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해야 할 복음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74회 작성일 2010-07-09 11:04본문
로마서 1:16-17 부끄러워하지 않고 자랑해야 할 복음
저는 지난 2주간 10일 여정에 무려 9개국을 순방하는 빡빡한 일정을 보내었습니다. 오고 가는 비행기 편으로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그리고 매일 평균 10시간을 타는 버스여행 거의 짐짝같이 실려 다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들은 그런데도 그 힘듦을 이길 수 있었지만 장로님 특히 부인되는 권사 집사님들은 힘듦을 하소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호텔에 10-11시 투숙하여 4시 30분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을 싸들고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하루에 1개국입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그렇습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첵코 그리고 또 독일
왜 그럴 수밖에 없느냐하면 언제다시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힘들고 짧은 기간 안에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갈빈, 체코의 얀 후스, 영국의 존낙스등이 목숨을 걸고 외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진리의 판단 기준은 교회와 교황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의 은총으로 만 구원을 얻고 셋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은혜(Sola Gratia)로 만 받으며, 넷째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만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모든 구원의 계획과 완성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Sola Deo Gloria)을 돌려야 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을 앞세운 종교개혁은 온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게 했으며 영혼을 살리는 우주적인 개혁의 역사였고 그 배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라고 하는데 HE IS STORY입니다.
그의 이야기 곧 그가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사명을 본 자들로 지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태워 그 진리를 밝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진리는 즉 개신교는 구교에서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라고 만 쉽게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앙과 개혁은 하나님중심인 초대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은 16-17절 이 복음을 내가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라고 하였으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고 곧 믿음이 생기게 되며 이 믿음으로 의인은 살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거울 자체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기 위함입니다.
혹시 이빨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지 안했는가? 넥타이가 삐뚤어지지는 안했는가? 얼굴에 무엇이 묻었지 않았나 곧 거울을 통하여 나를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거울 앞에서 눈썹을 그리며 립스틱을 바르고, 면도날로 얼굴을 굵어 내리는 것도, 정장을 한 후에 미소를 지어보는 것도 거울 앞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은 자기를 고치고 더 아름답게 가꾸는 성공의 지혜와 비결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금번 경평노회 주관으로 종교개혁지인 서 유럽을 100명이 탐방하면서 교과서로만 알던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스위스 등을 탐방하면서 느낀 것 하나는 그들이 정말 잘살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중세에 지어진 궁전과 저택들, 대성전과 동상들, 다리와 탑들, 그리고 잘 가꿔진 수목 속에서 오늘날의 빌딩들, 어제와 오늘의 아름다운 공존을 보면서 나를 보는 거울로, 새로운 사명을 깨우는 기회였습니다.
역사가 없는 사람과 건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고 존귀할수록 앉고 있는 수고의 땀과 지혜가의 역사가 번뜩이며,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크고 놀라움으로 각인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모든 마을이 조성되려면 먼저 교회가 세워지고 광장이 만들어지면서 시내를 형성해 왔습니다.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복음을 중심으로 모든 삶이 영위되어졌다는 말입니다.
복음과 더불어 모든 삶이 형성되어 짐으로서 아름다운 나라 사회가 구성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멀어질 때에는 혹은 변질이 되어 갈 때에는 무서운 재앙이 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의 시대를 살펴본다면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복음을 자랑할 만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많은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의 힘 앞에 굴복하고 아부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가진 지혜와 철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을 받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권력과 지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무력한자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과 능력을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복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마치 논증을 하듯이 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 복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군사력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강제적으로 굴복을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내면에서부터 새로운 삶, 생명력이 있는 삶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헬라의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철학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늙은 철학 교수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교수는 무식한 뱃사공에게 묻습니다. 철학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는가? 평생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온 이 뱃사공이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제일 쉬운 문제를 내보지!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가? 질문마다 뱃사공은 모른다는 답만 하는 것입니다. 교수는 뱃사공에게 정말 자네는 아무 것도 모르는 군! 인생을 헛살았어! 라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일기시작 했고, 배가 뒤집힐 듯이 일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불안에 떨고 있는 교수에게 뱃사공은 선생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교수는 난감한 얼굴로 아니 헤엄치는 것은 배우지 못했어.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공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헤엄칠 줄은 압니다 라고 하며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니 헤엄쳐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철학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구원이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울의 외침이요
그 전에 이미 예수님이 자신이 말씀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는 시내 산에서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금식하며 돌비에 새겨주신 말씀을 가져 온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아니 바로 전하기 위하여 개혁자들이 일어 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있었기에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종교의 탈을 쓴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성경본래로 돌아가 지켜 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하였고, 그 신념은 오늘에까지 이르고 많은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그들이 개혁의 현장을 찾아가서 나 자신들을 비추어 보는 고칠 것은 고치고 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짐짝이 실려 다니듯이 다녔지만 저를 보고 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 얼마나 기쁘고 힘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할렐루야!
