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삶에 풍성함은 하나님 의와 나라에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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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774회 작성일 2011-01-30 21:25본문
마태복음6:25-34 모든 삶에 풍성함은 하나님 의와 나라에 있습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라는 책에는 스티븐 코비와 결혼한 딸의 대화가 나온다. 출산 후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딸이 푸념을 한다. 아버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느라고 내 할 일을 전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요. 이것이 일종의 시간낭비는 아닌가요? 그때 스티븐 코비가 이렇게 말한다. 시간관리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은 없애버려라. 그리고 지금 네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를 돌보는 것을 감사하고, 즐기도록 하여라. 명심해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킨다. 반면에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제까지 우리는 얼마나 시간 관리에만 마음을 빼앗겼던가!
야 2010년이 자나간다 얼마나 호들갑을 떨고 불안해하고 아쉬워하고 그런데 지금은 2011년이라는 시간을 가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다시 방향이 없는 시간 죽이기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2011년 말에는 또다시 후회하고 또 다시 아쉬워하고 하면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내 평생이 다하는 그 순간에 아쉬움과 후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바쁘기만 바빠했지 실상은 이루어야 할 것은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제발 바쁘지 마십시오 여유를 가지고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여유 있게 갈 것입니다.
제아무리 큰 배도 방향을 잡는 키를 잘 잡으면 잘 갈수 있는 것입니다.
약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살면서 실상은 원하시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실패하는 자같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분명코 잡고 계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 일을 이루심으로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그 죽음도 헛되지 않았으며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삶이 너무나도 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후에 그의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평하기를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스스로도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요10:9-1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은혜를 입은 다윗은 그의 글에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4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리고 바울 같은 이는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방향 감각만 제대로 잡아도 삶이 얼마든지 풍요로워 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방향 감각을 제대로 잡음으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31-33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간관리보다 방향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찰스 험멜의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
시간 관리만큼 우리에게 학습된 무력감으로 다가오는 영역도 드물 것입니다. 수없이 많이 계획도 세워 보았고, 결단도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급한 일에 쫓기는 삶으로 회귀해 버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채찍과 당근, 두 종류 아이템으로 휘둘러 분주함으로 몰아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시간 관리는 단지 어떤 기법을 익힌다고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자는 시간이 아닌 자신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결국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커져야 하는데, 이는 영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우선순위에 두는 원칙을 거듭 강조합니다.
올 한해는 여유를 가지며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풍요로움이 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33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추상적이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의 암소가 붉은 색깔과 흰 색깔의 두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농부는 몹시 기뻐하여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두 놈을 잘 길러서 한 마리는 팔아서 우리를 위해 쓰고 또 한 마리는 팔아서 주의 사업을 위해 바칩시다. 아내는 어느 것을 주께 바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지금 우리가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소. 그 놈들을 꼭 같이 취급했다가 때가 되면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되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농부가 침통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가 죽어서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아내는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송아지인지 정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 나는 항상 흰 놈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그 놈이 죽었단 말이야. 이처럼 죽은 것은 항상 주님의 송아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청사진이나 미리 정해진 계획표를 갖고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지시를 들으셨다.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다. 그리고 집중적인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성령의 능력을 입어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행해 가신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긴급한 요구, 때로 합당할 뿐 아니라 절박하기까지 한 그 요구를 거부하셨다. 정말로 중요한 일,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기도하는 생활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말씀이 내 양식이 됩니다.
그 양식이 내게 에너지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가 시장에 가서 허겁지겁 배를 불리고 예수님 것을 가져왔을 때에 예수님은 이미 배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요4:30-34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시간 관리’라는 용어가 잘못된 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혹은 비축해 두거나 잃어버리거나 할 수 없으며, 관리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가치를 부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두 명의 후배 목사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은 울산에 있는 같은 노회 후배 목사였고 45, 또 한 사람은 일산에 목회를 하던 56 목사입니다.
