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을 통해 이루어야 할 새로운 사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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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22회 작성일 2011-01-30 21: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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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야 6:1-13 당신을 통해 이루어야 할 새로운 사명
세계2차 대전이 끝났을 무렵의 일입니다. 프랑스의 어떤 마을의 교회 안마당에 예수님상이 하나 서 있었는데 폭격으로 예수님 상의 두 팔이 떨어져 나갔다. 이 일을 놓고 교회 중직자 들이 회의를 열었다. 어떤 이들은 떨어져 나간 두 팔만 복원하자고 했습니다. 어떤 이들은 아예 헐어버리고 새로 만들어 세우자고 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이 이런 제안을 했습니다. 그 두 팔이 떨어진 예수님 상을 그대로 두고 그 앞에 이런 팻말을 세워두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당신의 팔과 손이 필요 하십니다. 여러분 사실 우리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시는데 우리의 팔과 손이 없어도 얼마든지 그 일을 이루어 가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일을 이루어 가심에 있어서 성경에 여러 인물들을 향하여 부르심의 음성을 들려주셨듯이 오늘 우리들에게도 아무개야 하는 하나님의 부르심이 있으며, 하나님의 뜻을 나를 통하여 이루시려고 하십니다.
내가 처한 현실 속에서 기꺼이 주여 말씀하옵소서 내가 듣겠나이다하는 자세를 갖추고 있어야 합니다
골1:24 나는 이제 너희를 위하여 받는 괴로움을 기뻐하고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그의 몸된 교회를 위하여 내 육체에 채우노라
하나님 앞에 있는 것의 극적인 한 표현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하는 고백입니다.
성경에 보면 하나님께서 부르실 때 귀하게 사용된 인물들은 언제나 내가 여기 있나이다고 고백하였습니다.
마지막 사사요 이스라엘의 왕정시대를 여는 사무엘 그도 역시
사무엘상 3:4 여호와께서 사무엘을 부르시는지라 그가 대답하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고
위기가 있을 때마다 하나님 앞에 자신을 내어 놓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간 야곱 역시
창세기 31:11 꿈에 하나님의 사자가 내게 말씀하시기를 야곱아 하기로 내가 대답하기를 여기 있나이다 하매
믿음의 조상으로 복의 근원이라 일컫는 아브라함도 하나님 앞에서는 언제나
창세기 22:1 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이스라엘을 이끌고 출애굽의 대장정을 주도했던 모세 역시
출애굽기 3:4 여호와께서 그가 보려고 돌이켜 오는 것을 보신지라 하나님이 떨기나무 가운데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 모세야 모세야 하시매 그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신약시대의 주역인 사울에게 하나님의 뜻을 전한 역시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사도행전 9:10 그 때에 다메섹에 아나니아라 하는 제자가 있더니 주께서 환상 중에 불러 이르시되 아나니아야 하시거늘 대답하되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하니
이처럼 하나님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를 고백하는 것이 창조목적에 순응하는 가장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그러면 인생의 가장 못난 모습은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부르심 앞에 피하는 반대로 창조목적을 역행하는 내가 여기 있나이다 고백하지 않는 것입니다.
아담이 타락했을 때 하나님께서 네가 어디 있느냐? 아담아 아담아 하고 불으시는 하나님을 피해버렸습니다.
창3:8-10 그들이 그 날 바람이 불 때 동산에 거니시는 여호와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아담과 그의 아내가 여호와 하나님의 낯을 피하여 동산 나무 사이에 숨은지라 여호와 하나님이 아담을 부르시며 그에게 이르시되 네가 어디 있느냐 이르되 내가 동산에서 하나님의 소리를 듣고 내가 벗었으므로 두려워하여 숨었나이다
본문의 이사야 역시 메시야 되신 예수 그리스도를 예표하는 사역을 감당한 그 역시
이사야 6:8 내가 또 주의 목소리를 들으니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 하시니 그 때에 내가 이르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하였더니
하나님의 음성 앞에서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말 할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 앞에 있는 사람, 그의 뜻에 자신을 드리는 사람이었기 때문입니다.
