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생명을 취하는 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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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07회 작성일 2015-06-21 20:10본문
디모데전서6:17-21 참된 생명을 취하는 선
1950년대 알바이트 슈바이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알베르 까뮈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쳐는 그 상급으로 아프리카의 환자들을 위하여 병실을 지어주는 의료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환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깊은 오지에서 기도하던 모습으로 죽은 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뮈는 상금으로 자신을 위하여 파리근교에 별장을 짓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로 했으나 그 별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던 중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고 자신을 위한 삶이 더 이상 계속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더 그 삶에 의미가 있을까?
본문에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베푸는 삶이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18-19절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행복에도 차원이 다른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일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행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오로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을 행복으로만 아는 자입니다,
이기적인 시대가 될 것입니다.
격을 좀 더 높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가는 행복은 이차원적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좀 더 나아가 형제 친척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효자 효부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 등등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을 주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웃을 위한 삶입니다.
이들의 삶은 결코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 삼차원적인 행복이라고 합니다.
인생이란 내 육신을 위하여 얼마큼 살았는가. 이루어 놓았는가가 아니라 내 육신으로 이웃을 위하여 얼마만큼 도움을 주는데 쓰였느냐에 따라 평가됩니다.
행복의 질도 물질 등 얼마만큼 소유했느냐에 따라 참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내 자신이 사용되어졌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에베소는 돈이 많은 대도시입니다.
그리고 복음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유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만 전부였습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
1923년에 미국 시카고의 에치워트 비치 호텔에 이들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만큼 부를 소유한 미국이 유력한 인사 거부 7명이 모여 자신들의 성공담 그리고 앞으로의 더 성공 할 것에 대하여 심포지엄을 가졌습니다.
시카고에 모였던 그날부터 계산하여 정확히 25년 뒤에 그 유력인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시의 철강회사의 회장으로 부를 누렸던 찰스 슈업이란 사람은 그 기업이 기울어져 한 푼 없는 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커튼이란 사람 역시 모든 것을 다 탕진하여 걸인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또 당시의 뉴욕은행의 총재였던 리처드 윌튼은 금융사고로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나라의 재무 장관이었던 앨버트 홀이란 사람은 감옥에서 종신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으나 보석금을 내고 나왔서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였습니다.
재력가 제이 스립모라는 사람은 자살로 세상을 떴고,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던 이반크루브란 사람은 자살 시도했다가 응급조치로 살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소유의 허무함을 보여 줍니다.
소유가 나쁜 것이 아니라 소유자체만으로 논한다면 크게 자랑 거리나 의지의 대상이 아니요
소망의 도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정함이 없는 재물이란 확실하지 않는 재물이란 뜻입니다.
얼마를 가졌다느니 앞으로 얼마를 모아야겠다는 큰 의미가 없고
일찍이 솔로몬은 그 삶이 그렇게 허무한 삶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5:13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것에 집착되면 큰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삶은 소유에만 집착하고 그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의 영혼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필요를 따라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 소유하기 위하여 구하는 자가 더 이상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선의 도구가 됨을 구하여야 합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은 입히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구하기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합니까를 구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과부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밀가루 조금과 기름이 약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그 집에 있는 음식 재료를 모두 섞어 떡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과부가 자기가 가진 재료를 모두 털어서 엘리야를 위해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그 여자에게 두려워 말고 자기가 말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바쳐서 그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에서 생명이 찾아 왔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단지 영원한 생명 하나만 가지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친 적도 없으며 간음을 한 일도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잘 공경한 청년이었습니다. 아주 모범적인 청년이요 성공한 청년입니다.
영생을 요구하는 청년에게 엘리야가 과부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처럼, 이 청년에게도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라는 믿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소유가 자신을 너무 슬픈 자로 만들었습니다.
슬픔으로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를 소유하였기에 모든 것을 얻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자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만물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확실히 달라지는 변화 하나는 남이 점점 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나 자신, 내 가족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남을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이고, 설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그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만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눅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요 부자였는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혼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담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소유한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주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눅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과연 우리에게도 삭개오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소유만을 고집하고 나를 위하여는 아낌이 없고 내 가족을 위하여는 아깝지 않고 선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선한 사업을 위하여는 요지부동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복은 더 달라고, 부르짖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된 삶은 선한 사업을 위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입니다.
