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 안에 삶의 만족과 처세법이 있습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66회 작성일 2010-11-01 10:18

본문

빌립보서 4:10-13 예수 안에 삶의 만족과 처세법이 있습니다.
추석이 다가오는데 집집마다 소한마리씩은 잡아야 합니다. 소는 사람에게 에너지와 영양분을 공급합니다. 소한마리는 그 부위를 대체로 15가지로 나뉘어져서 사람들에게 여러 가지 맛을 내며 영양을 주지 않습니까? 여러분은 각 부위를 맛보아 알 수 있을 것입니다. 1. 등심은 소의 어깨선 윗부분 살. 고기 사이에 하얀 기름이 대리석 무늬처럼 들어있는 꽃등심이 가장 맛있다. 알맞은 요리는? 불고기, 로스구이, 샤브샤브, 스테이크 2. 안심은 소의 등뼈를 따라 안쪽에 양쪽으로 나란히 붙어있는 부위가 안심. 소의 여러 부위 중에서 가장 연하고 지방이 적어 담백하며 나름의 독특한 맛이 난다. 알맞은 요리는? 스테이크, 볶음 요리 3. 채끝 살은 우둔 옆의 부위로 안심을 에워싸고 있다. 알맞은 요리는? 찜, 국, 찌개, 전골 4. 사태은 소 앞다리 부분의 살. 소의 부위 중 운동량이 많은 데 속하는 부위이기 때문에 힘줄이 있고, 아교질이 많아 오랫동안 익혀야 한다. 아롱사태라고 부르는 부위는 얇게 썰어 구우면 맛있다. 알맞은 요리는? 찜, 편육, 맑은 장국, 스튜 5. 양지머리는 소의 가슴과 배 부위를 말하며 양지머리, 차돌박이, 업진살, 치마살 등으로 나뉜다 알맞은 요리는? 편육, 육개장, 장조림, 스튜 6. 우둔살/홍두깨살은 소의 엉덩이 부위로 알맞은 요리는? 육회, 육포, 조림, 맑은 장국 7. 갈비는 갈비뼈를 감싸고 있는 살로 한국인들이 좋아하는 부위다 알맞은 요리는? 구이, 찜, 탕 8. 선지는 소의 피 알맞은 요리는? 국 9. 잡뼈 알맞은 요리는? 된장국 및 각종 찌개 국물 10. 사골/도가니사골은 소의 뼈, 도가니는 무릎 뼈로 가장 많이 쓰이는 곰국의 재료이다. 11. 쇠족/쇠꼬리/쇠머리 알맞은 요리는? 곰국 꼬리로는 찜을, 머리로는 편육을 하기도 한다. 쇠족/쇠꼬리/쇠머리의 장점은? 사골이나 도가니에 비해 결합조직이 많아 곰국을 끓이면 진한 맛이 난다. 어떻게 맛을 낼까? 너무 끓이면 아교질이 많이 빠져나와 엉기니, 너무 오래 고면 안 된다. 푹 삶아 뼈는 건지고, 살은 먹기 좋은 크기로 뜯어 곰국 건지로 쓴다. 12. 곱창 알맞은 요리는? 구이, 전골, 곰국 양 소의 위 알맞은 요리는? 곰국, 구이, 부침 13. 천엽 소의 3번째 위 알맞은 요리는? 회, 전 14. 혀 알맞은 요리는? 소금구이, 편육 가죽 가방 구두등 사람의 유용한 생활 용품으로 만들어집니다. 분뇨는 퇴비 그름 또는 에너지로 사용합니다.
생각만 해도 군침이 돕니다. 어디 버릴 것이 하나 없습니다.
우리 예수님이 그러하십니다.
사53:7 그가 곤욕을 당하여 괴로울 때에도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음이여 마치 도수장으로 끌려가는 어린 양과 털 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양 같이 그의 입을 열지 아니하였도다
사53:4-6 그는 실로 우리의 질고를 지고 우리의 슬픔을 당하였거늘 우리는 생각하기를 그는 징벌을 받아 하나님께 맞으며 고난을 당한다 하였노라 그가 찔림은 우리의 허물 때문이요 그가 상함은 우리의 죄악 때문이라 그가 징계를 받으므로 우리는 평화를 누리고 그가 채찍에 맞으므로 우리는 나음을 받았도다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먹고 마시고 하나도 버리지 말아야 합니다.