이같이 오늘도 하나님을 피하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앞에 언제나 떳떳하게 서는 인생이 되셔야 합니다.
죄는 의를 피하게 만듭니다.
그 결과 내 삶이 두려움으로 다가 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이 만족하지 못하고 행복해 지지 않습니다.
한번 묻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당신의 삶이 진정 행복합니까?
삶에 두려움이 없어야 합니다. 그리고 삶의 목적의식이 있어야 합니다.
이와 같은 인생이 될 수 있음은 날마다 하나님 앞에 내 자신을 내어 놓고 내가 여기 있나이다 라고 고백하는 사람입니다.
독일 중부에 보름스란 1500년 이상 된 고도에 옛 독일 의회 건물이 있습니다. 들어가는 입구에 비석이 놓여 있는 데, 그 비석에는 내가 여기에 서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쓰여 있습니다.
이 말은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가 독일 의회에서 사형 언도를 받고 의회 앞에서 한 말이었습니다. 종교개혁을 하려고 나섰던 루터는 엄청난 시련의 십자가가 자신에게 주어진 것을 알고 이사야의 말을 기억하며 주여 내가 여기 서 있습니다. 저에게 죽음의 십자가를 질 수 있도록 힘을 주십시오. 라고 당당하게 외쳤습니다. 그 때 하나님께서는 루터의 순종하는 의지를 보시고 다시 살리셔서 하나님의 일을 하게 했습니다. 그 후 루터는 자기에게 주어진 사명인 종교개혁을 성공리에 끝내게 되었고, 이를 기념하기 위해 비석을 세우게 된 것입니다.
이 시간에 나를 통하여 하나님의 일을 이루시도록 내가 여기 있나이다라고 내 인생이 있노라고 고백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참으로 이 시간에 그렇게만 된다면 아니 되어야 합니다.
나는 이 시간부터 가장 행복한 능력 있는 자가 될 것입니다.
하나님 앞의 인생은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함입니다.
이사야 43:21 이 백성은 내가 나를 위하여 지었나니 나의 찬송을 부르게 하려 함이니라
찬양이란 모든 만물의 창조주이시며 또한 구원자이신 하나님을 향한 감사의 노래를 뜻하는 말이다.
나는 하나님을 찬양하기 위하여 창조되었다. 아멘!
인간의 존재 이유의 출발이요 또한 결론입니다.
♬이전엔 세상 낙 기뻤어도 지금 내 기쁨은 오직 예수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이 세상 떠날 때 찬양하고 숨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다만 내 비는 말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더욱 사랑
인간은 입을 가지고 주의 찬송하며 전파하기 위하여 지음을 받았다는 고백이다
찬양이란 기뻐하고 즐거워하여 그 감격을 표출하지 않을 수 없는 동적인 행위를 말한다.
하나님만 생각하면 옥중에서도 찬양이 나오고 좁은 길을 걸어도 찬양이 나오고 죽음의 자리에도 죽음에서도 찬양이 나옵니다.
제가 사람들의 임종을 여럿을 지켜보았습니다. 대체로 정신이 혼미하여 오락가락 하고 불안해하며 염려를 떨치지 못하는데 오필남 권사님의 임종을 지켜보는데 끝까지 찬송을 하시다가 가시더라고
2-3절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어떤 분이 소록도를 방문해서 예배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통성기도 시간에 옆에서 한 형제가 통곡하며 충청도 사투리로 기도하고 있었습니다. 하나님! 이 크고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는데유. 도대체 얼마나 큰 은혜를 받았기에 저리 통곡을 하면서 기도하나 하며 그 형제를 쳐다보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는 한센스병으로 한쪽 눈은 없어졌고, 귀와 코는 문드러져서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습니다. 입은 돌아간 상태였고, 손가락은 다 없어져 뭉뚝한 두 팔뚝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팔뚝으로 예배당 바닥을 치면서 하나님의 은혜를 어찌 다 갚느냐?고 울며 기도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모습을 본 그분은 감동을 받고 그 형제를 붙들고 함께 통곡하며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예배 후에 그 형제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어떤 은혜를 받았기에 그렇게 기도하십니까? 그 형제가 말해주었습니다. 내가 문둥병에 드니까 제일 먼저 아내부터 나를 버리고 도망갔고, 형제들도 나를 버렸고, 나중에는 눈물 짖던 부모님도 저를 버렸습니다. 그래서 죽으려고 했는데 그때 하나님이 저를 만나 주셨습니다. 하나님은 찬송을 펼칠 때마다 저를 반겨 주셨고, 성경을 펼칠 때마다 저를 위로해 주셨고, 말씀을 들을 때마다 저에게 용기와 희망을 주셨고, 저를 사랑하신다고 하셨으니 그 하나님의 은혜를 어떻게 다 갚습니까?
