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어디서나 당신은 하나님은혜아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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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19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시 편 139:1-10 언제어디서나 당신은 하나님은혜아래 있습니다
본 시편은 오랜 인생의 경험을 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신앙의 고백을 노래한 시입니다.
다윗은 그의 여정은 다른 이들 못지 않은 어쩌면 더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막내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사랑을 받는 막내로 자라기보다는 가정을 돕는 생활의 일익을 부담하는 목동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한 때는 형님들이 전쟁하는 터에 위문을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쳐서 이기어 왕과 국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울 왕의 사랑은 잠시였고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산과 들로 피신을 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왕의 자리에까지 등극하여 주위의 모든 열국을 제압하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던 대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도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 여인을 소유하기 위하여 여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도록 하는 살인죄를 범하는 야비한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음행과 살인의 결과로 그 집안에는 참으로 형언키 어려운 비극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 태어 난지 얼마가지 아니하여 병이 들어 곧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이 슬픔이 체 가시기도 전에 배다른 자녀간에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로 인하여 자녀들간에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곧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형국이 벌어 졌습니다.
이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 다윗은 할 수 없이 아들을 피하여 피신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더욱 다윗이 비통해 지게 됨은 그의 후궁들을 이 아들이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점령한 왕이 피 점령국의 차지함으로서 온전히 점령하였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 더욱 다윗이 슬픔 가운데 빠진 것은 그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이지만 아비의 심령으로 아무런 사고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마져도 부하의 손에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왕으로의 외적인 화려함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화려함보다 더 짙은 가정사의 어두움이 깊이 깔려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이러한 다윗을 흠모하고 그리고 다윗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윗의 화려함도 좋지만 다윗의 그 어두움이 싫어서 다윗과 같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모든 신앙인 들이 다윗의 그 화려함에 포인트를 두다보니 다윗을 흠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상 그의 어두운 아픔을 바라보게 될 때에 다윗의 그 화려함도 영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 어찌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걸어온 인생 여정은 어떠하십니까?
누가 말하기를 내가 살아온 삶을 다 이야기로 한다면 소설 중에 이런 소설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가끔 이런 말을 잘 사용 하시 더라고요
여러분들도 다윗의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굴곡의 인생을 살아 왔을 것 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알지 못 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을는지 더 나쁠는지를 말입니다.
세계의 모든 이들이 흠모하는 노벨 평화상을 타시고 현직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계시는 김대중 대통령도 한 때는 빨갱이로 몰려 저 동해 바다에 수장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전대통령, 노대통령 같은 분은 대통령직에서 물러 난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서 사형의 구설수까지 오르고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인간 다윗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은 잘하였고 저것은 못하였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가 이 파란만장한 인생 길을 살아오면서 그 역경과 고비마다 이것은 그의 잘함과 못함과 상관이 없이 항상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는 그의 의롭고 또 불의 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다가오는 인간관계나 주위의 환경 등은 실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일에 실족하지 아니하고 능히 감당하면서 그 유명한 다윗이라는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그의 노래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뉘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로다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 할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그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부정들을 다 긍정으로 바꿀 수 있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였기 때문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수많은 부정들을 경험하였고 또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부정들은 저를 불안하게 하기도 하고 또한 저를 낙심되게도 합니다.
또한 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제가 잘하고 못하고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도저히 제 힘으로는 그 부정들을 긍정으로 전환 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저는 한없이 저 자신이 슬퍼지게 됩니다.
드디어 제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오늘도 걷은 다 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이네...
좀 고상하게 부르면 옛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고 ......모두다 어디 갔나 나 홀로 여기서서 지난날을 생각하네
이 노래는 살아온 삶이 더 슬퍼지는 것 같고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도 의지하고 하소연 할 데도 더 없는 것 같고......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저에게 무슨 희망의 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저에게 하나님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붙잡아 주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살아온 인생이 눈물만 나는 처랑한 인생이 아니라 그런 대로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 희망이 없지만은 않아 소망이 있어 그리고 지금도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내게 은혜가 있어 그러니 오늘도 걷는다만은 이런 노래는 부르지 말어 모두다 어디 갔나 하지 말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그리하여 저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울한 마음이 싹 가시고 아주 기분 좋게 하시고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케 하는 인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이 여러분들의 잘하기 때문에 잘되고 여러분들이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안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르게 사는 만큼 이 세상이 보장을 해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불의 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잘 살아가는 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산다고 해서 못되게 되고 바르지 않아도 잘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만사가 인간의 잘 잘못에만 달려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자신의 의를 가지고 바로 해보려고 해도 그 수고의 결과가 바르게 하지 못한 자보다 낮다고 그 아무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를 자랑 할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 그 사람의 삶은 축복의 삶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가 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인간의 의를 내 세운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의를 내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과 우리를 아비가 자식을 대하는 것같은 불쌍히 여기시는 측은함이 우리의 조건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눈 꼽만치도 없지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긍휼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은 참으로 의로운 자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선을 열심히 행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종교적인 열심을 내었습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한 세리가 또 등장합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죄인입니다.
