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을 기쁨으로 받은 자은 예수님을 아는 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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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10회 작성일 2010-12-26 21: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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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가복음 10:17-22 복음을 기쁨으로 받은 자은 예수님을 아는 자입니다.
저는 매일 조금씩 죽어갑니다 금년 초 루게릭병이란 진단이 내려졌을 때, 하나님, 감사합니다라는 고백이 나오더군요. 좀 엉뚱하죠. 병명이 무엇인지 알았다는 게 감사했어요. 죽음을 준비할 수 있다는 것도, 그리고 그 시간을 알차게 보낼 수 있는 마음이 있다는 것도 정말 감사했지요. 길면 5년이 저의 남은 인생입니다. 눈감을 때까지 딱 한 가지 일만 할 것입니다. 김정하 전도사(52, 샬롬교회)가 하고자 하는 일 한 가지는 바로 전도다. 복음을 전하다가 죽겠다는 것이다. 그의 전도표어가 그의 각오를 잘 설명해 준다. 1. 자나 깨나 전도 2. 앉으나 서나 전도 3. 때와 장소가 없다 4. 죽으나 사나 전도이다. 그는 꿈속에서도 전도를 한다. 진정으로 간절히 원하는 그의 소망이 전도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루게릭병은 근위축성측색경화증이란 다소 어려운 이름을 가지고 있다. 한 마디로 근육이 점점 말라가는 원인을 알 수 없는 희귀불치병이다. 손과 발의 근육이 점점 퇴화되어 간다. 입의 근육도 오므라든다. 그래서 말하기가 점점 힘들어진다. 그래도 정신은 그대로다. 더욱 또렷해진다. 결국에는 호흡에 필요한 근육에도 이상이 생긴다. 김 전도사의 발걸음과 손의 동작에도 벌써 증세가 나타났다. 말하는 어투도 달라졌다. 제 인터뷰가 어쩌면 이게 마지막일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대체로 3-5년을 시한부 인생 세상에서 가장 잔인한 병이란 별명이 붙은 가운데도 그에게는 무엇을 하여야 한다는 뚜렷한 목적의식을 가지고 남은 삶을 살 수 있으니 그 삶은 결코 헛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은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에 대하여 잘 모르고 있습니다.
그냥 자신의 소욕만을 위하여 살아가는 것으로 여기고 있습니다.
그것이 얼마나 무모하고 헛된 일인지 모릅니다.
본문에서도 한 젊고 능력이 있는 한 사람이 무엇을 하여야 할 것인가를 고민하고 예수님을 찾아 왔습니다.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이 그렇게 되고 싶어 하는 부자이었습니다.
이것이 사실 자신의 마음을 만족시키지 못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그 삶속에 받아 드리고 싶다는 것입니다.
영생이라는 주제를 가지고 왔습니다. 영생은 말 그대로 영원히 사는 생명을 얻는 것을 말합니다.
자신의 지금의 삶이 자신의 만족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무엇인가 참 생명을 참다운 삶이 필요로 한 것이었습니다.
새로운 변화를 가지고 싶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여야 할지를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그가 그렇다고 허랑방탕한 삶을 살은 사람도 아닙니다.
예수님의 질문에 그 누구보다도 그 사람은 의로운 자로 살았다고 하였습니다.
어릴 때부터 남에게 행해야 할 것들을 알았습니다.
역시 지금까지 그렇게 살아왔습니다.
살인하지 말라 사람을 죽인 적이 없습니다. 사람을 미워하면 벌써 살인이야 너 몇 사람 죽인 줄 몰라
간음하지 말라 남의 여자를 간통, 간강한 일도 없습니다. 마음에 음란을 품으면 벌써 간음죄야
도둑질 하지 말라 물론 남의 것 하나 바늘 하나도 훔친 적이 없습니다.
거짓증언 하지 말라, 법정에 서 본적도 없습니다.
속여 빼앗지 말라, 정당하게 살아 왔습니다.
