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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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821회 작성일 2010-04-24 12: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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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12:12-16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찬양합시다.
유대인들에게는 3대 명절이 있습니다.
맥추절이라고 하는 가나안 땅에 들어와서 첫 농사 지어 첫 열매를 거둔 것에 대한 감사로 입니다.
추수 감사절이라고 하는 수장절은 마지막 곡식을 거두어 창고에 드리는 것으로 성도들의 온전한 구원을 말하기도 합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나오는 명절인 유월절 절기입니다.
애굽땅에서 종살이 하다가 모세를 통하여 430년 만에 기적같이 해방을 맞이하였습니다.
이들이 해방을 얻게 된 것은 10가지의 재앙으로 기적을 보여 주어도 도대체 이스라엘 백성을 해방 할 기미를 보이지 않고 보내 주겠다고 하고 재앙을 철회하면 거짓말만 하는 것입니다.
이제 마지막으로 죽음의 재앙을 집집마다 보내기로 하였는데 그 죽음을 면 할 수 있는 방법을 내었는데 어린양을 잡아 그 피를 집 문설주에 바르면 그 피를 볼 때에 죽음의 재앙이 넘어 가겠다고 약속을 하였는데 이 말씀에 순종하고 양을 잡아 그 피를 문설주에 바른 집들은 다 죽음에서 구원을 받았지만 그렇지 않는 집은 집집마다 장자들이 다 죽임을 당하였는데 바로 왕의 장자도 죽임을 당하였습니다.
이렇게 하여 애굽의 바로 왕은 죽음을 맛보고서는 겁이 나서 이스라엘을 해방시켜 주었습니다.
이 해방의 날을 기념한 것이 유월(踰月)절입니다.
죽음의 재앙이 넘어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은 유월절기 때에는 예루살렘 성전에 모여 예배를 드렸습니다.
신16:16-17 너의 가운데 모든 남자는 일 년에 세 번 곧 무교절과 칠칠절과 초막절에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택하신 곳에서 여호와를 뵈옵되 빈손으로 여호와를 뵈옵지 말고 각 사람이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주신 복을 따라 그 힘대로 드릴지니라
12살 이상의 남자는 모두 하나님 성전이 있는 예루살렘에 올라가야 합니다.
예수님도 이 명절에는 12살 때부터 어머니를 따라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셨습니다.
눅2:41-42 그의 부모가 해마다 유월절이 되면 예루살렘으로 가더니 예수께서 열두 살 되었을 때에 그들이 이 절기의 관례를 따라 올라갔다가
본문에서 역시 예수님이 이 명절날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장면이 묘사되어 있는데 다른 때와는 다른 장면이 연출 되었습니다.
예수님 당시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올라오는 사람이 요세푸스라는 역사가가 기록한 역사기록에 보면 270만 명이 모였다고 하니 대단합니다. 예루살렘이 그리 큰 성이 아닙니다. 지금도 인구가 70만 밖에 안 됩니다.
유월절에 예루살렘에서 사람들이 잡는 희생의 양이 256,500 마리였습니다.
이렇게 많은 사람이 모여 있고 어마어마한 제사가 드려지는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 유월절에 예수님께서 오늘따라 나귀새끼 아직 멍에를 메지 않는 것을 타시고 뒤뚱뒤뚱 하시며 예루살렘에 들어가시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사람들은 예수님이 가시는 길에 자기들의 옷을 벗어 깔았고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고 호산나하며 예수님을 왕으로 환영하는 모습이 연출된 것입니다.
호산나는 지금 당장 구원하소서 라는 말입니다.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환영하는 것은 전쟁에 나가서 승리하고 돌아온 정복자 왕에게 행하는 것입니다.
우승자에게 씌우는 월계관이 이 종려가지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왕으로 여겨 종려나무 가지를 흔들며 호산나를 외치는 이스라엘 사람들의 구원의 요구가 있었습니다.
예수님이 왕으로 승리자요, 정복자가 되어 이스라엘을 고통에서 건져달라는 것입니다.
이들이 자신의 처한 형편에서 구원함을 받아야만 했습니다.