선을 행하기보다는 부정한 일을 하였습니다.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여 치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였고 반면에 세리는 그의 불의 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는 바리새인을 칭찬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꾸짖으시고 자신의 죄인임을 표하는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자격이 되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되지 못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께 특별히 한 것이 없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하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은혜를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한 것이 많아 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 출석도 잘하고 그러니 은혜를 왕창 주실 거야 하는 사람은 그 행위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입니까?
자신이 잘 난 사람이라고 아직도 여기고 있다면 은혜를 받지 못 할 사람이요 자신이 부족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조그만 일을 행하고서 그의 일한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을 사람은 많은 선을 행하였지만 그의 행한 일에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옥에 갈 자들이 자신들을 변론하기 시작하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이 행 한 의로움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시기는커녕 모두를 알지 못하다고 하시며 이들을 바깥 어두움에 던져 넣으라고 하였습니다.
또 천국에 갈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말하기보다는 한사코 의롭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의 의로움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인합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조그마한 선을 행하고 그것을 주장하거나 무슨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그런 마음이 충만한 자가 되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또 고백합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축복이 된다고 시인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든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 시편은 오랜 인생의 경험을 한 다윗이 하나님에 대한 새로운 발견을 하는 신앙의 고백을 노래한 시입니다.
다윗은 그의 여정은 다른 이들 못지 않은 어쩌면 더욱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는 평범한 가정에서 많은 형제들 중에 막내로 자랐습니다.
어릴 때부터 가정에서 사랑을 받는 막내로 자라기보다는 가정을 돕는 생활의 일익을 부담하는 목동의 직업을 가졌습니다.
한 때는 형님들이 전쟁하는 터에 위문을 갔다가 하나님의 은혜로 블레셋의 거장 골리앗을 쳐서 이기어 왕과 국민들의 인기를 독차지하기도 하였습니다.
그 일로 인하여 사울 왕의 사랑은 잠시였고 오히려 생명의 위협을 받고 산과 들로 피신을 다니는 처량한 신세가 되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가 왕의 자리에까지 등극하여 주위의 모든 열국을 제압하는 훌륭한 업적을 이루었던 대왕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러던 그도 한 여인의 아름다움에 반해서 그 여인을 소유하기 위하여 여인의 남편을 전쟁터에서 죽도록 하는 살인죄를 범하는 야비한 자이기도 하였습니다.
음행과 살인의 결과로 그 집안에는 참으로 형언키 어려운 비극이 있었습니다.
사랑하는 여인을 통하여 얻은 아들이 태어 난지 얼마가지 아니하여 병이 들어 곧 죽었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죽은 이 슬픔이 체 가시기도 전에 배다른 자녀간에 간음하는 일이 벌어졌고 이 일로 인하여 자녀들간에 살인이 벌어졌습니다.
곧 형제가 형제를 죽이는 형국이 벌어 졌습니다.
이 비극은 여기에서 끝나지 않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들이 아비를 죽이고 왕의 자리를 차지하려는 쿠데타를 일으킴으로 다윗은 할 수 없이 아들을 피하여 피신을 떠나는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가운데 더욱 다윗이 비통해 지게 됨은 그의 후궁들을 이 아들이 범하였다는 것입니다.
당시에는 점령한 왕이 피 점령국의 차지함으로서 온전히 점령하였다는 것으로 여겼기 때문입니다.
더 더욱 다윗이 슬픔 가운데 빠진 것은 그 쿠데타를 일으킨 아들이지만 아비의 심령으로 아무런 사고가 없기를 바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마져도 부하의 손에 살해를 당하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다윗이 대왕으로의 외적인 화려함이 있었다고 한다면 그 화려함보다 더 짙은 가정사의 어두움이 깊이 깔려져 있음을 보았습니다.
혹시 여러분들 중에는 이러한 다윗을 흠모하고 그리고 다윗같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드십니까?
저는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다윗의 화려함도 좋지만 다윗의 그 어두움이 싫어서 다윗과 같이 되고 싶은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모든 신앙인 들이 다윗의 그 화려함에 포인트를 두다보니 다윗을 흠모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실상 그의 어두운 아픔을 바라보게 될 때에 다윗의 그 화려함도 영광스럽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 역시 어찌 자기 마음대로 자신의 인생을 만들어 갈 수가 있었겠습니까?
여러분들이 걸어온 인생 여정은 어떠하십니까?