과연 무엇을 하다가 죽었을까? 한번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병이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다가 또 한 사람은 건강해서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테니스를 치고 사우나를 갔다가 운명을 했습니다.
장수하였다고 다 좋은 아니고 일찍 죽었다고 해서 할 일다 못한 것은 아닙니다.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길이길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길이길이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년만년을 삶을 살겠다는 식으로 살았다면 분명 그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혹시 아름다운 청년을 아십니까? 꽃미남 말고
4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에서 젊은 노동자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의 나이22세 이다. 그런데 그 청년을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22세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계천 노동자의 인격을 보장하라는 메시지를 그의 죽음으로 알려 주었으니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변심한 옛 애인을 찾아 달라고 다방에서 인질극을 벌리다가 저격수에게 총알을 맞고 죽는 그 남자를 아름다운 자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징그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흘린 피는 보배로운 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고 노래를 합니다. 참 나의 좋은 친구라고 그리고 아름답다 예수여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가 주제가 되지 맙시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삶으로 여기지 말고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어느 삶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느냐? 입니다
이 세상은 염려를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염려가 따라다닙니다.
31-32절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치 별명과 같이 자신들의 이름 앞에 붙이고 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바울도 그냥 바울이 아니라 티테디오스 바울로, 요한도 요한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티테디오스 요한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자기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이방 세계에 증거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근심에서 해방된 자들이라는 것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이는 염려거리가 너무나 많았던 시절이었음을 방증하는 별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황제를 큐리오스!(주여!)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초대교회 성도만은 로마 황제를 큐리오스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로마 황제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잡아 죽이며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염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였습니다. 완전 자유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분명한 인생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생명 건 헌신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에 답이 나면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 전 세계가 복음으로 장악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온 세상이 복음 앞에 굴복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민족도 사상도 종교도 어떤 인물도 어떤 영도
빌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던 로마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 국가임을 선포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떡이야기 그만해야 합니다.
마8:14-21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으면 키 작은 사람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염려하면 오히려 키가 쫄아듭니다. 또 키란 헬라어로 생명의 길이를 의미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오히려 목숨이 단축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위장병, 신경쇠약, 심장병, 고혈압, 암 등 각종 질환이 생기게 되어 일찍 죽습니다. 염려를 많이 하게 되면 머리도 빠지고 잠도 잘 안 오게 됩니다. 염려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아 불안하게 하여 일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확실히 염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소화도 잘되고 잠도 잘 오기 때문에 건강해집니다. 믿음은 만복의 근원입니다.
염려는 대개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것을 염려합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합니다. 염려는 왕성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 온갖 종류의 가능성을 상상해 냅니다. 예측도 못할 것을 기발하게 상상해 내어 염려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아니 한 시간 앞의 일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하도록 하고 우리는 오늘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킴피스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장래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사람은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이 있는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에 힘쓰는 자입니다.
쓸 때 하나님께서 도우사 내 인생이 가장 값지고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
스티븐 코비가 쓴 소중한 것을 먼저 하라 라는 책에는 스티븐 코비와 결혼한 딸의 대화가 나온다. 출산 후 아이 뒤치다꺼리를 하느라 자신의 일을 거의 하지 못하는 딸이 푸념을 한다. 아버지, 이 어린아이 하나를 키우느라고 내 할 일을 전혀 못하고 있어요. 하나님이 내게 주신 은사를 활용할 기회가 없어요. 이것이 일종의 시간낭비는 아닌가요? 그때 스티븐 코비가 이렇게 말한다. 시간관리 같은 것은 신경 쓰지 말아라. 달력은 없애버려라. 그리고 지금 네가 네 인생에서 가장 중요한 아이를 돌보는 것을 감사하고, 즐기도록 하여라. 명심해라.
인생에서 중요한 것은 시간이 아니라 방향이다.
시계는 시간을 가리킨다. 반면에 나침반은 방향을 가리킨다.
이제까지 우리는 얼마나 시간 관리에만 마음을 빼앗겼던가!
