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가장 즐거워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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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28회 작성일 2010-07-09 1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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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5:11-24 나를 가장 즐거워하는 아버지께로 돌아가자
인터넷 블러그에서 어머니에 대한 글이 올려져 있었습니다.
어머니날 일 년에 하루 어머니날이면 내 마음 속에는 눈물의 강이 흐릅니다.
벌써 23년 전에 돌아가신 어머니...... 그러나 항상 내 마음에 계신 어머니
그냥 오늘 일 년에 한번만 울겠습니다.
그리고 백뮤직이 깔리는데 나의 어머니 Mother of mine(나의 어머니) - Jimmy Osmond가 흘러나왔습니다.
그 내용은 이러합니다.
나의 어머니, 당신은 제게 제가 원하는 대로 저의 모든 삶을 주셨지요. 제가 가진 모든 것은 당신의 덕택입니다.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나의 어머니, 제가 어렸을 적에 당신은 제게 세상을 살아가며 해야 할 올바른 이치를 가르쳐 주셨지요 당신의 사랑 없이 제가 어디에 있었겠습니까? 어머니, 사랑하는 나의 어머니 어머니 당신은 제게 행복을 주셨습니다 말로 형언할 수 없는 것들이지요
그런데 아무리 들어도 무엇인가 모르게 애수(哀愁)가 깔려있었습니다.
부모를 생각하면 기뻐해야 하는데......
이것은 아직도 온전히 이루지 못한 사랑의 이야기이기 때문입니다.
다시 만날 날을 기약하지 못하는 전제 때문입니다.
부모와 자녀의 온전한 사랑은 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찬송가 579장 어머니의 넓은 사랑이라는 찬송이 나옵니다.
이 곡조는 결코 슬프다가 아니라 즐거움과 기쁨에 가깝고 그리고 희망적이었습니다.
그리고 가사를 보면 그렇습니다.
4절 가사 온유하고 겸손하며 올바르고 굳세게 어머니의 뜻 받들어 보람 있게 살리라
풍파 많은 세상에서 선한 싸움 싸우다 생명시내 흐르는 곳 길이 함께 살리라
다시 만나 길이 함께 살리라 이게 복음적인 부모와 자식과의 관계입니다.
아브라함의 하나님 그 아들이삭의 하나님 그 손자 야곱의 하나님
할아버지 아브라함의 하나님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 나 야곱의 하나님이 되시는 것입니다.
이번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부모를 생각하며 눈물을 흘리는 부모와 나의 관계가 아니라 기쁨의 관계로 설정하는 시간이 되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이 보시기에 좋았더라고 하셨는데 부모 자식 간의 관계를 슬픔의 모드로 만들지 마시기 바랍니다.
청개구리나 비가 오면 부모 묘지가 떠내려 갈까봐 울지 나를 향하여 환하게 웃으시는 아버지 어머니를 연상하며 나를 기쁘시게 하는 부모님으로 설정이 되시기 바랍니다.
스스로 슬픔의 조건을 만들지 말고 기쁨의 조건으로 만드시기 바랍니다.
부모는 슬픔의 조건이 아니라 기쁨의 조건이십니다.
본문에도 아버지의 사랑을 그리워하며 슬퍼하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 슬픔의 조건들을 슬픔으로 남겨두지 않았습니다.
즐거운 잔치가 되게 하였습니다. 모두가 즐거워하였습니다.
제 아무리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을 말하여도 이 세상의 부모와 자식 간의 사랑은 즐거움이기보다는 슬픔이 그리고 완전보다는 불완전 하여 마음의 아픔으로 남아있습니다.
어버이 날 노래
낳실제 괴로움 다 잊으시고 기를 제 밤낮으로 애쓰는 마음 진자리 마른자리 갈아 뉘시며 손발이 다 닳도록 고생하시네 하늘아래 그 무엇이 넓다 하리요 어버이의 희생은 가이없어라
이 가사에다가 이 곡조를 붙여서 노래를 부르니 누구든지 감정이 잡히지 않을 수 없습니다.
낳으실 제 괴로움 기르실 제 애쓰는 마음 손발이 다 닳고 희생은 가이없어라
그리고 자녀는 애수의 부모로 남는 것인가?
하나님 앞에서 제 설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이 부모와 자식 간에 준 사랑일까?를 생각해 봅니다. 결코 그렇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 앞에서는 계21:3-4 내가 들으니 보좌에서 큰 음성이 나서 이르되 보라 하나님의 장막이 사람들과 함께 있으매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 계시리니 그들은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하나님은 친히 그들과 함께 계셔서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처음 것들이 다 지나갔음이러라
그러면 부모와 자식 간의 온전한 사랑은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슬픔이 아니라 기쁨의 관계입니다.
살아계신 부모님을 두신 자도 그리고 돌아가신 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부모는 아들의 원대로 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하나님 아버지도 그러하신 분이십니다.
우리말에 자식이기는 부모 없다고 합니다. 자식에게 이기는 부모는 부모가 아닙니다.
부모가 자식을 이기면 그것을 힘으로 하든지 그 어떤 것으로 자식을 누르면 자식은 정신이 나갑니다.