내 부모를 공경하라, 용돈 잘 드리고 전화도 잘하고 잘 찾아뵙고 다른 사람들에게 효자라고 소문이 나서 효자상도 탔습니다.
그런데 왜 내 마음하나 공허함과 인생의 허무함이 가시지 않습니까?
이대로 살다가 죽어야 하는 것이 인생인가요?
왜 내 삶은 남편도 있고 아내도 자식도 있고 그냥 밥 먹고 살만한데 남에게 잘못한 것도 없고 소히 십계명도 잘 지키는데 왜 우울하고 불안하고 왜 기쁨이 없고 잠도 안 오고 그리고 밥맛도 없고 살 의미가 없습니까?
그래 2% 부족해 이것이 예수님의 대답이었습니다.
사람은 자신의 의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제 잘난 맛으로 만족이 되는 것 아닙니다.
100 가지 중에 한 가지 부족한 것은 결코 작은 문제가 아닙니다.
한 가지 부족한 것이 다른 100가지를 무익하게 만듭니다.
자동차 속에 들어 있는 부품은 수없이 많습니다. 그 중에 한 부품이 빠져있으면 수많은 부품이 완벽하다 할지라도 그 차는 움직이지 못합니다.
한 가지 부족함이 그 사람의 그렇게 열심히 살아온 삶이 의미가 없고 가치가 없게 생겼습니다.
어제 빨강불이 돌아가고 파란 불이 돌아가고 두드리는 타악기 관악기 현악기가 조화를 이루고 노랫가락이 흘러나오고 청중들의 괴성이 울려 나왔습니다. 그리고 이것을 위하여 수많은 시간과 에너지가 투자 되었습니다. 여기에 만약에 한 가지가 빠졌다면 부어라 마셔라 흔들어라 돌리고 돌리고 나이트클럽이 될 것입니다.
그것이 나이트클럽이 아닐 수 있었음은 예수님을 초대했다는 것입니다.
100 빼기 1은 얼마인가요? 99입니다. 그러나 100빼기 1은 0이 되기도 합니다.
어떤 사람이 예수님께 찾아와 선생님, 내가 무엇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하고 물었습니다.
네가 계명을 아나니, 계명을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여려서부터 다 지켰나이다 하니 예수께서 네가 아직도 한 가지 부족한 것이 있다고 하였습니다.
그 한 가지 부족이 또 다시 선행을 하라는 것이 아닙니다.
영생을 얻으라는 것입니다. 영생이 무엇입니까? 영생은 예수님을 아는 것입니다.
요17:1-2 아버지께서 아들에게 주신 모든 사람에게 영생을 주게 하시려고 만민을 다스리는 권세를 아들에게 주셨음이로소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가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
곧 예수님 아는 것은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을 드려 예수님을 드러내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열심히 자신을 드러냅니다.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내가 이런 삶을 살아야 하나
전생에 무엇을 잘못했기에 현세에 이런 고생을 하나 라고 자신을 두둔하기에 바쁩니다.
나는 이런 인물이야
나이가 들수록 사람들이 조심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남자 나이 50을 넘으면 젊은 척 아는 척 부유한척 하면 왕따를 당한다.
아줌마면 중년의 여성의 아름다움을 가지면 최고의 아름다움이지 왜 처녀 같다는 소리를 들으려고 합니까?
처녀라는 그 소리에 왜 그리 좋아합니까?
인색한 중년은 외로울 뿐이다 말은 닫고 주머니를 풀어라
아무 일에나 참견하지 말고 뒤에서 후원하는 후견인이 되라
자신에 대한 연민에서 벗어나라
나만큼 노력한 사람, 나만큼 고생한 사람, 나만큼 의로운 사람, 나만큼 불쌍한 사람, 이것은 자신을 세우기보다 자신의 나약함을 말할 뿐이다 는 것입니다.
나 이런 사람이야 자신이 하는 것이 아니라 남이 그렇게 말해 주어야 합니다.
사람의 눈에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착한 일을 하지 않는 사람보다 더 신자답게 보이기 마련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인간이 선악과를 먹음으로 선악을 알게 된 흔적이라는 것을 주지해야 합니다.
