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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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77회 작성일 2010-09-04 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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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12:6-9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삶이 됩시다.
지난 종교 개혁지 탐방 중에 말로만 듣던 2차 대전 당시 독일 나치의 수용소였던 폴란드의 아우슈비츠를 다녀왔습니다. 쉰들러리스트의 영화의 배경이 되기도 한 곳이었는데 그 영화의 장면이 거기 그대로 현장에 남아 있었습니다. 그 곳으로 향하는 길에 수용소를 향하는 기찻길을 보았습니다. 전 유럽의 유대인, 집시, 소련군 포로, 폴란드 정치범, 정신질환을 가진 정신 장애인. 동성애자. 기타 나치즘에 반대하는 자들을 가축 운반용 화물열차에 태워 이곳으로 운반하였습니다.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수용되었던 붉은 색 벽돌로 된 군 막사들이 즐비하게 줄지어서 있었습니다. 길게 늘어선 고압 전류가 흐르던 철조망과 그리고 높은 망대의 감시초소…….
그 곳으로 들어가니 마치 시간이 멈추어 선 것 같은 기분 그 때의 그 사람들이 그곳에 있는 것만 같았습니다.
독일 군인과 거기에 끌려온 유태인등
이 현장의 참상은 모두가 잘 아실 것입니다. 아직 그대로 존재해 있는 가스실에 실질적으로 들어가 보고 그 옆에 시체 소각하는 기계가 그대로 존재해 있었고 소각장의 굴뚝이 높이 세워져 있었습니다.
아직도 시체 냄새가 나는 것 같습니다.
가스실 벽에는 그 고통을 참느라고 손톱을 벽을 할켰던 자국들이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가스실 입구~이곳이 목욕탕이라 하고 독가스 실은 샤워실의 모양을 하고 있었는데 나치는 학살 피해자들에게 샤워를 하라고 하여 옷을 벗게 한 후 다니 찾아 입을 수 있도록 잘 간수하라고 거짓말을 하고는 가스실에 보내어 학살하였다.
학살 피해자들의 시체는 시체 소각로에서 대량으로 불태워졌는데 하루에 약 1,500-2,000구의 시체가 소각되었고 이들의 옷과 신발은 분류되었다. 또한 수용자들의 머리카락을 잘라 카펫과 가발을 만들었다 아직도 그들이 들어가면서 깍은 머리카락이 엄청난 양이 남아 있고 그들의 소지품 안경 신발 등이 산을 이루었습니다.
가스실 바로 앞에 있는 나이트클럽 건물에는 밤마다 독일 군인들이 춤추며 술을 마신 곳이 있었습니다.
말할 수 없는 인간들의 잔인성을 보며 과연 그들은 어떤 생각들과 즐거움으로 춤추며 술을 마셨을까?
이러한 참혹한 역사의 사실들이 감추어지지 않고 이렇게 벌어진 사실들을 세계만방에 공개하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누가 제일 많이 오느냐하면 가해자인 독일 사람들과 그리고 피해자인 유대인들이라고 합니다.
물론 세계만방의 사람들이 다 찾아가고 있지만 그러나 유독히 오지 않는 민족이 있는데 일본 사람들은 여행코스에 이곳을 제외 한다고 합니다.
아직도 그들은 역사에 대한 진실을 감추고 있으니 역사에 대한 교훈이나 반성이 따르지 않습니다.
진실을 왜곡하고 있으니 그들의 사상이 어떠한 것임을 알게 되고 앞으로 또 어떤 일을 벌여질지 모를 일입니다. 그래서 과거의 일본을 미워하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반성이 없는 것이 더 큰 문제입니다.
독일은 이 사실을 깊이 반성하고 그리고 온 사회에 어떻게 이바지하며 살아야 겠는가를 생각하고 실천하는 교육의 현장이 되었다고 합니다.
다시는 인류를 향한 이런 일을 해서는 안 된다는 큰 교훈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유대인들은 매년 3일간 이곳에 전세를 내어 와서 자신들의 과거의 아픈 역사를 보며 또 다시 굴욕적인 일이 이 민족에게는 있어서는 안 된다는 각오와 의지를 태우고 민족이 하나로 단결이 되고 국력을 키우는 일에 남녀노소 구분이 없이 힘을 합치는 에너지의 분출의 현장이었습니다.