그래서 최소의 투지로 최대의 이익을 얻도록 애씁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가지요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사업의 목적은 이 사업을 통하여 얼마나 남에게 주어졌느냐 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실비와 많은 서비스 제공입니다.
착한 가격이란 곳이 많이 생기면 좋습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업에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어주라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은 육신을 위한 일에만 적용되어지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생은 영원한 영혼을 위한 삶을 살게 하여줍니다.
육신은 탄생, 성장, 노쇠, 죽음의 과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영생은 탄생, 성장은 있어도 노쇠와 죽음은 없고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영혼이 자라나기 위한 임시 장막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육신이 영혼의 무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육신의 욕망 속에 영혼이 갇혀있을 때입니다.
그러면 함께 멸망합니다.
지금은 삶의 의미를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선을 행하며 선한 일을 하며 살 때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크리소스톰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렇게 구분했다고 합니다.
참된 부자란 많은 재물을 모은 자가 아닌 재물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참된 빈자는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한 사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부자이십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이십니까?
반면 재물이 많든 적든 탐욕이 가득하면 그건 가난한 자입니다.
즉 탐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탐욕을 절제하고 자족하는 사람! 그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고 나누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당장 오늘밤 일어날 일을 모르고 내일의 풍요와 누림을 생각하며 만족해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참된 부요는 하나님에 대한 부요입니다.
선에 대한 부요입니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인생의 어리석은 단순히 소유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주께서 보시기에 가난할까요? 부자일까요?
스스로 부요한 자로 여기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실상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한 주님의 말씀은
고후6:8-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선한 일에 부유한 이러한 삶의 결국은 자신을 위한 길입니다.
이게 얼마나 부유한 자로서의 삶이지 않습니까?
18-19절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가진 것이 없다는 인식으로 무엇인가 소유만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 선을 베풀려는 의식으로 내 스스로가 부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삶이 자신을 위한 좋은 투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살맛이 나시기를
1950년대 알바이트 슈바이쳐는 노벨평화상을 받았고 알베르 까뮈는 노벨문학상을 받았습니다.
슈바이쳐는 그 상급으로 아프리카의 환자들을 위하여 병실을 지어주는 의료사업에 투자를 하여 많은 환자들에게 위로와 소망을 주었습니다.
그는 아프리카 깊은 오지에서 기도하던 모습으로 죽은 그의 시신을 발견하였다고 합니다.
그러나 까뮈는 상금으로 자신을 위하여 파리근교에 별장을 짓고 즐거운 나날을 보내기로 했으나 그 별장으로 자동차를 몰고 가던 중 안타깝게 교통사고로 생명을 잃고 자신을 위한 삶이 더 이상 계속되지를 못했습니다
누가 더 그 삶에 의미가 있을까?
본문에는 자신을 위한 삶이 아닌 자신을 베푸는 삶이 참된 생명을 얻는 것입니다.
18-19절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행복에도 차원이 다른 세 가지 차원이 있다고 합니다.
일차원의 행복은 자기 자신을 위하여 사는 행복입니다.
무엇을 하던지 오로지 오직 자기 자신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사람들은 1차원의 행복을 행복으로만 아는 자입니다,
이기적인 시대가 될 것입니다.
격을 좀 더 높여 가족을 위하여 일생을 살아가는 행복은 이차원적인 행복입니다.
이 행복은 부모, 남편, 아내, 자녀, 좀 더 나아가 형제 친척을 위해서 노력을 하고, 그 노력을 행복으로 생각합니다.
효자 효부 부모의 헌신적인 사랑 등등 많은 사람들의 가슴을 뭉클하게 하지 않습니까?
가족을 위해서 자신의 일생을 헌신할 수 있다는 것은 귀한 일입니다.
그러나 진정한 감동을 주는 일이 있는데 이것은 이웃을 위한 삶입니다.
