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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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05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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갈라디아 6:11-18
십자가 외에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 동안 온 성도를 기도하게 하고 근신하게 한 교회 확장문제는 원래의 예
상했던 가격에서 우리 교회가 양보 함으로서 마무리 지어질 것으로 여겨집니다.
저는 기도하는 가운데 교회가 사용하는 부분을 얼마의 돈 때문에 오래 동안 흥정하는 것이 은혜롭지를 못함을 알고 양보함으로서 빨리 결정을 짖고
나머지 재정문제 감당을 기도하는 것이 축복이 되고 하나님께 영광이 될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협상을 하는 임 집사님도 같은 마음을 가지게 되었고 더욱이 감사 한 것은
지난 토요일에는 우리 남 선교회에서 이 일을 위하여 모여 기도하고 의논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어느 단체나 가정이나 마찬가지겠습니다, 누군가가 자기 헌신의 십자가를 짐으로서 단체나 가정이 유지가 되고 행복해지고 발전을 가져오게 되는 것
입니다.그러므로 십자가는 귀찮은 것, 몸서리치는 저주스러운 것으로만 여길 것이
아니라 더 나은 발전을 가져오게 하니 십자가는 크게 자랑 할 만 한 일입니다.
미국 필라델피아에 죤이라는 13세의 벽돌공장에서 노동하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린 소년 죤의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교회로 들어가는 길이었습니다.
비가 조금만 내려도 진흙 길이 되어 몹시 불편하지만 어른들은 대책을 세우지를 않았습니다.
죤의 생각에는 아마 자기 집 같으면 벌써 훌륭하게 벽돌이나 돌로 포장되었을 것이다. 라고 하고 어느 주일날 죤은 결심을 했습니다.
죤은 매일의 일당 임금 속에서 날마다 벽돌을 한 장씩 자기 공장에서 사서 깔기 시작했습니다.
이 넓은 길을 죤이 혼자 완성하려면 오랜 세월이 걸릴 것입니다. 그러나 기적은 1개월 내에 일어났습니다.
죤의 모습을 보고 이기적이며 형식적이었던 신앙생활을 회개하고 반성한 교인들이 길뿐, 아니라 낡은 교회당을 헐고 신축하기로 결의했던 것입니다.
이 소년의 이름은 죤 워너 메이커입니다. 미국의 백화점 왕이 되었고 미국과 전세계에 YMCA 건물을 수없이 지어 주었
는데 서울 종로 2가에 있던 Y 벽돌건물도 워너 메이커의 기증품이라고 합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기독교의 많은 업적을 남긴 사도 바울 역시 자랑 할 것이 있다면 십자가만이 그의 자랑으로 내세웠습니다.
바울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통하여 많은 생명을 구원하는 일을 했기 때문입니다.
십자가가 멸망 받을 자에게는 이해가 되지 않는 미련하게 보이지만 구원을 받을 저와 여러분들에게는 하나님의 능력인 줄로 믿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은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은혜에만 만족하기를 원하고 만족해 할 줄은 알지만 십자가가 더큰 만족이요 자랑감이 되는 것을 믿
으시기 바랍니다. 1. 십자가가 무엇입니까?기독교를 상징할 수 있는 것은 여럿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그러나 십자가를 빼고 기독교를 말 할 수는 없습니다. 십자가의 사건이 복음의 핵심이 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당시의 로마인들은 반역죄나 극악한 죄를 제외하고는 십자가에 메달아 죽이지는 않습니다.
십자가 처형은 주로 야만인들이 고안해 놓은 잔인한 것이기 때문에 로마시민권을 가진 사람은 십자가에 죽이지 않습니다.
유대인들 역시 나무 위에 달린 자는 저주받은 자로 단정해 버리기 때문에 십자가 위에 달리신 예수님께서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라고 하
면 이방인도, 유대인도 비웃음거리인 것입니다.그러나 십자가의 사건은 많은 사람들의 조롱에도 불구하고 주님을 따르던
모든 사람들로 하여금 상징이 되어 있고, 숱한 박해를 받아가면서도 십자가를 포기하지 않은 것은 이 십자가를 지시기 위해서 주님께서 오셨고 십자가
의 죽으심으로 하나님의 공의인 죄의 값이 치루워졌고 우리 믿는 자의 구원을 베푸신 하나님의 사랑이 해결되기 때문인 것입니다.