나는 어떨 때 하나님을 찬양 하는 걸로 알고 있습니까?
내 원하는 대로 다 들어 주었을 때 할렐루야! 하고 찬양하는 줄로 알고 있지 않습니까?
내가 원하는 대로 되지 않으면 찬양은커녕 놀렐루야! 하지 않습니까?
좋을 때 좋은 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힘들 때 어려울 때에 하나님은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교회적으로 힘이 든다는 것은 제일 먼저 느끼는 것이 목회자입니다.
작년은 힘이 들었습니다. 아예 사례도 안줍니다.
염려들은 하시겠지만 그것이 얼마나 저에게 힘이 되기도 했지만 참으로 내가 오히려 은혜가 된 것은 하나님이셨습니다.
그런데 나같이 못난 자에게 오히려 하나님의 은혜는 더욱 풍성하였습니다.
잘되고 잘 나갈 때는 은혜가 은혜 인줄을 잘 몰랐습니다.
우리 성도 가운데 저보다 더 어려움을 당하는 자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분은 저보다 더 큰 하나님의 은혜를 찬송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다윗왕의 고난은 시119:71 고난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 이로 말미암아 내가 주의 율례들을 배우게 되었나이다
고난의 대명사 사도 바울 빌2:18 이와 같이 너희도 기뻐하고 나와 함께 기뻐하라
살전5:16-18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마게도냐 교회 힘들었습니다. 그런데도 은혜로 이끌어 갔습니다.
고후8:1-2 형제들아 하나님께서 마게도냐 교회들에게 주신 은혜를 우리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환난의 많은 시련 가운데서 그들의 넘치는 기쁨과 극심한 가난이 그들의 풍성한 연보를 넘치도록 하게 하였느니라
작년에 교회가 힘들었지만 은혜가 풍성하고 성도들 힘들었지만 넘치는 헌금이 있었습니다.
이제는 인식해야 합니다.
앞으로는 삶은 찬송하는 삶만 남았다는 것입니다.
가시밭의 백합화라는 익숙한 가사의 이 찬양은 1941년 일본 경찰서 유치장에 수감됐던 유재헌 목사가 만든 곡입니다. 당시 일본에서 목회하며 교포들에게 애국과 반일사상을 전한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피검됐던 유 목사는 옥중에서 나라와 민족을 향한 간절함을 찬양에 담았습니다
♬동남풍아 불어라 서북풍아 불어라 가시밭의 백합화 예수향기 날리니 할렐루야 아-멘
이렇게 살지 못한 내가 망할 삶을 살았음을 인식해야
돈 못 벌고 출세 못한 것이 망하게 된 것이 아닙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천사들이 참으로 부끄럽고 송구스러움을 가지고 하나님을 찬양하는 모습을 보니 자신의 삶은 망하는 삶을 살았다는 것을 인식하였습니다.
사6:2-5 스랍들이 모시고 섰는데 각기 여섯 날개가 있어 그 둘로는 자기의 얼굴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자기의 발을 가리었고 그 둘로는 날며 서로 불러 이르되 거룩하다 거룩하다 거룩하다 만군의 여호와여 그의 영광이 온 땅에 충만하도다 하더라 이같이 화답하는 자의 소리로 말미암아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성전에 연기가 충만한지라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나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주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하였더라
바벨탑 같이 살아온 나는 무너져야 합니다.
세례요한은 예수님을 소개 할 때 나는 소리요 아무 것도 아닙니다.
나는 망하고 그는 흥해야 한다고 했습니다.
