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은 극한 부정에서 극한 긍정으로 인도하십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53회 작성일 2010-09-04 10:26본문
열왕기상:19:1-8 하나님은 극한 부정에서 극한 긍정으로 인도하십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킨 모 목사님의 간증 중에 자신이 교회를 지을 때에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왔습니다. 은행들이 다 문을 닫고 직장을 잃고 돈은 없고 공사한 회사에서는 돈을 내라고 하고, 일꾼들은 돈 내라고 벽돌장을 들고 따라오고 여의도에서 마포까지 도망을 쳤는데 그리고 집에 들어오니까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딸아이가 저녁을 못 지었으니까 밥 달라고 울어서 내일이면 어떻게 밥을 만들어 볼 테니까 지금은 밥이 없다고 하니까 밥 줘 밥 줘 그래서 때렸습니다. 내일까지 참으라카는데 뭐냐! 극도의 스트레스에 걸려서 애를 때리니까 우리 집사람이 왜 애를 때리느냐? 나를 못 때리니까 애를 때리느냐? 어린애를 데리고 그냥 친정집으로 가버렸습니다. 혼자 방에 앉아서 살 힘이 없어졌어요. 주님도 온데간데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심정이고 마음에 절망이 너무나 짓눌리므로 이제는 살 필요가 없다고 죽어야 되겠다고 아파트 7층에서 몸을 내밀어서 떨어지려고 했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죽음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죽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벌떼 같은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죽을 만한 용기가 있거든 그 용기로써 살아보라. 안 뛰어 내려도 너는 죽을 것이니까 죽는 것은 언제나 죽을 수 있는데 사는 것은 한번밖에 못산다. 그러므로 살아보라! 그런 벌떼 같은 음성이 들려오면서 제가 다리에 힘은 없고 주저앉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그때 성령께서 말하기를 너희 집사람에게 가서 회개나 하라! 그때 처갓집으로 찾아가서 집사람을 잡고 잘못했다고 용서하고 화해를 하고 용기와 힘을 내어 교회를 지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이세벨이라는 여인의 말 한마디에 겁을 먹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허겁지겁 도망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불의 사자, 능력의 종입니다. 3년 6개월의 가뭄을 해결하고 우상을 섬기던 이들을 섬멸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들과 경쟁을 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신봉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가뭄으로 황폐해졌습니다.
엘리야가 그 바알선지자들을 모두 한곳에 모여서 정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바알이 참신 인지 서로 경쟁을 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알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목 베어 죽이고 18: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니 아합의 병거보다 앞질러 달려갔습니다.
원기 충천한 그러한 엘리야가 지금은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차라리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담대하던 하나님의 종이 왜 이렇게 나약해졌을까요?
이세벨 왕후의 말 한마디에 온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만사가 다 힘겨우니 죽었으면 좋겠다.
사실 엘리야의 고민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민입니다.
돈을 벌다보니 안 벌어져서 죽고 싶다 내가 원하고 싶은 것이 안 되니 죽고 싶다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힘에 겨워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인의 모든 생활은 주를 위하는 것이 전제이기 때문에 비단 목회적인 일이 아니라 일반직에 종사하더라도 다 주의 일이라고 넓게 생각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천직이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나 힘에 겨워 죽겠다는 이런 경험을 자신의 주어진 삶에서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였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가운데서 잘 극복해 나가 죽지 않고 살아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택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왜 이런 상황이 찾아올까요? 당연히 주어진 업무가 나에게 과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신체적 긴장 상태. 이런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심장병·위궤양·고혈압 등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울증은 기분이 우울하고 슬프고 의욕이 없어서 주변에 사람,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상태 그런 우울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임무에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온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잘해 왔는데 ...... 지금은 왜 이럴까?
여태까지는 자신의 능력이 특출하였기 때문이었는가?
