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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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2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고린도전서15:50-58 넉넉히 이기게 하시는 하나님
지난 한 주간은 완연히 봄이 왔음을 부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겨울 가운데 앙상하게 서 있던 나무 가지에서 언제 생명이 찾아 왔는지 샛노란 개나리가 피고 붉은 진달래 꽃,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도 많은 꽃이 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많은 꽃이 핀 벚꽃 나무 그 외에도 초록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 밀고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가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 누가 보더라도 겨우 내의 나무들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온기가 돌아오니 이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만 천하에 들어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에다가 장사를 지내고 큰돌로 그 입구를 막고 인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그의 살리는 영으로 예수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당시 본문의 고린도는 헬라의 도시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을 때 어떤 자들은 바울을 비웃었습니다.
자신들의 알고 경험한 지식으로는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는 다는 말입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그래서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캄캄한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우리 다시 놀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고전15:12-13)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는 생명 있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죽어 인도에 묻혔습니다.
유교를 진리라고 선포했던 공자는 중국 산동성에 묻혔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죽었고 그들은 다 땅에 묻혔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인류를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 그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금도 빈 무덤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으심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상당한 놀라운 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어떠한 극한 절망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영국 델햄 지방에 한 석탄 광산이 무너져 164명이 생매장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시체와 함께 몇 줄의 글이 쓰여진 판자를 발견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원수인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에서 소망을 부활시켰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의 영혼이 즉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으니 절망에 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쇠 되어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생명은 한정되어 살다가 병들고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적인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상황을 절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죄 책과 정죄의 절망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결코 인간이 이겨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져 있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으며 또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무의미의 절망에 빠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을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문명도, 과학도, 어떠한 사회개혁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모든 사망과 절망의 세력을 다 정복하시고 소망의 부활을 가져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존재로 살아 갈 수 있는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한 소망을 부활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확신 할 축복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산다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될 것입니다.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움과 증오에서 살던 인간이 자유하고 사랑하며 살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미움에서 사랑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꾀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죄를 짓게 했소하와는 또 뱀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비극이 다가왔습니다.
첫 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밭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친족살상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형이 아우를 죽인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인류 속에는 미움이 꽉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전쟁의 역사입니다.
민족과 민족 간, 부족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전쟁이 없는 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상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인명을 파멸시켰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 대결로 말미암아 5대양 6대주가 모두 다 전쟁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 흘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미움이 온 세상에 가득했는데 미움을 청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움을 예수님이 오셔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인, 유대종교지도자들, 일반 군중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온 인류의 미움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이 미움을 멸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보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와도 대결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이 모든 극복하며 사랑으로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담은 허물어지고 미움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햇빛과 같이 비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면 받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미움을 극복하신 예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누가 말하기를 온 자연이 자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은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우리는 삶으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서 살았지만 소망 가운데 살게 되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질시 가운데서 살았던 저와 여러분들이 그 누구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러한 구원과 축복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사는 자가 되어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는 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지난 한 주간은 완연히 봄이 왔음을 부인 할 수가 없었습니다.
한 겨울 가운데 앙상하게 서 있던 나무 가지에서 언제 생명이 찾아 왔는지 샛노란 개나리가 피고 붉은 진달래 꽃, 그리고 어떻게 저렇게도 많은 꽃이 필 수 있을까? 할 정도로 많은 꽃이 핀 벚꽃 나무 그 외에도 초록빛 새싹들이 고개를 내 밀고 나오는 것을 볼 때에 참으로 신기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 누가 말을 하더라도 하나님의 위대한 솜씨를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할렐루야!
그 누가 보더라도 겨우 내의 나무들은 죽은 것과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런데 따뜻한 온기가 돌아오니 이것들이 죽지 않고 살아 있다는 것을 만 천하에 들어내었습니다.
마찬가지로 세상은 예수님을 십자가에 못을 박고 능지처참(陵遲處斬)을 하였습니다.
그리고는 무덤에다가 장사를 지내고 큰돌로 그 입구를 막고 인봉을 했습니다.
그런데 예수 그리스도는 죽은지 사흘만에 다시 살아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 로마서에서 말하기를 롬 8:11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고 하셨습니다.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 살리신 이가 그의 살리는 영으로 예수를 살아나게 하셨습니다.
당시 본문의 고린도는 헬라의 도시였습니다.
헬라인들은 죽은 자의 부활을 믿지 않았습니다.
바울이 아덴(아테네)에서 복음을 전하면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선포했을 때 어떤 자들은 바울을 비웃었습니다.
자신들의 알고 경험한 지식으로는 다시 살아난다는 말이 도대체 이해가 되지를 않는 다는 말입니다.
메뚜기와 하루살이가 하루 종일 논에서 재미있게 놀았습니다.
날이 저물자 메뚜기는 하루살이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얘, 이젠 저녁이 다 되었어.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또 놀자 이 말을 들은 하루살이는 메뚜기의 말이 무슨 말인지를 몰라 되물었습니다.
메뚜기야, 내일이 뭐니? 어떻게 내일 또 놀자고 하니?
