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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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27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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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13:1-9 열매를 찾으시는 하나님
우리 주위에는 생각지도 않는 사고와 사건들이 생겨 애매한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는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비탈길 아래로 달리던 대형 트럭이 브레이크 고장을 일으켜 가계와 가정집의 담을 뚫고 들어와 잠자던 사람이 소리 한번 지르지 못하고 참변을 당하기도 합니다.
한강을 가로질러 만들어 놓은 다리가 예고도 없이 다리 한 가운데가 내려앉아 달리던 차와 사람이 수장을 당하기도 했습니다.(성수대교)
기분 좋게 쇼핑을 즐기던 사람들 머리위로 세멘 콘크리트 덩어리가 무너져 내려 수많은 사람들이 깔려 죽기도했습니다.(삼풍백화점)
해외의 유명한 관광지로 가던 비행기가 신혼부부와 유명 인사들을 실은 체 그 머리를 산으로 쳐 박은 바람에 불에 타 폭파해 버렸습니다. (아시아나 괌)
많은 사람들이 죽은 사람의 남은 흔적이라도 찾아보려고 했지만 찾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건강한 사람이 몸이 좋지 않아 병원에 가보니 갑자기 병이 생겨 병원에 입원을 하여 사투를 버리다가 그냥 죽기도 합니다.
이럴 때에 많은 사람들은 이 슬픔을 비통해하면서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습니다.
나에게는 이런 일이 일어나리라고는 꿈도 못 꾸었는데 라든지 혹은 다른 사람의 일로만 알았는데 라고 하며 자신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일이 일어났다는 것으로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는 또 하는 말이 내가 무엇을 잘못했기에 이런 일을 당하여야 하는가? 하고 원망과 불평을 털어놓기도 합니다.
참으로 나에게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우리 가정에 어려운 일과 상관이 없으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사실 이러한 사건과 사고는 어느 특정인에게만 생기는 일이 아니라 어느 누구에게나 일어 날 수 있는 일이요 바로 나 자신에게도 생길 수 있는 일입니다.
다만 이러한 사건과 사고를 어떠한 시각으로 바라보느냐? 가 더 중요합니다.
예수님 당시에도 이와 같은 비극적인 사건들이 생겨 많은 사람들이 희생을 당하였습니다.
빌라도가 성전에 제물을 바치려고 온 갈릴리 사람들을 잡아다가 잔인하게 죽이고 그 사람들의 피를 자신의 제물 곧 짐승의 피에 섞어서 제사한 사건입니다.
이 사건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아 자세히 알 수는 없지만은 역사가 요세푸스는 [갈릴리 사람들은 특별히 반란을 일으키기 쉬운 기질을 가졌다] 고 말한 것으로 보아서 아마 그 당시 갈릴리 사람들이 총독 빌라도와 로마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이 일어난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습니다.
유세비우스의 기록에 의하면 어떤 유월절에는 유대인들이 짐승처럼 학살되었는데 한번에 3,000명 또는 20,000명이 당하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이 사건은 참으로 비극적인 사건이 아닐 수 없으며 예수님을 십자가에 사형언도를 내린 빌라도 총독이 얼마나 잔인한 사람인가를 잘 알 수가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사실을 예수님께 알리는 유대인들은 빌라도의 악독함으로 살해당한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는 것보다는 그들의 죽음은 그들의 죄 값으로 당연히 죽었다고 하는 교리논쟁을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들이 주님께 갈릴리 사람들이 예배를 드리러 갔다가 제물로 바치는 짐승의 피에 자기들의 피를 섞게 된 소식을 애통하는 마음으로서가 아니라 정죄 하듯이 알린 것입니다.
갈릴리 사람들은 죄가 많아서 이 같은 벌을 받았다는 것입니다.
또 한 사건은 실로암에 있는 망대가 무너진 사건입니다.
실로암 망대는 물을 높은 곳에서 저장하는 물탱크입니다.
이 망대가 무너져서 열 여덟 명이 압사한 사건이 예수님 당시에 일어났습니다.
물론 거기에는 상당한 이유가 있습니다.
설계가 잘못되었거나 아니면 엉터리 불실 공사라거나 허술한 것을 알면서도 당국에서 감독을 소홀히 함으로 서 사고가 일어난 것이라 고 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이러한 사건이 발생하기만 하면 모두가 죄 때문이라고 말들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의 해석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빌라도에게 처형을 당한 사람이나 망대에 치여 죽은 사람들이 살아 있는 사람보다 죄가 더 많아서 그 죄 값으로 죽은 것이 결코 아니라고 하십니다.