누가 말하기를 내가 살아온 삶을 다 이야기로 한다면 소설 중에 이런 소설이 없을 것이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우리 어머니가 가끔 이런 말을 잘 사용 하시 더라고요
여러분들도 다윗의 정도는 아니더라도 이러한 굴곡의 인생을 살아 왔을 것 입니다.
그리고 앞으로의 삶도 어떻게 될지를 아무도 알지 못 할 것입니다.
지금보다 더 나을는지 더 나쁠는지를 말입니다.
세계의 모든 이들이 흠모하는 노벨 평화상을 타시고 현직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계시는 김대중 대통령도 한 때는 빨갱이로 몰려 저 동해 바다에 수장 될 뻔하지 않았습니까?
과거에 전대통령, 노대통령 같은 분은 대통령직에서 물러 난후 김영삼 대통령 시절에 분노한 국민들에 의해서 사형의 구설수까지 오르고 감옥살이를 하지 않았습니까?
저는 오늘 이 시간에 인간 다윗이 무엇을 하고 어떻게 살았다는 이야기를 하려고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이것은 잘하였고 저것은 못하였다고 말을 하려고 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직 그가 이 파란만장한 인생 길을 살아오면서 그 역경과 고비마다 이것은 그의 잘함과 못함과 상관이 없이 항상 은혜를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이 함께 계셨다는 것을 말씀드리려고 합니다. 할렐루야!
그는 그의 의롭고 또 불의 함으로 인하여 그에게 다가오는 인간관계나 주위의 환경 등은 실로 자신의 힘으로 감당할 수가 없었던 일들이 너무나도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가 그 모든 일에 실족하지 아니하고 능히 감당하면서 그 유명한 다윗이라는 인물로 남아 있을 수 있음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였습니다.
그는 그의 노래에는 너무나도 유명한 글이 있습니다.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나로 하여금 푸른 초장에 뉘게 하시며 잔잔한 물가로 잔잔한 물가로 인도하시는 도다 진실로 선함과 인자하심이 인자하심이 나를 따르리로다 나를 따르리니 내가 내가 여호와 전에 영원토록 영원토록 거하리로다
내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로 다닐지라도 해를 두려워하지 아니 할 것은 주의 지팡이와 막대기가 나를 안위하시는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다윗 그에게 다가오는 수많은 부정들을 다 긍정으로 바꿀 수 있음은 하나님의 크신 은혜가 함께 하였기 때문임을 이렇게 노래하고 있었습니다.
저에게도 수많은 부정들을 경험하였고 또한 다가오고 있습니다.
그 부정들은 저를 불안하게 하기도 하고 또한 저를 낙심되게도 합니다.
또한 저로 하여금 죄를 짓도록 하는 요인이 되기도 합니다.
이러한 일들이 제가 잘하고 못하고 하고는 전혀 상관이 없이 일어나는 일들이었습니다.
도저히 제 힘으로는 그 부정들을 긍정으로 전환 할 수가 없는 것들입니다.
그러면 저는 한없이 저 자신이 슬퍼지게 됩니다.
드디어 제 입에서는 다음과 같은 노래가 흘러나오게 됩니다.
오늘도 걷은 다 만은 정처 없는 이 발길 지나온 자국마다 눈물 고이네...
좀 고상하게 부르면 옛동산 아지랑이 할미꽃 피고 ......모두다 어디 갔나 나 홀로 여기서서 지난날을 생각하네
이 노래는 살아온 삶이 더 슬퍼지는 것 같고 그리고 지금은 그 누구도 의지하고 하소연 할 데도 더 없는 것 같고......
이런 노래를 부른다고 해서 저에게 무슨 희망의 빛이 있는 것도 아니고......
이러한 저에게 하나님은 찾아 왔습니다.
그리고 저를 붙잡아 주시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습니다.
네가 살아온 인생이 눈물만 나는 처랑한 인생이 아니라 그런 대로 가치가 있고 보람이 있었어 그리고 앞으로 희망이 없지만은 않아 소망이 있어 그리고 지금도 너를 위하여 준비된 내게 은혜가 있어 그러니 오늘도 걷는다만은 이런 노래는 부르지 말어 모두다 어디 갔나 하지 말어 이렇게 말씀하시지 않겠습니까? 할렐루야!
그리하여 저를 하나님으로 인하여 우울한 마음이 싹 가시고 아주 기분 좋게 하시고 부정적인 마음을 긍정케 하는 인물로 만들어 주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삶이 여러분들의 잘하기 때문에 잘되고 여러분들이 잘하지 못하기 때문에 잘안대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 주위에는 자기 나름대로 바르게 살아가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그의 바르게 사는 만큼 이 세상이 보장을 해 주지 않습니다.