야 2010년이 자나간다 얼마나 호들갑을 떨고 불안해하고 아쉬워하고 그런데 지금은 2011년이라는 시간을 가리치고 있지 않습니까?
또 다시 방향이 없는 시간 죽이기 여행이 시작되었습니다.
정신없이 살다가 2011년 말에는 또다시 후회하고 또 다시 아쉬워하고 하면 이것이 쌓이고 쌓이면 내 평생이 다하는 그 순간에 아쉬움과 후회가 되지 않겠습니까?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바쁘기만 바빠했지 실상은 이루어야 할 것은 이루지 못하고 있습니다.
올해 제발 바쁘지 마십시오 여유를 가지고 방향을 제대로 잡으면 여유 있게 갈 것입니다.
제아무리 큰 배도 방향을 잡는 키를 잘 잡으면 잘 갈수 있는 것입니다.
약3:4 또 배를 보라 그렇게 크고 광풍에 밀려가는 것들을 지극히 작은 키로써 사공의 뜻대로 운행하나니
그러나 그렇게 분주하게 살면서 실상은 원하시는 방향과는 정반대로 가고 있지 않습니까?
예수님은 세상에서 실패하는 자같이 보였지만 그렇지 않았습니다.
삶의 방향을 분명코 잡고 계셨습니다.
마 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그 일을 이루심으로 죽음 앞에서 비굴하지 않으셨고 그 죽음도 헛되지 않았으며 그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는 것은 그의 삶이 너무나도 가치가 있었다는 것입니다.
요19:30 예수께서 신 포도주를 받으신 후에 이르시되 다 이루었다 하시고 머리를 숙이니 영혼이 떠나가시니라
후에 그의 사도 바울은 예수님에 대하여 평하기를
롬5:18-19 그런즉 한 범죄로 많은 사람이 정죄에 이른 것 같이 한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 하심을 받아 생명에 이르렀느니라 한 사람이 순종하지 아니함으로 많은 사람이 죄인 된 것 같이 한 사람이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리라
예수님의 의로 말미암아 많은 사람이 의롭다함을 얻고 생명을 얻게 되었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님 스스로도 이런 말씀을 하였습니다.
요10:9-10 내가 문이니 누구든지 나로 말미암아 들어가면 구원을 받고 또는 들어가며 나오며 꼴을 얻으리라 도둑이 오는 것은 도둑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는 것뿐이요 내가 온 것은 양으로 생명을 얻게 하고 더 풍성히 얻게 하려는 것이라
그 은혜를 입은 다윗은 그의 글에
시23:1 여호와는 나의 목자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 시23:4 내 잔이 넘치나이다
그리고 바울 같은 이는
빌4:11-13 내가 궁핍하므로 말하는 것이 아니니라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방향 감각만 제대로 잡아도 삶이 얼마든지 풍요로워 집니다.
오늘 본문에도 방향 감각을 제대로 잡음으로 더욱 풍요로운 삶을 약속하고 있지 않습니까?
31-33절 그러므로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시간관리보다 방향관리가 더 중요합니다.
찰스 험멜의 늘 급한 일로 쫓기는 삶
시간 관리만큼 우리에게 학습된 무력감으로 다가오는 영역도 드물 것입니다. 수없이 많이 계획도 세워 보았고, 결단도 해 보았으나 결국에는 급한 일에 쫓기는 삶으로 회귀해 버린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탄은 끊임없이 우리를 채찍과 당근, 두 종류 아이템으로 휘둘러 분주함으로 몰아가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게 합니다. 시간 관리는 단지 어떤 기법을 익힌다고 효과를 볼 수 있는 영역이 아닙니다.
그러기에 저자는 시간이 아닌 자신을 관리할 수 있어야 한다고 힘주어 강조합니다.
결국 자신의 태도와 습관을 컨트롤하는 능력이 커져야 하는데, 이는 영적인 문제와 직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저자는 그리스도인으로서 가장 중요한 것을 먼저 우선순위에 두는 원칙을 거듭 강조합니다.