선한 척 하는 것이지 선한 자가 아닙니다.
롬3:10-12 기록된바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 깨닫는 자도 없고 하나님을 찾는 자도 없고 다 치우쳐 함께 무익하게 되고 선을 행하는 자는 없나니 하나도 없도다
선한 이는 하나님 한분뿐이십니다.
선은 오직 하나님에게는 나오는 것이지 사람이 하나님을 빼고 선을 말 할 수가 없는 것입니다.
선은 믿음의 여부와 상관없이 모든 인간들에게서 얼마든지 볼 수 있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불교에도 선, 원불교도 선, 천주교도 선, 국회에도 선, 정부에도 선, 서울시에도 선, 송파구에도 선, 풍납동에도 선, 시티극동 아파트 부녀회에도 선, 아쿠르트 아줌마도 김치를 서울 광장에서 모여 선, 현대 백화점도 선, 이것은 믿음과 상관이 없이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선은 생명이 없습니다. 열심히 자신의 공덕을 쌓고 자신을 나타낼 뿐입니다.
교회 안에도 열심히 자신의 공덕을 쌓고 더 자신을 강하게 나타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게 전부가 아닙니다.
사람이 선행을 행한다고 해도 인간의 도덕과 윤리가 아무리 선하다고 해도 그 선이 인간으로 하여금 자신을 포기하고 생명이 되시는 주를 바라보게 하는 능력이 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어떻게 인간의 선이 생명의 근거가 될 수 있겠습니까?
하나님 한분 외에는 선한 이가 없다는 것은 예수님도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뜻이 아니라 하나님께 속하지 아니한 그 어떤 것도 선한 것이라고 할 수 없다는 뜻입니다.
결국 선은 하나님으로부터 나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지 인간이 생산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뜻이 됩니다. 그런데 예수님 찾아온 이 사람은 선을 자신이 생산해 낼 수 있는 것으로 여긴 것입니다.
그래서 무엇을 하면 영생을 얻을 수 있는지 물은 것입니다.
이것을 보면 이 사람은 선이 무엇인가를 몰랐고 인간은 선을 생산할 수 있는 존재가 못 된다는 사실을 알지 못한 것입니다.
이것이 이 사람으로 하여금 예수님을 찾아왔다가 또 떠나가게 한 이유가 된 것입니다.
너무나도 자신의 쌓은 공덕이 크고 자신을 드러내는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세상에서도 자신을 들러내려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피곤하고 우울해집니다.
공황장애가 옵니다 사탄이 자리 잡기 가장 좋은 터를 만드는 것입니다.
아셔야 합니다. 사탄은 모두가 자신이 주체입니다. 나입니다.
이런 사람은 그리스도의 의가 자신에게는 짐으로 여깁니다.
거라사 지방의 귀신들린 자가 무엇이라고 예수께 말한 줄 아십니까?
마1:24-26 마침 그들의 회당에 더러운 귀신 들린 사람이 있어 소리 질러 이르되 나사렛 예수여 우리가 당신과 무슨 상관이 있나이까 우리를 멸하러 왔나이까 나는 당신이 누구인 줄 아노니 하나님의 거룩한 자니이다 예수께서 꾸짖어 이르시되 잠잠하고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 하시니 더러운 귀신이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키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오는지라
예수와 상관을 짓지 아니하는데 무슨 생명이 있겠습니까?
영생은 자신을 주어 그리스도가 나타나게 하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신자가 선행을 하면서 사는 것을 당연하다고 생각합니다. 그것이 믿음이 있는 모습이라고 생각합니다.
물론 신자가 선행을 하는 것을 나쁘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러나 만약 자기 선행을 바라보게 된다면 선행을 하는 자신에 대견스럽게 보일 것입니다.
이것이 선행이 가지고 있는 함정입니다. 사단은 인간을 이러한 함정으로 몰아가는 것입니다.
선행이라는 함정에 빠뜨려서 자기 선행만 바라보고 살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의의 행함에 대해서는 눈을 감게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그리스도께 드림으로 그리스도를 얻습니다.