왜 그렀는가 하면 자식의 은신처는 부모이기 때문입니다.
자식은 언제든지 부모를 밝고 일어서는 것이 자식입니다.
내가 살아온 부모 밑에서의 삶을 보십시오 모두가 내 마음대로입니다.
이것 역시 하나님 아버지도 그대로 놔두신다는 것입니다.
에덴동산에서부터 그렇지 않습니까?
그런데 문제는 내 고집대로의 삶이 나를 기쁘게 하는 것이 아니라 나를 슬프게 하는 것입니다.
러시아의 문호 도스토예프스키는 사람이 하나님을 등질 때 모든 것을 등진다
이 말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저버리는 순간 자신의 의와 거룩, 건강과 기쁨, 평안과 행복과 생명, 심지어 자기 자신마저도 등지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해를 등지면 어둠을 안게 되는 것과 같이 하나님을 등질 때 어디서 와서 왜 살며 어디로 가는지 알지 못하고 흑암 가운데 방황하게 되는 것입니다.
본문에서도 아버지와 함께 하는 삶이 싫증이 나서 결국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주의에 빠지고 자신의 길을 가기 시작한 한 아들이 잘 먹고 잘 살았다고 하지 않았습니다.
허랑방탕하고 재산 낭비하고 궁핍해지고 머슴살이로 급기야는 짐승이 먹는 먹이도 못 얻어먹을 정도로 전략하드니 드디어는 주려 죽게 되었습니다.
죽음의 자리까지 이르게 된 것입니다.
내 생각대로의 삶이 고난의 삶이 라는 것을 아셔야 합니다.
어떤 고난의 시작입니까?
마귀의 지배를 받습니다.
롬3:23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더니
요8:44 너희는 너희 아비 마귀에게서 났으니 너희 아비의 욕심을 너희도 행하고자 하느니라
우상 숭배에 빠집니다.
그 결과 미신, 우상에 빠져 점, 굿 등을 하고 선행도 해보지만 행복은 없고, 이사 가는 날, 방향, 묘자리를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사주팔자에 매여 살게 됩니다.
엡2:2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공중의 권세 잡은 자를 따랐으니 곧 지금 불순종의 아들들 가운데서 역사하는 영이라
정신적인 고통이 따릅니다.
불안, 불평, 허무, 정신병, 노이로제, 불면증, 우울증 등 이상한 저주에 사로잡혀 배경 좋고 지식도 많고 돈도 많은데 자꾸만 망해가게 됩니다.
육신의 고통이 따릅니다.
불치병, 우환, 질고, 악몽에 시달리고 가위에 눌리며 병명도 없는데 온 몸이 눌리는 고통을 받게 됩니다.
죽음과 지옥 심판의 삶이요
하나님을 부인하고 현실에만 집착하다 결국은 죽어 지옥의 영원한 심판을 받게 됩니다.
히9:27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
영적인 더러운 유산을 자녀들에게 물러 줍니다.
결국은 모든 문제가 고스란히 자녀에게 대물림됩니다.
나를 사랑하는 자는 천대의 복을 받지만 그렇지 않는 자는 3,4대 저주를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누가 무슨 말을 해도 자녀의 책임은 그 부모입니다.
그러니 부모 된 자의 책임은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말 안 듣는 자녀 있으면 매일 붙잡고 울든지 빌든지 해야 합니다.
솔제니친이 소련이 망하고 난 다음 그가 한말이 소련이 언제부터 망했느냐. 소련이 교회의 문을 닫았을 때 하나님은 하늘 문을 닫았다고 말한 것입니다.
교회의 문을 닫고 하나님에 대해서 저항 할 때 하나님은 소련에 대한 축복의 문을 닫아 버렸다고 말한 것입니다.
하나님을 등지면 이 세상의 모든 그림자진 인생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죄와 썩어짐의 종노릇과 병과 저주와 가난과 고통과 죽음이 다가오는 것입니다.
이것으로 끝나면 피차 슬픔의 노래를 부르게 될 것이며 애수의 부모 자식의 관계가 되는 것입니다.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로 돌아가야 합니다.
스페인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이 어떤 문제에 대한 의견 차이로 사이가 틀어졌고, 결국 아들은 집을 나갔습니다. 아버지는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는 반항적인 아들을 찾아 나섰습니다. 그러나 어디서도 아들을 찾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다가 아버지는 아들을 찾을 수 있는 기발한 방법을 생각해 냈습니다. 마드리드라는 신문에 아들을 찾는 광고를 내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파코야, 오늘 정오에 이 신문사 정문에서 좀 만나자. 모든 것을 용서한다. 그리고 널 사랑한다. 아버지가. 그런데 전혀 생각지도 못했던 일이 일어났습니다. 그 광고가 나간 그날 정오에 파코라는 이들을 가진 사람 팔 백 명이 그 신문사 정문에 나타났던 것입니다.
그들은 모두 아버지의 용서와 사랑을 갈망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스킵 하이지그, 예수님과 직접 만나라, 가이드포스트, p.218)
아버지의 무조건적인 용서와 사랑을 갈망하지 않는 사람이 어디에 있겠습니까?