어떤 이는 불의 하게 살아가는 이도 있습니다.
그런데도 잘 살아가는 자도 있습니다.
그렇다고 바로 산다고 해서 못되게 되고 바르지 않아도 잘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모든 만사가 인간의 잘 잘못에만 달려 있음이 아니라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 아래 놓여 있다는 것입니다.
비록 인간이 자신의 의를 가지고 바로 해보려고 해도 그 수고의 결과가 바르게 하지 못한 자보다 낮다고 그 아무도 말 할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인간적인 의를 자랑 할 것이 없다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를 의지하면 그 사람의 삶은 축복의 삶이 되기도 합니다.
내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는 것은 나에게 무슨 의가 있기 때문에 받는 것이 아닙니다.
지금이라도 인간의 의를 내 세운다고 한다면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하지 않을 것입니다.
나의 의를 내 세울 것이 없기 때문에 하나님의 은혜가 필요한 것입니다.
하나님의 자비와 긍휼하심과 우리를 아비가 자식을 대하는 것같은 불쌍히 여기시는 측은함이 우리의 조건과 상관이 없는 하나님의 은혜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은혜를 받을 만한 것이 눈 꼽만치도 없지만은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그 긍휼하심이 크시기 때문에 값없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어떠한 가를 보여주는 장면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한 바리새인은 참으로 의로운 자 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인간적으로 선을 열심히 행하고 하나님을 향하여 종교적인 열심을 내었습니다.
구제하고 봉사하는 일이 어디 쉬운 일입니까?
한 세리가 또 등장합니다.
그는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나 사람 앞에서 죄인입니다.
선을 행하기보다는 부정한 일을 하였습니다.
세금을 부당하게 징수하여 치부를 하였습니다.
그러니 바리새인은 사람 앞에나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로움을 자랑하였습니다.
그러나 세리는 사람 앞에서나 하나님 앞에서 떳떳하지를 못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은 하나님께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였고 반면에 세리는 그의 불의 함을 드러내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자신의 의로움을 말하는 바리새인을 칭찬하시지 않으시고 오히려 꾸짖으시고 자신의 죄인임을 표하는 세리를 칭찬하셨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하나님의 은혜는 받을 자격이 되어서 주는 것이 아니라 자격이 되지 못하는 자에게 주시는 은혜이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 가운데서 나는 하나님께 특별히 한 것이 없어 은혜를 받을 자격이 없어 하는 마음을 가진 자라면 은혜를 받을 사람입니다.
그러나 나는 하나님께 한 것이 많아 봉사도 많이 하고 교회 출석도 잘하고 그러니 은혜를 왕창 주실 거야 하는 사람은 그 행위로 은혜를 받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입니다.
그러면 여러분은 은혜를 받을 수 있는 사람입니까?
아직도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입니까?
자신이 잘 난 사람이라고 아직도 여기고 있다면 은혜를 받지 못 할 사람이요 자신이 부족함을 인식하는 사람은 은혜를 받을 것입니다.
그런데 저는 참으로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게 됩니다.
은혜를 받지 못할 사람은 조그만 일을 행하고서 그의 일한 것에 큰 관심을 가지고 있었고 무슨 보상을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은혜를 받을 사람은 많은 선을 행하였지만 그의 행한 일에 오히려 부족함을 느끼는 자들입니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사람들이 심판을 받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먼저 지옥에 갈 자들이 자신들을 변론하기 시작하는데 모두가 한결같이 자신들이 행 한 의로움을 하나도 잊어버리지 않고 말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 때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그들의 행위를 칭찬하시기는커녕 모두를 알지 못하다고 하시며 이들을 바깥 어두움에 던져 넣으라고 하였습니다.
또 천국에 갈 자들이 있는데 이들은 자신들의 의로움을 말하기보다는 한사코 의롭지 못하고 부끄러워하고 있었습니다.
이런 자들에게 예수님이 오히려 그들의 의로움을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시인합시다.
그리고 고백합시다.
내가 생각하는 것이나 말하는 것이나 행하는 것이나 이 모든 것이 너무나도 부족하여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아무런 쓸모가 없다는 것을 말입니다.
조그마한 선을 행하고 그것을 주장하거나 무슨 보상을 기대하는 마음이 없어지기를 바랍니다.
오히려 자신이 죽도록 충성하고도 아무 것도 하지 못한 무익한 종입니다 라는 그런 마음이 충만한 자가 되시기바랍니다.
그리고 또 고백합시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축복이 된다고 시인합시다.
그러면 하나님은 우리가 무엇을 하든지 어디를 가든지 언제든지 함께 하시며 도와주시고 축복해 주실 것입니다.
이런 은혜가 오늘 우리 성도들 가운데 충만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