이들의 삶은 결코 자기 자신도 아니요, 가족도 아니요, 자신과는 전혀 상관없는 사람, 이웃을 위한 것입니다.
이것 삼차원적인 행복이라고 합니다.
인생이란 내 육신을 위하여 얼마큼 살았는가. 이루어 놓았는가가 아니라 내 육신으로 이웃을 위하여 얼마만큼 도움을 주는데 쓰였느냐에 따라 평가됩니다.
행복의 질도 물질 등 얼마만큼 소유했느냐에 따라 참 행복이 결정되는 것이 아니라, 얼마만큼 내 자신이 사용되어졌느냐에 따라 행복이 결정되는 것입니다.
본문에는 에베소교회에 대하여 사도 바울이 디모데에게 참된 생명이 무엇인가를 소개하는 내용입니다
에베소는 돈이 많은 대도시입니다.
그리고 복음도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나 진정한 그리스도인의 생활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소유에만 관심이 있었습니다.
영생에 대하여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이 땅에서만 전부였습니다.
어떠한 삶을 살아야 합니까?
소망을 하나님께 두는 것
1923년에 미국 시카고의 에치워트 비치 호텔에 이들의 재산을 합치면 미국 전체의 국고를 능가할 만큼 부를 소유한 미국이 유력한 인사 거부 7명이 모여 자신들의 성공담 그리고 앞으로의 더 성공 할 것에 대하여 심포지엄을 가졌습니다.
시카고에 모였던 그날부터 계산하여 정확히 25년 뒤에 그 유력인사들이 어떻게 되었는지 조사해 보았습니다.
당시의 철강회사의 회장으로 부를 누렸던 찰스 슈업이란 사람은 그 기업이 기울어져 한 푼 없는 걸인이 되어 세상을 떠났습니다.
밀농사로 거부가 되었던 커튼이란 사람 역시 모든 것을 다 탕진하여 걸인으로 살다 죽었습니다.
또 당시의 뉴욕은행의 총재였던 리처드 윌튼은 금융사고로 옥중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당시 그 나라의 재무 장관이었던 앨버트 홀이란 사람은 감옥에서 종신형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존재가 되었으나 보석금을 내고 나왔서나 집에서 죽음을 기다리는 병자였습니다.
재력가 제이 스립모라는 사람은 자살로 세상을 떴고,
부동산 업계의 거부였던 이반크루브란 사람은 자살 시도했다가 응급조치로 살아 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는 중이었다고 알려져 있습니다.
이는 소유의 허무함을 보여 줍니다.
소유가 나쁜 것이 아니라 소유자체만으로 논한다면 크게 자랑 거리나 의지의 대상이 아니요
소망의 도구도 아니라는 것입니다
17절 네가 이 세대에서 부한 자들을 명하여 마음을 높이지 말고 정함이 없는 재물에 소망을 두지 말고 오직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께 두며
정함이 없는 재물이란 확실하지 않는 재물이란 뜻입니다.
얼마를 가졌다느니 앞으로 얼마를 모아야겠다는 큰 의미가 없고
일찍이 솔로몬은 그 삶이 그렇게 허무한 삶이었음을 말하고 있습니다.
전5:13 내가 해 아래에서 큰 폐단 되는 일이 있는 것을 보았나니 곧 소유주가 재물을 자기에게 해가 되도록 소유하는 것이라
그것에 집착되면 큰 폐단이 되는 것입니다.
가장 어리석은 삶은 소유에만 집착하고 그것에 소망을 두는 사람입니다.
결국은 그의 영혼까지 잃어버릴 것입니다.
우리는 하나님께 소망을 두고 살아가기 때문에 소유의 개념이 아니라 필요를 따라 사용되는 개념입니다.
하나님께 소유하기 위하여 구하는 자가 더 이상 되지 말아야 합니다.
내 자신이 선의 도구가 됨을 구하여야 합니다.
공중의 새도 먹이시고 들의 백합화도 하나님은 입히십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마6:31-34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내가 힘들면 힘들수록 구하기만 하지 말고
하나님이 내가 어떻게 사용되어야 합니까를 구해야 합니다.