그래서 메뚜기는 잠시 후면 하늘에 별들이 반짝이고, 모든 동물이 다 잠을 자게 되는데 잠자는 이 캄캄한 밤이 지나면 내일이 온다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하루살이는 내일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메뚜기를 향하여 날씨가 무더워져서 메뚜기가 정신이 나갔나 보다고 놀렸습니다.
그 후 메뚜기는 개구리와 온 여름을 함께 놀았습니다.
가을이 오고 날씨가 차가워지자 개구리가 메뚜기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메뚝아, 내년에 만나 우리 다시 놀자.
이번에는 메뚜기가 내년이 뭐냐고 개구리에게 물었습니다.
개구리는 흰눈이 천지를 뒤덮고 얼음이 얼고 몹시 추워서 모든 개구리가 땅 속에 들어가서 오래 오래 겨울잠을 자고 나면 다시 따뜻한 봄이 오는데 그 때가 내년이라고 일러주었습니다.
그러나 메뚜기는 그 말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개구리를 보고 날씨가 서늘해지니 정신이 나간 모양이라고 놀렸습니다.
하루살이나 메뚜기는 내일 혹은 내년을 경험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내일이나 내년을 쉽게 믿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믿지 않는다고 해서 내일이나 내년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들이 믿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내일이나 내년은 엄연히 존재하는 것입니다.
자기가 알고 있는 것만 가지고 주장하는 사람은 가장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알고 있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은 것을 아셔야 합니다.
내세나 하나님의 존재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들이 그 세계를 경험하지 못해서 그 세계를 쉽게 이해하려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국과 하나님은 존재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내세가 있고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에 죽은 자의 부활도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증거 하기를 (고전15:12-13)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전파되었거늘 너희 중에서 어떤 이들은 어찌하여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이 없다 하느냐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라고 했습니다.
기독교는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는 생명 있는 부활의 종교입니다.
불교의 창시자인 석가는 죽어 인도에 묻혔습니다.
유교를 진리라고 선포했던 공자는 중국 산동성에 묻혔습니다.
어떤 위대한 성자, 어떤 종교의 창시자도 죽었고 그들은 다 땅에 묻혔습니다.
죽었다가 다시 살아났다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기독교는 예수님은 십자가에 인류를 위하여 대신하여 십자가에 고난을 받으시고 죽으셨습니다.
그러나 삼일 후 그는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하시었습니다. 할렐루야!
예수 그리스도만이 지금도 빈 무덤으로 남아 있을 뿐입니다.
자 그러면 이 예수 그리스도의 다시 살으심은 우리 믿는 자들에게 상당한 놀라운 영향을 가져오게 됩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넉넉히 이기게 하실 것입니다.
어떠한 극한 절망 상황에서도 소망을 가지고 살게 하십니다. 할렐루야!
영국 델햄 지방에 한 석탄 광산이 무너져 164명이 생매장되어 죽은 사건이 있었습니다.
얼마 후 시체를 발굴하는 과정에서 시체와 함께 몇 줄의 글이 쓰여진 판자를 발견했는데 다음과 같은 글귀가 적혀 있었습니다.
주님은 우리와 함께 하셨습니다. 우리는 갈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주여, 축복하소서. 우리는 대단히 유쾌한 기도회를 가졌습니다. 모든 사람은 영원한 영광에 들어갈 준비가 되었습니다. 화요일 오후 2시 라고 적혀 있었습니다.
부활의 신앙을 가진 자에게는 가장 무서운 원수인 죽음이 와도 두렵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부활은 절망에서 소망을 부활시켰습니다.
인류의 최초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의 타락으로 말미암아 인간의 생존은 완전히 절망에 빠져 버렸습니다.
하나님께서는 하나님을 거역하고 선악과를 따먹은 아담과 하와와 그 자손들의 영혼이 즉시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인간은 영혼이 죽어서 하나님과의 교통이 끊어졌으니 절망에 처하게 되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육체가 병들고 노쇠 되어 죽을 것을 말씀하셨습니다.
너는 흙이니 흙으로 돌아가라고 하셨으니 인간의 생명은 한정되어 살다가 병들고 노쇠해서 흙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는 죽음의 절망에 떨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인간은 환경적인 절망에 부딪쳤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아담의 죄로 말미암아 이 땅을 저주했습니다.
그래서 이 땅은 가시와 엉겅퀴가 나고 너희는 이마에 땀을 흘려야 먹고 살수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저주의 절망에 처하게 된 것입니다.
실존주의 철학자들도 인간의 상황을 절망으로 평가했습니다.
그들은 말하기를, 인간은 죄 책과 정죄의 절망에 놓여 있는데 그것을 결코 인간이 이겨낼 수가 없다고 합니다. 그리고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져 있어서 이 세상에서 아무리 영화롭더라도 그 삶의 의미와 가치는 알 수가 없다고 합니다.
이렇듯 인간은 허무와 무의미의 절망에 빠졌으며 또 죽어서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죽음과 무의미의 절망에 빠진 존재라고 말했습니다.
