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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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53회 작성일 2015-06-14 07:30본문
시편18:20-26 의를 따라 상주시는 하나님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구나 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살고 계시는데 괜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지나간 선진들이 모두 고민 했던 과제입니다.
인생은 여러 번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딱 한번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세월은 정해져 있고 그리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철학의 거성, Arthur Schopenhauer가 어느 날 공원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해가 넘어가게 되자 공원지기가 문을 닫으려고 순시하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사람인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보시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알았다면 여기, 이렇게 오래 앉아 있겠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민하고 앉아 있는 것이요 라고 대답했다.
쇼펜하우어의 고백처럼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느냐? 의 문제도 답을 못준다.
이것은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삶은 길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만족한 삶도 아닌 찾으면 찾을수록 헤매는 오리무중 같은 삶일 뿐이다.
이 같은 인생에서 확실하게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음을 아니 잘하여 일등 하여 상을 받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본문의 다윗입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본문의 다윗은 13년에 걸쳐서 21번이나 당했던 사울의 살해위협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인생은 과연 내가 무엇인가 참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된 일인가 아닌가? 내가 무엇하는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철학적인 오리무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베리 굿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의는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적인 수양이나 도덕적인 의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내 삶에 받아드리는 믿음으로 받은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신득의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합니다.
로마서3:22-3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결코 어떤 경험으로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였으므로 그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상이 있습니다.
이왕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상 받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상 받은 삶은 믿음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24-26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이것은 마음을 그렇게 가지는 것입니다.
자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자비 곧 사람을 받게 됩니다.
완전함이란 마음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타 날 것입니다.
요한복음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깨끗함이란 그리스도를 쫒아가는 인격입니다.
이런 자는 더럽고 어두움이 물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사특(邪慝)한 자란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양심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주님 그의 행사를 거스르게 할 것입니다.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곧 믿음의 삶이요
의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 하실 적에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마테복음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존 번연 상한 심령으로 서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범사에 유익되는 것이 많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만 해도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 자신이 직접 죄를 범하는 것은 더더욱 두려워할 것입니다
왕하22: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부드러운 마음은 재빨리 기도하도록 만들며, 그것뿐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격려하고 기도에 열렬함과 열정을 더해 줍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 또는 가장 작은 실수에 대해서, 또는 그 영혼이 저지를 죄악된 생각에 대해서 항상 신속하게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죄를 경계하며 언제나 깨어 있고 방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드럽지 않으면 죄에 방치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드러움 마음은 자기 부인을 모든 일들에서 자기 부인을 실천할 것입니다.
반면에 부드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누가 상처를 입든지, 누가 슬퍼하게 되든지, 누가 연약해지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기에게 전적으로 금지된 일에도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징계를 예방함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즉 마음을 부드러운 상태로 늘 유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치심이나 채찍질 등 징계를 많이 받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한 마음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자초하는 원인인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시107: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어리석은 행동이 없다면 그것들을 인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행할 길이 믿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길은 상 받은 길입니다.
22-23절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하나님은 하늘보좌에만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In my distress(재난과 슬픔과 근심과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오늘 나의 절망과 비통과 한숨과 근심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건져주고자 지금 예배드리는 이 성전에도 계시는 분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돌배나무가 참배나무와 접붙임을 받아 원줄기에 붙어서 잘 자라야 돌배가 열리지 않고 맛좋은 참배를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예수 믿어 값없이 구원함에 이르렀다면 이제 그 은혜를 힘입고 살면 생활 속에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해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거기에 합한 삶을 살아 성화가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몫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헛되지 않고 그는 믿음으로 행하며 결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의인입니다.
다윗의 의는 이러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는 말이다.
제정한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인간의 의와 불의가 판가름 났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한 것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법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로 원수들에게서 보호를 받고 기적적인 축복들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다.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길 외에 어떤 삶도 깨끗하고 의로운 삶은 되지 않는다.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나이다 고백할 수 있다면 다윗이 받은 축복을 함께 받는 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의는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악하게 떠났다함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헌 집신 버리듯이 버리지 않습니까?