요6:53-57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인자의 살을 먹지 아니하고 인자의 피를 마시지 아니하면 너희 속에 생명이 없느니라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영생을 가졌고 마지막 날에 내가 그를 다시 살리리니 내 살은 참된 양식이요 내 피는 참된 음료로다 내 살을 먹고 내 피를 마시는 자는 내 안에 거하고 나도 그의 안에 거하나니 살아 계신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시매 내가 아버지로 말미암아 사는 것 같이 나를 먹는 그 사람도 나로 말미암아 살리라
이번 명절에는 소만 잡아 배불리면 잠시잠깐 이지만 예수님으로 먹고 마시는 잔치가 되시면 영원히 만족하게 되실 것입니다.
무신론자로서 변호사였던 클래렌스 대로우(Clarence Darrow)가 미국의 경기가 아주 나빴을 때 시카고 남부 지역에 있는 흑인 형제들과 대화할 수 있는 기회를 갖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아주 궁핍한 환경에 있었기 때문에 하루하루 간신히 연명할 정도로 어려운 시절을 보내고 있었던 사람들이었지만 모두 환한 얼굴로 찬송을 부르는 모습에 대로우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대로우는 묻기를, 이렇게 어려운 가운데도 당신들은 모두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다. 사실 그 어떤 사람도 당신들처럼 행복한 모습으로 노래 부를 수는 없답니다. 도대체 이 어려운 환경 가운데 어떻게 노래를 부를 수 있습니까? 이 질문에 어떤 여자 한 분이 큰 소리로 대답했습니다. We got Jesus to sing about! 우리는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대답에 많은 사람들이 That's right! 하면서 맞장구를 쳤습니다. 대로우는 기가 막혀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들은 비록 비참한 환경 속에 빠져 있었지만 자기들이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여전히 기쁨으로 노래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모두 찬양할 수 있는 예수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환난 중에도 기뻐하고 감사하고 자족할 수 있습니다.
우리의 감사와 자족은 저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의 구주 예수 그리스도로부터 오는 것입니다
합3:17-18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본문에서도 사도 바울은 11절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이 만족이요 처세술이 되십니까?
자족은 만족하다는 말로 표현 할 수 있습니다. 만족은 곧 행복이지 않습니까?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모두가 만족 즉 자족하는 것, 행복에 대하여 관심이 많았습니다.
여러분은 만족하십니까? 별로 만족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아마도 내 삶이 만족하고 싶고, 언제나 나는 만족 할 것인가?
자족은 동양의 경행록이라는 책에 지족가락(知足 可樂)이요 무탐즉우(無耽卽憂)라고 족한 줄로 알면 아주 기쁘고 욕심을 부리면 근심만 더한다, 탐욕이나 탐심, 욕심을 물리치고 자족하면 기쁨의 행복을 누린다는 자족의 강조입니다.
불교도 이 세상에서의 온갖 번뇌를 버리고, 수행을 통하여 깨달음으로써 부처가 되는 것입니다. 번뇌는 모든 사람에게 본성적으로 있는 오욕(재물욕, 명예욕, 식욕, 수면욕, 색욕) 칠정(기쁨, 노여움, 근심함, 두려워함, 사랑함, 미워함, 욕심)때문에 오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그 번뇌를 이겨내어 수행하여 도달하는 경지가 자족이라고 가르칩니다.
서양의 헬라 철학자들 중에서도 스토익 학파에 속하는 철학자들은 도덕과 윤리 면에서 사람이 도달해야 할 최고의 경지를 자족 이라고 여겼습니다.
어떻게 하면 자족하게 되는가, 그들은 욕망과 감정을 제거해 버리는 것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불교의 가르침과 비슷합니다. 욕망과 감정을 온전히 없애버리는 것입니다.
이 철학의 가르침은 컵이 하나 깨어졌을 경우, 그까짓 컵하나 깨어지는 것, 신경 꺼, 그것에 내 감정이 지배되어서는 안 돼. 다음에 애완동물이 죽었습니다, 마음이 아프지만 어쩔 수 없지, 사람이 죽는 것 보다 낫지 않아, 신경 꺼. 그러다가 가장 가까운 가족에게 불행한 일이 생겼습니다, 어쩌겠나, 이겨내야지, 신경 꺼! 그렇게 욕망이나 감정을 지배해서 무관심의 상태에 까지 이르는 것을 자족이라고 가르쳤습니다.