사무엘은 얻은 한나는 하나님 앞에 도전하는 나는 산산히 부셔져야 한다고 했습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골3:8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빌3:13 빌립보서 3:13 형제들아 나는 아직 내가 잡은 줄로 여기지 아니하고 오직 한 일 즉 뒤에 있는 것은 잊어버리고 앞에 있는 것을 잡으려고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는 죄인이며 동시에 멸망(undone)으로 들어갈 존재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알게 됨과 동시에 하나님의 높고 높은 거룩성을 알게 됩니다.
거룩하신 하나님께서 찾아오시는 순간 모든 인간은 자신의 실재를 보며 탄식이 나오며 자신이 지옥에 갈 수밖에 없는 존재임을 철저하게 느끼게 되는 것입니다.
어떻게 된 일인지 하나님 앞에 나오면 나올수록 내가 낸데 하고 있으니 어찌 된 일입니까?
참으로 하나님이 쓰시는 자는 한번 만져 주실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다메섹에서 한번 하나님이 만져 주시니 아이쿠 내가 죄인 중 괴수 죄인입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 사람 가능성이 잇고 복된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몇 번 만져 주어도 아직도 난데하고 있으니 하나님이 사랑하시니 또 만져 주실 것입니다.
이것도 나중에 알게 되면 은혜라고 할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자신을 보도록 비춰주시는 말씀이지 남을 판단하라고 주신 말씀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항상 나에게 맞추고 있습니다.
많은 종교인들이 자신의 부패를 보지 못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만이 형식적이고 외식적이며 또한 자아도취의 삶을 산다고 평가하며 그 잣대는 자신에게 들이대지 않습니다.
나를 위한 삶에서 복음을 위한 삶으로 전한입니다.
한국교회의 시작은 젊은 20대 초반의 언더우드와 아펜젤러 두선교사가 1885년 4월 10일 부활주일에 인천항을 통해서 한국에 들어옴으로 시작되었습니다. 원래 언더우드는 인도 선교사로 가려고 공부를 하고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인도 선교사로 가기 위해서 모임에서 회의를 하는데 한 사람이 한국 선교에 대해서 한국은 대원군의 쇄국정책에 의해서 아직도 복음을 받지 않은 나라, 어둠에 싸여있는 나라라는 보고를 받고 누가 이 한국에 가겠느냐 그는 하나님 앞에 기도를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이시여,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 주시옵소서. 저는 인도로 가지만 한국 땅에 선교사를 보내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 때 성령께서 언더우드에게 언더우드야, 왜 네가 가지 않고 남을 보내달라고 기도하느냐 한국 선교사로 네가 갈 수 없느냐 하는 감동이 왔습니다. 그때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그는 한국 땅에 처음으로 선교사로 갈 것을 결정한 후에 인도 선교를 포기하고 1885년 한국 땅에 와서 복음을 전하기 시작했습니다. 복음을 들고 온지 120년이 지난 지금 한국은 4만 5천개 교회가 섰고 천 만의 기독교인이 이 땅에 복음을 들고 있습니다.
그런 위대한 일이 일어난 것은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하는 주의 음성을 듣고 스스로 결단한 그의 삶에서 된 것입니다. 이것을 소명이라고 말합니다.
어찌 나는 네가 가야 한다 네가 해야 한다는 소리는 듣지 못하는지 모릅니다.
들어도 못들었는척 하고 있지 않습니까? 아직 나는 아니냐 아직 나는 믿음이 없어 하고 있지 않습니까?
뱃세다 광야에서 5000명의 무리가 있었지만 진작 예수님의 말씀이 나에게 주시는 말씀으로 받아 드린 자는 어린 아이였습니다.
폐쇄적인 가치관, 편견과 아집 편협한 생각을 버리시길 바랍니다. 작년까지 내가 어떤 사람이었든지 이게 중요하지 않습니다.
이 시간에 내가 이런 사람이 되었다는 것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 오직 자신이 할 수 있는 말은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 뿐입니다. 아멘
이유도 없고 핑계도 없고 인정보다 사정보다 내가 드려지는 것이 우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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