그런데 일본은 이와 같은 사실을 지금도 부인하고 있고 그리고 더 가슴 아픈 일은 우리민족입니다.
일제의 만행에 분을 떨고 일본이라면 거품을 품고 축구도 이겨야하고 무엇이든지 일본에 지지 말아야 한다고 하는 적개심을 가지고 있지만 실상 일제의 만행의 흔적을 부끄러운 일이라고 하여 다시는 기억하고 싶지 않다고 하여 만행의 현장을 다 없애버렸다는 것입니다.
육이오 전쟁도 지금 다 잊어버리고 사는 세대들인데 어찌 일본 식민지 시대의 치욕의 역사는 아예 알 길도 없는 것입니다.
아무런 교훈이나 유익을 가져오지 못한 것입니다.
이같이 사실을 사실로 인정하고 받아드린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모릅니다.
아우수비치의 수용소 현장이 가해자나 피해자나 진실을 드러낼 때에 그 사실이 결코 나쁜 사실로만 남는 것이 아니라 그 일로 새로운 역사를 만들어 간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남겨 놓아 사실을 받아드림으로 새로운 삶을 형성시켜 가는데
우리와 일본은 부끄러운 과거라 하여 감춰버리고 부인 할려고하니 앞으로의 진보가 없는 것입니다.
진리를 시인하고 그대로 받아드려야 할 일이지 부인하고 감춰서는 안 될 일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진리를 부인하지 말고 시인하라는 것입니다.
진리는 무엇입니까? 예수 그리스도시오 그의 뜻이요
오직 그 뜻대로 되어 가는데 그것을 부인하고 어떻게 살아남으려고 하고 어떻게 잘 되고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8-9절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그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을 당하리라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길은 진리를 인정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그 은혜와 능력의 경험은 진리를 인정하는데 있는 것입니다.
고후1:18-20 하나님은 미쁘시니라 우리가 너희에게 한 말은 예하고 아니라 함이 없노라 우리 곧 나와 실루아노와 디모데로 말미암아 너희 가운데 전파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예하고 아니라 함이 되지 아니하셨으니 그에게는 예만 되었느니라 하나님의 약속은 얼마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예가 되니 그런즉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아멘 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되느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이야 말로 일이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를 알려주고 있습니다.
그냥 나 교회 다녀 라는 정도의 제스츄어가 아닐 것입니다.
법정에서 되어진 사건과 사실들 그리고 나 자신을 변호 드러낼 때와 같은 상황입니다.
내 신변에 어떤 일이 벌어 질 지도 모를 상황 앞에서 그분을 향한 신앙 고백입니다.
그 당시 제자들은 끌려가고, 법정에 서고, 감옥에 갇힐 위험이 눈앞에 다다랐으니 그 상황이 되면 두려움에 빠지고 진리를 왜곡되이 하고 감추기도 하고 이런 일이 벌어질 수가 있습니다.
그래도 진리를 드러낼 것을 권면하고 있습니다.
제자들은 왜 그렇게 마음속의 믿음을 겉으로 당당히 드러내지 못하고 무너졌습니까? 두려움 때문이었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잡혀서 매 맞고 십자가에 달려 죽는 것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자기들을 잡아 형벌을 가하고 죽이기까지 할 수 있는 권력을 잡은 자들을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핍박을 받거나 잡히더라도 자기들을 지켜주실 하나님, 억울하게 죽는다 해도 의의 심판을 하시고 부활과 영생을 주실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부족했기 때문에 하나님보다 사람을 더 두려워했던 것입니다.
이런 두려움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사가 하나님의 의지 가운데 있습니다.
두려워하기 전에 아니 두려운 사실이 벌어질지라도 두려움의 이유가 소멸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의지가 내 두려움조차도 주관하고 계심을 아셔야 합니다.
블레셋의 골리앗 앞에 온 이스라엘은 크게 떨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윗은 용기가 백배하여 골리앗 앞에 당당히 서서 큰 소리치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그 공포의 대상 골리앗을 쓰러뜨리고 목을 베어 창에 꽃아 들고 있었습니다.