무슨 일이든지 감당 할 만한 힘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힘은 그가 소리쳐 갈멜산에서 부르짖던 그 하나님의 이름이었지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왕상18:37-38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역시 이세벨의 살해 협박도 여호와의 이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이름은 이제는 그만입니다.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니 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이 갈멜산의 내용과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4-5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원하는 기도 제목이 죽기를 원하고 자신의 비관을 말하고 그리고는 누워 잤습니다.
이런 엘리야가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절대로 그 누구도 탓 할 수 없고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믿음이 있지만 그런 경험자이며 지금도 로뎀 나무 아래로 들어가 이만하면 족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해 달라는 하나님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자신의 형편 입장만을 주장하고 더 진보적으로 할 수 있음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다 압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여태까지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실 하나님으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 되어야 하는데 그만 지금부터의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다스려야 하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다 하려는 데에, 내가 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잘 될 때에는 내가 참으로 괜찮은 자가 되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게 멸망의 원인입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수성가 했다는 사람입니다.
자수성가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지요
요셉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십니까?
자수성가 했다고 사실 요셉이 만큼 자수성가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할렐루야!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잘 나갈 때 내가 한 것으로 여긴 자는 잘 안 될 때에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상당히 부정적인 존재요 차라리 숨어 버리고 싶고 그리고 죽어 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일은 일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보면 이 만큼 했는데 아직도 멀어서 난 더 이상 못해 모두가 자신이 기준이었습니다.
결코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다가 아닙니다.
이제 엘리야가 회복이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엘리야라 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 것으로 가득한 마음이 삶의 형태가 하나님을 수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어루만져 주면서 먹으라 하니 먹고 자고 또 깨워 먹으라 하니 먹고
아마도 이게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죽으려고 하다가도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이요
찬송 202장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사람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별거 아닌 거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요나 선지자도 죽고 싶어 했는데 요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호박 잎사귀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죽겠다고
사실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것 보니깐 별거 아닌 것 가지고도 죽이더라고요 쳐다본다고 죽이더라고요
결국은 내가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아퍼보니 엘리야의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아픈 이유가보니깐 제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앞선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이겼으면 이세벨도 이기는데 이세벨을 내가 이겨 보려고 하니 열이 나고 마음이 상하고 머리가 아파오는데 영적으로 지니깐 병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저것 내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내 마음에 들어야 삽니까?
하나님 마음에 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마음에 맞추면 되는데 하여튼 로뎀나무에서 죽으면 죽을 수 있겠더라고요
하나님이 죽어라하면 예하고 죽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지 않습니다.
다 큰 자식 그냥 버리겠습니까? 엘리야 그냥 버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버리겠습니까?
아내의 사랑을 받게 합니다. 아프기도 했지만 일부러 더 아픈 시늉을 내니 더 잘해 줍니다.
또 집사님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점점 힘이 나고 용기가 생깁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가만히 이끄시는 데로 먹고 마십시오
그리고 영육 간에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그러면 40주야를 달려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도 좀 더 쉬어야 하는데 금요 주일 새벽기도 나와서 인도하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먹고 자고 해야 하는데 오늘 새벽기도 다녀와서 지금까지 식은 땀 줄줄 흘리며 설교 정리하다가 왔습니다.