저는 오늘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바로 전하고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 목회자가 될 것을 기도 할 때에 제 스스로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방향감각을 다시 세우고 나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다른 그 어떤 것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복음입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복음을 위한다는 것이 성공입니다.
분당에서 제법 많은 성도들을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모 목사님은 자신의 부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의 부친은 작은 교회를 섬기던 중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던 중 소천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초라하게 돌아가셨고 소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부흥을 생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하면 영적 거인이고, 작은 교회 목회하면 난쟁입니까?
작은 교회 목회하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목사는 부흥에 대해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게 결코 부흥이 아니다 고 강조했습니다.
부흥은 말씀이 흥왕할 때를 가르쳐 부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 기도 시간에 사람에 매이지 않고 세상의 어떤 능력에 메이지 않는 복음에 매여 복음을 위한 목회자 교회를 다짐하는 은혜로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오늘 이 새벽에 초등학생 중고등 청년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희망을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이 교회도 젊은 세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할 똑똑한 믿음의 세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개혁이 말씀과 더불어 되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라고 하면 루터는 자신의 영적 구원을 갈망하다가 1505년 수도사가 되었지만 그는 죄와 무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한 미사와 고해, 성자숭배, 그리고 각종 고행과 면죄부 구입을 강요했고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타락했고 신부와 사제들 중에는 윤리적으로 부패한 삶을 사는 이가 많았습니다.
루터는 고행의 사닥다리를 통한 특별한 체험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연구를 통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면죄부 구입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는 해괴한 논리 앞에 교인들이 속고 있을 때,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항의하는 항의문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을 95가지로 정리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내 걸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522년에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독일어로 된 신약 성경 번역을 완성했고 이 성경은 유럽 전역과 특별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회유와 갖은 생명의 협박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종교개혁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태로운 때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의 마음이 침체해 있던 1529년에 이 찬송을 작시했습니다. 이 찬송가는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루터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오랜 싸움과 탄압에 지쳐서 실의에 차 있었고 이때 루터는 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전투명령과 같은 내용으로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1.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 할때는 패 할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예수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나라 영원하리라
루터는 자신을 보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보름스시민에게 그는 의회를 통해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황제에게 신의 복음을 박해하는 짐을 지우는 일이 없도록 충고했으며, 성경이나 명백한 이치에 의해 논박당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박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의지로 나아가고 또 나아갔던 신앙 선배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사상가 존 칼빈은 그는 55년이라고 하는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철두철미하게 성경과 하나님에 빠져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가 젊은 날에 집필한 기독교 강요는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하나 지적하면서 성경적 교리에 충실했던 기독교의 불후의 역작이었습니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했던 이유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풍성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새가족반 제자반 사역반 왜 하는 줄 아십니까?
진정한 교리 공부가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세우기가 힘듭니다.
그 다음이 이 책을 읽을 대상은 앞으로 목사가 되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야 할 신학생들과 또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주의 종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주의 종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경은 제쳐두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성경보다 교회를 우선시하고 교회와 교황의 발언과 결정에 우선을 두는 로마가톨릭의 성직자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칼빈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가톨리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전파하려는 개신교회에 대해 광적인 교회라고 오도하고 핍박하였다. 이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판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생명을 내 건 작업이었습니다.
정치와 결탁한 가톨릭교회의 개신교회를 향한 박해와 핍박을 오히려 대항하고 나섰던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신과 사물은 우물 안에서보다 우물 밖에서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우물 안에서 보는 하늘은 조그만 원 하나로 제한시킵니다.
이래서는 안 되고, 이것은 아니다 라고 외친 종교개혁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물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건물은 내가 지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기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합니다.
이 진리로 구원받은 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복음 앞에서 늘 자신을 보고 이스라엘과 교회역사를 거울로 삼아 끊을 것은 끊고 새롭게 추구 할 것은 추구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신앙의 개혁으로 내 교회와 내가정 내 사회가 내 자신이 날마다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아보자!
