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나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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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69회 작성일 2010-04-24 12:58본문
고린도전서15:55-58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復活) 나의 승리
일생 동안 실패의 경험이 전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란 하는 일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게 되는 일이니 실패했다고 지나치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 재벌이 쓴 책의 제목이 실패는 있지만 좌절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패로 인한 손실이나 고통과 상처가 심각한 것을 패배라고 합니다.
패배를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육체적 패배와 영적 패배입니다.
육적 패배란 인간관계에서의 경쟁과 다툼에서 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패배를 맛보지 않으려면 경쟁이나 다툼이 없어야 하는데 인간사회에서는 이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실패와 패배 사이에서 힘들어 하지 않습니까?
실패한 인간 패배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적 패배는 육적 패배 보다 더욱 큰 피해를 가져다줍니다.
영적 패배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면할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집니다.
이는 죄와 마귀와 사망에 대한 패배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것으로 그 영향아래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패배자가 되어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노릇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적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면 패배자의 종말은 비참합니다.
멸망에 이르고 지옥형벌에 처하는 것입니다.
사실 육적인 패배의식도 영적인 패배로 인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내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강건하고 범사가 형통함을 받습니다.
영적 패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운명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은 절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철저히 패배자가 된 인생을 완전히 승리자가 되게 하여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뀌게 됩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자유하십니까?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까?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히2:15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히2:16 이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가 마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눅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할렐루야!
인류 역사이래로 다시 살아났다는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혹시 어떻게 하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있어도 다시 죽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자가 없습니다. 죽음을 영원히 도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죽음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승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었습니다.
사망이라는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왕 노릇 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할렐루야!
한 기독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가 직장에서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메카를 순례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이슬람의 율법을 어겼다고 한 여성의 코를 잘라버리고 귀를 잘라버리고 심지어는 불을 태워 화형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메카에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모하멧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기독인이 대답하기를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는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면 사망이 왜 찾아 왔습니까?
죄의 값이 사망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찾아옵니다.
56절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이 해결 받지 못하면 죄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사망은 죄를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죄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죄를 지으면 벌을 받지 않습니까? 벌금부터 시작하여 사형도 받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죄를 지었음으로 그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망이 이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들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집행되면 일반적으로 지옥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그 단어는 금기시되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기에 말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갈수록 사람 중심으로 사람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맞추며 타협하고 훼손하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라도 사람 본연의 모습과 필요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000년 전이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들어야 했던 말을 지금의 사람도 들어야 합니다.
과학이 좀 더 발달한 시대에 산다고 해서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적인 사람됨이나 필요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 앞에 아무도 꼼짝없이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바르게 살아 보려고 열심인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도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하였습니다.
어찌 이것이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되지 않지 않습니까?
이 죄 문제만 해결이 되면 사망에서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게 복된 소식입니다.
죄는 실제하고 있는 세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 죄는 시작됩니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이 죄인 아담의 자손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인간이 철저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패배를 역전시키는 길을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셨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심판 받고 대신 죽으심으로 이 사실을 받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의 값을 다 치르게 된 자이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가 없으면 기독교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교라고 하고 예수를 한문으로 말하기 기독교라고 하고 영어로 말하니 그리스도교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기독교는 독특한 신앙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다시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 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쁘고 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결과주의고 모두 성급한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암송대회에서 일등을 한 사람이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은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다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자, 배부른 자, 건강한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통,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의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보니 신앙은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자시켜 준다 병 고쳐 준다 시집 장가 잘 간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얻어도 생명이 없다면 이런 것 다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기독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요즘에는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제 아무리 무소유를 한다해도 제 몸을 불사르게에 내어 주어도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불교 자체가 허무 아닙니까?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없고 거짓이 될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사랑하는 자여, 결코 죽음을 두려워 말라. 믿는 자에게 죽음은 가장 작은 문제일 뿐이다.
두려워 할 것은 오히려 삶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친 싸움이고, 혹독한 훈련이며, 험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죄와 마귀와 사망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로 인하여 믿는 모든 자가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승리를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이 크고 놀라운 승리를 한껏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죽은자가 다시 살아났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리고 그 죽은자가 살아 난 것이 나도 살아난다는 보증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크고 놀라운 승리의 기반 위에 서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인생길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환난, 시험, 핍박, 유혹을 능히 이기며 살아가십시오.
항상 주위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노라. 이것이 여러분의 간증이요 찬송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일생 동안 실패의 경험이 전혀 없이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실패란 하는 일이 뜻한 바대로 이루어지지 아니한 것을 의미합니다.
실패는 일상생활에서 자주 겪게 되는 일이니 실패했다고 지나치게 낙심하고 좌절하지 말아야 합니다.
오히려 실패는 성공의 어머니라고 하지 않습니다.