또한 주님의 가르침의 핵심이요 마찬가지로 사도들의 선포의 핵심도 십자가입니다.
사도 바울 역시 십자가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다 고 했으며 또한 그
는 고전 2:1-2에 십자가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했다 고 했습니다.
오늘날에 와서는 이 저주의 십자가가 교회의 기둥과 터전이 된 것이며 승리와 평화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외면하고 예수님을 생각 할 수도 없고 십자가를 피한다면 우리 예수님과는 상관이 없습니다.
누구든지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몫에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지니 십자가를 부인하는 자는 나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고했습니다.
오늘 우리의 삶에는 십자가가 요구가 되어집니다. 특히 우리 교회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아프리카에 가 있는 미국의 선교사가 어느 마을을 방문하게 되었습니다. 그 마을 입구에 작은 개울이 흐르고 있는데 그 개울을 건너오는 사람마다
큰돌을 머리에 이고 건너 와서는 그 돌을 버리고 가는 것이었습니다. 이상히 생각한 선교사는 동행자를 시켜서 그 까닭을 물었습니다.
이제 막 개울을 건너온 한 사람이 이 개울은 비록 좁지만 한 가운데는 물
살이 어찌나 센지 이런 큰돌을 머리에 이고 지나지 않으면 모두 떠내려갑니다. 여기에서 조금만 떠내려가면 깊은 낭떠러지로 떨어져 목숨을 잃게 됩니
다.라고 했습니다. 물론 그 선교사의 일행도 큰돌을 머리에 이고 무사히 건널 수가 있었습니다.
이 세상에는 생각지 않은 때와 장소에 생명을 앗아갈 세상의 급류가 흐르고 있습니다.
이 위험한 급류를 무사히 건너게 하시기 위하여 하나님은 우리에게 큰돌의 무게와 같은 십자가를 주셨습니다.
그것을 피한다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습니다.십자가의 우리 모두의 구원입니다. 감사히 십자가를 집시다. 아니 자랑하며 지고 갑시다.
2. 십자가는 예수님을 위한 믿음의 흔적(痕迹)을 남깁니다.
예수님에 의한 은혜는 찬송하지만 은혜에 대한 보답은 없습니다.상당히 모순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그러므로 은혜가 은혜 되지를 못합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나를 위하여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입니다.
이제는 은혜만을 요구하는 자리에서 받은 은혜에 헌신이 되어져야 할 때입니다.
예수님의 흔적을 가졌다는 말은 내가 속한 곳에서 십자가의 정신의 책임과 사명의 짐을 지고 있다는 말입니다.
중세 교회에서는 예수님의 흔적을 육신적인 흉터로 생각하고 못 자국과 가시 면류관 등으로 상처받은 곳에 자기들도 상처를 냈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은 흔적이 아닙니다. 맹장이 터짐 바울은 자신이 갖고 있는 모든 것들을 주님을 위해 바치고 살았습니다.
가문, 학벌, 명예, 권세등 바울이 소유한 그 모든 것들을 모두 주님께 드리
고 결혼도 하지 않고 한 평생 헌신의 생활로 살다가 순교하신 분입니다.전북 삼례 문형일 집사님은 본 교회가 예배당을 짓다가 완공 을 못하자 불
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문집사는 예수님께 욕을 돌리고 불신자들의 비난을 받게 된 것이 늘 마음 아파하다가 어느 날 신문에서
전주 예수병원에서 사람의 눈을 사겠다는 광고를 발견했습니다. 광고를 본 문집사는 주님의 도우심이라고 매우 기뻐했고. 그는 자기 부인
에게 이를 알렸으나 노발대발했습니다.그러나 그는 <나의 눈이라도 바쳐서 주의 전을 건축한다면 얼마나 영광이겠
는가> 하고 결심한 후 병원에 찾아가서 자기 눈을 팔겠다고 했습니다. 원
장은 예배당 완공 때문이라는 말에 감동을 받아 눈을 뽑지도 않았을 뿐 아
니라 오히려 병원에서 헌금을 해 주었고, 본 교단으로 알려서 미국 신문에 보도되기까지 했습니다.