내 평생 주님의 말씀과 평안을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저는 지난 2주간 10일 여정에 무려 9개국을 순방하는 빡빡한 일정을 보내었습니다. 오고 가는 비행기 편으로 가는데 하루 오는데 하루 그리고 매일 평균 10시간을 타는 버스여행 거의 짐짝같이 실려 다녔습니다. 목사님 사모님들은 그런데도 그 힘듦을 이길 수 있었지만 장로님 특히 부인되는 권사 집사님들은 힘듦을 하소연 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떤 날은 호텔에 10-11시 투숙하여 4시 30분에 기상하여 호텔에서 제공하는 도시락을 싸들고 여행을 계속하였습니다. 매일 하루에 1개국입니다. 프랑스를 제외하고는 그렇습니다.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오스트리아 스위스 헝가리 슬로바키아 폴란드 첵코 그리고 또 독일
왜 그럴 수밖에 없느냐하면 언제다시 올 수 있는 기회를 만들기가 힘들고 짧은 기간 안에 종교 개혁자들의 발자취를 찾아보려고 하는 욕심이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종교 개혁자들의 주제가 무엇입니까?
독일의 루터, 스위스의 츠빙글리. 제네바의 갈빈, 체코의 얀 후스, 영국의 존낙스등이 목숨을 걸고 외친 내용을 요약하면 첫째, 진리의 판단 기준은 교회와 교황이 아니라 오직 성경(Sola Scriptura)이다.
둘째, 오직 그리스도(Sola Christus)의 은총으로 만 구원을 얻고 셋째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의 오직 은혜(Sola Gratia)로 만 받으며, 넷째 구원은 사람의 노력이 아닌 오직 믿음(Sola Fide)으로 만 얻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모든 구원의 계획과 완성은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의 역사이기에 오직 하나님께 만 영광(Sola Deo Gloria)을 돌려야 만 한다는 것입니다.
하나님 주권을 앞세운 종교개혁은 온 성도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성령의 역사하심 속에 교회를 진정한 교회로 거듭나게 했으며 영혼을 살리는 우주적인 개혁의 역사였고 그 배후에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역사였습니다.
역사는 영어로 HISTORY라고 하는데 HE IS STORY입니다.
그의 이야기 곧 그가 바로 하나님의 이야기이며 하나님의 역사의 현장입니다.
종교 개혁자들은 이런 하나님 앞에서 자신과 사명을 본 자들로 지체 할 수가 없기 때문에 그들은 자기들의 생명을 태워 그 진리를 밝히고 모든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보게 한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 진리는 즉 개신교는 구교에서 새롭게 태어난 프로테스탄트라고 만 쉽게 정의할 수가 없습니다.
이 신앙과 개혁은 하나님중심인 초대교회에 그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은 16-17절 이 복음을 내가 부끄러워 아니 하노니 라고 하였으며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들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고 하였습니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 믿음에서 믿음으로 이르게 하고 곧 믿음이 생기게 되며 이 믿음으로 의인은 살게 될 것이라고 외쳤습니다.
내가 거울을 보는 것은 거울 자체를 보려는 것이 아니라 나 자신을 보기 위함입니다.
혹시 이빨사이에 고춧가루가 끼지 안했는가? 넥타이가 삐뚤어지지는 안했는가? 얼굴에 무엇이 묻었지 않았나 곧 거울을 통하여 나를 바로잡기 위함입니다.
거울 앞에서 눈썹을 그리며 립스틱을 바르고, 면도날로 얼굴을 굵어 내리는 것도, 정장을 한 후에 미소를 지어보는 것도 거울 앞에서 가능한 것입니다.
거울 앞에 서는 것은 자기를 고치고 더 아름답게 가꾸는 성공의 지혜와 비결이 숨어있습니다.
그러나 금번 경평노회 주관으로 종교개혁지인 서 유럽을 100명이 탐방하면서 교과서로만 알던 네덜란드, 프랑스 독일, 그리고 스위스 등을 탐방하면서 느낀 것 하나는 그들이 정말 잘살고, 아름다운 환경 속에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특히 중세에 지어진 궁전과 저택들, 대성전과 동상들, 다리와 탑들, 그리고 잘 가꿔진 수목 속에서 오늘날의 빌딩들, 어제와 오늘의 아름다운 공존을 보면서 나를 보는 거울로, 새로운 사명을 깨우는 기회였습니다.
