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때까지 머뭇 머뭇 하려느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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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50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열왕기상18:16-24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스라엘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보통 몇 개월만 비가 오지 않아도 야단이지 않습니까? 민심이 상당히 흉(凶)융해 졌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핑계를 대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문제로 발달하였습니다.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 신이냐? 그렇지 않으면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냐? 라는 누가 참신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종교적 대결을 갈멜산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무한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로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처한 당시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해서 선지자직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도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들을
불러내어 생사를 가름하는 복음 전하는 선지자로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머뭇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한 말도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분명한 기사와 이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능
력 사건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백성들의 신앙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누구도 생명의 복음에 귀를 기우리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사이에서 확실한 결정을 짖지 못하고 방황하고 머뭇머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서서 그 은혜를 받고 살아야 마땅함에도 믿음에 서지 아니하
고 언제까지나 머뭇머뭇하고만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 안
에서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지만은 믿음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믿음은
말한 마디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고 움직 일수 없는 병신이 되고 그 은혜
를 배반하는 비겁자가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회는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적이지 안는 것은 언젠가는 후회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후회 정도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선택이 중요합니까? 선택에 따라 결과가 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진도 하고 후퇴도 하며, 잘 되기도 하
고 못 되기도 하며, 어두움에 살기도 하고 광명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은 어제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
는가에 의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제 잘
못 선택한 결과일 것이고 오늘 고민이 있다면 그것도 어제 잘못 선택한 열
매일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상태는 과거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
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
다.
어버이 날 사랑하지만 내대신 성공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승이 아무리 지
식이 많아도 내 대신 공부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합격의 영광도 내 선택의 결과요 불합격의 창피함도 내 선택의 결과
입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중요한 것일수록 오래가고 믿음의 선택은 영
원한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에 후회 새라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그 새는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밤이 되어 추우면 슬피 울며 내일이면 꼭 집
지리, 내일이면 꼭 집지리!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또 잠만 콜콜 잡니다.
그러다가 또 밤이 되면 밤새 떨며 후회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잠자고...평생
을 그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환경이냐? 하나님이냐? 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을 선택해야 합니다.
육체의 즐거움이냐? 영혼의 순결이냐? 을 택해야 합니다.
백년뿐인 인생이냐? 영원한 인생이냐? 을 결정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신뢰지 못하는 불신자의 모습이요 기회주
의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선택을 왜 올바로 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우선 먹기 좋은 곶감이 단 줄만 알았지, 눈에 보기에 좋으며 그것 택하고,
귀에 듣기 좋으면 그것 택하고 내일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기에 올바른 선
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마치 아편과 같아
서 중독이 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돈 욕심에 중독 된 가룟유다는 공금이 자기 돈으로 보였고 심지어 예수님까
지 돈으로 보였습니다.
욕심 중독증 환자는 나쁜 줄 몰라서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요 좋은 줄 몰라
서 선한 일 못하는 것 아닙니다.
욕심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선보다 악을, 참보다 거짓을, 의
보다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잘못 된 줄 알면서도 뻔히 그 길을 가는 것입
니다.
믿음의 선택을 요구하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믿음을 보여 주는 자가 아니라
믿음에 전혀 무반응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어떠하신 분이신가 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더라도 세상
에 자신을 위한 욕심에 끌려있기에 믿음의 요구에 벙어리가 되고 머뭇머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별로 위대하신 분으로 만 왕의 왕으
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만 왕의 왕으로 말들은 하지만 자신의 유익
과 욕심을 위하여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고 있는 슬픔의 현실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하는 믿음의 요구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
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이란 바로 이런 믿음 없는 백성들에게 믿음의 선택을 요구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기회를 즐겨하기는커녕 무반응이요 아마 입이 불쑥 튀어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믿음을 요구하느냐? 는 것입니다.
힘이 드니 믿음이 필요하지 힘든 일이 없는데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
까?