시139:1-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
22절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규례는 성문화된 법전 또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세오경 전체를 의미하고, 율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이란 말로 십계명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고 했습니다
23절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는 내가 그분 앞에서 정직하고 고결하며 올바르게 살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고백이다.
물론 여기에는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매일 밤마다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는 완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여 정욕시험에 빠지고 사람을 살인 교사를 하였지만은 그 죄의 심판에서 회개하므로 스스로를 지켜서 다시 일어섰다. 이것이 다윗의 의다.
인간의 의로가 아닌 언제든지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다고 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신앙을 보였다.
죄가 손길을 펼칠 때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 손대는 죄를 멀리하려고 비참하고 처절하도록 자신을 지켰고, 죄를 지었을 때는 죄의 징벌을 끝까지 받고, 처절하게 당하고 견디면서 회개하여 파멸에서 자신을 지켰다.
그래서 자비를 사모하는 사람에겐 성경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이 많게 하여 자비를 밝히 깨닫고 알게 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을 경험케 해 자비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완전한 자에겐 완전한 하나님을 경험하여 완전한 하나님을 닮게 하시며, 깨끗함을 사모하는 성도에겐 깨끗하신 하나님을 배우게 하므로 점점 더 깨끗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고 반항적이며 비뚤어진 사특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거슬림을 보여 그의 삶과 길이 비뚤어지게 하신다.
내 삶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평안한 삶이십니까?
아니면 점점 꼬여 가십니까? 두 개다 하나님의 관여하심입니다.
다만 내가 어떻게 하고 살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 따라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가 사업가 운동선수가 되듯 성도들이 성경에서 어떤 것을 사모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가에 따라 그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그가 경험하는 하나님이 각각 다르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저울이 되어 달아보시고 자가 되어 재어보시고 거울이 되어 비춰보게 하실 것입니다.
매일 벌 받은 기분으로 인생을 사시다가 가시렵니까? 매일 상 받은 기분으로 사시렵니까?
내게 주어진 삶을 어떻게 살아야 잘 살았구나 할 수 있을까요?
열심히 살고 계시는데 괜한 질문을 한 것은 아니겠지요
지나간 선진들이 모두 고민 했던 과제입니다.
인생은 여러 번 사는 것은 아닙니다. 딱 한번입니다.
그리고 시간은 세월은 정해져 있고 그리고 지금도 지나가고 있습니다.
철학의 거성, Arthur Schopenhauer가 어느 날 공원벤치에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앉아있었다. 해가 넘어가게 되자 공원지기가 문을 닫으려고 순시하다가 그를 발견하고는 여보시오, 당신은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사람인데 해가 지는 줄 모르고 앉아 있느냐? 고 물었다. 그러자 그는 여보시오, 내가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 줄 알았다면 여기, 이렇게 오래 앉아 있겠소? 그것을 모르기 때문에 고민하고 앉아 있는 것이요 라고 대답했다.
쇼펜하우어의 고백처럼 세상의 그 어떤 것으로도 인생의 실존적인 문제를 해결해 주지 못한다.
내가 누구냐, 나는 어디서 와서 어떻게 살아야 하며 어디로 가느냐? 의 문제도 답을 못준다.
이것은 인생을 연구하는 철학자들의 영원한 질문이다.
그래서 철학적 삶은 길을 제시해 주지도 못하고 그렇다고 만족한 삶도 아닌 찾으면 찾을수록 헤매는 오리무중 같은 삶일 뿐이다.
이 같은 인생에서 확실하게 인생을 살아 갈 수 있음을 아니 잘하여 일등 하여 상을 받는 삶을 살아 갈 수 있다고 말하는 자가 있었는데 그 사람이 본문의 다윗입니다.
20절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상 주시며 내 손의 깨끗함을 따라 내게 갚으셨으니
본문의 다윗은 13년에 걸쳐서 21번이나 당했던 사울의 살해위협에서 알 수 있듯이 그의 인생은 과연 내가 무엇인가 참으로 많은 질문을 던지기에 충분하였습니다
내가 이렇게 사는 것이 잘 된 일인가 아닌가? 내가 무엇하는 거야?
