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정으로 사모하고 돌아가야 할 고향은 천국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625회 작성일 2010-11-01 10:18

본문

히브리서 11:13-16 진정으로 사모하고 돌아가야 할 고향은 천국입니다.
한민족의 대이동이 시작되었습니다. 명절이 되면 많은 사람이 고향을 찾습니다. 매년 통계를 보면 약 3,000만 명이 이동을 한다 합니다.
명절이 되면 고향에 대한 그리움과 향수가 더욱 간절합니다.
내가 태어났고 어릴 적 추억이 있는 곳, 부모 형제들의 혈육의 정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어 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입니다.
동물도 마찬가지, 특히 연어는 산란과 죽음을 위해 반드시 회귀하는 본능이 있습니다. 남대천이나 오십천 같은 동해안 쪽의 강에서 부화된 연어가 자라면서 망망대해 태평양, 수천 키로 떨어진 알래스카까지 이동하여 삽니다. 그러나 반드시 태어난 곳으로 돌아옵니다. 오는 도중 전과 달리 댐과 폭포가 생기고, 그 길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지만 포기하지 않고 역류하는 물을 어렵게 헤엄쳐 태어난 하천에서 산란과 죽음을 맞이합니다.
그런데 요사이는 고향보다 더 가고 싶은 좋은 곳이 생겨 고향을 가는 둥 마는 둥 하고 있습니다.
국내외 휴양지로 여행을 갑니다. 앞으로는 고향이 없어지지 않나 하는 생각이 되어 집니다.
제부터도 고향이 벌써 없어졌어요 부모가 계시지 않으니깐 말입니다.
집으로 들어가도 자녀들이 없으니 내 집이다 하는 기분이 들지를 않습니다.
이번 명절에는 캐나다 계시는 누님이 13년 만에 한국에 오셨는데 모시고 콘도나 하루 갔다 올까 생각입니다.
그래서 저는 이 땅에 고향이 없어진지 오래 되었습니다.
오늘도 하숙집에 들어왔구나 실상 우리네 삶은 그 어디나 완전히 정착 할 곳이 아닙니다.
13하-14절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본문에도 본향, 고향에 대한 이야기가 나옵니다. 이 고향은 이 땅에 있는 고향이 아니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이라는 진짜 고향은 사람도 부모 조상이 계시는 이 땅이 아니라 그것이 진짜 고향이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지만 아브라함은 고향을 떠나온 지 한 번도 갈대아 우르, 지금 이라크 지역이라고 합니다.
아브라함은 돌아가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 당시 아브라함이 떠나야만 했던 우르가 얼마나 좋은 곳인 줄 아십니까?
보통 믿음을 가지고는 떠나지 못합니다. 그가 하나님을 믿으니 그 곳을 떠났던 것입니다.
우르는 이라크의 수도인 바그다드에서 남쪽으로 350km 정도의 먼 거리에 있는데 아브라함 시대 이전에는 세계에서 가장 화려한 성읍으로 토지는 매우 비옥하고 주민의 생활은 부유하였으며 농업, 공업, 어업의 중심지였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당시 가장 번성했던 살기 좋은 우르를 떠나도록 명령하였고 아브라함은 그 약속을 믿고 생활의 터전인 우르를 떠나 약속의 땅인 가나안으로 들어왔다.
가나안은 모든 조건에서 우르와는 비교할 수 없는 사람이 살기에 적합하지 못한 곳이었다.
그러나 훗날 역사는 무엇이 하나님이 축복하신 땅인지를 보여주셨다. 곧 바벨론과 함께 아브라함 당시 그렇게 번창하던 메소포타미아 문명의 한 중심에 있던 우르는 역사의 흐름 속에 파괴되고 오랜 세월이 지나는 중에 사막의 모래에 묻혀 버리고 말았다. 우르의 대표적인 유적은 유네스코 지정문화재이기도 한 지구랏트이다 우르의 지구랏트에서 불과 100여m 정도에는 아브라함의 집터가 있고 그 옆에는 왕들의 무덤이 있다. 그 옛날 아브라함이 하나님의 부름을 받고 고향을 떠난 우르는 오늘날 인류 최초의 문명의 발생지였던 찬란한 문명은 사라지고 그나마 남아있는 유적은 이라크 전쟁으로 다시 한 번 파괴를 당했다. 이런 우르의 폐허 속에서 하나님을 떠난 문명은 결코 영원하지 못함을 말하지 않습니까?