살아 있는 사람 가운데는 얼마든지 죽은 사람들보다 더 죄가 많은 사람들이 있을 수가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렇다면 그 멸망의 이유가 무엇이란 말입니까?
결코 죄가 멸망의 원인이 아니라 죄를 죄로 알고 죄를 회개하지 못하는 그 강퍅한 마음이 멸망을 가져오는 것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잘못한 일이 있어도 즉각적으로 우리에게 심판이 없다는 것은 우리의 죄를 따라 갚지 아니하시고 회개의 기회를 주시며 참고 기다리시는 것입니다.
아마 하나님이 우리의 잘 못에 따라 다 갚으시면 아무도 살아 남을 자가 없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한 사람도 죄로 인하여 멸망을 당하기를 원치 안으시고 그 가운데 회개함으로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시는 은혜로우신 하나님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여러분 한 사람도 멸망에 이르지 원치 않으시고 구원받기를 원하여 오래 참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고 하나님께 합당치 않는 행동을 회개하는 기회를 가지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누가 회개의 합당한 열매를 맺는가를 보시고 그 회개하는 자에게 구원의 은혜를 베풀려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우리에게는 마냥 구원을 가져오는 회개의 기회가 남아 있는 것이 아닙니다.
기회는 지금 이 시간뿐입니다. 내일도 늦습니다. 내일을 우리가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여기에 한 포도원이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포도원이기 때문에 포도나무만 심겨있는 과원입니다.
그런데 그 주인은 전혀 격식에 맞지 않은 무화과나무를 그 포도원에 심었습니다.
그리고는 그 심겨진 무화과나무를 포도나무와 함께 사랑을 하며 돌보았습니다.
이 포도원에 포도나무가 아니지만 심겨서 포도나무와 똑같은 사랑을 받는 이 무화과나무는 어떤 나무입니까?
사랑을 받지 못할 나무가 주인의 사랑을 받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바로 이 나무의 주인공은 저와 여러분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랑을 받지 못 할 자가 사랑을 받고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면 어찌 의인들이 설 수 있는 하나님의 보좌 앞에 죄인 된 우리가 어찌 주의 교회에 나 올 수가 있었겠습니까?
무조건적으로 받아 주시는 은혜가 아니라면 어찌 하나님을 아버지라 부를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세상의 다른 이들 보다 무엇을 잘하여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되었습니까?
우리가 무엇이 하나님을 닮아서 하나님을 감히 아버지라고 부를 수가 있습니까?
혈과 육만 가득 찼고 하나님의 성품은 찾아 볼 수도 없지 않습니까?
오늘 저와 여러분은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같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로 하나님 앞에 나오게 된 자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그것뿐입니까?
하나님 앞에 나오고 보니 내게 주시는 또 큰 은혜가 너무나도 많지 않습니까?
하나님 아버지하고 부르면 온갖 무거운 짐에서 가벼움을 얻고 참 평안의 은혜를 받지 않습니까?
그 안에서 행복과 소망 가운데 살지 않습니까?
예수 안에서의 삶은 너무나도 안락하고 안전하며 또한 축복의 날들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마치 포도원에 심겨진 무화과나무가 포도원에 주어진 조건이 너무나도 좋아서 그 나무가 튼튼하게 자랐고 그리고 그 잎사귀도 아주 무성하였다고 합니다.
포도원 지기가 정성을 다하여 돌봐 주었기 때문입니다.
좋은 거름도 주고 잡초도 뽑아 주었습니다.
그러기를 3년의 세월을 보냈습니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습니다.
3년의 세월을 보냈다는 것은 열매가 맺힐 때가 충분히 되었다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분명히 열려야 할 열매가 열리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님의 희생을 통하여 값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많이 받은 자인 줄로 믿어지십니까?
그런데 그 은혜만을 좋아했지 그 은혜를 베풀어주신 하나님에게는 전혀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은혜만 받았지 그 은혜를 감사치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불평과 원망만을 하고 있지는 않습니까?
어느 날 포도원에 나온 주인의 명령이 떨어졌습니다.
당장 찍어 버리라는 심판의 메시지입니다.