열왕기상 17장에 사르밧 과부는 당시 이스라엘에는 비가 오지 않아서 큰 기근이 들었습니다.
과부에게는 아들이 있었습니다.
이 가정에도 먹을 것이 부족하여 밀가루 조금과 기름이 약간 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마저 없으면 굶어 죽을 지경이 되었습니다.
엘리야가 그 집을 방문했습니다. 그리고 자기를 위해서 그 집에 있는 음식 재료를 모두 섞어 떡을 만들어달라고 했습니다.
이 과부가 자기가 가진 재료를 모두 털어서 엘리야를 위해 떡을 만들기 위해서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엘리야는 그 여자에게 두려워 말고 자기가 말한 대로 하라고 했습니다.
과부는 엘리야의 말을 믿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것을 전부 다 바쳐서 그가 하라는 대로 했습니다.
그 결과 사망에서 생명이 찾아 왔습니다.
마태복음 19장에 나오는 부자청년 이야기입니다.
이 청년은 세상이 줄 수 있는 모든 것을 가진 부자였습니다.
단지 영원한 생명 하나만 가지지 못했습니다.
거짓말을 한 적도 없고 남의 것을 훔친 적도 없으며 간음을 한 일도 없습니다.
어머니와 아버지를 잘 공경한 청년이었습니다. 아주 모범적인 청년이요 성공한 청년입니다.
영생을 요구하는 청년에게 엘리야가 과부에게 믿음을 요구한 것처럼, 이 청년에게도 자신의 소유를 가난한 자들에게 나누어라는 믿음을 요구했던 것입니다.
이 청년은 자신의 소유가 자신을 너무 슬픈 자로 만들었습니다.
슬픔으로 예수님을 떠나가고 말았습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너무 사랑하셔서 독생자를 주셨습니다.
이제는 예수를 소유하였기에 모든 것을 얻는 자입니다.
다른 말로 하면 부자입니다.
선을 행함으로 생명을 얻는 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그리스도인은 예수님의 마음으로 만물을 보고 사는 사람들입니다.
예수를 믿으면, 확실히 달라지는 변화 하나는 남이 점점 남에 대한 관심이 크게 보여진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믿기 전에는 나 자신, 내 가족 밖에는 보이지 않았는데, 예수님을 영접하고 나서는 남을 생각하게 되고, 남에게 사랑을 나누어주게 됩니다.
이런 변화가 뒤따르지 않으면, 그 사람은 예수를 잘못 믿은 것이고, 설사 예수를 믿는다고 해도 기독교를 여러 종교 중에 하나로 생각하고 그저 마음의 평화를 위해서만 하나의 종교로서 기독교인이 되는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눅 19장에 보면 삭개오 이야기가 나옵니다.
삭개오는 세관장이요 부자였는데 그가 어느 날 예수님을 영접합니다.
그가 예수님을 영접한 이후, 그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는지 주목해보시기 바랍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았으니 혼자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해하는 것이 아니라, 자기가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담하고 불의한 방법으로 소유한 재산을 남에게 나누어주기로 결단을 했습니다.
눅19:8-9 삭개오가 서서 주께 여짜오되 주여 보시옵소서 내 소유의 절반을 가난한 자들에게 주겠사오며 만일 누구의 것을 속여 빼앗은 일이 있으면 네 갑절이나 갚겠나이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오늘 구원이 이 집에 이르렀으니 이 사람도 아브라함의 자손임이로다
과연 우리에게도 삭개오와 같은 변화가 뒤따르고 있습니까?
예수를 믿고도 여전히 소유만을 고집하고 나를 위하여는 아낌이 없고 내 가족을 위하여는 아깝지 않고 선을 위하여 남을 위하여 선한 사업을 위하여는 요지부동이 아닙니까?
그러면서 하나님께 복은 더 달라고, 부르짖고 매달리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참된 삶은 선한 사업을 위한 인생이 되어야 합니다
세상 사람들의 사업의 목적은 이윤추구입니다.
그래서 최소의 투지로 최대의 이익을 얻도록 애씁니다.
이렇게 생겨난 것이 바가지요금입니다.