계속 두려워하는 이스라엘과 두려움의 대상의 목을 잘라 버린 다윗과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두려워하는 이스라엘 왕과 장군과 병사들에게는 진리가 소멸되고 말았습니다.
아예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아예 생각해 내지도 못하였습니다. 알아도 드러내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그 용맹은 진리를 드러냄에 있었습니다.
삼상17:45-47 다윗이 블레셋 사람에게 이르되 너는 칼과 창과 단창으로 내게 나아오거니와 나는 만군의 여호와의 이름 곧 네가 모욕하는 이스라엘 군대의 하나님의 이름으로 네게 나아가노라 오늘 여호와께서 너를 내 손에 넘기시리니 내가 너를 쳐서 네 목을 베고 블레셋 군대의 시체를 오늘 공중의 새와 땅의 들짐승에게 주어 온 땅으로 이스라엘에 하나님이 계신 줄 알게 하겠고 또 여호와의 구원하심이 칼과 창에 있지 아니함을 이 무리에게 알게 하리라 전쟁은 여호와께 속한 것인즉 그가 너희를 우리 손에 넘기시리라
두려움에서도 그리스도를 인정해야 할 이유가 무엇입니까?
만사를 하나님이 어떠한지 알고 계십니다.
하나님을 믿지 못하고 세상을 두려워하게 되는 이유의 하나가 하나님께서 얼마나 세심하게 한 사람 한 사람을 지키시고 돌보시는지를 모르는 데에 있습니다.
6-7절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 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앗사리온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하찮은 참새 앗사리온이란 화폐단위의 하나로서 1데나리온의 16분의 1에 해당하는 돈입니다.
너희에게는 심지어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 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니라.
두 앗사리온에 다섯 마리나 살 수 있는 참새 하나도 잊지 않으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백성 된 사람은 얼마나 지극한 사랑과 정성으로 지키시고 돌보시겠느냐는 말씀입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머리털 숫자까지도 다 세실만큼 세밀하게 심음 소리조차도 그냥 넘기시지 않으신다는 말씀입니다.
내 모든 형편을 하나님은 인식하시고 진리대로 사시면 됩니다.
염려라는 단어를 헬라어로는 메림나오(merimnao)라고 하는데 이것은 나누다(merice)는 말과 마음(nous)라는 말이 합성된 말입니다.
즉 염려는 마음이 나누어지는 것이고 마음이 둘로 나뉘어지니까 마음이 복잡해지는 것입니다.
염려를 영어로는 Worry라고 하는 데 이것은 물어뜯다, 목 졸라 질식시키다 는 뜻인데 이것은 염려가 느린 형태의 자살행위라는 것입니다.
베드로전서 5:7절 너희 염려를 다 주께 맡겨 버리라 이는 저가 너희를 권고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기서 맡겨버린다는 것은 던져버리는 것을 의미합니다.
미국 콜로라도 주에 가면 Royal gorge(로얄고지)라는 곳이 있습니다. 그곳에 400년 된 거목이 쓰러져 있었습니다. 이 나무는 오랜 세월동안 14번이나 벼락을 맞았는데도 끄떡없었던 나무였답니다. 또 그곳에는 겨울이면 눈이 많이 내려서 눈사태가 많이 일어나는데 눈사태에도 잘 견뎠습니다. 그러던 아름드리나무가 넘어진 것입니다. 알고 보니 딱정벌레가 속을 갈아먹기 시작하여 쓰러진 것입니다.
근심과 걱정이 우리의 인생이라는 거목을 한순간 무너뜨릴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그리스도를 시인하고 인정하고 드러내는 삶입니다.