핑계 삼아 한 일주일 쉬어야 하는데
하여튼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아내의 사랑 성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엘리야 하나님 사랑이 없었더라면 끝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무서워서 비겁하게 도망쳐 나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아합왕을 폐하고 예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한 바알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의 본거지였던 아람나라의 왕을 폐하고 하사엘을 아람의 새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선택하여 기름 부었습니다. 마지막 세 가지 사명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하이든이 작곡한 곡 가운데 천지창조라는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원래 대본은 영국 작가가 밀턴의 실낙원을 기초로 헨델을 위해 쓰여진 것인데 헨델이 손대지 못했으므로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하이든이 작곡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곡을 감상하다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연주단상에까지 올라와서 무릎을 꿇고 통회하며 선생님 어쩌면 이렇게 환희에 넘치고 영혼을 울리는 곡을 작곡하실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하이든이 저의 곡들은 제가 작곡한 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작곡해 주신 것들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 생각하면 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샘솟아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면 예술가에게는 영감이 주어지고, 사업가에게는 지혜가 주어지고 젊은이에게는 꿈과 소망이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절망과 고통과 가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소망의 빛이, 능력의 빛이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영적인 절망감도, 육적인 피곤함도 이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일으켜 세워지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금은 은퇴를 하셨지만 한국에서 가장 큰 교회로 성장시킨 모 목사님의 간증 중에 자신이 교회를 지을 때에 1973년 1차 오일쇼크가 왔습니다. 은행들이 다 문을 닫고 직장을 잃고 돈은 없고 공사한 회사에서는 돈을 내라고 하고, 일꾼들은 돈 내라고 벽돌장을 들고 따라오고 여의도에서 마포까지 도망을 쳤는데 그리고 집에 들어오니까 먹을 것이 하나도 없고 딸아이가 저녁을 못 지었으니까 밥 달라고 울어서 내일이면 어떻게 밥을 만들어 볼 테니까 지금은 밥이 없다고 하니까 밥 줘 밥 줘 그래서 때렸습니다. 내일까지 참으라카는데 뭐냐! 극도의 스트레스에 걸려서 애를 때리니까 우리 집사람이 왜 애를 때리느냐? 나를 못 때리니까 애를 때리느냐? 어린애를 데리고 그냥 친정집으로 가버렸습니다. 혼자 방에 앉아서 살 힘이 없어졌어요. 주님도 온데간데없고 하나님께 버림받은 심정이고 마음에 절망이 너무나 짓눌리므로 이제는 살 필요가 없다고 죽어야 되겠다고 아파트 7층에서 몸을 내밀어서 떨어지려고 했었습니다. 정말 그때는 죽음이 아름답게 보였습니다. 산다는 것이 너무나 고통스럽고 괴롭기 때문에 죽는 것이 그렇게 편할 수가 없다고 생각해서 죽으려고 하는데 갑자기 벌떼 같은 소리가 귀에 들려오는 것입니다. 죽을 만한 용기가 있거든 그 용기로써 살아보라. 안 뛰어 내려도 너는 죽을 것이니까 죽는 것은 언제나 죽을 수 있는데 사는 것은 한번밖에 못산다. 그러므로 살아보라! 그런 벌떼 같은 음성이 들려오면서 제가 다리에 힘은 없고 주저앉았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하나님, 나는 살지도 못하고 죽지도 못하니 어떻게 합니까?
그때 성령께서 말하기를 너희 집사람에게 가서 회개나 하라! 그때 처갓집으로 찾아가서 집사람을 잡고 잘못했다고 용서하고 화해를 하고 용기와 힘을 내어 교회를 지었었습니다.
오늘 본문은 엘리야가 이세벨이라는 여인의 말 한마디에 겁을 먹고 생명을 부지하기 위해 허겁지겁 도망하는 참으로 안타까운 모습을 보여 줍니다.
엘리야가 누구입니까? 불의 사자, 능력의 종입니다. 3년 6개월의 가뭄을 해결하고 우상을 섬기던 이들을 섬멸한 사람입니다.
엘리야는 바알의 선지자 450명 그들과 경쟁을 했습니다. 바알의 선지자들이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바알을 신봉하게 하므로 하나님께서 진노하사 3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게 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은 완전히 가뭄으로 황폐해졌습니다.
엘리야가 그 바알선지자들을 모두 한곳에 모여서 정말 여호와가 참 하나님인지 바알이 참신 인지 서로 경쟁을 하여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고 18:40 엘리야가 그들에게 이르되 바알의 선지자를 잡되 그들 중 하나도 도망하지 못하게 하라 하매 곧 잡은지라 엘리야가 그들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거기서 죽이니라 바알 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목 베어 죽이고 18:45 조금 후에 구름과 바람이 일어나서 하늘이 캄캄해지며 큰 비가 내리는지라 3년 6개월 동안 내리지 않던 비가 내리게 되었습니다.