그런데 이런 동양이나 서양의 자족에 대한 가르침에는 해결되지 않는 문제가 남아 있습니다. 사람은 목석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사람의 욕망을 완전히 없애거나 감정을 완전히 죽일 수 없다는 것입니다.
또한 인간의 노력이나 의지만으로는 욕망이나 감정을 완전히 지배하고 다스리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11절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12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자족, 나아가 일체의 비결을 배웠기에 지금 자족하다는 간증입니다.
바울이 어떻게 자족할 수 있었는가요?
바울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있습니다. 감옥살이는 결코 쉬운 형편이 아닙니다.
그런데 감옥살이 때까지 바울 사도가 살아온 과거도 결코 순탄하지 않았습니다.
고전4:11-13 바로 이 시각까지 우리가 주리고 목마르며 헐벗고 매 맞으며 정처가 없고 또 수고하여 친히 손으로 일을 하며 모욕을 당한즉 축복하고 박해를 받은즉 참고 비방을 받은즉 권면하니 우리가 지금까지 세상의 더러운 것과 만물의 찌꺼기 같이 되었도다
그런데 바울 그 가운데서 자족을 배웠다고 증거합니다.
바울은 결코 구원받은 후 천사가 된 것이 아닙니다. 우리와 똑 같은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바울이 자족할 수 있었던 비결은 무엇이었던가요?
13절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것입니다.
그 자족의 핵심은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입니다.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입니다.
곧 예수님이 자족 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시기에 자족할 수 있었습니다.
내가 참아서 내가 관심을 가지지 않고 목석같이 무관심해서 자족하는 것이 아니라 자족하는 능력으로 자족하는 것입니다.
왜 예수님이 만족이요 처세술이 되십니까? 하나님은 대처 할 수 있게 하는 능력이 있으십니다.
바울이 감옥에서 쓴 서신으로 유명한 빌립보서를 읽으면 가장 자주 나오는 말씀은 기뻐하라는 말입니다.
빌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빌4:4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2:17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빌1:18 그러면 무엇이냐 겉치레로 하나 참으로 하나 무슨 방도로 하든지 전파되는 것은 그리스도니 이로써 나는 기뻐하고 또한 기뻐하리라
한마디로 표현하면 기뻐 죽겠다는 말입니다.
그런데 그가 당시 처해 있던 상황은 결코 감사와 기쁨이 넘치는 상황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로마 감옥에 갇혀 언제 풀려 나올지 모르는 비참한 신세였습니다. 무엇보다 끊임없이 밀려드는 고독감과 싸워야 했고, 압제자들의 핍박과 멸시와 조롱을 감당해야 했습니다.
그런데 바울은 그런 상황 속에서 기뻐하라고 외치고 있습니다.
어떠한 형편에서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노라고 말하고 있습니다.
어떤 환경의 지배도 받지 않고 항상 마음속에 누릴 수 있는 이 기쁨이 바로 자족입니다.
이 자족을 예수님께 배우고 그 능력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바울의 경험에서 얻은 확신이었습니다.
때문에 주님의 능력만 받으면 어떤 환경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누구든지 예수님으로 이 은혜를 받고 살아 갈 수 있습니다.
믿음으로 감당하려고하면 됩니다.
왜 사람들이 만족해하지 못합니까?
흔히 우리는 불만족 하면 숱한 실패를 겪거나 좌절을 맛 본 사람이 가지는 감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실제로 불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은 희한하게도 자신이 원하던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거나 불만이나 좌절감을 크게 맛보지 못한 경우가 많았다고 합니다.
사람들은 왜 그토록 원하는 것을 얻고도 좌절감을 느끼는 것일까?
왜 사람들은 끊임없이 남과 자신을 비교하는가?
불만족이라는 감정은 아이러니하게도 무수한 갈등과 실패를 겪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자신이 원하는 것을 성취하고, 갖고 싶은 것을 손에 넣은 사람일수록 심했다고 합니다.
이상하지요
사람들은 자신이 원했던 일을 하고, 집을 사고, 승진을 하고, 더 높은 자리에 올라 갈수록 자신이 이루어 놓은 것들을 그 상황을 즐기기는커녕 오히려 불편해 했으며, 항상 뭔가 부족하다는 생각에 시달린 답니다.