하지만 그는 그런 철학적인 오리무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었습니다
그의 인생은 베리 굿이었습니다.
왜요 하나님께서 나의 의를 따라 상을 주심을 알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인간의 의는 없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다윗의 의는 하나님이 배제된 인간적인 수양이나 도덕적인 의가 아니다.
오직 하나님을 내 삶에 받아드리는 믿음으로 받은 의(義)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의인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이신득의 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다윗도 하나님을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합니다.
로마서3:22-30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 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곧 이 때에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사 자기도 의로우시며 또한 예수 믿는 자를 의롭다 하려 하심이라 그런즉 자랑할 데가 어디냐 있을 수가 없느니라 무슨 법으로냐 행위로냐 아니라 오직 믿음의 법으로니라 그러므로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얻는 것은 율법의 행위에 있지 않고 믿음으로 되는 줄 우리가 인정하노라 하나님은 다만 유대인의 하나님이시냐 또한 이방인의 하나님은 아니시냐 진실로 이방인의 하나님도 되시느니라 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또한 무할례자도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실 하나님은 한 분이시니라
결코 어떤 경험으로 공로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예수를 구주로 영접하고 하나님을 아버지로 영접하였으므로 그 믿음으로 얻는 의를 말합니다.
이 믿음으로 살아가는 삶에는 상이 있습니다.
이왕 이 세상을 살아간다면 상 받는 삶이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히브리서11:6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또한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
믿음으로 상 받은 삶은 믿음으로 행하게 하십니다.
24-26절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내 의를 따라 갚으시되 그의 목전에서 내 손이 깨끗한 만큼 내게 갚으셨도다 자비로운 자에게는 주의 자비로우심을 나타내시며 완전한 자에게는 주의 완전하심을 보이시며 깨끗한 자에게는 주의 깨끗하심을 보이시며 사악한 자에게는 주의 거스르심을 보이시리니
이것은 마음을 그렇게 가지는 것입니다.
자비한 사람이란 하나님의 사랑을 품은 자라는 것입니다.
이런 자가 하나님의 자비 곧 사람을 받게 됩니다.
완전함이란 마음이 다른 생각을 품지 않고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입니다.
이런 자는 그리스도의 사역이 나타 날 것입니다.
요한복음14:12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를 믿는 자는 내가 하는 일을 그도 할 것이요 또한 그보다 큰 일도 하리니 이는 내가 아버지께로 감이라
깨끗함이란 그리스도를 쫒아가는 인격입니다.
이런 자는 더럽고 어두움이 물러 갈 것입니다.
반면에 사특(邪慝)한 자란 생각과 행동이 하나님의 뜻으로부터 벗어나 양심입니다.
이런 자에게는 주님 그의 행사를 거스르게 할 것입니다.
마음을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품는 것이 곧 믿음의 삶이요
의로운 삶입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소개 하실 적에 이렇게 소개하셨습니다.
마테복음11:29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존 번연 상한 심령으로 서라는 책에서
그리스도의 온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은 범사에 유익되는 것이 많다고 소개했습니다.
그리스도의 부드러운 마음은 다른 사람의 죄를 보기만 해도 괴로워할 것입니다.
하물며 그 자신이 직접 죄를 범하는 것은 더더욱 두려워할 것입니다
왕하22:19 내가 이 곳과 그 주민에게 대하여 빈 터가 되고 저주가 되리라 한 말을 네가 듣고 마음이 부드러워져서 여호와 앞 곧 내 앞에서 겸비하여 옷을 찢고 통곡하였으므로 나도 네 말을 들었노라 여호와가 말하였느니라
부드러운 마음은 재빨리 기도하도록 만들며, 그것뿐 아니라 기도하는 것을 격려하고 기도에 열렬함과 열정을 더해 줍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가장 작은 죄에 대해서, 또는 가장 작은 실수에 대해서, 또는 그 영혼이 저지를 죄악된 생각에 대해서 항상 신속하게 회개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과의 교제를 하는 것을 좋아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죄를 경계하며 언제나 깨어 있고 방심하지 않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부드럽지 않으면 죄에 방치하는 일이 생기게 됩니다.