무화과나무의 종말을 의미하는 두렵고 떨리는 한마디였습니다.
주인의 질책에 걸맞게 무화과나무는 열매도 없이 과수원 땅만 차지하고 버리고 있었는지 모릅니다.
주인이 기뻐하는 것, 주인이 찾으시는 것보다는 자신이 좋아하는 것만 하였습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에 관심을 갖기보다는 늘 자신이 원하는 대로만 살아 왔습니다.
그리하여 그는 은혜는 받았지만 진정으로 주인이 기뻐하는 것은 하나도 이루지 못한 존재였습니다.
이 모습이 오늘 우리의 모습에서 찾아 볼 수도 있지 않습니까?
여러 해를 기다렸지만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 이제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은 주인으로서는 당연한 일입니다.
그러나 포도원지기는 주인에게 사정을 합니다.
마치 이 무화과나무가 열매를 맺지 못함은 자신의 잘 못이기라도 한 것처럼 주인에게 간청을 합니다.
다시 한 번의 기회를 허락하신다면 더 잘 돌보아 반드시 열매를 맺도록 하겠습니다 하고 만약에 그 때에도 열매가 없으면 찍어 버려도 말 할말이 없습니다 라고 간청을 한 것입니다.
포도원지기의 간청 때문에 마땅히 찍혀야 할 무화과나무에게 다시 열매를 맺을 기회를 주어 졌다는 것입니다.
이제는 이 무화과나무는 살아 있는 이유는 오직 한 가지 뿐입니다.
이랬다 저랬다 할 시간도 없습니다.
마지막 기회가 주어졌을 뿐입니다.
주인이 원하는 열매를 맺기 위해 전념할 기회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하여야 만이 무화과나무가 살아 남을 유일한 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저와 여러분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수 없는 자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사는 자가 된 줄로 믿으십니까?
그리고 우리는 지금까지 그 사랑을 받고 지금까지 이 세상에서 살아 온 것임도 또한 믿으십니까?
앞으로 이 사랑을 받은 길만이 내가 살길인지도 믿습니까?
당신은 사랑 받기 위해 태어난 사람 그 사랑 지금도 받고 있지요
이제는 그 은혜를 자각하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여태까지 우리는 그 은혜와 그 사랑만을 좋아했지 그 은혜에 대한 보답은 없이 살아온 참으로 무심한 사람으로 살아 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습니다.
우리의 필요에 따라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던 자였습니다.
조난 당한 두 명의 선원이 며칠 동안 표류하고 있었습니다.
두려움과 좌절로 신음하던 한 선원이 하나님께 기도하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 저의 죄를 용서해 주세요. 저는 그 동안 너무나 많은 죄를 짓고 살아왔습니다.
주님, 이번 한 번만 저를 구해 주신다면 이제 하나님을 위해 살 것을 맹세합니다 라고 하려고 하는데…
그때 동료 선원이 잠깐 ! 하나님께 약속한다는 말은 하지 말게.
저기 육지가 보이네 !하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 말과 동시에 그 선원은 더 이상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이 이야기는 많은 사람들의 모습을 대변해 주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요즘도 참으로 많은 사람들이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회개를 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위기 상황이 지나가고 나면 그들의 본래의 인간의 혈육이 돌아가 여전히 똑같은 죄를 범합니다.
당신은 어떻습니까 ?
진정한 회개는 전에 사랑했던 죄에서 떠나는 것입니다.
이제 말씀을 마칩니다.
은혜를 받은 사람은 은혜에만 젖어서 사는 존재가 아니라 그 은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사람입니다.
이 사순절 절기에는 은혜의 절기며 축복의 절기입니다.
죄악의 삶에서 돌아서 은혜를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을 살도록 세움 받은 존재임을 새롭게 인식하는 절기입니다.
그리고 은혜와 축복에 합당하게 살지 못했음을 회개하는 기간입니다.
마음이 회개하면 생활이 회개하고 생활이 회개가 되면 이제는 내 자신을 주을 위하여 헌신하는 삶을 사는 자가 되는 줄 믿습니다.
이제 더 이상 우리에게는 이와 같은 좋은 기회가 주어지지 않습니다.
오직 이번뿐입니다.
그리고 이 합당한 회개가 내게 주어진 생활이요 이 합당한 회개를 통하여 이 순간에도 하나님의 사랑을 받을 좋은 기회가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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