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 말고 약속을 믿고 나아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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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22회 작성일 2010-04-24 12: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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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수기 14:1-10 두려워 말고 약속을 믿고 나아갑시다.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가면 금문교라는 다리가 있는데 다리는 양쪽을 두 기둥에다 매달아 놓고 중앙에 아무것도 없이 그냥 물 위에 떠 있습니다. 건축 당시 1930년대에 세계에서 가장 높고 긴 다리입니다. 그 다리를 건설할 때 위험 요소가 너무 많아 기술자들의 마음은 항상 불안했다고 합니다. 일을 하다가 밑을 보면 현기증이 일어나는 바람에 불안과 공포로 많은 인부들이 추락해 바닷속에 빠졌습니다. 시 당국은 기술자들의 안전을 위해 여러 방법을 간구 중에 그중 하나가 공사 현장 밑에 철사로 만든 그물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렇게 하자 그물 위로 떨어지는 기술자들이 없었는데 그것은 안전망 때문에 설상 추락해도 바닷속으로 떨어지지 않을 것이라는 평안함 때문이었습니다.
안전그물이 그들에게 믿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세상의 삶도 마찬가지입니다.
세상에서 무엇인가 기댈 수 있는 것이 없는 사람은 공포와 불안을 쫓아내지 못합니다.
성도들의 축복은 하나님이 내 삶을 다스리시고 나를 인도하시며 나와 동행하신다는 믿음이 나의 인생의 안전그물입니다. 할렐루야!
시125:1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는 시온 산이 흔들리지 아니하고 영원히 있음 같도다
그 하나님을 믿는 사람은 마음의 불안과 고통 속에서 벗어나게 됩니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내일의 문제를 놓고 걱정하지 않습니다.
이런 믿음의 확신을 가질 때 내 인생을 용기 있게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본문에서도 그렇습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백성들을 인도하여 가나안의 축복의 땅으로 들어가기 위하여 각 지파에서 한명씩 선정하여 가나안을 정탐하고 오도록 했습니다.
이들은 자유의 몸이 되었지만 이 축복의 땅을 바라 볼 때에 평안하고 안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래서 각 지파의 지도자 12명이 약 40일 동안 가나안을 돌아보고 와서 과연 이 땅에 들어 갈 수 있을까?
그리고 잘 살 수 있을까?
돌아온 이들의 보고대회를 열었는데 보고 내용은 5대 1로 부정적이었습니다.
과연 겁을 먹고 실망이었습니다.
13:31-33절 우리는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칠 수 없으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고,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라. 우리 스스로 보기에도 우리는 메뚜기와 같은 존재이니, 그들이 보기에도 그와 같을 것이니라.
자타(自他)가 인정 할 정도지 아니하느냐? 는 것입니다.
이들의 믿음이 없는 보고가 더욱이 믿음이 없는 이스라엘 사람들을 겁을 주기가 딱 좋았습니다.
14:1절 밤새도록 통곡하였는데 전혀 울 일이 아니고 기뻐해야 할 일입니다.
2절 죽었으면 좋겠다 라고 하고 결코 이 문제 때문에 죽지 않는데 잘 살 수 있는데
3절 애굽으로 돌아가자고 하고 종살이 하는데서 구원시켰더니 다시 종이 되겠다고 하고 세상적으로 살겠다고 합니다.
10절 그것도 부족하여 자신들을 인도하여낸 모세를 돌로 쳐서 죽이려고 까지 하니 모세가 죽일 자입니까?
아니 자신들을 위하여 희생한 모세에게 백번 감사해야 할 일이지 않습니까?
하나님을 향한 믿음이 없어지니깐 상상도 못할 생각지도 못할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게 아닌데 옷을 찢으면서 소리를 치면서 2명의 정탐꾼은 믿음의 소리를 합니다.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라.
그런데 이 말이 전혀 먹혀들지가 않습니다.
여호와를 거역하지 말라 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잇감이다 밥이라고 해도 돌로 치려고 합니다.
이같이 사람이 믿음이 떨어지면 어떤 현상이 일어나는 줄 아십니까?
