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을 위한 필요는 당신의 몫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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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86회 작성일 2010-04-24 12:58본문
마태복음 14:15-21 선을 위한 필요는 당신의 몫입니다.
미주 중앙일보 인터넷 4월 12일자 블로그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이디가 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물 좋은 교회 없나요?
제목 가지고 입에 거품 무실 분 들 꽤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제 글 끝까지 읽으시고 말씀해주세요
제가 원하는 물 좋은 교회는 아래와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매 주 십일조와 전도얘기를 푸쉬 하지 않는 교회
헌금 안했다고 전도사가 째려보지 않는 교회
성경공부에 목장예배 보라고 푸쉬하고 눈치주지 않는 교회
나이 40에 교회에서 막내노릇하지 않는 교회(즉 젊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참 편하게 한번 내 마음에 딱 맞춤의 믿음을 각색했습니다.
제가 궁금했습니다. 과연 누가 무엇이라고 나이론에게 댓글을 달 까였습니다.
그런데 댓글은 놀랍게도 거의가 나이론에게 맞추지 않고 믿음 적으로 대답을 하였어요
아저씨가 교회하나 세우셔서 딱 마음에 들게 사역 하시면 되겠네요
하지만 자기에게 완벽하게 만족되는 교회는 세상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물 좋은 이란 표현은 나이트클럽 같은 곳이나 물 좋다 나쁘다고 표현하지 교회를 두고 물 좋은 교회라고 표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군요.
옛날 나와 같은 사람이군요?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적응도 될 것입니다.
나중에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교회가 조금 불완전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고, 나이롱이 아니라 진심이 되고 싶고, 교회에 발을 딛는 것만도 감사한 마음이 있어 누가 돈 내지 말라고 해도 그냥 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 때, 교회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는 곳으로 생각이 될 때 그때 나가세요. 그러면 님은 영원히 못나가겠지만.... 교회는 놀이터가 아니에요.
저도 그걸 아는데 20년쯤 걸렸는데 당신은 행운아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찾으시는 그런 교회는 없답니다.
물 좋은 교회를 찾으시는 것보다 내가 도움이 되고 필요한 교회를 찾으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회는 교인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하는 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니까요
성도가 성도들에게 이런 대답을 해 주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성숙한 긍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에 참으로 미주 교회는 희망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삶보다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문제 삼아 나오지 못하는 자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오늘 주의 전을 향하여 올라온 여러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올라오다가 다 잡혀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본문의 내용에도 교회를 잘 다니는 자들에게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부정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과연 제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긍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기적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광야에서의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은혜가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정 남자만 5천이 되었으니 거의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물론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모두가 주님의 은혜에 대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듣지도 못하는 천국에 관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치유되지 못한 불치의 육신적인 질병이 치유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또 어떠한 사역이 이 교회에서 계속 될지 모르는 기대가 차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새벽부터 예수님을 찾아와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은혜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초신 자가 아니라 오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소히 믿음이 있을 것 같은 제자들이 문제를 들추기 시작합니다.
광야 교회의 문제 인물은 초신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을 것으로 여기는 제자들이라는 직분 자들 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초신 자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믿었다는 자들이 조금 안다고 하는 자들이 직분을 가지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빈들입니다. 광야 교회가 장소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써 해는 저물었습니다. 타임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생리적으로 불편하다 이유가 많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만사를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어찌 한마디 한마디가 다 부정적이라 은혜가 풍성한 광야 교회가 갑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 교회가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던 교회가 순식간에 불평불만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예수님이 인도하셨는데 이들의 결론은 예수님도 이 문제만큼은 관여하시지 못합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신성은 배제(排除)되고 인간적인 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이유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6절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뜻은 예수님의 뜻만이 섭니다. 할렐루야!
기적이 있을 수 없다는 광야 교회에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20-21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문제를 찾아 나서지 말고 은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찾으면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찾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역할입니다.
자 이제 우리 가운데 부정적으로 보는 인간적으로 보는 시각을 버리시고 예수님이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야 말로 주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돕는 자입니다.
주의 사역에는 긍정적일 때 나의 조건과 상관이 없이 모든 부정을 종식시키고 주의 뜻대로 내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14절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는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餓死直前狀況)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왜 이들이 진정한 목자가 아니었습니까? 생명 되신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라면 반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를 공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엄연히 광야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소리가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할 때입니다.
온갖 부정적인 요소가 입을 닫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선을 위한 필요에는 결코 부정이 없습니다. 언제나 믿음이 있는 말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따르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계산이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 때문에 주의 일을 못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는 아무 것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돈으로 생각한 가륫인 유다는 돈이 믿음이 되어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자라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요 남아도 넘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돈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200데나리온 한 이억은 있어야 만 명이 먹지요
이것가지고도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아이의 도시락 일인분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의 교회는 돈으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합니다.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남아돌았습니다. 할렐루야!