이 신문을 본 어느 미국인이 헌금을 해 주어서 교회를 건축하여 완공할 수 있었습니다.그렇다고 여러분에게 모두 눈알을 빼라는 말이 아닙니다.
이 같이 십자가는 책임과 사명의식을 가지고 자신을 희생시키는 일입니다.십자가라는 단어만 나오면 마파람에 게 눈을 감추듯이 쏙 들어가고 진저리
를 치고 있으니 어찌 이방인과 다름이 없고 유대인과 나을 것이 무엇이며, 십자가를 통한 구원을 얻었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바울은 믿음의 선한 싸움에서 예수님 때문에 고난받은 흔적 즉 많은 상처를 입었습니다.고후 11:23-27 에 말해주고 있습니다.
사십에 하나 감하는 매를 다섯 번이나 맞고 태장으로 맞고 돌로 맞고 강도
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고 환난과 고난을 통하여 예수님의 흔적을 가진 나
를 아무도 무슨 말과 행동으로 괴롭게 할 수 있겠느냐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예수님으로 인하여 오는 십자가의 흔적을 용케도 잘 피하
여 지금까지 오지 않았습니까?내 생활에는 예수님을 믿는데 전혀 짐이 되는 것이 없습니다. 어찌 주님 앞에 설 수가 있겠습니까?
3. 십자가는 나를 영화롭게 하며 나의 일상 생활에 구원을 가져옵니다.
왜 내가 예수님을 믿는데 아직도 내가 이 정도밖에 되지 않느냐?참 내가 한심하다 하고 있는 성도들을 봅니다.
왜 이 어려움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 할까? 하고 구원에 갈망해 하고 있지 않습니까?그 이유는 십자가를 외면하고 지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어쩌면 십자가의 요구에 의도적으로든지 핑계를 되어 서라도 피하려고만 합니다.
많은 이들에게 예수님에 대하여 논하라 할 적에 그를 시인하고 그를 따르겠다고 합니다.
그리고는 예수님의 요구가 진작 주어 질 적에는 잠시 여유를 달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요구를 원하는 자들에게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했습니
다. 예수의 사람은 십자가를 자랑하는 삶이 되어야 하며 그 흔적을 가진 자입니다.
그러한 자는 죄사함의 기쁨이 있고 질병에서 치료함을 받으며 저주가 물러가고 형통의 복을 받고 영원한 천
국의 소망으로 가득한 삶을 살아갈 수 있습니다. 십자가를 통해야 위대한 능력을 입어 세상의 유혹과 환난을 이기며 구원의
보증, 영생의 보증, 천국의 보증을 믿는 믿음의 삶을 살게 되시길 바랍니다.십자가의 힘은 새 생명을 창조합니다.
십자가에 달리신 예수 그리스도의 보혈로 인하여 우리의 죄가 가리워 지는 하나님의 능력으로 새 생명이 창조되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능력은 사탄을 이기신 승리의 모습입니다.사탄은 믿음의 사람으로 하여금 육신의 생각을 갖게 하고 하나님의 법을 어
기도록 하여 사망의 자리로 이끄는 것입니다. 그 동안 죄가 인간을 누르고 하나님과의 사이를 떨어뜨리게 되는 조건들
을 십자가로 완벽하게 해결하므로 사탄의 올무에서 놓임을 받게 되므로 실질적으로 사탄을 완패시키는 능력이 나타난 것입니다.
그러므로 십자가를 의지하는 사람은 사탄을 이기는 힘을 얻는 것입니다. 또한 십자가의 힘은 삶을 풍성케 하는 부흥의 원동력입니다.
십자가에 나타나는 현상 가운데 하나는 할례 자나 무 할례 자나 아무 것도 아니요 오직 새로 지음을 받은 자 뿐이라고 말씀 하셨습니다.
새로 지음 받았다 함은 변화된 상태를 말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죄인 관계에서 만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하나님의 진정한 자녀
관계로 그분을 만나는 것이므로 담대함으로 주님을 만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의 담대함. 사랑. 기쁨이 우리의 내면에 용솟음 치고 있으니 어
찌 주어진 일에 불평이 있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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