모 재벌이 쓴 책의 제목이 실패는 있지만 좌절은 없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실패로 인한 손실이나 고통과 상처가 심각한 것을 패배라고 합니다.
패배를 두 종류로 크게 나눌 수 있습니다.
육체적 패배와 영적 패배입니다.
육적 패배란 인간관계에서의 경쟁과 다툼에서 지게 되는 것을 말합니다.
패배를 맛보지 않으려면 경쟁이나 다툼이 없어야 하는데 인간사회에서는 이를 면할 길이 없습니다.
실패와 패배 사이에서 힘들어 하지 않습니까?
실패한 인간 패배한 인생이라고 생각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영적 패배는 육적 패배 보다 더욱 큰 피해를 가져다줍니다.
영적 패배란 모든 사람에게 태어나면서부터 면할 수 없는 현실로 주어집니다.
이는 죄와 마귀와 사망에 대한 패배로, 조상대대로 내려오는 것으로 그 영향아래서 살아갑니다.
사람은 태어나면서부터 패배자가 되어 죄와 마귀와 사망의 종노릇 하면서 일생을 살아가게 됩니다.
영적 패배를 극복하지 못하면 패배자의 종말은 비참합니다.
멸망에 이르고 지옥형벌에 처하는 것입니다.
사실 육적인 패배의식도 영적인 패배로 인하여 영향을 받습니다.
내 영혼이 잘되면 육신도 강건하고 범사가 형통함을 받습니다.
영적 패배는 인간이 가지고 있는 본질적인 운명이기 때문에 이러한 사실을 생각하면 인간은 절대 절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절망이 소망으로 바뀌게 되는 길이 있습니다.
철저히 패배자가 된 인생을 완전히 승리자가 되게 하여주시는 하나님께서 계시기 때문입니다.
57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패배자에서 승리자로 바뀌게 됩니다.
아담 이후 인류의 최대의 적은 죽음이었습니다.
모든 인간은 죽음의 종이었습니다.
죽음은 인류의 최대의 폭군이었고, 공포의 대상이었습니다.
어떤 영웅호걸도, 죽음 앞에서는 무릎을 꿇었습니다.
여러분은 죽음에 자유하십니까? 죽음이 무섭지 않습니까?
참으로 인간은 죽음 앞에 모두 약한 존재들이었습니다.
히2:15 죽기를 무서워하므로 일생에 매여 종노릇하는 모든 자들이라고 했습니다.
이렇게 지금도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공포의 대상이 되어 있습니다.
히2:16 이 죽음의 세력을 가진 자가 마귀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죽음을 이기시고 죽었다가 살아나신 분이 계시는데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눅24:34 주께서 과연 살아나시고 시몬에게 보이셨다 하는지라 할렐루야!
인류 역사이래로 다시 살아났다는 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혹시 어떻게 하다가 다시 살아난 자가 있어도 다시 죽었습니다.
영원히 사는 자가 없습니다. 죽음을 영원히 도말하신 분이 예수 그리스도이십니다.
사람들이 그렇게 무서워하는 죽음의 도전을 정면으로 받아 승리한 것이 예수님의 부활입니다.
예수님께서 다시 살아나심으로 죽음의 권세를 이기었습니다.
사망이라는 도전을 피한 것이 아니라, 정면으로 죽음을 그대로 수용하고 승리하였습니다.
그래서 본문 15:55 사망아! 너의 승리가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왕 노릇 할 것을 잃어버렸습니다. 할렐루야!
한 기독교인이 사우디아라비아에 진출해 있는 어떤 건설회사와 용역계약을 맺고 사우디아라비아로 갔다가 직장에서 모슬렘교도를 사귀게 되었습니다. 어느날 이 모슬렘교도는 자기가 믿는 이슬람교에 대해 자랑을 늘어놓았습니다. 우리는 매일같이 하루에 다섯 번씩 기도하며 엄한 규율대로 살아야 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 메카를 순례해야 합니다.
얼마 전에도 이슬람의 율법을 어겼다고 한 여성의 코를 잘라버리고 귀를 잘라버리고 심지어는 불을 태워 화형을 하기도 하지 않습니까?
메카에는 이슬람의 창시자인 모하멧의 무덤이야. 너희 기독교의 교주인 예수님의 무덤은 비어 있지만 우리 교주의 무덤은 아주 웅장하게, 그리고 아름답게 꾸며져 있다. 모하멧의 아름다운 분묘, 이것이 우리의 자랑이야.
이 말을 듣고 있던 기독인이 대답하기를 그것이 바로 기독교와 이슬람교의 차이점이다. 라고 했습니다.