올 한해는 여유를 가지며 그리고 하나님 때문에 풍요로움이 되는 한 해가 되시기를 축복합니다.
그러기 위해서 33절 먼저 그 나라와 의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나라와 의를 구한다는 말이 쉬운 것 같지만 추상적이고 어려울 수 있습니다.
간단하게 가르쳐 줍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농부의 암소가 붉은 색깔과 흰 색깔의 두 송아지를 낳았습니다. 농부는 몹시 기뻐하여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우리 이 두 놈을 잘 길러서 한 마리는 팔아서 우리를 위해 쓰고 또 한 마리는 팔아서 주의 사업을 위해 바칩시다. 아내는 어느 것을 주께 바치겠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남편은 지금 우리가 그 문제로 고민할 필요는 없소. 그 놈들을 꼭 같이 취급했다가 때가 되면 내가 말한 대로 하면 되니까라고 대답했습니다. 그런데 몇 달 뒤에 농부가 침통한 모습으로 돌아와서 말했습니다. 송아지 한 마리가 죽어서 주님의 송아지가 죽었소 아내는 당신은 어느 것이 주님의 송아지인지 정하지 않았지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그 농부가 말했습니다. 아, 나는 항상 흰 놈으로 정하고 있었는데 그 놈이 죽었단 말이야. 이처럼 죽은 것은 항상 주님의 송아지입니다.
예수님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청사진이나 미리 정해진 계획표를 갖고 계시지 않았다.
예수님은 매일매일 기도하는 가운데 아버지의 지시를 들으셨다.
누가는 성령의 역할을 강조한다.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예수님은 성령에 이끌려 광야로 가신다. 그리고 집중적인 시험을 받으신 후 갈릴리로 돌아와 성령의 능력을 입어 아버지의 뜻을 분별하고 그 뜻을 실행해 가신다.
이런 식으로 예수님은 긴급한 요구, 때로 합당할 뿐 아니라 절박하기까지 한 그 요구를 거부하셨다. 정말로 중요한 일, 곧 아버지의 뜻을 행하기 위해서 말이다.
기도하는 생활이 너무나도 중요합니다. 기도하면 말씀이 내 양식이 됩니다.
그 양식이 내게 에너지가 되고 능력이 되는 것입니다. 밥을 안 먹고도 살 수 있습니다.
제자들이 배가 고파가 시장에 가서 허겁지겁 배를 불리고 예수님 것을 가져왔을 때에 예수님은 이미 배를 불리고 있었습니다.
요4:30-34 그들이 동네에서 나와 예수께로 오더라 그 사이에 제자들이 청하여 이르되 랍비여 잡수소서 이르시되 내게는 너희가 알지 못하는 먹을 양식이 있느니라 제자들이 서로 말하되 누가 잡수실 것을 갖다 드렸는가 하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의 양식은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며 그의 일을 온전히 이루는 이것이니라
시간 관리’라는 용어가 잘못된 말임을 깨달아야 한다. 사람은 시간을 늘리거나 줄이거나 혹은 비축해 두거나 잃어버리거나 할 수 없으며, 관리는 더더욱 불가능한 일이다.
문제는, 우리에게 삶의 목표와 가치를 부여하시는 예수 그리스도의 주권 아래서 우리 자신을 관리하는 것이다.
본문에서도 삶의 방향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이방인과 세상 사람들이 살아가는 삶의 모습은 다르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 이면에 있는 삶의 방향이 다르다는 것입니다.
지난주에 두 명의 후배 목사의 죽음의 소식을 들었다 한 사람은 울산에 있는 같은 노회 후배 목사였고 45, 또 한 사람은 일산에 목회를 하던 56 목사입니다.
과연 무엇을 하다가 죽었을까? 한번 죽는 것은 누구에게나 있습니다.
한 사람은 지병이 있었는데 아침에 일어나다가 또 한 사람은 건강해서 추운 겨울임에도 불구하고 테니스를 치고 사우나를 갔다가 운명을 했습니다.