엘리야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알의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입
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일어서서 함께 갈멜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리고 하나님
의 살아 계심을 체험해야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구경꾼같이 구경만 하고 가
만히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한다
면 목회자의 사역을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적인 행위를 가장 앞서서
행해야 할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삼 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재앙의 근본은 아합 왕도 아니요, 바알
의 선지자도 아닌 바로 묵묵히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만 하는 머뭇거리는 백
성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가로막은 존재입니다.
벌써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고도 남아야 할 자들이 믿음의 결단을 아직까
지도 내리지 못하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를 모르겠
습니다.
내게는 은혜가 없고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3. 죽느냐? 사느냐? 가 달려있습니다.
우리 성도 중에 남동생이 음주 운전을 하다가 전 붓대를 드리 받고 차가 망
가지고 전 붓대가 부셔졌지만 생명은 겨우 건졌습니다.
음주 운전관계로 보험은 고사하고 벌금까지 물게 생겼는데, 이천만원 정도
의 돈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 어머니의 말씀이 이 돈 이천만을 주고 아들을 사겠느냐?
고 했습니다.
돈 보다 아들의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억 만금을 주더라도 생명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줄 알고 나 계십니까?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명적
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머뭇 머뭇거리고 있기만 합
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믿음의 선택이 생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믿음으로 왜 행하지 않으려고 만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
니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믿음으로 생활을 해야만 살게
됩니다.
믿음적인 것은 하나님이 다 책임을 져 주시지 만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하
신 것은 여러분이 책임을 다 져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참 재미있는 성도
들이 있습니다.
차차 믿음으로 하지요 하고 믿음을 부인하려고 하니 찜찝하고 그렇다고 믿
음으로 안한 다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하겠다고 정당하듯이 미루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수법입니다.
악마가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을 전부 실족시키느냐 하는 회의를 했습니
다.
그러자 젊은 악마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전부 죽이면 됩니
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악마는 옛날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지만 기독교인
한 사람을 죽이면 순교의 피가 씨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몇백 몇천으로 늘어
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젊은 악마 하나가 일어나서 그러면 죽이지 말고 감옥에 가두면
전도하러 돌아다니지 못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쓸데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모두 기도를 하는 바람에 우리의 세력이 더 약해
지더라고 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가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매를 좀 때리면 될 것입니
다.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안되더라고 말했습니다.
매를 한 대 때리면 그 아픈 자리에서 예수가 몇백 개 생겨나고, 매를 때리
면 때릴수록 손해가 나더라고 말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는 남녀의 성 문제를 가지고 실족하게 하면 됩니다.라
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은 좋은 것이고 성공률도 있지만 결국은
손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실족을 하면 제7계명을 범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설교를 해서 느
닷없이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준비를 하니까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악마가 꾀를 하나 냈습니다.
예수를 잘 믿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전도를 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등 전부 하도록 해놓고는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 오늘
은 불편하니까 내일부터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이 계략에 제일 많이 걸려 있습니다.
부름 받는 것은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믿음이 요구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요 행하게 하실 것이요 넉넉
히 감당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
어느 때까지 머뭇머뭇 하려느냐?
이스라엘은 3년 6개월 동안이나 비가 오지 않아서 온 나라가 난리가 났습니다.
보통 몇 개월만 비가 오지 않아도 야단이지 않습니까? 민심이 상당히 흉(凶)융해 졌습니다.
이러한 위기 상황에 모두가 서로 서로에게 핑계를 대고 이리저리 핑계를 대면서 책임을 전가하고 있었습니다.
이스라엘에게 있어서는 종교적인 문제로 발달하였습니다.
아합 왕과 그 아내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 신이냐? 그렇지 않으면 엘리야가
섬기는 여호와 하나님이냐? 라는 누가 참신이라는 명분을 가지고 종교적 대결을 갈멜산에서 하게 되었습니다.
갈멜산의 엘리야라 하면 얼핏 생각하기에 누구도 범할 수 없는 무한의 능력을 지닌 선지자로 기억하기 쉽습니다.