만사에 부정적이고 비판적인 사람이 됩니다. 특히 하나님에 관하여 더욱 그렇게 되는 것입니다.
믿음이 없는 이 세대는 참으로 부정적이고 비판적입니다.
사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내게 주신 은혜로 말미암아 너희 각 사람에게 말하노니 마땅히 생각할 그 이상의 생각을 품지 말고 오직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나누어 주신 믿음의 분량대로 지혜롭게 생각하라
그러니 이들 역시 부정적이며 비관적인 보고에 귀를 기우리고 받아 들였습니다.
우리의 삶은 긍정적인 말보다 부정적인 말에 더 큰 영향을 받습니다.
나의 입술을 보십시오 부정적인 말을 잘 합니까? 긍정하는 말을 더 잘합니까?
부정적인 말과 긍정적인 말이 우리에게 영향을 주는 비율은 5대1입니다.
부정적인 말은 긍정적인 말 보다 5배 이상의 힘을 갖고 나를 뒤흔듭니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낙관적인 말은 기껏해야 하나 정도의 힘과 영향력을 줄 수 있을 뿐입니다.
그래서 부정적인 말, 비난하는 말, 잘못된 말에 대해서 끊임없이 귀를 기울이고, 긍정적이며 믿음적인 말에 대해서는 귀를 닫아놓은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삶은 부정적인 것을 너무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됩니다.
그래서 삶과 미래에 긍정하고 자기의 삶을 바꾸려면 다른 때보다 5배 이상의 노력이 필요합니다.
기도하는 것이 무엇입니까? 부정적인 것을 긍정적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내 삶을 내 인격을 내 모든 것들을 긍정으로 바꾸는 것입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함이 없느니라
소경된 자가 부모의 죄도 아니요 그 자의 잘못도 아니요
하나님의 하시는 일이 무엇인가를 나타내려 함이니라 할렐루야!
역사이래로 세상은 부정적인 자의 말대로 되지 아니하고 긍정적인 자들의 말대로 이루어졌습니다.
부정적인 자의 말대로라면 벌써 세상은 벌써 몇 번이나 멸망하고 말았을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이것과 같습니다.
부정적인 생각, 불신앙적인 생각, 비관적인 생각으로 신앙생활을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교회 비판하고 목사 비판하고 앞장서서 일하는 직분 자들 비판하고 무엇이든지 부정적으로 보며 이런 식으로 신앙 생활하지 않습니까?
그리고는 자기 마음대로 말해 버리고 기분대로 행동해 버리고 하는 자입니다.
그러니 이런 사람은 말에 책임도 없고 의무도 없고 교회가 어떻게 되든지 모르겠다 하나님의 영광이 어떻게 되든지 나와 무슨 상관이야
나만 살고 보면 되지 내 배만 부르면 되지 합니다.
그러니 신경질 적이요 혈기적이요 다툼을 일으키고 말끝 마다 죽겠다고 하든지 아니면 죽여 버리겠다고 다른 사람을 향하여 돌을 던집니다.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은혜를 기다릴 수 있겠습니까?
믿음적이지 아닌 곳에는 하나님의 역사가 없고 사탄이 장난을 치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믿음의 신앙생활을 하는 사람은 그렇지 않습니다.
대략 교회에서도 진정한 일군은 10-20%가 믿음으로 일하는 자들입니다.
본문에도 보면 지도자라는 이름을 가진 자 열 명 중에 한두 명 정도가 주의 교회를 이끌어 나갑니다.
교회 직분을 가졌다고 다 일하는 것 아닙니다. 믿음이 직분과 상관이 없이 일을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주어진 일들을 믿음으로 감당하려고 합니다.
교회는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세워져 갑니다.
우리 교회를 가만히 보십시오 부정적인 자 항상 바라 볼 때에 불안합니다. 언제 어떻게 튈지를 모릅니다.
믿음의 긍정적인 자들로 교회가 유지되는 것입니다. 이들을 바라 볼 때에 든든합니다.
결국 가나안은 이런 사람들을 위하여 예비 되어 있습니다.