왜요 주님의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의지를 행 할 능력도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의지에 나의 최선이 필요 할 뿐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T.V.에 공익광고 카피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
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 버스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얼마만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표현을 얼마만큼 보여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인분의 도시락 보리개떡 5개 피라미 같은 생성 두 마리 뿐입니다 가 아니라 내게 가져 오너라입니다.
그리고 먹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배터지게 먹고 먹다가 먹다가 남은 부스러기 12바구니가 찼다고 했으니 온 사람들이 모여서 먹은 곳곳마다 부스러기만 거두어도 바구니가 찰 정도로 배불렀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그렇게 목말라하고 죽을 것만 같은 다윗은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렐루야!
1955년 어느 가을, 미국 오리건 주, 저 시골 유게너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그 회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어요. 그 영화는 그들이 전혀 모르는 나라 동방에 전쟁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지금 아이티에 지진같이 그 나라에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고아가 버려져 있는 곳. 그 나라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어요. 한국이 어디일까?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부부의 마음속에 부담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농터에 절반을 털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8명의 고아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용기를 보고 그 아이들을 나누어 자기가 키우겠다고 두 명씩 두 명씩 다 데리고 갔어요. 다시 그 부부는 나머지 농토를 다 팔아서 한국에 나오고 마침내 그들은 농사를 그만두고 한국에서 고아를 데려다가 미국에 입양시키는 일에 자신들의 전 생애를 들였어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바친 거죠.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어요. 그들 부부를 통해 일만 육천 명의 한국의 고아들이 그들의 생애 기간 살아있는 동안 미국에 입양 되요. 여러분 그들 부부의 이름이 바로 헤리 홀터에요. 홀터 아동 복지회의 설립자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재산도 없었어요. 여러분 만일 홀터 아동 복지회가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버려진 고아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범죄자가 되고 불우한 자가 되어 고통을 당했을까요? 수 만 명의 고아들이 미국에 건너가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홀터씨의 선을 위한 필요가 자신임을 알고 나섬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이 한국 땅에 수많은 고아들의 참 목자가 되었어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UBF의 기초입니다. 1960년대 가난한 한국대학생들은 어디 먹을 것이 없는가 하며 기웃거렸습니다. 미국선교사들은 이런 한국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하며 교회에 초청하였습니다.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한국대학생들을 먹을 것을 주는 자로 키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공부한 한국대학생들이 세계의 대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하여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우리도 본문공부를 통하여 이 시대 지성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의 말이다 .비누는 사용할 때마다 자기 살이 녹아져 작아진다.
때가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더러움을 없애 준다.
만일 녹지 않는 비누가 있다면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희생을 통해 사회에 공헌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비누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기 것을 아끼려는 부정적인 사람은 물에 녹지 않는 비누와 같다.
비록 내 생활이 힘드지만 그래도 선의 필요에 사용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은 풍요로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힘드지만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기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
미주 중앙일보 인터넷 4월 12일자 블로그에 이런 제목의 글이 올라왔습니다.
아이디가 나이론이라는 이름으로 물 좋은 교회 없나요?
제목 가지고 입에 거품 무실 분 들 꽤 있으리라 생각됩니다만... 제 글 끝까지 읽으시고 말씀해주세요
제가 원하는 물 좋은 교회는 아래와 같습니다
목사님께서 매 주 십일조와 전도얘기를 푸쉬 하지 않는 교회
헌금 안했다고 전도사가 째려보지 않는 교회
성경공부에 목장예배 보라고 푸쉬하고 눈치주지 않는 교회
나이 40에 교회에서 막내노릇하지 않는 교회(즉 젊은 사람들이 많은 교회)
그리고 몇 가지가 더 있었습니다.
참 편하게 한번 내 마음에 딱 맞춤의 믿음을 각색했습니다.
제가 궁금했습니다. 과연 누가 무엇이라고 나이론에게 댓글을 달 까였습니다.
그런데 댓글은 놀랍게도 거의가 나이론에게 맞추지 않고 믿음 적으로 대답을 하였어요
아저씨가 교회하나 세우셔서 딱 마음에 들게 사역 하시면 되겠네요
하지만 자기에게 완벽하게 만족되는 교회는 세상에는 없을 것으로 생각 됩니다
물 좋은 이란 표현은 나이트클럽 같은 곳이나 물 좋다 나쁘다고 표현하지 교회를 두고 물 좋은 교회라고 표현하는 건 바람직하지 않군요.