로마의 식민지로부터 이스라엘 나라를 해방시키는 다윗 왕과 같은 정치적인 왕이 되어 달라고 요구입니다.
이스라엘 나라 사람들로 잘 살게 하는 솔로몬과 같은 경제적인 왕이 되라고 소리를 칩니다.
질병과 기타 어려움에서 벗어나게 해 달라는 간청입니다.
왜냐하면 이들은 예수님에 대한 경험과 체험도 있었고 소식도 들었기 때문입니다.
아무래도 외국에서 온 사람들 보다는 지리적으로 가까운 북부 갈릴리 지역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나사렛 예수의 소문을 익히 듣고 본 사람들입니다.
또, 베다니를 거쳐서 온 사람들도 많이 있었는데 며칠 전 베다니에서 죽었던 나사로가 살아난 기적에 대한 소문이 온 예루살렘에 삽시간에 퍼졌습니다.
며칠 전에 죽었던 나사로를 살린 예수님이 지금 예루살렘으로 오고 있음에 사람들은 놀라움과 설렘으로 예수님을 기다렸습니다.
구원함을 받아야 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기 때문입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해서 종려가지를 흔들었습니다.
사람들은 맞으러 나가 외쳤다고 합니다. 자신들의 겉옷을 벗어 길에다 깔았습니다.
아주 역동적인 장면이 연출되었습니다. 우리말로 하면 맞으러 급히 뛰어나갔습니다.
목이 쉬도록 고함을 쳤습니다. 사람들은 호산나라고 외쳤습니다.
내가 구하오니, 지금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호산나는 시 118:25-26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또,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라고 불렀습니다.
구원의 근본은 죄에서의 구원입니다. 영혼의 구원은 모든 것에서 구원함을 얻게 됩니다.
그러나 이들은 예수께 구원을 간청했지만 자신의 죄 사함을 받을 구원은 생각하지 못하였습니다.
예수님은 여러분의 육신적인 구원보다 더 중요한 영혼의 구원을 주시는 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영혼이 잘되면 범사가 잘되고 강건하게 될 것입니다.
구원의 주라는 증거로 죽은 나사로도 살리시고 보리떡 2개와 물고기 다섯 마리로 5천명을 먹이시고 더 나아가서 온갖 질명을 낫게도 하시고 귀신들린 자를 깨끗하게도 한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종려 주일에 구원의 예수님을 찬양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만약에 내가 찬양하지 않으면 돌들을 들어서도 예수님을 찬양하게 하신다고 하셨습니다.
눅19:20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너희에게 말하노니 만일 이 사람들이 침묵하면 돌들이 소리 지르리라 하시니라
이토록 예수님이 왜 찬양을 받으셔야 합니까? 절대 주권자이십니다.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이 애굽에서 해방되는 이 유월절에 예루살렘에 들어오시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구원은 세상의 다른 이로서의 구원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구원이심을 알려 주시기 위함입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이 애굽의 종살이에서 벗어난 것은 전쟁에 이긴 군대의 힘이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구원하심에 있다.
시33:16-20 많은 군대로 구원 얻은 왕이 없으며 용사가 힘이 세어도 스스로 구원하지 못하는도다 구원하는 데에 군마는 헛되며 군대가 많다 하여도 능히 구하지 못하는도다 여호와는 그를 경외하는 자 곧 그의 인자하심을 바라는 자를 살피사 그들의 영혼을 사망에서 건지시며 그들이 굶주릴 때에 그들을 살리시는도다 우리 영혼이 여호와를 바람이여 그는 우리의 도움과 방패시로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원수 마귀는 어찌하던 사람들이 구주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힘입지 못하게 하려고 해방을 하고 있습니다.
마귀는 때때로 유혹을 하고, 때로는 위협을 하며, 어떤 때는 무지막지하게 고통을 가합니다.
의심을 불러 일으켜서 흔들리게 합니다.
그렇게 방법은 다르지만 목적은 한 가지이니 구주 예수를 못 믿게 하려는 것이요, 믿는 자까지도 넘어지게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아까운 세월을 허송하게 만들고, 나의 재능을 썩게 만들며, 해야 할 일을 하지 못하게 합니다.
