서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둘도 많다 딸 아들 구별 말고 하나만 낳아 잘 기르자 라는 식의 구호가 잘 먹혀 들어가서 이제는 아이를 낳지 않으려고 합니다.
멜더슨이 말 할 때에 인구 10억이었는데 지금은 60-70억이지 않습니까?
결코 굶어 죽지 않았습니다. 너무 많이 먹어 탈이 나고 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일찍이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사람이 죽게 된 것은 먹을 것이 없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 즉 말씀이 없어서 곧 하나님이 배제된 삶이 인간을 죽게 만든다고 하였습니다.
저는 성도들의 가정과 삶을 봅니다. 왜 죽게 생겼을까요?
외형적으로는 돈을 말하고 질병을 말하고 다른 이유들을 말하지만 사실은 이 모든 것을 인간적으로만 해결을 보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생텍쥐페리의 어린왕자에 어른들은 숫자를 좋아한다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자녀가 새로 사귄 친구 이야기를 하면, 어른들은 가장 중요한 것 그 애 목소리는 어떠니? 어떤 놀이를 제일 좋아하지? 곤충 채집은 하니? 하고 묻는 일은 없고, 그 애는 몇 살이지? 형제는 몇이나 있니? 몸무게는 키는 얼마나 되니? 공부는 몇 등이니 아버지 수입은 얼마야? 라고만 물어댄다. 어른들은 그런 숫자를 통해서만 그 애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만약 어른들에게 그 창가에는 아름다운 허브 향을 내는 제라늄 꽃이 피어 있고 지붕에는 비둘기들이 놀고 있는 아름다운 붉은 벽돌집을 보았다라고 말하면 어떤 집인지 상상하지 못한다. 그러나 20억 원짜리 집을 보았다고 라고 하면, 어른들은 아, 참 훌륭한 집이구나! 하고 그제야 감탄을 한다고 합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너무 인간적인 계산으로 굳어져 버렸습니다.
그래서 망하게 된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요구로 바꿔져야 합니다. 하나님의 요구는 성공의 시작입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상당히 이해가 되지 않습니다.
인간적으로 보면 예수 믿는 사람들을 어리석게 보기도 합니다.
때로는 미련하게도 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고린도전서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고전1:26-29 형제들아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 육체를 따라 지혜로운 자가 많지 아니하며 능한 자가 많지 아니하며 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세상의 미련한 것들을 택하사 지혜 있는 자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고 세상의 약한 것들을 택하사 강한 것들을 부끄럽게 하려 하시며 하나님께서 세상의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사 있는 것들을 폐하려 하시나니 이는 아무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하심이라
결코 기독교는 인간의 의로운 그 무엇을 나타내려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죄인 됨을 약함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값없이 주시는 죄의 용서를 받고 구원을 받으라고 하십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한 번도 선행을 하지 못한 살인강도도 예수 공로로 지옥이 아닌 천국에 가는 것입니다.
우리 가운데 그런 경험을 하지 않습니까?
예수님께로 오기만 하면 묻지도 않고 따지지도 않고 그냥 은혜만을 주신다는 것 말입니다.
다윗은 하나님을 필요로 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그는 간음죄를 지었습니다. 간음을 덮기 위하여 살인도 했습니다.
집안에 자녀들이 서로 죽이기도 하고 간음을 행하기도 하였습니다.
심지어 아들이 아버지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쿠데타를 일으켜 아버지를 축출하였고 아버지의 여인들을 간음했습니다.
그리고 그 아들은 비참히 부하의 손에 살해를 당하였습니다.
무엇이 인간적으로 윤리적으로 도덕적으로 사울 왕보다 낫다고 할 수 있습니까?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누구나 사울에게 호감이 갑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다윗에게 마음이 들었고 하였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사울은 언제든지 자신 인간적인 의만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은 하나님만이 있을 뿐입니다.
사울은 한 번도 자신이 죄인이라고 여긴 적이 없고 끝까지 자신의 의를 변호한 자입니다.
그러나 다윗은 자신이 하나님 앞에 죄인임을 고백하였습니다.
사울은 자신의 의를 드러내기 위한 삶이었고 다윗은 하나님만이 나타나기를 원했습니다.
이것이 다릅니다.
내가 의롭다 누가 의롭지 안하도가 절대로 하나님 앞에 잘하고 못하고의 평가의 대상이 아닙니다.
누가 하나님을 원하고 필요로 하는 가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시간에 나의 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니라 내가 절실히 예수님이 필요로 하는 자가 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런 사람 주님이 사용하십니다.
주의 뜻을 이루십니다.
끝까지 자기의 의에 기준을 둔 가륫유다는 자살을 할 수 밖에 없었지만 자신이 죄인임을 인식한 베드로는 복음의 사도로 귀하게 사용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하나님은 사람을 찾습니다.
자신의 의를 드러내는 자가 아니라 자신은 없고 하나님만 드러내는 자를 찾으십니다.
이런 사람 하나님의 마음에 드는 사람입니다.
의인 필요 없습니다. 죄인이 구원을 받아야 합니다.
건강한 자 의원이 필요 없습니다. 병든 자가 필요합니다.
참으로 주님이 없이는 잠시라도 살 수가 없습니다 하는 자를 하나님은 사용하십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