엘리야에게 여호와의 능력이 임하니 아합의 병거보다 앞질러 달려갔습니다.
원기 충천한 그러한 엘리야가 지금은 광야로 도망가서 로뎀나무 아래에 앉아 차라리 죽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믿어지지 않습니다.
그렇게 당당하고 담대하던 하나님의 종이 왜 이렇게 나약해졌을까요?
이세벨 왕후의 말 한마디에 온 힘이 다 빠져 버렸습니다.
어느 정도까지 만사가 다 힘겨우니 죽었으면 좋겠다.
사실 엘리야의 고민은 참으로 아름다운 고민입니다.
돈을 벌다보니 안 벌어져서 죽고 싶다 내가 원하고 싶은 것이 안 되니 죽고 싶다가 아니었습니다.
주의 일을 열심히 하다가 힘에 겨워 죽겠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기독인의 모든 생활은 주를 위하는 것이 전제이기 때문에 비단 목회적인 일이 아니라 일반직에 종사하더라도 다 주의 일이라고 넓게 생각해도 괜찮을 것입니다.
모든 직업은 천직이라 하나님이 주신 것이라 하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사람은 누구나 힘에 겨워 죽겠다는 이런 경험을 자신의 주어진 삶에서 느끼게 됩니다.
이런 경험을 하였다고 해서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 가운데서 잘 극복해 나가 죽지 않고 살아나는 길을 택하는 것입니다.
길을 찾는 것이 아니라 택하는 것입니다.
하여튼 왜 이런 상황이 찾아올까요? 당연히 주어진 업무가 나에게 과도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스트레스는 적응하기 어려운 환경에 처할 때 느끼는 심리적·신체적 긴장 상태. 이런 상태가 장기적으로 지속되면 심장병·위궤양·고혈압 등의 신체적 질환을 일으키기도 한다
우울증은 기분이 우울하고 슬프고 의욕이 없어서 주변에 사람, 일에 대해서 관심이 없어지는 상태 그런 우울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어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할 수 없을 때 우울증이라고 합니다.
엘리야는 선지자의 임무에 심한 스트레스와 우울증을 앓고 있다라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자신의 능력에 한계가 온 것입니다.
여태까지는 잘해 왔는데 ...... 지금은 왜 이럴까?
여태까지는 자신의 능력이 특출하였기 때문이었는가?
무슨 일이든지 감당 할 만한 힘이 있었는가? 하면 그렇지 않습니다.
그의 힘은 그가 소리쳐 갈멜산에서 부르짖던 그 하나님의 이름이었지 자신의 그 무엇이 아니었습니다.
왕상18:37-38 여호와여 내게 응답하옵소서 내게 응답하옵소서 이 백성에게 주 여호와는 하나님이신 것과 주는 그들의 마음을 되돌이키심을 알게 하옵소서 하매 이에 여호와의 불이 내려서 번제물과 나무와 돌과 흙을 태우고 또 도랑의 물을 핥은지라
응답하소서 응답하소서 내게 응답하소서 그 하나님의 이름이었습니다.
역시 이세벨의 살해 협박도 여호와의 이름이 필요하였습니다.
그러나 그가 부르는 이름은 이제는 그만입니다.
이제는 한계에 다다랐습니다. 그러니 끝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드립니다.
기도의 내용이 갈멜산의 내용과 사뭇 다르지 않습니까?
4-5절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원하는 기도 제목이 죽기를 원하고 자신의 비관을 말하고 그리고는 누워 잤습니다.
이런 엘리야가 믿음이 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이것이 인간의 모습입니다. 절대로 그 누구도 탓 할 수 없고 아무도 나무랄 수 없습니다
저 역시 믿음이 있지만 그런 경험자이며 지금도 로뎀 나무 아래로 들어가 이만하면 족하겠습니다 라고 하고 있었습니다.