아마 아브라함이 이 땅의 고향만을 고집했다면 이슬람 사람이 되었을 것 같습니다.
수니파냐 시아파야 할 것입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이스라엘의 믿음의 조상이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는 진정한 고향이 어디인지를 알고 있었습니다.
15-16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사도바울은 주님과 함께 하는 영원한 천국 본향이 있음을 말합니다.
고후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느니라
예수님께서도 본향에 대하여 말씀하셨습니다.
요14:2-3 내 아버지 집에 거할 곳이 많도다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일렀으리라 내가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위하여 거처를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
여기에서 말하는 거처는 엄밀히 뜻을 보면 팔레스로 중세 봉건주의시대 영주가 사는 곳입니다.
왕에 버금가는 귀족들이 사는 곳, 청와대나 뉴욕, 런던시장이 사는 공관과 같은 곳입니다.
그러므로 본향은 이 땅에 있는 것이 아니요 그리고 또한 이 땅에서 만족을 얻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사람들을 부르시면서 사람들이 집착하는 고향을 떠나라고 하셨습니다.
믿음의 조상으로 부름 받은 아브라함을 부르신 말씀을 보면 먼저 하신 말씀이 바로 고향을 떠나라는 것입니다. 창12:1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창12:2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애굽에서 종살이 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출애굽하여 갈 곳은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입니다.
야곱 당시 양식을 구하려 내려 갔다가 애굽에서 요셉이 총리가 되어 그 곳에서 대접받고 영원히 잘 먹고 잘 살줄을 알았지만 그곳은 행복의 땅이 아니라 고통의 땅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약속의 가나안 땅을 사모하며 부르짖었다고 하였습니다.
그 땅은 그들의 조상 아브라함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하나님이 지시한 그 땅이 엇습니다.
출3:9-10 이제 가라 이스라엘 자손의 부르짖음이 내게 달하고 애굽 사람이 그들을 괴롭히는 학대도 내가 보았으니 이제 내가 너를 바로에게 보내어 너에게 내 백성 이스라엘 자손을 애굽에서 인도하여 내게 하리라
그들의 삶의 모든 것이 있는 고향인 애굽을 떠나야만 이스라엘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이스라엘 백성에게 고향인 애굽은 죄악과 우상의 도시입니다. 그곳에서 하나님을 바로 섬길 수가 없습니다. 그곳에서 하나님도 다른 우상의 하나로 생각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므로 200만 이스라엘은 고향인 애굽을 떠나 하나님의 선민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부름 받은 제자들은 고향을 떠났습니다.
마4:18-22 갈릴리 해변에 다니시다가 두 형제 곧 베드로라 하는 시몬과 그의 형제 안드레가 바다에 그물 던지는 것을 보시니 그들은 어부라 말씀하시되 나를 따라오라 내가 너희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거기서 더 가시다가 다른 두 형제 곧 세베대의 아들 야고보와 그의 형제 요한이 그의 아버지 세베대와 함께 배에서 그물 깁는 것을 보시고 부르시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예수님의 부르심을 입었을 때에 제자들은 자기들이 붙들고 있었던 것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습니다.
부친과 배와 그물을 버린 것은 곧 고향을 버린 것입니다. 어쩌면 배와 그물은 그들이 지금까지 떠나지 못했던 것입니다. 어려서부터 그들의 놀이터였고, 자라서는 그들의 삶의 자리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부름을 받고 그 모든 것을 버리고 떠났습니다.
예수님이 고향을 무시하라고 한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고향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을 보면 더 확실하게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서 제자들은 고향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그 고향은 옛 삶의 방식과 옛 가치관과 옛 생활 그리고 혈육에 매여 있는 삶입니다.
하나님은 가정을 만드실 때에 아주 중요한 말씀을 하나 하셨습니다.