부드러움 마음은 자기 부인을 모든 일들에서 자기 부인을 실천할 것입니다.
반면에 부드럽지 않은 그리스도인은, 자신을 부인하는 것과는 전혀 상관없이 생활합니다.
그리고 그들은 자신들의 행동으로 누가 상처를 입든지, 누가 슬퍼하게 되든지, 누가 연약해지든지 전혀 상관하지 않으며, 심지어는 자기에게 전적으로 금지된 일에도 끼어들기를 서슴지 않으려고 합니다.
부드러운 마음은 하나님의 징계를 예방함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고 있으면, 즉 마음을 부드러운 상태로 늘 유지하고 있으면 하나님의 치심이나 채찍질 등 징계를 많이 받지 않게 됩니다.
왜냐하면 그렇지 못한 마음은 징계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자초하는 원인인 죄를 범하기 때문입니다.
시107:17 미련한 자들은 그들의 죄악의 길을 따르고 그들의 악을 범하기 때문에 고난을 받아
어리석은 행동이 없다면 그것들을 인해 고통을 느끼지 않을 것입니다.
어떻게 행할 길이 믿음으로 보이기 때문에 그 길은 상 받은 길입니다.
22-23절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하나님은 하늘보좌에만 앉아 계시는 분이 아니다.
하나님은 다윗이 In my distress(재난과 슬픔과 근심과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부르짖어 기도할 때, 하나님은 그 가운데 계셨던 하나님이시며, 오늘 나의 절망과 비통과 한숨과 근심에서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건져주고자 지금 예배드리는 이 성전에도 계시는 분이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그의 인도하심을 따라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돌배나무가 참배나무와 접붙임을 받아 원줄기에 붙어서 잘 자라야 돌배가 열리지 않고 맛좋은 참배를 열매 맺을 수 있습니다.
롬11:17 또한 가지 얼마가 꺾이었는데 돌감람나무인 네가 그들 중에 접붙임이 되어 참감람나무 뿌리의 진액을 함께 받는 자가 되었은즉
예수 믿어 값없이 구원함에 이르렀다면 이제 그 은혜를 힘입고 살면 생활 속에 구원의 축복을 누리게 됩니다.
구원은 하나님의 전적인 은해입니다.
그러나 그 은혜를 헛되지 않도록 거기에 합한 삶을 살아 성화가 되고 성령의 열매를 맺는 몫은 사람에게 있습니다.
다윗은 자신이 받은 은혜를 헛되지 않고 그는 믿음으로 행하며 결실을 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힘입어 사는 의인입니다.
다윗의 의는 이러했습니다.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다
기록된 하나님의 명령을 지켰다는 말이다.
제정한 법도에 순응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인간의 의와 불의가 판가름 났다.
하나님만이 절대 의를 소유하셨기 때문에 하나님이 인간에게 제시한 모든 법도는 하나님의 성품을 대변한 것이기에 의로운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이 그 법도를 지키는 것이 바로 내 의가 되는 것입니다.
의인은 믿음으로 사는 것입니다.
그것이 다윗이 하나님의 보호로 원수들에게서 보호를 받고 기적적인 축복들을 받을 수 있었던 원인이다.
죽을 것 같지만 하나님의 생명이 그를 살게 하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인생은 하나님의 도를 지키며 사는 것이다. 이 길 외에 어떤 삶도 깨끗하고 의로운 삶은 되지 않는다.
다윗처럼 내가 여호와의 도를 지켰나이다 고백할 수 있다면 다윗이 받은 축복을 함께 받는 누리게 되지 않겠습니까?
다윗의 의는 악하게 하나님을 떠나지 않았다고 했습니다.
악하게 떠났다함은 의도적으로, 계획적으로 하나님을 떠나는 것을 가리킨다.
그에게 어떠한 일이 있어도 어찌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날 수 있습니까?
신앙생활을 헌 집신 버리듯이 버리지 않습니까?