역사가 없는 사람과 건물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크고 존귀할수록 앉고 있는 수고의 땀과 지혜가의 역사가 번뜩이며, 배후에 역사하신 하나님의 섭리가 크고 놀라움으로 각인되어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유럽의 모든 마을이 조성되려면 먼저 교회가 세워지고 광장이 만들어지면서 시내를 형성해 왔습니다.
교회가 세워졌다는 것은 복음을 중심으로 모든 삶이 영위되어졌다는 말입니다.
복음과 더불어 모든 삶이 형성되어 짐으로서 아름다운 나라 사회가 구성되어져 갔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멀어질 때에는 혹은 변질이 되어 갈 때에는 무서운 재앙이 띠를 수밖에 없었던 것을 역사가 증명해 주고 있었습니다.
본문의 사도 바울의 시대를 살펴본다면 당시 사회의 전반적인 분위기는 복음을 자랑할 만 것이 아니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계를 지배하던 로마는 자신들의 군사력과 힘을 자랑하였습니다.
많은 당시의 사람들은 로마의 힘 앞에 굴복하고 아부하고 그것을 자랑하고 소유하기를 원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이라고 자부하는 유대인들은 자신들의 종교적 이상을 자랑하고, 헬라인들은 자신들의 가진 지혜와 철학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복음의 근원이 되시는 예수님은 흉악한 죄인들이 처형을 받는 십자가에 못 박혀 비참하게 돌아가신 것입니다.
고린도전서 1:22-23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유대인들은 십자가를 하나님께 저주받은 것으로 보았습니다.
당시 로마 사회는 권력과 지위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무력한자의 상징인 십자가형을 받는 사람과 능력을 연관시키는 것은 전혀 말이 되지 않는 것이었습니다.
그러기에 얼마든지 이 예수 그리스도와 복음을 믿는다는 것을 부끄러워할 수 있는 분위기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도바울은 복음 부끄럽게 여기지 않는다고 마치 논증을 하듯이 강하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왜 그런 것입니까?
이 복음이야 말로 하나님의 구원이 나타나기 때문입니다.
로마의 군사력이 사람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까? 아닙니다. 강제적으로 굴복을 시킬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그 내면에서부터 새로운 삶, 생명력이 있는 삶을 만들어내지는 못합니다.
그러면 헬라의 인간의 두뇌에서 나온 철학이 사람을 구원할 수 있습니까?
공부를 많이 한 늙은 철학 교수가 배를 타고 강을 건너게 되었습니다. 교수는 무식한 뱃사공에게 묻습니다. 철학이 무엇인지 들어보았는가? 평생 물가에서 고기를 잡아온 이 뱃사공이 알 리가 없는 것입니다. 그럼 제일 쉬운 문제를 내보지! 인생이 무엇인지 아는 가? 질문마다 뱃사공은 모른다는 답만 하는 것입니다. 교수는 뱃사공에게 정말 자네는 아무 것도 모르는 군! 인생을 헛살았어! 라고 안타까워하였습니다. 그런데 그때 바람이 일기시작 했고, 배가 뒤집힐 듯이 일렁거리는 것이었습니다. 상기된 얼굴로 불안에 떨고 있는 교수에게 뱃사공은 선생님, 헤엄칠 줄 아십니까? 교수는 난감한 얼굴로 아니 헤엄치는 것은 배우지 못했어. 라고 대답을 했습니다. 그러자 사공은 나는 아무 것도 모르지만 헤엄칠 줄은 압니다 라고 하며 강물 속으로 풍덩 뛰어들더니 헤엄쳐 사라져 버렸다는 것입니다.
세상철학은 관념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이야기는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철학으로는 사람을 구원할 수 없습니다.
이 복음이야말로 구원이요 사람을 살리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이것이 바울의 외침이요
그 전에 이미 예수님이 자신이 말씀이 육신으로 이 땅에 오셔서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살아서 믿는 자는 영원히 죽지 아니하리라 고 친히 하신 말씀입니다.
더 나아가서 모세는 시내 산에서 생명과 축복의 말씀을 금식하며 돌비에 새겨주신 말씀을 가져 온 것입니다.