옛날 나와 같은 사람이군요? 때가 되면 어느 정도 적응도 될 것입니다.
나중에 내가 조금 손해 보더라도, 조금 불편하더라도, 교회가 조금 불완전하더라도 감수할 수 있고, 나이롱이 아니라 진심이 되고 싶고, 교회에 발을 딛는 것만도 감사한 마음이 있어 누가 돈 내지 말라고 해도 그냥 내고 싶은 그런 마음이 들 때, 교회가 심심풀이 땅콩이 아니라 나를 희생하는 곳으로 생각이 될 때 그때 나가세요. 그러면 님은 영원히 못나가겠지만.... 교회는 놀이터가 아니에요.
저도 그걸 아는데 20년쯤 걸렸는데 당신은 행운아입니다.
이 세상 어디에도 찾으시는 그런 교회는 없답니다.
물 좋은 교회를 찾으시는 것보다 내가 도움이 되고 필요한 교회를 찾으셔야 하지 않을까 생각됩니다
교회는 교인에게 도움을 주기위해 존재 하는 것이 아니고 다른 사람에게 도움을 주고자하는 사람이 모여 하나님의 뜻을 전해야 하니까요
성도가 성도들에게 이런 대답을 해 주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성숙한 긍정적인 그리스도인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을 생각 할 때에 참으로 미주 교회는 희망적이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교회에 다니는 사람들이 그 삶보다 멍청해서 어리석어서 다니는 것이 아니라 여러 조건을 문제 삼아 나오지 못하는 자들보다 훨씬 우수하다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모든 장애를 극복하고 오늘 주의 전을 향하여 올라온 여러분들은 참으로 훌륭한 분이심에 틀림이 없습니다.
올라오다가 다 잡혀간 자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본문의 내용에도 교회를 잘 다니는 자들에게 교회를 떠나야만 하는 부정적인 조건을 제시하는 자들이 있었는데 그들은 다름 아닌 예수님과 가장 가까이 있었다는 제자들이었습니다.
이 제자들에게 예수님은 과연 제자들이 교회를 떠나게 하는 주체가 아니라 오히려 교회가 교회되게 하는 긍정의 주체가 되어야 한다고 일러 주셨습니다.
여기에 교회의 기적이 있습니다. 할렐루야!
지금 광야에서의 교회는 예수님을 중심으로 은혜가 풍성하게 진행되고 있었습니다.
장정 남자만 5천이 되었으니 거의 2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물론 어린아이부터 시작해서 노인에 이르기까지 남녀노소 빈부귀천 상관없이 모두가 주님의 은혜에 대 만족해하고 있었습니다.
이 땅에서 듣지도 못하는 천국에 관한 소식을 듣습니다.
그리고 오랫동안 치유되지 못한 불치의 육신적인 질병이 치유됩니다.
사람들을 괴롭히는 더러운 귀신들이 떠나갑니다.
또 어떠한 사역이 이 교회에서 계속 될지 모르는 기대가 차 있었습니다.
한마디로 은혜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러니 그들이 새벽부터 예수님을 찾아와서 저녁 해가 질 때까지 따라다녔습니다.
그 어떤 것도 문제가 될 것이 없습니다.
밥을 먹지 않아도 배가 고픈 것도 모르고 있을 정도로 은혜가 풍성하였습니다.
그런데 드디어 초신 자가 아니라 오래 예수님을 따라다녔다는 소히 믿음이 있을 것 같은 제자들이 문제를 들추기 시작합니다.
광야 교회의 문제 인물은 초신 자가 아니라 믿음이 있을 것으로 여기는 제자들이라는 직분 자들 이었습니다.
교회마다 초신 자가 문제가 있는 것이 아니라 조금 믿었다는 자들이 조금 안다고 하는 자들이 직분을 가지면 문제를 일으킵니다.
우리가 있는 곳은 빈들입니다. 광야 교회가 장소가 좋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벌써 해는 저물었습니다. 타임이 맞지 않다는 것입니다.
배가 고프니 마을로 가서 먹을 것을 사 먹게 하소서 생리적으로 불편하다 이유가 많습니다.
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 뿐입니다. 만사를 불평이요 불만입니다.
어찌 한마디 한마디가 다 부정적이라 은혜가 풍성한 광야 교회가 갑자기 부정적인 것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할 수 있는 교회가 할 수 없는 교회가 되어버렸습니다.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감사하던 교회가 순식간에 불평불만으로 가득차 버렸습니다.