장수하였다고 다 좋은 아니고 일찍 죽었다고 해서 할 일다 못한 것은 아닙니다.
25절 목숨을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몸을 위하여 무엇을 입을까 염려하며 살았다고 한다면 이 세상을 떠나지 말아야 합니다.
길이길이 이 세상에서 잘 먹고 잘 살아야 합니다. 그러나 길이길이 이 세상에서는 그렇게 살 수가 없습니다.
그런데 천년만년을 삶을 살겠다는 식으로 살았다면 분명 그 죽음은 결코 아름답지 못합니다.
혹시 아름다운 청년을 아십니까? 꽃미남 말고
40년 전인 1970년 11월 13일, 서울 청계 6가 평화시장에서 젊은 노동자 한 사람이 자신의 몸을 스스로 불살랐다. 그의 이름은 바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그의 나이22세 이다. 그런데 그 청년을 아름답다고 하였습니다.
22세의 시간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청계천 노동자의 인격을 보장하라는 메시지를 그의 죽음으로 알려 주었으니 아름답다는 것입니다.
변심한 옛 애인을 찾아 달라고 다방에서 인질극을 벌리다가 저격수에게 총알을 맞고 죽는 그 남자를 아름다운 자라 하지 않습니다.
예수님을 두고 징그럽다고 하지 않습니다. 그의 흘린 피는 보배로운 피라고 합니다.
그리고 예수를 보고 노래를 합니다. 참 나의 좋은 친구라고 그리고 아름답다 예수여 라고 하지 않습니까?
이제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가 주제가 되지 맙시다.
그런데 그런 삶을 삶으로 여기지 말고 새로운 삶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33절 그런즉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어느 삶이 나의 삶을 더 풍요롭게 하느냐? 입니다
이 세상은 염려를 위하여 사는 삶이 아닙니다. 세상의 것은 염려가 따라다닙니다.
31-32절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하늘 아버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초대교회 성도들은 마치 별명과 같이 자신들의 이름 앞에 붙이고 다는 말이 있었습니다.
세기 초대교회의 문서들을 살펴보면 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Titedios)라는 별칭이 붙어 있는 것을 발견합니다. 즉, 바울도 그냥 바울이 아니라 티테디오스 바울로, 요한도 요한이라고만 부르지 않고 티테디오스 요한이라 불렀습니다. 여기서 티테디오스란 결코 염려하지 않는 사람, 염려에서 해방된 사람이란 뜻이 있습니다. 초대교인들이 자기의 이름 앞에 티테디오스라고 붙인 이유가 무엇입니까?
믿지 않는 이방 세계에 증거 하고 싶은 것이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근심에서 해방된 자들이라는 것을 세상 가운데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사람들은 믿지 않는 사람과 똑같은 문제에 직면하게 되었을 때 반응하는 태도가 다릅니다. 이는 염려거리가 너무나 많았던 시절이었음을 방증하는 별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초대교회 시절은 예수를 믿는다는 이유만으로 죽임을 당하던 때였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을 장악하고 있던 로마제국은 황제를 큐리오스!(주여!)라 부르도록 했습니다. 로마 황제가 자신의 주인임을 고백하도록 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를 믿는 초대교회 성도만은 로마 황제를 큐리오스라 부르지 않았습니다. 이런 까닭에 로마 황제는 초대교회 성도들을 잡아 죽이며 핍박했던 것입니다. 이처럼 초대교회 성도들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는 상황 속에서 신앙생활을 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염려로부터 완전히 해방된 상태였습니다. 완전 자유함을 누렸던 것입니다.
예수가 그리스도로 오셔서 인생의 모든 문제를 해결하셨다는 분명한 인생의 결론을 내리고 있었기에 자연스럽게 생명 건 헌신이 이루어질 수 있었습니다.
복음을 위해 생명을 걸었으니 아무것도 두렵지 않았던 것입니다. 복음에 답이 나면 염려할 이유가 없습니다.