창2:24 남자가 부모를 떠나 그의 아내와 합하여 둘이 한 몸을 이룰지로다
그런데 자꾸 부모를 떠나라고 했는데 이걸 떠나지 못하도록 얽어 메이게 하면 안 됩니다.
올 명절에도 이것 때문에 싸우는 가정들이 많이 있을 것입니다.
명절이혼이 생기고 형제간에 죽은 조상 제사 때문에 효도하니 불효하니 하고 칼부림 일어나고 이거 안 됩니다. 형제자매 가족들이 모여 즐겁게 위로하고 힘을 주고 격려하고 도와주는 장으로 안부를 묻고 이런 장이 된다면 너무 좋을 것인데 차라리 만나지를 않았더라면 하는 일은 만들지 말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동양의 문화는 혈육적인 문화가 되어 설날 추석입니다.
그러나 서양 기독교 문화는 부활절 추수감사절 성탄절 문화입니다.
이때에 예수 그리스도를 중심하여 즐기는 문화입니다.
그러니 조상 문제 혈육 문제 때문에 싸우는 일이 없습니다.
우리나라도 예수 문화로 바꿔지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봅니다.
본향을 향해 돌아갈 준비를 하는 삶을 삽니다.
1980년 봄 프랑스의 부르세 병원에서 프랑스가 자랑하는 세계적인 철학가 사르트르가 입원했습니다. 병명은 폐수종이었습니다. 특히 그는 자유라는 이름하에 수많은 글을 발표해 많은 사람들에게 깊은 감동과 교훈을 주었습니다. 그런 사르트르였습니다만 병원에 한 달 가까이 있는 동안, 소리를 지르고 발악을 하고 미치광이처럼 고함을 쳐 댔습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 때문이었습니다.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를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물어 보지 못했다고 합니다. 무서워서 한 세계를 풍미하며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사르트르는 그렇게 소리 지르고 발악을 하다가 1980년 4월 16일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뒤 프랑스 언론들이 떠들어댑니다. 사르트르가 왜 그렇게 죽어야 하는가? 자유를 그렇게도 외치던 그의 마지막이 그토록 비참한 이유가 무엇인가? 어떤 독자가 신문사에 투고를 해서 이런 기사가 실렸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 비참했던 이유는 그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 혈육만 따지고 고향 고향만을 세상만을 고집하던 자들은 죽음이 올 때 참 난감합니다.
자기를 누가 오라고 하는 데가 없습니다.
그리고 갈 곳도 없습니다. 오직 한군데만 열려있는데 지옥입니다.
그러니 죽음은 생각하기도 싫고 노후의 살생각만하고 노후 대책만 열심히 했지 죽음에 대한 지식도 준비도 없었으니 죽음이 예고도 없이 덜컥 찾아오니 미칠 것 아닙니까?
프랑스가 사르트르를 자랑했다면 독일에는 본회퍼라는 신학자가 있습니다. 그는 사르트르보다 앞서서 세계 대전 중 독일 수용소에서 나치에 항거하다가 죽었습니다. 어느 날 간수가 그의 감방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는 직감적으로 마지막 순간이 왔음을 알고, 함께 있던 감방 동료들에게 형제 여러분! 나에게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 일은 마지막이 아닙니다. 시작입니다. 주께서 나를 위해 예비하신 집으로 갑니다. 우리 다시 만날 때까지 안녕히 계세요 그리고 감방을 나섰습니다. 그 모습을 본 모든 사람들은 그를 뒤덮고 있는 기쁨과 평안을 보았고 깊은 감동을 받았다고 합니다.
사르트르와 본회퍼의 차이가 어디에 있습니까? 무신론자와 유신론자의 차이일 것입니다. 하나님 없이 살아가는 사람과, 하나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돌아갈 고향이 없는 사람과, 돌아갈 고향을 준비한 사람의 차이일 것입니다.
한국에 제자 사역의 목회를 정착시킨 모 교회 원로목사님이 72세에 소천을 하셨습니다.
그는 몇 년 전 폐암을 수술 받아 회복되어 잘 계시다가 한 달간 중환자실에 계셨습니다.
그의 어록을 살펴보면 그가 얼마나 본향에 대한 삶을 이 땅에서 잘 살았는가를 말해 주고 있습니다.