내 것으로 하였다고 생각하니 자신의 의가 생기는 것입니다.
사실 내 것이 아니라 모든 것이 하나님의 것입니다.
사실 이스라엘은 애굽의 종이었습니다. 그러한 그들이 하나님의 은혜로 약속의 땅에 들어와 거기에 있는 모든 것을 차지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이 갖게 되고 누리게 된 모든 것도 하나님의 은혜로 누리게 된 것 뿐입니다.
내 것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이 있으면 말해 보십시오
내 것이라는 사고가 나를 그렇게 힘들게 한 것입니다.
십계명의 정신은 나를 나타내는 것이 아닙니다. 십계명은 하나님을 나타내는 것입니다.
곧 하나님의 사랑 즉 예수 그리스도를 사랑입니다. 십계명을 줄이면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입니다.
결국 있는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라는 것은, 십계명을 알고 그 계명을 온전히 지켰다면 그것은 자기의 모든 것이 자기 것이 아님을 믿는다는 것이고 그렇다면 얼마든지 모든 것을 다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도 줄 수 있다는 의미가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사람은 재물이 많으므로 근심하고 돌아갑니다.
결국 자기 수중에 있는 것은 자기 것이었고 자기 것이었기 때문에 버릴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인간입니다.
나도 이 사람과 다르지 않습니다. 이 사람처럼 자신이 선을 행한 것이 얼마나 많은지.....
이것으로 무엇인가 이루어 보려고 하고 보상을 받으려고 합니다.
사실 진정 하나님의 선을 요구 할 때에는 걱정하고 짐으로 여기고 그리고는 떠나버리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선이 요구 될 때에 등 돌리는 자가 많이 있습니다.
사람은 인간이 얼마든지 선을 행할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보실 때는 선을 행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다시 말해서 자기에게 있는 그 어떤 것도 자기 것으로 간주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 한 마디에 다 팔아서 선의 요구에 응하는 사람은 없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나의 모든 것을 주고 얻어야 할 것이 무엇입니까?
영생을 얻는 것 아닙니까? 예수님을 따르는 것 아닙니까?
또 다시 나만을 외치는 삶으로 돌아가고 싶습니까?
이제 이 만큼 인생을 살아와봤으면 깨달아야 합니다.
나 자신을 드려 예수님을 따라야 겠다는 시간이 되셔야 합니다.
그냥 또 다시 나로 돌아가 봐야 별 볼일 없는 인생을 살 수밖에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인생을 허무를 노래 할 것입니다.
서서히 죽어가는 것이 아니라 당장이라도 죽을 수 있고 아니 내 자신을 사람들이 죽었다고 하는 과거사로 표현을 할 때가 올 것입니다.
1923년 Chicago의 어느 Hotel에서 그 당시 미국에서 가장 부자였던 9명이 모여 재벌 Club을 만들었다고 합니다. 그 후 25년이 지나 이 재벌들의 상황이 Chicago News지에 이렇게 보도되었습니다. 철강 왕이었던 Charles Shuward은 사업파산 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Gas 회사 사장이었던 Howard Hopson은 정신병원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미국 최대의 밀 도매상이었던 Arthur Carter는 알 수 없는 병으로 숨지고, New York의 증권사 사장이었던 Richard Whitney는 형무소에서 죽었으며, 내무장관을 지냈던 Albert Well도 형무소에서 보석으로 귀가 후 약을 먹고 자살했습니다. 은행총수를 지냈던 Samuel Inshell이라는 사람은 범죄 후 도망지에서 외롭게 죽었으며, 남아있던 세 명 모두도 자살로 자기 일생을 끝마쳤다고 합니다. 이들 9명의 인생의 목표는 오직 한가지였다는 공통점이 있는데 그것은 세계 최고의 부자가 되어 보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살아 있지만 죽는 자가 있고 죽었지만 예수이름으로 살아있는 자가 있습니다.
예수님께 내 자신을 드리십시오
그러면 나는 영생을 소유하는 자가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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