이런 복음을 지키기 위하여 아니 바로 전하기 위하여 개혁자들이 일어 난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있었기에 수천 년 동안 내려오던 종교의 탈을 쓴 로마가톨릭교회로부터 성경본래로 돌아가 지켜 살고자 하는 열망을 품게 하였고, 그 신념은 오늘에까지 이르고 많은 신학도들과 목회자들 그리고 성도들이 그들이 개혁의 현장을 찾아가서 나 자신들을 비추어 보는 고칠 것은 고치고 또 힘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저 역시 짐짝이 실려 다니듯이 다녔지만 저를 보고 제 자신이 나아갈 길을 찾아 얼마나 기쁘고 힘이 생기는지 모릅니다.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할렐루야!
저는 오늘 새벽기도 시간에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바로 전하고 복음을 위하여 나아가는 교회가 되고 목회자가 될 것을 기도 할 때에 제 스스로 얼마나 위로가 되고 힘이 되는지 모릅니다.
방향감각을 다시 세우고 나아 갈 수 있었다는 것입니다.
물질과 다른 그 어떤 것을 위함이 아니라 오직 복음입니다.
무엇이 성공입니까? 복음을 위한다는 것이 성공입니다.
분당에서 제법 많은 성도들을 모이는 교회에서 목회를 하는 모 목사님은 자신의 부친의 이야기를 했습니다.
이 목사의 부친은 작은 교회를 섬기던 중 교인들 사이의 갈등을 해결하기 위해 40일 금식기도를 하던 중 소천 받았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초라하게 돌아가셨고 소이 세상 사람들이 말하는 부흥을 생전에 경험해 보지 못했습니다. 대형 교회 목회하면 영적 거인이고, 작은 교회 목회하면 난쟁입니까?
작은 교회 목회하는 게 부끄러운 일입니까?
이 목사는 부흥에 대해 교인이 많이 모이는 게 결코 부흥이 아니다 고 강조했습니다.
부흥은 말씀이 흥왕할 때를 가르쳐 부흥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저는 오늘 새벽 기도 시간에 사람에 매이지 않고 세상의 어떤 능력에 메이지 않는 복음에 매여 복음을 위한 목회자 교회를 다짐하는 은혜로운 시간이기도 했지만 오늘 이 새벽에 초등학생 중고등 청년들이 예배에 참여하는 것을 보고 얼마나 희망을 노래했는지 모릅니다.
이 교회도 젊은 세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말씀과 더불어 함께 할 똑똑한 믿음의 세대들이 일어나야 합니다.
교회는 날마다 개혁이 말씀과 더불어 되어가야 합니다.
종교개혁자라고 하면 루터는 자신의 영적 구원을 갈망하다가 1505년 수도사가 되었지만 그는 죄와 무능력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습니다.
로마가톨릭교회는 구원을 얻기 위한 미사와 고해, 성자숭배, 그리고 각종 고행과 면죄부 구입을 강요했고 시민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읽게 하지 않았습니다.
교황은 타락했고 신부와 사제들 중에는 윤리적으로 부패한 삶을 사는 이가 많았습니다.
루터는 고행의 사닥다리를 통한 특별한 체험과 갈라디아서와 로마서 연구를 통해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산다고 하는 이신칭의 교리를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면죄부 구입을 통해 죄 사함을 받는다는 해괴한 논리 앞에 교인들이 속고 있을 때, 루터는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에 대하여 항의하는 항의문을 로마가톨릭교회의 잘못을 95가지로 정리하여 비텐베르크 대학 정문에 내 걸고 종교개혁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그로부터 7년 후인 1522년에는 당시 금기시되었던 성경 번역에 착수하여 독일어로 된 신약 성경 번역을 완성했고 이 성경은 유럽 전역과 특별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로 건너가 영국과 스코틀랜드 종교개혁의 기초가 되었습니다.
이런 일들로 인해 루터는 로마 가톨릭교회의 회유와 갖은 생명의 협박을 당하게 되었지만 그러나 그는 한 번도 종교개혁의 입장을 굽히지 않았습니다.
오늘 부른 찬송가 585장 내 주는 강한 성이요는 독일 역사상 가장 위태로운 때에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그의 마음이 침체해 있던 1529년에 이 찬송을 작시했습니다. 이 찬송가는 루터가 로마 가톨릭 교회와의 싸움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 루터의 뒤를 따르던 사람들은 오랜 싸움과 탄압에 지쳐서 실의에 차 있었고 이때 루터는 그들의 사기를 돋우기 위하여 전투명령과 같은 내용으로 이 찬송을 지었습니다.