그러나 엘리야가 처한 당시의 상황은 그리 좋은 것이 아니었습니다.
언제까지나 하나님과 바알 사이에서 머뭇거리는 수많은 백성들을 대상으로
해서 선지자직을 감당하는 것이 그리 쉽지는 않았습니다.
아무도 신앙적으로 살아가기를 거부하는 세상에서 하나님으로부터 이들을
불러내어 생사를 가름하는 복음 전하는 선지자로 선택을 받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머뭇거리는 정도가 아니라 한 말도 대꾸를 하지 않았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의 본문은 분명한 기사와 이적이며 놀라운 하나님의 능
력 사건이기도 하지만, 다른 의미에서는 백성들의 신앙을 살펴 볼 수 있는 기회입니다.
그 누구도 생명의 복음에 귀를 기우리 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세상사이에서 확실한 결정을 짖지 못하고 방황하고 머뭇머뭇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이방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선민입니다.
그러나 믿음에 서서 그 은혜를 받고 살아야 마땅함에도 믿음에 서지 아니하
고 언제까지나 머뭇머뭇하고만 있습니다. 오늘 이러한 모습이 우리 교회 안
에서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입니다.
믿음이 있노라고 하지만은 믿음이 요구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그 믿음은
말한 마디 할 수 없는 벙어리가 되고 움직 일수 없는 병신이 되고 그 은혜
를 배반하는 비겁자가 되고 있습니다.
믿음의 기회는 언제까지나 주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믿음적이지 안는 것은 언젠가는 후회를 가져오게 되는 것입니다.
아니 후회 정도가 아니라 사망에 이르게 되는 것입니다.
선택은 우리 인생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왜 그렇게 선택이 중요합니까? 선택에 따라 결과가 오기 때문입니다.
사람은 자기 자신의 선택에 따라 전진도 하고 후퇴도 하며, 잘 되기도 하
고 못 되기도 하며, 어두움에 살기도 하고 광명한 삶을 살기도 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보면 오늘 우리의 현재의 삶은 어제 우리가 무엇을 선택했
는가에 의한 결과임을 알 수 있습니다. 오늘 눈물이 있다면 그것은 어제 잘
못 선택한 결과일 것이고 오늘 고민이 있다면 그것도 어제 잘못 선택한 열
매일 것입니다. 이처럼 현재의 상태는 과거 선택의 결과임을 부인할 수 없
을 것입니다.
이 선택은 절대적으로 내가 하는 것이지 다른 사람이 해주지 않기 때문입니
다.
어버이 날 사랑하지만 내대신 성공해 줄 수 없는 것이고 스승이 아무리 지
식이 많아도 내 대신 공부해 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때문에 합격의 영광도 내 선택의 결과요 불합격의 창피함도 내 선택의 결과
입니다.
선택은 순간이지만 그 결과는 중요한 것일수록 오래가고 믿음의 선택은 영
원한 것입니다.
히말라야 산에 후회 새라는 새가 있다고 합니다.
그 새는 낮에는 잠만 자다가 밤이 되어 추우면 슬피 울며 내일이면 꼭 집
지리, 내일이면 꼭 집지리!하고 후회한다고 합니다. 그러다 날이 밝으면
언제 그랬다는 듯이 또 잠만 콜콜 잡니다.
그러다가 또 밤이 되면 밤새 떨며 후회하고 아침이 되면 또 잠자고...평생
을 그러다가 죽는다고 합니다.
환경이냐? 하나님이냐? 을 선택해야 합니다.
물질이냐? 하나님이냐? 을 선택해야 합니다.
육체의 즐거움이냐? 영혼의 순결이냐? 을 택해야 합니다.
백년뿐인 인생이냐? 영원한 인생이냐? 을 결정해야 합니다.
1. 하나님을 신뢰지 못하는 불신자의 모습이요 기회주
의자입니다.
그러면 이렇게 중요한 하나님의 선택을 왜 올바로 하지 못합니까?
하나님에 대하여 아노라 하지만 아직도 잘 모르는 무지함 때문입니다.