성도는 구원은 주께 있음을 믿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절대 주권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주를 찬송해야 함은 겸손하게 이루어 주셨습니다.
소히 아무 것도 요구하시지 않으시고 자신이 친히 그 값을 치르셨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은 고난을 받으시고 끝내는 십자가에 달려 죽으시고 무덤과 음부까지 내려갔습니다.
가장 처한 곳 멸시 받는 곳까지 가장 저주 받는 곳까지 가셨습니다.그렇지만, 예수님은 겸손과 낮아짐과 섬김을 통해 구원의 역사를 이루어 내셨습니다.
기독교의 파워는 세상의 기준과 다릅니다. 돈과 권력이 아닙니다.
오히려 낮아지고 섬김으로 리더십이 생깁니다. 예수님은 폭군이 아니십니다.
꺼져가는 등불도 꺼지 않으시고 상한 갈대도 꺾지 않으시는 온유와 사랑이 많으신 평강의 왕이십니다.
14절 죽은 사람을 살리시는 예수님을 목격한 사람들, 그 소문을 들은 많은 사람들이 열렬하게 환영을 하는 가운데 예수님께서 예루살렘 성에 들어오시는데, 성경에 기록되기를 예수님께서는 한 어린 나귀를 타고 계셨다 했습니다.
거기 있던 환영군중들은 아무도 예수님께서 왜 하필 어린 나귀 새끼를 타고 계신지 몰랐습니다.
예수님께서 시키시는 대로 어린 나귀 새끼를 구해왔던 제자들조차 왜 하필 어린 나귀 새끼인지 궁금하게 여기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요한은 나중에 예수님께서 영광을 얻으신 후에야 즉 부활과 승천, 오순절 성령강림 등을 경험한 후, 예수님께서 구세주이심을 깨달은 후에야, 어린 나귀를 탄 평화의 왕으로 오시겠다는 스가랴 9:9에 있는 예언,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는 말씀대로 된 것임을 깨달았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렇게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오신 것이, 알고 보니, 이미 수백 년 전에 예언되었던 일이었습니다.
예수님은 메시아 예언의 성취로 오신 분이요,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고난 받는 종의 모습으로 수난을 당하시고, 다시 부활하셔서 영원히 믿는 자들의 구주가 되신 것도 하나님께서 여러 선지자들을 통하여 조금씩 조금씩 밝혀 주셨던 메시야 예언대로 된 것입니다.
세상은 그저 우연히 그렇게 대충 흘러가는 것 같지만, 실상은 모든 것들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계획과 뜻에 의해 다스려지고 있음을 우리는 알아야 합니다.
여러분, 믿음대로 됩니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것들의 실상입니다.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입니다.
말씀은 그대로 이루어집니다. 누가 뭐래도 말씀대로 사셔야 합니다.
이 자리에 예수님은 멸망에 허덕이는 나에게 구원주로 오셨습니다.
예수님은 결코 다른 일을 하시지 않습니다. 아무도 판단하거나 정죄하거나 멸망을 하시지 않습니다.
왜요 그 이름 자체가 그 별명이 구주이십니다. 구주란 말은 구해주시는 주라는 뜻입니다.
사람이 물에 빠졌을 때에 옆에서 보고 수영하고 나오라고 하지 않습니다.
수영 방법을 설명하시지도 않습니다. 직접 오셔서 건져 주시는 분이십니다.
세상에서는 말과 교훈을 하는 자들이 참으로 많이 있습니다.
별별 철학을 말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의롭다고 합니다. 사람들이 의롭다고 추앙을 합니다.
추앙을 받기를 원합니다. 그러나 이들은 아무도 구원을 해 주지 못합니다.
예수님은 좋은 사상과 교훈을 남겼거나 몸소 그 교훈을 실천하며 살다가 간 훌륭한 사상가나 스승, 정치가가 아닙니다.