같은 교실에서 같은 선생 밑에서 함께 공부한다고 다 훌륭한 인물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똑같은 하나님을 섬기더라도 같은 교회 안이라도 은혜를 다 받는 것은 아닙니다.
오직 믿음으로 행할 때에 역사는 일어납니다.
세상은 언제나 두려움을 줍니다. 세상은 믿음이 떨어지게 만들어 세상적으로 돌아가게 만듭니다.
성도 중에 믿음이 떨어지는 소리가 들립니다. 어떤 성도는 믿음이 축적 되어 가는 것을 봅니다.
이스라엘의 10명의 지도자들과 이에 동요했던 백성들의 문제는 무엇일까요?
그들은 자기 자신에 대한 믿음의 자존감이 없었습니다.
하나님이 그들을 너무나 사랑하셔서 종 되었던 애굽 땅에서 기적적으로 구원하여 자유와 해방을 향해 여기까지 오게 하셨다는 것에 대한 자부심이 없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 믿고 구원받은 것에 대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습니까?
나 같은 사람에게 믿음을 선물로 주신 것에 대하여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것을 무엇으로도 바꾸지 말아야 하지 않습니까? 죽음이라도 말입니다.
돈 몇 푼에 바꾸고 힘들다고 팔아먹고 기분 나쁘다고 믿음 팽개치고 하면 됩니까?
신앙생활을 가지면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의 자부심이 사라지면 부정적인 생각이 내 삶 전체를 뒤흔듭니다.
그러면 망합니다. 세상의 종으로 다시 돌아갑니다.
개가 토한 것을 다시 먹고 돼지가 그 누운 더러운 곳에 다시 눕습니다.
이들은 너무 오랫동안 애굽에서 노예생활에 익숙해 있어서 진정한 자발성이 없는 세상에 속박을 받는 종의 모습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믿음적인 꿈과 비전이 맞지 않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면 자기 자리를 보전하며 지금 있는 곳에서 만족할 것인가를 생각하는 현실 안주적인 사고에 붙잡혀 있었습니다.
세상에 익숙한 사고로부터 벗어날 생각을 하지 못했습니다.
뒤를 돌아보지 말고 옛것은 잊어버리고 해야 하지 않습니까?
그 때 그들의 사고는 과거 지향적이 되고, 믿음적인 미래에 대한 도전의식이 결여되었습니다.
과거로 되돌아가려고 했기에 이렇게 표현합니다.
죽는 것이 더 낮겠다고 함부로 말합니다.
죽는 것이 두려워서 믿음으로 가나안 땅으로 나아가지 못하는 자들이 죽는 것이 낫다고 말하니 그 말이 신빙성이 있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적으로 살기 싫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으로 돌아가겠다는 것입니다.
세상일 때문에 죽겠다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것은 비성경적이며 비 신앙적입니다.
죽을 수 있는 경우는 주를 위한 일 밖에 없습니다.
세상일 때문에 죽겠다는 감정을 가진다면 그것은 내가 갖고 있는 많은 가능성을 다 무너뜨리는 것입니다.
피곤하면 피곤해 죽겠다라고 말하지 말고 그냥 피곤하다고 하세요.
괴로우면 괴로워 죽겠다 고 말하지 말고 그냥 괴롭다고 하세요.
배고프면 배고파 죽겠다고 말하지 말고 그냥 배고프다고 하세요.
내리가 갖고 있는 죽음 대한 생각은 알게 모르게 나의 모든 사고에 영향을 미쳐 머리끝에서부터 발끝까지 나를 부정적 사람으로 만듭니다.
노가미 히로유키라는 사람이 미래를 바꾸는 습관이라는 책에서 이렇게 말합니다.
과거에 무언가를 성취한 경험이 있다면 그것은 자신감에 재료가 되고, 큰 잘못이나 실패를 했다면 그것은 반성의 자료가 된다. 좋아도 나빠도 과거는 학습의 재료이며 그 이외엔 아무것도 아니다. 단순하게 질질 끌기만 하는 과거라면 깨끗하게 내버리라.