우선 먹기 좋은 곶감이 단 줄만 알았지, 눈에 보기에 좋으며 그것 택하고,
귀에 듣기 좋으면 그것 택하고 내일을 모르는 무지한 인간이기에 올바른 선
택을 못하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욕심 때문에 바른 선택을 할 수 없습니다.
인간은 누구에게나 욕심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욕심은 마치 아편과 같아
서 중독이 되면 보이는 것이 없습니다.
돈 욕심에 중독 된 가룟유다는 공금이 자기 돈으로 보였고 심지어 예수님까
지 돈으로 보였습니다.
욕심 중독증 환자는 나쁜 줄 몰라서 나쁜 짓 하는 거 아니요 좋은 줄 몰라
서 선한 일 못하는 것 아닙니다.
욕심이라는 것 자체가 이미 에덴 동산에서 선보다 악을, 참보다 거짓을, 의
보다 불의를 좋아하기 때문에 잘못 된 줄 알면서도 뻔히 그 길을 가는 것입
니다.
믿음의 선택을 요구하는 엘리야 선지자에게 믿음을 보여 주는 자가 아니라
믿음에 전혀 무반응을 하고 있었을 뿐입니다.
하나님이 아직도 어떠하신 분이신가 을 이해하지 못하고 이해하더라도 세상
에 자신을 위한 욕심에 끌려있기에 믿음의 요구에 벙어리가 되고 머뭇머뭇
하고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에는 아직도 하나님을 별로 위대하신 분으로 만 왕의 왕으
로 여기지 않고 있습니다.
또한 하나님의 위대하신 능력과 만 왕의 왕으로 말들은 하지만 자신의 유익
과 욕심을 위하여 움직이는 신앙인이 되고 있는 슬픔의 현실입니다.
누가 나를 위하여 갈꼬? 하는 믿음의 요구에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
를 보내소서 할 수 있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2.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 할 기회를 놓치게 됩니다.
엘리야의 부르심이란 바로 이런 믿음 없는 백성들에게 믿음의 선택을 요구
하는 부르심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은혜를 체험하게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들은 이 기회를 즐겨하기는커녕 무반응이요 아마 입이 불쑥 튀어
나왔을 지도 모릅니다.
힘들어 죽겠는데 왜 믿음을 요구하느냐? 는 것입니다.
힘이 드니 믿음이 필요하지 힘든 일이 없는데 믿음이 무슨 필요가 있겠습니
까?
엘리야를 가장 힘들게 하는 것은 바알의 선지자가 아니라 이스라엘 백성입
니다.
이들이 믿음으로 일어서서 함께 갈멜산으로 올라가야 하는데 그리고 하나님
의 살아 계심을 체험해야 하는 믿음의 사람들이 구경꾼같이 구경만 하고 가
만히 있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교회 안에서도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 믿음의 생활을 한다고 한다
면 목회자의 사역을 아니 하나님이 기뻐하는 믿음적인 행위를 가장 앞서서
행해야 할 사람들이 머뭇거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교회 성장의 가장 큰 걸림돌입니다.
삼 년 6개월 동안 비가 오지 않는 재앙의 근본은 아합 왕도 아니요, 바알
의 선지자도 아닌 바로 묵묵히 자기의 유익을 구하기만 하는 머뭇거리는 백
성들의 문제였습니다.
이런 수수방관하는 모습을 어디서 많이 보지 않으셨습니까?
바로 우리의 모습이며, 차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우리가 하나님의 사역을
가장 가로막은 존재입니다.
벌써 큰 은혜와 기적을 체험하고도 남아야 할 자들이 믿음의 결단을 아직까
지도 내리지 못하고 머뭇머뭇하고 있으니 얼마나 답답한 노릇인지를 모르겠
습니다.
내게는 은혜가 없고 하나님의 역사가 없다고 말하기 전에 믿음으로 결단을
내리십시오 그러면 하늘에서 불이 떨어지는 체험을 하실 것입니다.