여태까지 예수님이 인도하셨는데 이들의 결론은 예수님도 이 문제만큼은 관여하시지 못합니다고 말하고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능력과 신성은 배제(排除)되고 인간적인 소리만이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부정적일 수 없다고 하였습니다.
그것이 이유가 될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16절 갈 것 없다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것입니다.
뜻은 예수님의 뜻만이 섭니다. 할렐루야!
기적이 있을 수 없다는 광야 교회에서 기적이 나타났습니다.
20-21절 다 배불리 먹고 남은 조각을 열두 바구니에 차게 거두었으며 먹은 사람은 여자와 어린이 외에 오천 명이나 되었더라
문제를 찾아 나서지 말고 은혜를 찾으시기 바랍니다.
은혜를 찾으면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문제를 찾으면 은혜가 은혜 되지 못하는 것입니다.
은혜가 은혜 되게 하는 것이 성도의 역할입니다.
자 이제 우리 가운데 부정적으로 보는 인간적으로 보는 시각을 버리시고 예수님이 보이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나야 말로 주의 사역에 긍정적으로 돕는 자입니다.
주의 사역에는 긍정적일 때 나의 조건과 상관이 없이 모든 부정을 종식시키고 주의 뜻대로 내 삶이 이루어집니다.
그것을 기적이라고 합니다.
14절 예수님이 큰 무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셨다고 하셨는데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다는 말씀입니다.
왜? 예수님이 무리를 보실 때마다, 애간장이 녹으셨는가? 그 이유가 중요합니다.
무리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였고, 기진하여 죽게 되었기 때문입니다. 조금만 더 그대로 방치하여 둔다면, 다 죽을 수밖에 없는 아사직전상황(餓死直前狀況)이라는 뜻입니다.
그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목자가 없었던 것이 아닙니다.
목자와 같은 지도자들이 수없이 많았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예수님 당시에 대제사장들은 물론, 제사장들이 20,000여명이 있었습니다. 수많은 서기관들이 있었습니다. 산헤드린 관원들도 있었고, 하나님을 잘 믿는다고 하는 6,000여명이나 되는 바리새인들도 있었습니다. 이들은, 다 자타가 인정하는 이스라엘의 목자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 그들은 이스라엘의 진정한 목자(牧者)들이 아니었다는 겁니다.
왜 이들이 진정한 목자가 아니었습니까? 생명 되신 예수님과 관계가 없는 자들이기 때문입니다.
오히려 예수님이라면 반대하고 심지어는 죽이기를 공모하는 자들이었습니다.
본문의 제자들도 그렇습니다.
엄연히 광야 교회의 주인이 되시는 예수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의 소리가 분위기를 주도하려고 하고 있었습니다.
자 이제 주님의 음성에 귀를 기우려야 할 때입니다.
온갖 부정적인 요소가 입을 닫게 될 것입니다. 주의 말씀에 긍정적이어야 합니다.
선을 위한 필요에는 결코 부정이 없습니다. 언제나 믿음이 있는 말은 무슨 말씀을 하시든지 따르겠습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인간적인 계산이 앞서지 말아야 합니다.
물질 때문에 주의 일을 못한다고 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그런 사람들을 통하여는 아무 것도 지금까지 하지 못했습니다.
믿음을 돈으로 생각한 가륫인 유다는 돈이 믿음이 되어 예수님을 은 30냥을 받고 팔아먹었습니다.
교회의 사역은 돈으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모자라도 부족함이 없게 하실 것이요 남아도 넘치지 않게 하실 것입니다.
돈이 많이 있어야 합니다 200데나리온 한 이억은 있어야 만 명이 먹지요
이것가지고도 배불리 먹을 수 없습니다. 턱도 없이 부족합니다.
아이의 도시락 일인분이 있을 뿐입니다.
물론 돈이 있어야 하고 있는 것으로는 턱없이 부족합니다.
그러나 주의 교회는 돈으로 하지 않습니다. 믿음으로 합니다.
부족하지 않았습니다. 남아돌았습니다. 할렐루야!
왜요 주님의 의지가 있기 때문입니다.
주님은 그 의지를 행 할 능력도 있습니다.
다만 주님의 의지에 나의 최선이 필요 할 뿐입니다.
태산이 높다하되 하늘아래 뫼이로다 오르고 또 오르면 못 오를리 없건마는 사람이 제 아니 오르고 뫼만 높다하더라
T.V.에 공익광고 카피엔 이런 것이 있습니다.