갈멜산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하나님이 아니라 자신이 할 수 없음을 시인해 달라는 하나님으로 바꿔버렸습니다.
자신의 형편 입장만을 주장하고 더 진보적으로 할 수 있음을 말하지 않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할 수 없는 것 다 압니다.
이것으로 끝이 아니지 않습니까?
내가 이렇지만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할 수 있습니다가 되어야 합니다.
여태까지 함께하신 하나님 지금도 함께하셔서 넉넉히 이기게 하실 하나님으로
내가 나 된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가 되어야 하는데 그만 지금부터의 나는 내가 책임져야 하고 보호해야 하고 다스려야 하고 하는 것입니다.
문제는 내가 다 하려는 데에, 내가 한 것으로 여기는 데에, 그러니 죽을 지경인 것입니다.
자 가만히 생각해 봅시다
잘 될 때에는 내가 참으로 괜찮은 자가 되어서 잘되었다고 생각하셨습니까?
대다수의 사람들이 이게 멸망의 원인입니다.
제일 무서운 사람이 자수성가 했다는 사람입니다.
자수성가가 어디 있습니까? 누군가의 도움이지요
요셉이 이런 단어를 사용하십니까?
자수성가 했다고 사실 요셉이 만큼 자수성가한 자가 어디 있습니까?
그러나 그런 말 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의 도우심이라고 할렐루야!
창45:5 당신들이 나를 이곳에 팔았다고 해서 근심하지 마소서 한탄하지 마소서 하나님이 생명을 구원하시려고 나를 당신들보다 먼저 보내셨나이다
잘 나갈 때 내가 한 것으로 여긴 자는 잘 안 될 때에는 내가 어떤 존재가 되겠습니까?
상당히 부정적인 존재요 차라리 숨어 버리고 싶고 그리고 죽어 버리고 싶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이와 같은 부정적인 일은 일이 잘되지 않았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모든 것의 기준이 되고 있기 때문에 부정적이 되는 것입니다.
나의 기준으로 보면 이 만큼 했는데 아직도 멀어서 난 더 이상 못해 모두가 자신이 기준이었습니다.
결코 내가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믿음이 다가 아닙니다.
이제 엘리야가 회복이 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았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엘리야가 엘리야라 할 수 있음은 하나님의 위로를 받기를 거절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자신 것으로 가득한 마음이 삶의 형태가 하나님을 수용하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희망이 있고 역사가 일어납니다.
하나님의 천사가 와서 어루만져 주면서 먹으라 하니 먹고 자고 또 깨워 먹으라 하니 먹고
아마도 이게 하나님의 자녀의 특징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죽으려고 하다가도 아버지의 사랑에 감동을 받는 것이요
찬송 202장 ♬구속의 은혜를 저버리고 어긋난 딴 길로 가다가도 예수의 사랑만 생각하면 곧 다시 예수께 돌아오리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즐겁고도 즐겁도다 주 나를 사랑하시오니 나는 참 기쁘다
사람이 죽고 싶다는 생각이 별거 아닌 거 가지고도 할 수 있는 것 같아요
요나 선지자도 죽고 싶어 했는데 요나4:8 해가 뜰 때에 하나님이 뜨거운 동풍을 예비하셨고 해는 요나의 머리에 쪼이매 요나가 혼미하여 스스로 죽기를 구하여 이르되 사는 것보다 죽는 것이 내게 나으니이다 하니라
호박 잎사귀 별거 아닌 거 가지고 죽겠다고
사실 사람이 사람 죽이는 것 보니깐 별거 아닌 것 가지고도 죽이더라고요 쳐다본다고 죽이더라고요
결국은 내가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의 위로와 사랑을 받으라는 것입니다.
제가 이번에 아퍼보니 엘리야의 생각이 많이 나더라고요
아픈 이유가보니깐 제가 모든 것을 하려고 하는 것이 앞선 것입니다.