감독 휴허드슨 출연 밴크르스 이안찰스영화 불의전차( Chariots of Fire) 1981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최우수 작품상을 수상 1919년 헤럴드라는 청년이 켐브리지 대학에 입학한다 유태인이자 고리대금업자 아들인 그의 희망은 영국을 대표하는 육상 선수가 되어 유태인에 대한 편견을 없애고 파리 올림픽에서 금메달을 따는 것 드디어 헤럴드는 각종 경기에서 우승을 한 스코트랜드 출신 육상 선수 에릭 리텔 선수와 함께 대표선수가되어 프랑스행 배에 함께 오르게됩니다. 하지만 독실한 신앙인이 에릭은 자신의 출전일이 일요일이라는 것을 알고 출전을 포기한다 리델의 문제를 가지고 회의를 하던 중 어떤 한 임원의 제안으로 리델을 주종목은 아니지만 주일에 경기 일정이 잡히지 않은 400m 경기에 출전시키는 것으로 결정합니다. 리델도 그 결정을 따라 400m 경기에 출전을 합니다. 100m 선수가 400m에 출전 한다는 것은 상식적으로 말이 안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리델이 자기 주 종목이 아닌 400m에 출전하면서 본문의 말씀을 읽는데 8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은 자기 주 종목이 아닌 400m 경기에서 우승합니다. 중요한 것은 이것이 픽션이 아닌 사실이었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실제로 제 8회 파리 올림픽에서 일어났던 실화이었던 것입니다.
100m가 주 종목인 선수가 400m 경기에 출전하여 우승을 한다는 것은 정말 기적과 같은 사실이었습니다.
국가대표로 올림픽에 출전한 선수가 경기가 주일에 잡혔다고 그것을 포기하고 거부한다는 것은 절대로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월드컵 축구 선수가 주일날 경기한다고 안 나가면 어떻겠습니까?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선수가 아니더라도 빅게임을 보기 위해 주일날 경기장에 구경을 가지 않겠습니까?
꼭 예배당에 가서 예배를 드리지 못해도 혼자서라도 하나님께 예배하고 경기에 출전할 수도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하는 사람을 신앙이 없는 사람이라거나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부인한 사람이라고 매도할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여기서 분명한 것은 에릭 리델이 한 행동은 분명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한 행동이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자신의 명예와 체면보다도 더 귀하고 소중한 가치로 온 세계 사람들에게 선포한 것이었습니다.
자기 인생을 걸고 정말 피나게 노력했던 모든 것과 또 자기에게 몰아닥칠 감당할 수 없는 비난과 정죄들을 다 포기하고 하나님 식과 법을 고집한 것이었습니다. 에릭 리델의 신앙은 참으로 위대한 것이었습니다.
그는 정말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하나님을 더 사랑하고 소중히 여길 줄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정말로 많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한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 때문에 영광을 받으셨고 많은 사람들 앞에서 에릭 리델 때문에 높임을 받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에게 경기 전 예언처럼 주셨던 말씀 8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나도 하나님 앞에서 저를 시인하리라는 말씀을 현실로 이루어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에릭 리델을 하나님 나라에서 뿐만 아니라 저가 하나님 때문에 포기한 세상 나라에서도 높여 주셨습니다.
믿음은 사람들 앞에서 하나님을 시인하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편에 서는 것입니다.
믿음은 언제나 하나님 식과 방법을 선택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인정은 사실 내가 하나님의 인정을 받는 일이여 곧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위하는 일이 나를 위한 일인 줄 아셔야 합니다.
인정 나를 위하여 하는 일이라는 글중에
인정한다는 것은 정확히 알지 못하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안다고 다 인정할 수 없는 것이 사람들의 삶일 것입니다
사람과 사람사이에 서로를 인정하지 못하는 것은 마음과 생각 그리고 모든 환경이 다르고 그 모든 것을 알 수 없기에 어쩌면 당연할 것입니다
그러나 인정하지 못하는 중요한 이유 중에 하나는 자신의 생각이 앞서기 때문일 것입니다
할 수 있다면 인정하는 삶을 사세요 아니 인정하는 삶을 살면 평안합니다
있는 그대로를, 보여지는 모습 그대로를 인정하면서 산다면 그곳에는 내 자의적인 생각이 들어 갈 수 없으며
실망을 안하게 됩니다
인정한다는 것은 상대를 먼저 생각하는 것이며 그를 이해하고 사랑해야만 인정할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입장에서 생각하면 사람은 아무도 인정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인정하려는 사람입장에 서면 또한 인정 못할 것도 없는 것이 우리 사람입니다
상대를 인정하지 않으면 상대는 결코 나를 인정할 수 없는 것입니다
나는 인정을 안하고 상대는 나를 인정하기 바란다면 참 이기적인 생각일 것입니다
상대를 인정하는 것은 결국 나를 위해서 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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