좋은 얘기, 옳은 얘기 많이 해 주고 그 얘기를 따라 살면 좋다고 말하는 분이 아니라, 지금 여기에서 살고 있는 나를 직접 손을 내밀어 구해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인류 역사에 좋은 교훈과 사상을 남긴 분들은 많습니다만, 위기의 현장에 직접 오셔서 구해주시는 분은 오직 예수님 한 분뿐입니다.
무너진 기업, 더럽혀진 인격, 꼬일 대로 꼬인 인생, 병든 육신, 깨어진 행복에 대하여 교훈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직접 오셔서 다시 일으키시고 정결하게 하시며 형통의 길을 여실뿐만 아니라 치료하여 주시고 행복을 재건하여 주시는 분이 바로 예수님이십니다.
기독교 신앙은 예수님의 훈계와 교훈만을 연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나를 구해주시는 주님을 믿고, 그 주님을 불러 찾으며, 오신 주님을 의지하여 모든 악과 고통에서 건짐을 받는 것입니다.
울어도 참아도 힘써도 인간적으로 별별 짓을 다해도 구원이 되지 않습니다.
그냥 믿으면 구원입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네가 잘하면 복주께 이게 무슨 복음이 됩니까?
의인을 부르시지 않으셨습니다. 죄인을 불러 구원하시기를 좋아하십니다. 할렐루야!
사65:1-2 나는 나를 구하지 아니하던 자에게 물음을 받았으며 나를 찾지 아니하던 자에게 찾아냄이 되었으며 내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던 나라에 내가 여기 있노라 내가 여기 있노라 하였노라 내가 종일 손을 펴서 자기 생각을 따라 옳지 않은 길을 걸어가는 패역한 백성들을 불렀나니
그러므로 나가 가진 조건으로 구원을 얻을 수 없지만 예수라는 그 이름으로 얼마든지 구원을 받게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게 복음입니다.
그 주님께서 지금도 이 시간도 구원이라는 주제를 가지시고 다스리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계 각지에 흩어져 사는 유대인들이 유월절을 맞이하여 예루살렘 성전을 방문하게 되었는데, 때마침 예수님이 예루살렘 성으로 들어온다는 소문이 퍼져나갔습니다.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기 위하여 몰려들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맞으러 나간 이유는 사람들마다 달랐습니다.
어떤 부류는 어떻게 죽일까?를 생각하며 그 자리에 나갔고, 어떤 부류는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을 이용하여 유익을 얻어볼까?를 생각하며 그 자리에 있었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나사로가 부활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하면 나도 영원한 부활에 동참할 수 있을까?를 생각하며 예수님을 환영하였습니다.
종려주일이라는 환영인파들이 손에 종려나무 가지를 꺾어 흔들었다고 해서 종려주일이란 이름이 붙었습니다.
종려나무는 풍요와 번영(시92,12), 아름다움(아7,7-8), 기쁨(레23,40)을 상징하는 나무입니다.
그래서 기독교 문화권 세계에서는 이 종려나무가 가지가 평화와 번영의 의미로 마크에 많이 쓰이는데 그 대표적인 것이 유엔마크입니다.
호산나, 이스라엘의 왕이여 라는 말은 왕이시여 우리를 구해주소서라는 뜻입니다.
이번 종려주일은 내가 구주를 우리가 알고 그 분을 불러 나를 구원해 달라고 요청해야 한다는 것을 깨닫게 하는 날입니다.
환난 당한 당신에게는 구주가 계십니다.
도와주시려고 서서 기다리시는 예수님을 찾을 생각은 하지 않고 무슨 비책이 있나 싶어 찾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을 버리고 지금 즉시 부르짖어 구주를 찾아야 합니다.
이번 주간은 고난을 생각하기보다는 고난을 통하여 구원을 이루신 주의 고난이 헛되지 않도록 주의 구원으로 채워지는 한 주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한 손에 종려가지를 들고 한 손으로는 겉옷을 깔고 겸손하게 그리고는 엎드려 호산나 하고 기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주님을 뜨겁게 찬양하며 간절히 사모함으로 종려주일에 부어주신 축복을 함께 공유할 수 있는 복된 심령들 되시기를 축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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