미래를 사는데 과거가 어떠했는지는 문제가 되지 않는다.
미래를 살 때 과거의 경험을 어떻게 활용할 수 있는지, 그 재료로 과거가 존재할 뿐이다. 만일 그래도 문제가 있다면 과거에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당신 자신에게 문제가 있다.
과거가 어떠했든 당신은 과거를 토대로 하여 미래를 얼마든지 다시 창조할 수 있다.
끊임없이 과거에 집착하여 이스라엘 백성들처럼 과거로 돌아갔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면 거기에는 하나님의 약속이 들어갈 자리가 없습니다.
믿음이 없으면 패배주의적인 발상을 하고 있습니다.
과거 지향적인 사람이 되면 패배주의적인 발상을 하게 되어 더 이상 가능성을 생각하지 않습니다.
체념 상태에 빠져들어 더 이상 인생에 가망성이 없는 끝이라고 말합니다.
빨리 믿음으로 일어서야 합니다.
윈스턴 처칠이 영국 수상으로 있을 당시 제2차 세계 대전의 위기를 겪으면서 히틀러의 위협으로 영국 국민들은 치욕적인 패배의 위기에 빠져들었습니다. 영국인들이 존재의 위협 속에서 독일에게 패망한다고 절망감을 느끼고 있을 때, 처칠은 어떻게 하면 영국 백성들의 패배주의를 극복해 줄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혼신의 힘을 다해 그들에게 영웅심을 불러 일으켜 주며 1940년 6월 4일 하원 연설에서 이렇게 연설합니다.
우리는 포기하지도 좌절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끝까지 진격하여 프랑스 전선에서 싸울 것입니다. 바다와 하늘에서 싸울 것입니다. 충천하는 사기와 영양으로 공중전을 펼칠 것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루더라도 조국을 지켜낼 것입니다. 우리는 해변에서도 싸우고, 상륙지점에서도 싸울 것이며, 들판에서, 시가지에서, 언덕에서도 싸울 것입니다. 우리는 결코 항복하지 않을 것입니다. 불굴의 용기만이 우리의 유일한 방패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단결해야 합니다. 용기를 잃지 말아야 합니다.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영국인들은 이런 처칠의 연설을 들으면서 그들이 갖고 있었던 패배주의적 사고를 극복합니다.
그들은 처칠을 믿었고 그의 말대로 역사가 진행되기를 기대했습니다. 그 결과 영국이 연합군과 합하여 승리했고 독일이 패망했습니다.
한 국가의 단위뿐만 아니라 개인의 인생에도 이런 위기가 다가옵니다.
더 이상 하고 싶지 않다, 이제 다 망했구나, 모든 가능성은 다 끝났다는 고통을 받을 때가 있습니다.
그때 누군가의 도전하는 말, 사랑으로 격려하는 말이 필요합니다. 믿음적인 말이 필요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심히 아름다운 땅 약속의 땅은 하나님이 인도하십니다.
믿으십시오 그러나 약속은 세상을 이깁니다. 믿음에 매력을 느낍니다.
남들이 No라고 할 때 Yes라고 하겠습니다. 남들이 하는 대로 생각 없이 따라가지 않겠다는 의지입니다.
오늘의 여호수아와 갈렙은 굉장히 용기 있는 사람입니다. 온 회중이 낙심하다 못해 반란을 일으킵니다. 이때 자신이 본 아름다운 땅과 하나님의 섭리를 이야기 하며 그들에게 죽을 때 죽더라도 하나님의 뜻에 따라 저 땅을 정복하자고 외칩니다.
이때 많은 군중이 그들을 죽이려고 돌을 듭니다. 하지만 멈추지 않습니다. 계속 그들에게 어리석음을 주장합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차려놓은 밥상을 기쁨으로 받자고 이야기 합니다.
진리를 가지고 계십니까? 그런데 왜 주저하십니까? 지금은 시기가 아니라구요? 그러면 언제가 그 때입니까? 진리가 선포되는 그 순간이 바로 세상이 변화되는 순간입니다.
가나안은 내 가까이 다가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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