3. 죽느냐? 사느냐? 가 달려있습니다.
우리 성도 중에 남동생이 음주 운전을 하다가 전 붓대를 드리 받고 차가 망
가지고 전 붓대가 부셔졌지만 생명은 겨우 건졌습니다.
음주 운전관계로 보험은 고사하고 벌금까지 물게 생겼는데, 이천만원 정도
의 돈이 필요로 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 그 어머니의 말씀이 이 돈 이천만을 주고 아들을 사겠느냐?
고 했습니다.
돈 보다 아들의 생명이 더 귀하기 때문입니다.
억 만금을 주더라도 생명하나 얻을 수 있습니까?
여러분 믿음이 무엇인줄 알고 나 계십니까? 사느냐? 죽느냐? 하는 생명적
인 문제입니다.
그런데 이 이스라엘 백성들은 죽는 줄도 모르고 머뭇 머뭇거리고 있기만 합
니다.
여러분은 어떠하십니까? 믿음의 선택이 생명이지 않습니까?
그런데도 믿음으로 왜 행하지 않으려고 만 하는지 도대체 이해가 되지 않습
니다.
믿음으로 예배를 드리고 믿음으로 기도하며, 믿음으로 생활을 해야만 살게
됩니다.
믿음적인 것은 하나님이 다 책임을 져 주시지 만은 여러분이 마음대로 하
신 것은 여러분이 책임을 다 져셔야 합니다. 우리 가운데 참 재미있는 성도
들이 있습니다.
차차 믿음으로 하지요 하고 믿음을 부인하려고 하니 찜찝하고 그렇다고 믿
음으로 안한 다는 것도 아니니 앞으로 하겠다고 정당하듯이 미루는 자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마귀의 수법입니다.
악마가 어떻게 하면 기독교인들을 전부 실족시키느냐 하는 회의를 했습니
다.
그러자 젊은 악마가 그것은 간단합니다. 기독교인들을 전부 죽이면 됩니
다.라고 말했습니다.
이 말을 들은 늙은 악마는 옛날에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지만 기독교인
한 사람을 죽이면 순교의 피가 씨가 되어 기독교인들이 몇백 몇천으로 늘어
나기 때문에 오히려 손해를 보았다. 고 했습니다.
그러자 또 젊은 악마 하나가 일어나서 그러면 죽이지 말고 감옥에 가두면
전도하러 돌아다니지 못할 것 아닙니까?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쓸데없다고 대답했습니다.
감옥에 들어가면 감옥에서 모두 기도를 하는 바람에 우리의 세력이 더 약해
지더라고 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가 그 사람들을 아프게 하고 매를 좀 때리면 될 것입니
다.라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도 안되더라고 말했습니다.
매를 한 대 때리면 그 아픈 자리에서 예수가 몇백 개 생겨나고, 매를 때리
면 때릴수록 손해가 나더라고 말했습니다.
또 젊은 악마 하나는 남녀의 성 문제를 가지고 실족하게 하면 됩니다.라
고 말했습니다. 늙은 악마는 그것은 좋은 것이고 성공률도 있지만 결국은
손해라고 했습니다.
한 사람이 실족을 하면 제7계명을 범했다고 모든 사람들이 설교를 해서 느
닷없이 갑옷을 입고 무장을 하고 준비를 하니까 안 된다고 했습니다.
그래서 늙은 악마가 꾀를 하나 냈습니다.
예수를 잘 믿게 하고, 기도를 하게 하고, 성경을 읽게 하고, 전도를 하게
하고, 사랑하게 하는 등 전부 하도록 해놓고는 그러나 내일부터 하자, 오늘
은 불편하니까 내일부터 하자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악마의 이 계략에 제일 많이 걸려 있습니다.
부름 받는 것은 현재 내가 있는 이 자리에서 믿음이 요구받는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은 이 세상의 그 어떤 것보다 먼저요 행하게 하실 것이요 넉넉
히 감당하게 하고도 남음이 있을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