목표를 달성하고 원하는 것을 갖게 되면 만족하는 것도 잠시, 곧바로 다음 해야 할 일을 찾았고, 그것이 끝이 아니라고 생각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아직 충분하지 않다며 더 큰 만족을 좇았는데 결코 그들의 성장과 변화가 충분치 못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만족이 결코 성취나 소유의 문제가 아니라는 결론을 내리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사람들이 성품에서 나타나는 낮은 자존감 때문에 끝없이 불만족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자기 존중감이 낮거나 외부에서 인정을 구하고, 칭찬을 받아들이는 과정에서 상처를 받았을 때 만족을 느끼기란 쉽지 않다고 합니다.
환경여건은 모든 것이 갖추어져 남 보기에는 아주 자존감이 높은 사람이지만 실질적으로 많은 열등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 때 불만족이 하나의 습관이 되고 성격으로까지 굳어져 버리는데, 이 때문에 충분하다는 감정을 가질 수 없게 만들고 만족할 줄 모르게 만드는 것이라는 것입니다.
자존감은 사람의 소유와 신분의 고하와 상관이 없이 실력이 없으면 불만에 휩싸이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이 자존감 때문에 불만족한 상태의 삶을 계속하는 것이 합당한 것일까요?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면서 십자가를 전인격적으로 체험하는 거듭남이 없이는, 우리는 이러한 성품을 결코 떠날 수가 없는 것입니다.
고전 15:31 형제들아 내가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서 가진 바 너희에 대한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노니 나는 날마다 죽노라
사도 바울은 자랑은 내 자존감이 죽고 그러면 예수님의 자존감이 사는 것입니다.
나는 내게 능력주시는 하나님을 믿기 때문에, 불만에 휘둘리지 않고 궁핍에도 처할 수 있고, 풍요에도 처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배고픈 곳도 갈 수 있고, 배부른 곳도 갈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하나님께 요구했습니다, 쌀 항아리도 채워주시고 과일 광주리도 채워주시고, 고기 상자도 채워주세요. 하도 졸라대서 하나님이 그 요구를 들어주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은 항아리를 자꾸만 키웁니다 그리고 또 채우기 시작합니다. 그러다가 어느 듯 죽는 날이 가까워오게 된 것을 알았습니다. 그제야 문득 채우려고만 쫓아다닌 자신의 모습을 깨닫고 하나님께 항의 했습니다 하나님, 이렇게 거지처럼 채우기만 하며 살아오도록 왜 내버려두셨습니까? 한번도 제대로 써보지도 못하고 그건 내 탓이 아니라 네 탓이니라. 진작에 바울처럼 자족을 배워 알았다면 그렇게 살지 않았을 것을! 하나님의 대답입니다.
딤전6:6-10 그러나 자족하는 마음이 있으면 경건은 큰 이익이 되느니라 우리가 세상에 아무 것도 가지고 온 것이 없으매 또한 아무 것도 가지고 가지 못하리니 우리가 먹을 것과 입을 것이 있은즉 족한 줄로 알 것이니라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세상에 태어날 때 우리의 몸 이외에 가지고 온 것이 있었던 분이 계신가요?
사실 벌거벗은 몸도 그냥 주어진 선물이었습니다.
그 몸을 자신의 돈으로 산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선물로 받은 맨 몸으로 이 땅위에 태어났습니다. 그런 후 일정한 기간을 살다 그 몸을 선물로 주셨던 하나님이 부르시면 떠나가는 것입니다.
일정한 기간이라는 일생도 또한 하나님이 선물로 주시는 것입니다.
그 기간 동안에 자족하며 사는 것은 모든 것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예수님으로 만족하며 살아가십시오 그러면 만족하게 사실 것입니다.
일찍이 다윗은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노래하지 않았습니까?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고 하였습니다.






































































































































































Total 914 건 | 1 / 92 page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