신문 대신 던져주는 시간 6초 어르신과 함께 횡단보도 건너는 시간 23초
후배에게 커피 타주는 시간 27초 버스벨 대신 눌러주는 시간 4초
세상을 아름답게 하는 시간 하루 1분이면 충분합니다
그렇습니다. 무엇을 얼마만큼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할 수 있는 우리의 마음의 표현을 얼마만큼 보여주었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일인분의 도시락 보리개떡 5개 피라미 같은 생성 두 마리 뿐입니다 가 아니라 내게 가져 오너라입니다.
그리고 먹을 준비하라는 것입니다.
그랬더니 배터지게 먹고 먹다가 먹다가 남은 부스러기 12바구니가 찼다고 했으니 온 사람들이 모여서 먹은 곳곳마다 부스러기만 거두어도 바구니가 찰 정도로 배불렀다는 것입니다.
일찍이 그렇게 목말라하고 죽을 것만 같은 다윗은 순종을 통하여 예수님의 풍성함을 경험하였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할렐루야!
1955년 어느 가을, 미국 오리건 주, 저 시골 유게너라고 하는 작은 마을에서 그 회관에서 영화가 상영되었어요. 그 영화는 그들이 전혀 모르는 나라 동방에 전쟁에 관한 소식이었습니다. 지금 아이티에 지진같이 그 나라에 전쟁이 벌어져 수많은 고아가 버려져 있는 곳. 그 나라의 이름은 다름 아닌 한국이었어요. 한국이 어디일까?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부부의 마음속에 부담이 생겼어요. 그래서 그들은 자신들의 농터에 절반을 털어서 한국이라는 나라에 와서 8명의 고아를 입양해 미국으로 데리고 갑니다.
동네 사람들이 그 용기를 보고 그 아이들을 나누어 자기가 키우겠다고 두 명씩 두 명씩 다 데리고 갔어요. 다시 그 부부는 나머지 농토를 다 팔아서 한국에 나오고 마침내 그들은 농사를 그만두고 한국에서 고아를 데려다가 미국에 입양시키는 일에 자신들의 전 생애를 들였어요. 물고기 2마리와 보리떡 5개를 바친 거죠. 그러나 그 결과는 놀라웠어요. 그들 부부를 통해 일만 육천 명의 한국의 고아들이 그들의 생애 기간 살아있는 동안 미국에 입양 되요. 여러분 그들 부부의 이름이 바로 헤리 홀터에요. 홀터 아동 복지회의 설립자입니다. 그들은 공부를 한 적이 없어요. 재산도 없었어요. 여러분 만일 홀터 아동 복지회가 없었다면 이 나라에는 얼마나 많은 버려진 고아들이 있었을까요? 그들이 범죄자가 되고 불우한 자가 되어 고통을 당했을까요? 수 만 명의 고아들이 미국에 건너가 훌륭한 인물들이 되었습니다.
홀터씨의 선을 위한 필요가 자신임을 알고 나섬으로 아무 관계도 없는 이 한국 땅에 수많은 고아들의 참 목자가 되었어요.
너희가 먹을 것을 주라는 말씀은 UBF의 기초입니다. 1960년대 가난한 한국대학생들은 어디 먹을 것이 없는가 하며 기웃거렸습니다. 미국선교사들은 이런 한국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겠다고 하며 교회에 초청하였습니다. 이에 문제의식을 가지신 고 이사무엘 선교사님은 “성경은 그렇게 가르치지 않는다. 성경은 먹을 것을 주는 사람을 키우는 것이다”라고 하며 한국대학생들을 먹을 것을 주는 자로 키웠습니다. 이렇게 말씀을 공부한 한국대학생들이 세계의 대학생들에게 먹을 것을 주기 위하여 선교사로 나갔습니다. 우리도 본문공부를 통하여 이 시대 지성인들에게 먹을 것을 주는 자로 변화될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 워너메이커의 말이다 .비누는 사용할 때마다 자기 살이 녹아져 작아진다.
때가 되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러나 그때마다 더러움을 없애 준다.
만일 녹지 않는 비누가 있다면 쓸모없는 물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자기희생을 통해 사회에 공헌할 줄 아는 사람은 좋은 비누지만 어떻게 해서든 자기 것을 아끼려는 부정적인 사람은 물에 녹지 않는 비누와 같다.
비록 내 생활이 힘드지만 그래도 선의 필요에 사용되셔야 합니다.
그래야 당신은 풍요로울 수가 있습니다.
우리 교회는 힘드지만 주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살 수 있습니다. 그래야만 기적이 있습니다.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힘대로 할 뿐 아니라 힘에 지나도록 자원하여
이 은혜와 성도 섬기는 일에 참여함에 대하여 우리에게 간절히 구하니
우리가 바라던 것뿐 아니라 그들이 먼저 자신을 주께 드리고 또 하나님의 뜻을 따라 우리에게 주었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