그런데 그리스도인의 사업의 목적은 이 사업을 통하여 얼마나 남에게 주어졌느냐 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바로 실비와 많은 서비스 제공입니다.
착한 가격이란 곳이 많이 생기면 좋습니다.
선한 사업에 부하라는 말씀은 사람들에게 유익이 되는 사업에 넉넉한 마음으로 베풀어주라는 말입니다
육신적인 생명은 육신을 위한 일에만 적용되어지는 삶을 살게 만듭니다.
그러나 영생은 영원한 영혼을 위한 삶을 살게 하여줍니다.
육신은 탄생, 성장, 노쇠, 죽음의 과정을 가집니다.
그러나 영생은 탄생, 성장은 있어도 노쇠와 죽음은 없고 영생입니다.
그러므로 육신은 영혼이 자라나기 위한 임시 장막일 뿐입니다.
그러나 잘못하면 육신이 영혼의 무덤이 될 수 있습니다.
바로 육신의 욕망 속에 영혼이 갇혀있을 때입니다.
그러면 함께 멸망합니다.
지금은 삶의 의미를 찾을 때입니다.
하나님께 대한 소망으로 선을 행하며 선한 일을 하며 살 때입니다.
기독교 철학자 크리소스톰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이렇게 구분했다고 합니다.
참된 부자란 많은 재물을 모은 자가 아닌 재물에 대해 욕심을 부리지 않는 사람이다.
또한 참된 빈자는 재물이 없는 사람이 아니라 탐욕이 가득한 사람을 뜻한다고 했습니다.
여러분은 부자이십니까? 아니면 가난한 자이십니까?
반면 재물이 많든 적든 탐욕이 가득하면 그건 가난한 자입니다.
즉 탐욕을 다스리지 못한다면, 어떤 경우에도 부유하다고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탐욕을 절제하고 자족하는 사람! 그가 세상에서 가장 풍요로운 사람인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소유에만 관심을 가지고 나누지 못하고 하나님의 부르심을 입었습니다.
당장 오늘밤 일어날 일을 모르고 내일의 풍요와 누림을 생각하며 만족해하는 어리석은 자였습니다.
참된 부요는 하나님에 대한 부요입니다.
선에 대한 부요입니다.
마6:19-21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땅에 쌓아 두지 말라 거기는 좀과 동록이 해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고 도둑질하느니라 오직 너희를 위하여 보물을 하늘에 쌓아 두라 거기는 좀이나 동록이 해하지 못하며 도둑이 구멍을 뚫지도 못하고 도둑질도 못하느니라 네 보물 있는 그 곳에는 네 마음도 있느니라
인생의 어리석은 단순히 소유만의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과 생각이 하나님을 향하지 못한 것이 더 큰 문제였습니다.
주께서 보시기에 가난할까요? 부자일까요?
스스로 부요한 자로 여기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주신 말씀을 보면
계3:17-18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도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많은 시련과 극한 가난이 있지만 그리스도인은 실상을 고린도교회에 소개한 주님의 말씀은
고후6:8-10 우리는 속이는 자 같으나 참되고 무명한 자 같으나 유명한 자요 죽은 자 같으나 보라 우리가 살아 있고 징계를 받는 자 같으나 죽임을 당하지 아니하고 근심하는 자 같으나 항상 기뻐하고 가난한 자 같으나 많은 사람을 부요하게 하고 아무 것도 없는 자 같으나 모든 것을 가진 자로다
선한 일에 부유한 이러한 삶의 결국은 자신을 위한 길입니다.
이게 얼마나 부유한 자로서의 삶이지 않습니까?
18-19절선을 행하고 선한 사업을 많이 하고 나누어 주기를 좋아하며 너그러운 자가 되게 하라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
가진 것이 없다는 인식으로 무엇인가 소유만 해야 한다는 의식으로 스스로 가난한 자가 되지 마시기 바랍니다.
무엇인가 선을 베풀려는 의식으로 내 스스로가 부유한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 삶이 자신을 위한 좋은 투자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살아가면 갈수록 더욱 살맛이 나시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