♬1. 내주는 강한 성이요 방패와 병기 되시니 큰환난에서 우리를 구하여 내시리로다
옛원수 마귀는 이때도 힘을 써 모략과 권세로 무기를 삼으니 천하에 누가 당하랴
2. 내 힘만 의지 할때는 패 할수 밖에 없도다 힘있는 장수 나와서 날 대신하여 싸우네
이 장수 누군가 주예수그리스도 만군의 주로다 당할자 누구랴 반드시 이기리로다
3. 이 땅에 마귀 들끓어 우리를 삼키려하나 겁내지 말고 섰거라 진리로 이기리로다
친척과 재물과 명예와 생명을 다빼앗긴대도 진리는 살아서 그나라 영원하리라
루터는 자신을 보기 위해 거리로 쏟아져 나온 보름스시민에게 그는 의회를 통해 장래가 기대되는 젊은 황제에게 신의 복음을 박해하는 짐을 지우는 일이 없도록 충고했으며, 성경이나 명백한 이치에 의해 논박당하지 않는 한 나는 아무것도 취소할 수 없고 또 취소하지도 않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양심에 거슬려 행동하는 것은 죄악이고 위험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이여 도우소서. 아멘이라고 단호하게 말했습니다. 그는 박해나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은 인물이었던 것이다.
그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고 하는 확고한 신앙의지로 나아가고 또 나아갔던 신앙 선배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의 사상가 존 칼빈은 그는 55년이라고 하는 비교적 짧은 생을 살았지만 철두철미하게 성경과 하나님에 빠져 살았던 하나님의 사람이다.
그가 젊은 날에 집필한 기독교 강요는 로마가톨릭의 잘못된 교리들을 하나 지적하면서 성경적 교리에 충실했던 기독교의 불후의 역작이었습니다.
칼빈은 이 책을 집필했던 이유는 일반 성도들에게는 하나님의 진리의 말씀을 교리적으로 풍성하게 알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새가족반 제자반 사역반 왜 하는 줄 아십니까?
진정한 교리 공부가 없이는 그리스도인들을 바르게 세우기가 힘듭니다.
그 다음이 이 책을 읽을 대상은 앞으로 목사가 되어 일평생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고 전해야 할 신학생들과 또 목회 현장에서 말씀을 전하고 성경을 직접적으로 가르치는 주의 종들을 위함이었습니다.
주의 종이 성경에 충실하지 않으면 성경은 제쳐두고 자기의 욕심을 채우기 위해, 그리고 성경보다 교회를 우선시하고 교회와 교황의 발언과 결정에 우선을 두는 로마가톨릭의 성직자와 같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칼빈은 알고 있었습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에 대한 올바른 신앙고백이 있어야 한다. 당시 로마가톨리교회는 바른 신앙을 가지고 바른 신앙을 전파하려는 개신교회에 대해 광적인 교회라고 오도하고 핍박하였다. 이것이 칼빈으로 하여금 이 책의 출판을 서두르게 했던 것이다.
칼빈은 기독교강요를 출판은 당시의 상황에서는 생명을 내 건 작업이었습니다.
정치와 결탁한 가톨릭교회의 개신교회를 향한 박해와 핍박을 오히려 대항하고 나섰던 것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신과 사물은 우물 안에서보다 우물 밖에서 보는 눈을 가져야한다. 우물 안에서 보는 하늘은 조그만 원 하나로 제한시킵니다.
이래서는 안 되고, 이것은 아니다 라고 외친 종교개혁자들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건물이 나를 지켜주는 것이 아니다. 건물은 내가 지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의 말씀을 지켜야합니다. 하나님이 내편이 되기보다 내가 하나님 편에 서야합니다.
이 진리로 구원받은 하님의 백성이요, 하나님의 종입니다.
복음 앞에서 늘 자신을 보고 이스라엘과 교회역사를 거울로 삼아 끊을 것은 끊고 새롭게 추구 할 것은 추구 해야 합니다.
그리고 더 아름다운 신앙의 개혁으로 내 교회와 내가정 내 사회가 내 자신이 날마다 개혁이 되어야 합니다.
그리고 복음으로 승리의 인생을 살아보자!
내 평생 주님의 말씀과 평안을 전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