그의 아들에게 아버지는 하나님께 지난 몇 년 간의 그 극심한 고통 속에서도 살려달라고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그랬습니다. 아버지는 결코 그렇게 기도하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70년이 넘는 평생 동안 당신이 하나님으로 받은 축복과 은혜가 이토록 넘치는 데 지금 이 세상에서 좀 더 살고 싶다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이 하나님께 너무도 염치없기 때문이라고요. 하지만 아버지는 이렇게 말하곤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자신에게 좀 더 시키실 일이 남아있으면 분명 자신의 생명을 연장시키실 것이고 그게 아니면 가장 좋은 시간에 자신을 데려가실 것이라고요. 아버지로서는 너무도 당연한 모습이라고 회고를 했습니다.
병상에서 가족과 교우, 동역자들에게 남긴 말 나는 참 행복한 목회자였다. 내 그리운 예수님 보고 싶다.
김영순 아내 사모에게 남긴 말 내가 과대포장된 것 같아 괴롭다. 이름 없는 수많은 선교사들, 사역자들이 남 모르게 나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하고 헌신했을 텐데, 나는 이 땅에서 많이 대접받고 칭찬받았으니 하나님 앞에 가면 그들보다 상급이 더 적을 것 같다 교회에 감사해요. 사랑해요
진정으로 우리가 만나야 할 곳은 본향입니다.
그곳에 가면 다 만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부모 형제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들 그리고 이 땅에서 함께 살지만 만나지 못한 자들도 만날 수 있습니다.
이북에 고향을 두고 내려온 자들은 만나지 못해 얼마나 안타까워합니까?
김정일 정권은 자신의 정치 이익을 가지고 남북 이산가족을 이번에는 만나게 해주니 그러다가 수틀리면 그만 만나게 하고 이 얼마나 악랄합니까?
그러나 천국에서 만날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은 고향가기 위하여 살아가는 자들입니다.
아무렇게나 살아가지 않습니다. 내 아버지의 뜻에 맞게 살아가는 자입니다.
다시 만날 약속이 있기 때문입니다.
해방 육이오 등등 환난기 때에 일정한 거쳐지가 없고 앞날이 어떻게 될지도 모르고 통신수단도 없고 할 때에 확실히 우리가 만나는 약속 장소와 시간이 있습니다.
서울역 광장에서 첫 눈이 내릴 때 만나자 그러면 그 약속 믿고 열심히 살아가는 것입니다.
그 약속이 당장 이루어 지지 않았지만 언젠가는 이루어 질 것을 믿고 기대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그렇게 열심히 예수 믿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물질, 세상 향락 마음껏 누리지 못하고, 힘들게 주일마다 예배를 드려야 하는 가?
이 땅의 것만이 전부가 아니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고향집을 예비해 두셨습니다.
16절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들의 하나님이라 일컬음 받으심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시고 그들을 위하여 한 성을 예비하셨느니라
하나님께서 왜 우리들을 고향을 떠나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게 하셨는지에 대하여 이제는 우리가 확실하게 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내 시대에 이런 저런 약속이 이루어지지 않는가 하고 불평하고 자신도 불행하고 주위사람도 불행하게 하고 말입니다.
비록 나는 그 약속의 실현을 못 누리지만 나의 후손들이 누릴 그 놀라운 약속의 실현을 생각하면서 감사하면서 찬송하면서 행복한 꿈을 꾸세요!
내가 받은 하나님의 약속이 계대하여 이루어질 것을 믿고 감사하세요! 그것들을 멀리서 바라보고 환영하시기 바랍니다.
외롭고 고단한 세상생활이지만 우리가 기죽지 않고 활기차게 살수있는 근거가 바로 이것입니다.













































































































































Total 914 건 | 1 / 92 page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