갈멜산에서 이겼으면 이세벨도 이기는데 이세벨을 내가 이겨 보려고 하니 열이 나고 마음이 상하고 머리가 아파오는데 영적으로 지니깐 병이 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이것저것 내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 하나도 없는 것이었습니다.
어찌 내 마음에 들어야 삽니까?
하나님 마음에 들면 되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 마음에 맞추면 되는데 하여튼 로뎀나무에서 죽으면 죽을 수 있겠더라고요
하나님이 죽어라하면 예하고 죽을 수 있겠더라고요
그런데 하나님의 사랑이 그렇지 않습니다.
다 큰 자식 그냥 버리겠습니까? 엘리야 그냥 버리겠습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을 버리겠습니까?
아내의 사랑을 받게 합니다. 아프기도 했지만 일부러 더 아픈 시늉을 내니 더 잘해 줍니다.
또 집사님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점점 힘이 나고 용기가 생깁니다.
요3:16-17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이 그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려 하심이 아니요 그로 말미암아 세상이 구원을 받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은 사랑이십니다. 가만히 이끄시는 데로 먹고 마십시오
그리고 영육 간에 예수 안에서 안식을 누리십시오
그러면 40주야를 달려도 피곤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새로운 비전을 보게 될 것입니다.
저도 좀 더 쉬어야 하는데 금요 주일 새벽기도 나와서 인도하는데 식은땀이 줄줄 흘러내리고 다리가 후들후들 떨려요
이게 주님이 원하시는 것이 아니고 먹고 자고 해야 하는데 오늘 새벽기도 다녀와서 지금까지 식은 땀 줄줄 흘리며 설교 정리하다가 왔습니다.
핑계 삼아 한 일주일 쉬어야 하는데
하여튼 사랑을 받으십시오 그 사랑이 힘입니다.
아내의 사랑 성도의 사랑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할렐루야!
엘리야 하나님 사랑이 없었더라면 끝입니다.
죽음의 자리에서 받은 하나님의 사랑이 그에게 새로운 출발을 하게 되었습니다.
지금보다 더 큰 일을 하게 되었습니다.
엘리야는 무서워서 비겁하게 도망쳐 나온 길로 다시 되돌아갔습니다. 아합왕을 폐하고 예후를 새로운 왕으로 세웠습니다. 한 바알신을 섬기던 우상숭배의 본거지였던 아람나라의 왕을 폐하고 하사엘을 아람의 새 왕으로 세웠습니다.
그리고 자신의 후계자로 엘리사를 선택하여 기름 부었습니다. 마지막 세 가지 사명을 완수했던 것입니다.
오스트리아의 작곡가 하이든이 작곡한 곡 가운데 천지창조라는 유명한 곡이 있습니다.
원래 대본은 영국 작가가 밀턴의 실낙원을 기초로 헨델을 위해 쓰여진 것인데 헨델이 손대지 못했으므로 이를 독일어로 번역하여 하이든이 작곡했는데 어떤 사람이 그 곡을 감상하다가 너무나 감동한 나머지 연주단상에까지 올라와서 무릎을 꿇고 통회하며 선생님 어쩌면 이렇게 환희에 넘치고 영혼을 울리는 곡을 작곡하실 수가 있었습니까라고 물었더니 하이든이 저의 곡들은 제가 작곡한 곡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친히 작곡해 주신 것들입니다. 다만 저는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만 생각하면 제 영혼 깊은 곳에서부터 환희가 샘솟아 견딜 수가 없게 됩니다
하나님의 사랑만 생각하면, 하나님의 은혜만 의지하면 예술가에게는 영감이 주어지고, 사업가에게는 지혜가 주어지고 젊은이에게는 꿈과 소망이 주어지고, 어떤 이에게는 절망과 고통과 가난과 시련도 이겨낼 수 있다는 소망의 빛이, 능력의 빛이 주어지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 은혜의 힘으로 영적인 절망감도, 육적인 피곤함도 이기고 하나님의 온전한 자녀로 일으켜 세워지는 은혜가 충만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