시139:1-10 여호와여 주께서 나를 살펴 보셨으므로 나를 아시나이다 주께서 내가 앉고 일어섬을 아시고 멀리서도 나의 생각을 밝히 아시오며 나의 모든 길과 내가 눕는 것을 살펴 보셨으므로 나의 모든 행위를 익히 아시오니 여호와여 내 혀의 말을 알지 못하시는 것이 하나도 없으시니이다 주께서 나의 앞뒤를 둘러싸시고 내게 안수하셨나이다 이 지식이 내게 너무 기이하니 높아서 내가 능히 미치지 못하나이다 내가 주의 영을 떠나 어디로 가며 주의 앞에서 어디로 피하리이까 내가 하늘에 올라갈지라도 거기 계시며 스올에 내 자리를 펼지라도 거기 계시니이다 내가 새벽 날개를 치며 바다 끝에 가서 거주할지라도 거기서도 주의 손이 나를 인도하시며 주의 오른손이 나를 붙드시리이다
하나님의 규례와 율례를 버리지 않았다
22절 그의 모든 규례가 내 앞에 있고 내게서 그의 율례를 버리지 아니하였음이로다
규례는 성문화된 법전 또는 율법을 가리키는 것으로 모세오경 전체를 의미하고, 율례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법칙이란 말로 십계명 같은 것을 가리킨다.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고 했습니다
23절 또한 나는 그의 앞에 완전하여 나의 죄악에서 스스로 자신을 지켰나니
하나님 앞에서 완전했다는 내가 그분 앞에서 정직하고 고결하며 올바르게 살았다. 나는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고 바르게 살았다는 고백이다.
물론 여기에는 도덕적으로 전혀 죄가 없는 완전한 상태를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서 그 신실함과 의로움을 인정하실 만한 순수한 상태를 의미한다.
매일 밤마다 흘리는 회개의 눈물이 하나님 앞에는 완전한 것입니다
자신이 약하여 정욕시험에 빠지고 사람을 살인 교사를 하였지만은 그 죄의 심판에서 회개하므로 스스로를 지켜서 다시 일어섰다. 이것이 다윗의 의다.
인간의 의로가 아닌 언제든지 하나님의 의로 의롭게 되는 것입니다.
자기의 죄악에서 스스로 지켰다고 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피 흘리기까지 죄와 싸우는 신앙을 보였다.
죄가 손길을 펼칠 때마다 사울과의 관계에서는 하나님이 기름 부은 자 손대는 죄를 멀리하려고 비참하고 처절하도록 자신을 지켰고, 죄를 지었을 때는 죄의 징벌을 끝까지 받고, 처절하게 당하고 견디면서 회개하여 파멸에서 자신을 지켰다.
그래서 자비를 사모하는 사람에겐 성경에서 자비하신 하나님의 역사에 관심이 많게 하여 자비를 밝히 깨닫고 알게 하시며 자비하신 하나님을 경험케 해 자비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완전한 자에겐 완전한 하나님을 경험하여 완전한 하나님을 닮게 하시며, 깨끗함을 사모하는 성도에겐 깨끗하신 하나님을 배우게 하므로 점점 더 깨끗한 성도가 되게 하시고, 생각과 행동이 왜곡되고 반항적이며 비뚤어진 사특한 사람에겐 하나님의 거슬림을 보여 그의 삶과 길이 비뚤어지게 하신다.
내 삶이 점점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평안한 삶이십니까?
아니면 점점 꼬여 가십니까? 두 개다 하나님의 관여하심입니다.
다만 내가 어떻게 하고 살았느냐에 따라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관심 따라 의사 변호사 교수 정치가 사업가 운동선수가 되듯 성도들이 성경에서 어떤 것을 사모하고 어떤 것에 관심이 많은가에 따라 그에게 보여주시는 하나님, 그가 경험하는 하나님이 각각 다르다는 말이다.
하나님을 속일 수는 없습니다. 하나님이 내가 원하시는 대로 해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으로 내 삶을 저울이 되어 달아보시고 자가 되어 재어보시고 거울이 되어 비춰보게 하실 것입니다.
매일 벌 받은 기분으로 인생을 사시다가 가시렵니까? 매일 상 받은 기분으로 사시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