모하멧이나 다른 종교의 교주는 모두 죽어 무덤에 묻혀 썩어 버렸지만 예수 그리스도는 죽었는지 사흘 만에 무덤을 깨뜨리고 부활하셨습니다 할렐루야!
사셨네! 사셨네! 예수 다시 사셨네!
그러면 사망이 왜 찾아 왔습니까?
죄의 값이 사망입니다. 죄가 있는 곳에 사망이 찾아옵니다.
56절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율법이 해결 받지 못하면 죄아래 있을 수밖에 없고 사망은 죄를 향하여 쏘는 것입니다.
죄란 법을 어기는 것입니다.
세상에서도 법을 어기면 죄인이 되는 것 아닙니까?
죄를 지으면 벌을 받지 않습니까? 벌금부터 시작하여 사형도 받지 않습니까?
사람들의 조상인 아담이 하나님의 법을 어겨 죄를 지었음으로 그 죄의 값은 사망입니다.
당연하지 않습니까?
그래서 사망이 이 땅에 들어온 것입니다.
지금도 모든 사람들은 죄의 종들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인간은 하나님의 진노 아래 있습니다. 하나님의 진노가 집행되면 일반적으로 지옥이라고 불리는 영원한 불 못에 던져지게 됩니다. 현대인들은 이 말을 아주 싫어합니다. 지옥이라는 단어를 너무나 싫어합니다. 교회에서도 그 단어는 금기시되는 실정입니다.
사람들이 듣기 싫어하기에 말하지 않으려는 분위기가 형성되어 있습니다. 갈수록 사람 중심으로 사람의 기분에 맞추려고 하는 경향이 강해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도 사용하기를 꺼려하고 있습니다.
이는 아주 위험한 모습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을 맞추며 타협하고 훼손하는 잘못된 모습입니다.
지금과 같은 시대라도 사람 본연의 모습과 필요는 아무런 차이가 없습니다. 1000년 전이나 2000년 전의 사람들이 죄인이라는 사실은 전혀 변함이 없습니다.
그렇기에 그 시대의 사람들이 들어야 했던 말을 지금의 사람도 들어야 합니다.
과학이 좀 더 발달한 시대에 산다고 해서 상관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그 근원적인 사람됨이나 필요는 동일하기 때문입니다.
로마서 3:10-12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한가지로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라고 했습니다.
모든 인간이 다 죄인이라는 말씀입니다.
죄로 인하여 사망이 들어왔고, 그 사망 권세는 오늘까지도 죽음의 위력 앞에 아무도 꼼짝없이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죄의 세력 앞에, 죄가 이끄는 대로 끌려가는 존재들이란 말입니다.
바르게 살아 보려고 열심인 사도 바울이라는 사람도 롬7:24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 고 탄식하였습니다.
어찌 이것이 바울뿐이겠습니까? 오늘 우리들도 마찬가지일 것입니다.
제 아무리 바르게 살려고 해도 되지 않지 않습니까?
이 죄 문제만 해결이 되면 사망에서 자유 할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죄 없으신 예수님이 인간의 몸을 입고 죄인 대신 죽으신 것입니다.
이게 복된 소식입니다.
죄는 실제하고 있는 세력입니다.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서 명하신 말씀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것에서 죄는 시작됩니다.
아담이 범한 최초의 죄가 모든 사람에게 전가되므로 모든 사람이 죄인이 되었습니다.
콩 심은 데 콩이 나고 팥 심은 데 팥이 나듯이 죄인 아담의 자손은 모두 죄인으로 태어납니다.
그리하여 모든 사람은 죄의 지배 아래 있습니다.
죄에 대하여는 인간이 철저한 패배자가 되었습니다.
이러한 패배를 역전시키는 길을 하나님께서 내어 놓으셨는데 그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죄 없으신 하나님의 독생자가 인간의 죄를 대신 담당하여 심판 받고 대신 죽으심으로 이 사실을 받고 그를 믿는 모든 자가 죄 사함을 받고 의인이 되도록 하신 것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로마서 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하였습니다.
그러므로 나를 대신하여 죽으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자는 죄의 값을 다 치르게 된 자이기 때문에 죄에서 자유하니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기게 됩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라고 합니다. 예수가 없으면 기독교는 성립이 되지 않습니다.
그래서 예수교라고 하고 예수를 한문으로 말하기 기독교라고 하고 영어로 말하니 그리스도교라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사망에서 승리합니다. 세상에서 승리합니다.
기독교는 독특한 신앙체제를 가지고 있습니다.
나를 위하여 죽으시고 나를 위하여 다시 예수님을 믿으면 됩니다.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믿는 것이 아니고 부자 예수를 믿으려고 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곧 바로 복을 받아서 부자가 되는 줄로 아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예수만 믿으면 부자가 되고 형통하는 줄로 압니다. 그래서 소유가 많아지고 건강해지고 잘 되면 다 축복이고 은혜라고 쉽게 믿어 버립니다. 그래서 예수 알기를 부자 예수로, 해결사 예수로 알고 있습니다.