그리고 하나님은 완전한 용서의 프로그램을 가지고 기다리고 계십니다.
20절 거리가 먼데 아버지가 그를 보고
얼마나 기다리고 학수고대(鶴首苦待)하고 계셨습니다. 할렐루야!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용서를 그렇게 원하면서도 둘째 아들처럼 용기를 내어 아버지께 돌아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죄를 용서 받는 유일한 길은 아버지께로 가는 것입니다.
내가 어떤 죄와 허물을 가지고 왔던 하나님 아버지는 예수님의 보혈로 다 덮어 주십니다.
그리고 그 죄를 기억하시지도 않습니다.
21-24 아들이 이르되 아버지 내가 하늘과 아버지께 죄를 지었사오니 지금부터는 아버지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감당하지 못하겠나이다 하나 아버지는 종들에게 이르되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히고 손에 가락지를 끼우고 발에 신을 신기라 그리고 살진 송아지를 끌어다가 잡으라 우리가 먹고 즐기자 이 내 아들은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다시 얻었노라 하니 그들이 즐거워하더라
돌아오는 만큼 은혜는 큽니다. 죄가 큰 만큼 용서도 큽니다.
하나님은 최고의 것으로 준비하고 계십니다.
한국의 슈바이처라고 불리는 장기려 박사님, 이분이 80회 생일을 맞았을 때 몇 가지 생의 기쁨에 대해 이야기했습니다. 첫째는 결혼한 후 아들을 낳았을 때, 천하를 얻은 것과 같은 기쁨이었다고 합니다. 둘째는 손기정 선수가 마라톤에서 우승했을 때, 일본의 지배를 받고 있던 조선의 사람으로서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에게 있어 가장 큰 기쁨은 아들을 낳은 것도, 손기정 선수가 우승을 한 것도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음으로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죄 사함의 확신을 가졌을 때보다 더 기뻤던 순간은 없었다고 합니다. 80년 인생을 돌아보면 그 순간이 가장 기뻤다고, 그 기쁨에 비하면 다른 기쁨은 하찮은 것에 불과하다고 고백했습니다.
아버지께 돌아오는 자들에게는 이토록 놀라운 죄 사함의 기쁨이 있습니다.
그런데 많은 성도들이 자신의 모든 죄가 용서받았다는 사실을 잘 믿지 못합니다.
나는 죄인이야, 이렇게 매일 죄만 짓고 사는 사람을 하나님께서 사랑하시겠어? 나 같은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과 축복을 받을 자격이 없어. 아닙니다. 더 이상 자신을 정죄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돌아온 자에게 문책이 따르지 않고 큰 위로와 형언 할 수 없는 은혜가 기다리고 있습니다.
아버지가 돌아온 아들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기쁨으로 춤추며 노래하는 이런 기쁨 이런 축제가 있습니다.
간혹 하나님께로 돌아오는 것을 두려워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지금까지 누리던 인생의 기쁨과 즐거움을 다 그만두어야 할 것이라고 오해하고 신앙생활은 대충 하는 것이지 깊이 빠지면 안 된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나의 행복을 빼앗아가는 분이 아닙니다. 내 인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 주시는 분이십니다.
손에 반지를 끼워 주고 신발을 신겨 주십니다.
손에 반지를 끼워준다는 것은 아들의 권세를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그 당시 종은 신발을 신을 수 없었습니다. 그러니까 발에 신을 신겨준다는 것은 아들의 신분을 회복시켜 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돌아가면 아들의 권세, 아들의 신분이 회복됩니다. 그러면 아들의 권세, 아들의 신분이 우리에게 어떤 축복을 가져다주는 것입니까? 크게 세 가지로 말할 수 있습니다.
첫째, 아들은 아버지의 것을 상속하는 특권이 있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을 상속합니까? 하늘나라입니다. 우리 모두는 천국의 상속자입니다.
둘째, 아들은 죄를 이기고 마귀를 이기는 권세가 있습니다.
아들은 마귀를 이깁니다. 왜요? 아들에게는 아버지의 권세가 있기 때문입니다.
셋째, 아들에게는 기도의 권세입니다.
마태복음 7장 9-11절 너희 중에 누가 아들이 떡을 달라 하는데 돌을 주며 생선을 달라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있겠느냐 너희가 악한 자라도 좋은 것으로 자식에게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자에게 좋은 것으로 주시지 않겠느냐.
성도들 중에 기도를 부담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기도를 의무로만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건강한 신앙을 유지하고, 쓰임 받는 자가 되고, 성숙한 성도, 열매 맺는 성도, 승리하는 성도가 되기 위해서는 기도가 꼭 필요하지요. 생각해 보십시오. 이것이 짐입니까, 복입니까?
이제 아버지 하나님께로 돌아오십시오
그리고 더 이상 슬픔과 애수의 어버이날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기쁨과 즐거움의 부모와 자식 관계가 재 설정되시시오
그리고 다시 함께 할 날을 기약하며 오늘을 확실하게 살아가는 자녀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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