결국 이들을 통해 전 세계가 복음으로 장악되었습니다.
앞으로도 온 세상이 복음 앞에 굴복합니다.
정치도 경제도 사회도 문화도 민족도 사상도 종교도 어떤 인물도 어떤 영도
빌2:8-11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사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이러므로 하나님이 그를 지극히 높여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을 주사 하늘에 있는 자들과 땅에 있는 자들과 땅 아래에 있는 자들로 모든 무릎을 예수의 이름에 꿇게 하시고 모든 입으로 예수 그리스도를 주라 시인하여 하나님 아버지께 영광을 돌리게 하셨느니라
당시 최강의 제국이었던 로마가 이들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독교 국가임을 선포하는 열매를 맺었습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먼저 그의 나라와 의를 구하면 이 모든 것을 더 해 주신다는 하나님의 뜻을 깨달아야합니다.
공중의 새를 보라 들의 백합화를 보라 떡이야기 그만해야 합니다.
마8:14-21 제자들이 떡 가져오기를 잊었으매 배에 떡 한 개 밖에 저희에게 없더라 예수께서 경계하여 가라사대 삼가 바리새인들의 누룩과 헤롯의 누룩을 주의하라 하신대 제자들이 서로 의논하기를 이는 우리에게 떡이 없음이로다 하거늘 예수께서 아시고 이르시되 너희가 어찌 떡이 없음으로 의논하느냐 아직도 알지 못하며 깨닫지 못하느냐 너희 마음이 둔하냐 너희가 눈이 있어도 보지 못하며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느냐 또 기억지 못하느냐 내가 떡 다섯 개를 오천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바구니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열 둘이니이다 또 일곱 개를 사천 명에게 떼어 줄 때에 조각 몇 광주리를 거두었더냐 가로되 일곱이니이다 가라사대 아직도 깨닫지 못하느냐 하시니라
27절 너희 중에 누가 염려함으로 그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느냐
우리가 염려함으로 키를 한 자나 더할 수 있으면 키 작은 사람은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염려하면 오히려 키가 쫄아듭니다. 또 키란 헬라어로 생명의 길이를 의미합니다. 염려한다고 해서 목숨을 한 시간이라도 연장할 수 없습니다. 염려하게 되면 오히려 목숨이 단축됩니다. 염려하게 되면 위장병, 신경쇠약, 심장병, 고혈압, 암 등 각종 질환이 생기게 되어 일찍 죽습니다. 염려를 많이 하게 되면 머리도 빠지고 잠도 잘 안 오게 됩니다. 염려는 분열을 의미합니다. 염려는 사람의 마음을 찢어놓아 불안하게 하여 일을 제대로 못하게 합니다. 확실히 염려는 만병의 근원입니다. 그러나 믿음으로 살면 마음이 평안해지고 소화도 잘되고 잠도 잘 오기 때문에 건강해집니다. 믿음은 만복의 근원입니다.
염려는 대개 현재보다 미래에 대한 것을 염려합니다. 내일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내년은 어떻게 될 것인가? 나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염려합니다. 염려는 왕성한 상상력을 갖고 있어 온갖 종류의 가능성을 상상해 냅니다. 예측도 못할 것을 기발하게 상상해 내어 염려하고 두려움에 빠집니다.
약4:14 내일 일을 너희가 알지 못하는도다 아니 한 시간 앞의 일도 예측하지 못합니다. 내일 일은 내일 스스로가 염려하도록 하고 우리는 오늘에 충성하면 되는 것입니다.
토마스 아킴피스는 오늘이 내 인생의 마지막인 것처럼 생각하고 하나님 앞에서 최선을 다해서 살라고 하였습니다. 장래를 확실하게 보장받는 사람은 장래를 걱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장래를 하나님께 맡기고 오늘이 있는 동안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기에 힘쓰는 자입니다.
쓸 때 하나님께서 도우사 내 인생이 가장 값지고 풍성하게 하실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