정말 그렇습니까? 가난하고, 병들고, 대학에 낙방하고, 머리가 나쁘고 한 것이 모두 복을 받지 못해서 그렇습니까? 그것은 모두 잘못된 생각입니다. 오늘 우리는 너무나 현세적이고 현실 중심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리고 사람들은 너무 결과주의고 모두 성급한 성공 위주의 삶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여러분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십시오. 우둔한 사람들은 죄를 짓지 않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 중에는 진실하고 충성스러운 사람들이 많습니다. 오히려 우둔한 사람들은 더 선량한 사람일 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죄를 짓는 사람들을 보면 거의 다 비상한 머리를 가진 사람들이 많습니다. 몇 년 전에 전국 암송대회에서 일등을 한 사람이 영등포 교도소에 있던 사람이었습니다. 이것은 우리들에게 많은 것은 시사해 주는 이야기입니다. 이를테면 머리가 명석하고 좋다고 해서 다 복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또 병든 사람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병든 사람은 죄를 짓고 싶어도 지을 수가 없습니다. 죄는 모두 건강한 사람들이 짓습니다. 그리고 가난한 사람들도 죄를 짓지 않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은 탈선을 하고 싶어도 기회가 없고 여유도 없습니다. 오직 살아가는 데 열중할 뿐입니다. 그러면 누가 죄를 짓습니까? 모두가 가진 자, 배부른 자, 건강한 자들이 죄를 짓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들이 신앙생활을 하면서 형통, 형통하지만 그것이 모두 복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런가 하면 어떤 이들은 부활의 예수를 찾지 않고 의사 예수를 찾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서 변화를 받고, 새 생명을 얻고, 구원을 얻으려는 것이 아니고, 병을 고치려고 예수를 찾아가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병을 고치려는 목적이 우선하다보니 신앙은 본질이 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이 같은 예수를 찾으려고 해서는 안 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찾아가야 합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나러 가야 합니다.
그 때 비로소 그에게 새 삶이 주어지고, 새 인생이 시작되고, 새 믿음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새 출발이 시작되고, 변화된 삶이 주어지는 것입니다
부자시켜 준다 병 고쳐 준다 시집 장가 잘 간다 이런 것보다 더 중요한 생명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천하를 다 얻어도 생명이 없다면 이런 것 다 쓸데없는 것이 됩니다.
그래서 기독교는 부활의 신앙입니다.
세상에는 종교가 수도 없이 많이 있지만 부활을 말하는 종교는 단 하나도 없습니다.
요즘 불교가 산에서 도심으로 내려와서 기독교를 여러 가지 면에서 모방해 가고 있습니다. 찬불가도 만들어 부르고, 심방도 하고, 불교 어린이학교도 개설하고, 수련회도 갖고, 요즘에는 주일마다 정기 예불도 드리고 있습니다.
아무리 기독교의 것을 모방한다고 하여도 한 가지만은 모방할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부활입니다.
제 아무리 무소유를 한다해도 제 몸을 불사르게에 내어 주어도 무슨 유익이 되겠습니까?
불교 자체가 허무 아닙니까? 기독교가 이 땅에 탄생하게 된 것은 부활 때문입니다.
부활이 없으면 기독교도 있을 수 없고 그리스도도 없고 거짓이 될 것입니다.
찰스 스펄전은 사랑하는 자여, 결코 죽음을 두려워 말라. 믿는 자에게 죽음은 가장 작은 문제일 뿐이다.
두려워 할 것은 오히려 삶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거친 싸움이고, 혹독한 훈련이며, 험난한 여정이기 때문이다.
성도들은 죄와 마귀와 사망을 두려워할 이유가 없게 되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주시는 승리가 우리에게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에서의 대속의 죽음과 무덤에서의 부활로 인하여 믿는 모든 자가 죄와 마귀와 사망에서 자유케 되었습니다.
승리를 얻었습니다. 성도 여러분은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주신 이 크고 놀라운 승리를 한껏 누리며 살아가십시오.
죽은자가 다시 살아났다면 어떤 기분일까요?
그리고 그 죽은자가 살아 난 것이 나도 살아난다는 보증이라고 한다면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그리고 이러한 크고 놀라운 승리의 기반 위에 서서 말씀과 성령으로 충만하여 인생길에 다가오는 크고 작은 환난, 시험, 핍박, 유혹을 능히 이기며 살아가십시오.
항상 주위 일에 힘쓰시기 바랍니다. 그런 수고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나에게 이김을 주시는 하나님에게 감사하노라. 이것이 여러분의 간증이요 찬송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