이러한 인간적인 절망을 어떠한 사람도, 어떠한 문명도, 과학도, 어떠한 사회개혁도 건져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절망적인 인간을 위하여 예수님께서 오셔서 우리의 모든 절망을 당신의 몸에 짊어지고 십자가에 못 박혀 몸찢고 피흘려 죽으셨다가 사흘만에 모든 사망과 절망의 세력을 다 정복하시고 소망의 부활을 가져오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는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내일은 오늘보다 다음달은 금번 달보다 명년은 금년보다 영원한 미래는 현재보다
더 나아진다는 소망을 가지고 살수 있는 존재로 살아 갈 수 있는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부활을 통하여 인간의 가슴속에 영원한 소망을 부활시키셨습니다. 할렐루야!
이제 저와 여러분들이 확신 할 축복이 있습니다.
이제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는 삶을 산다면 모든 것이 합력 하여 선이 될 것입니다.
화라도 변하여 복이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미움과 증오에서 살던 인간이 자유하고 사랑하며 살수 있게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미움에서 사랑을 부활시키셨습니다.
마귀는 아담을 꾀어 타락시킴으로 하나님과 인간이 원수가 되게 하였습니다.
그 결과 인간은 하나님 앞에서 쫓겨나고 하나님의 심판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마귀는 인간과 인간 사이에 미움을 심어 주었습니다.
아담은 하나님 앞에서 하와를 원망했습니다.
당신이 내게 죄를 짓게 했소하와는 또 뱀을 원망했습니다.
여기서부터 부부의 갈등이 생기기 시작하였습니다.
그리고 아담과 하와의 가정에는 비극이 다가왔습니다.
첫 아들 가인이 둘째 아들 아벨을 시기하고 질투해서 밭에서 돌로 쳐죽인 것입니다.
친족살상의 비극의 시작입니다.
형이 아우를 죽인 비극이 일어난 이후로 인류 속에는 미움이 꽉 들어차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지옥이 아니겠습니까?
이래서 오늘날까지 인간의 역사는 오로지 전쟁의 역사입니다.
민족과 민족 간, 부족과 부족간의 전쟁으로 이어진 것이 인간의 역사인 것입니다.
이러므로 이 세상이 생겨난 이후로 전쟁이 없는 때가 한번도 없었습니다.
인류는 제1.2차 세계대전을 통해서 세상을 오염시키고 수많은 인명을 파멸시켰습니다.
공산주의와 민주주의라는 사상 대결로 말미암아 5대양 6대주가 모두 다 전쟁터가 되고 만 것입니다.
그리고 이 피 흘림이 지금도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은 미움이 온 세상에 가득했는데 미움을 청산할 힘이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바로 이 미움을 예수님이 오셔서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로마인, 유대종교지도자들, 일반 군중들의 미움의 대상이 되었습니다.
심지어는 하나님께로 부터도 미움을 받고 버림을 받았습니다.
하나님이여, 하나님이여 어찌하여 나를 버리셨나이까.
이것은 온 인류의 미움을 주님이 대신 짊어지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 못 박혀 이 미움을 멸하시고 위대한 사랑의 화신으로 부활하신 것입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자기를 십자가에 못박는 사람을 보고 주여 저들을 용서하옵소서 저들이 하는 일을 알지 못하나이다라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아무와도 대결하지 않고 미워하지 않고 크신 사랑으로 이 모든 극복하며 사랑으로 부활하신 위대한 사랑의 원천이 되는 것입니다.
오늘이 이 예수 그리스도를 구주로 모셔들일 때 하나님과 인간은 사랑으로 연결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된 담은 허물어지고 미움은 사라지고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나님의 크신 사랑이 성령으로 말미암아 햇빛과 같이 비춰지게 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은 그리스도를 믿고 나오는 사람을 지극한 사랑으로 사랑해 주시고 넘치는 은혜를 부어주시는 것입니다.
그리고 예수님은 인간과 인간 사이를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서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 주시면 받은 그 사랑으로 말미암아 이웃을 사랑하게 됩니다.
남편을 아내를 사랑하고 부모와 자식을 사랑하게 됩니다. 친구를 사랑하게 됩니다. 할렐루야!
인간으로는 할 수 없지만 모든 미움을 극복하신 예수께서 우리 속에 들어와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심으로 원수조차도 사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의 사랑은 인간과 자연을 사랑으로 연결시킵니다.
오늘날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모셨으니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 새 한 마리도 사랑하는 마음이 생기니 얼마나 행복한 사람이 되겠습니까?
누가 말하기를 온 자연이 자신을 축하해 주는 것 같은 행복을 느낀다고 하지 않습니까?
자 이제 우리는 삶으로 인하여 절망 가운데서 살았지만 소망 가운데 살게 되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미움과 질시 가운데서 살았던 저와 여러분들이 그 누구도 사랑 할 수 있는 사람으로 살아 갈 수 있는 축복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일러한 구원과 축복이 우리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우리에게 주어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이런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떠한 삶이 우리에게 주어진다 할지라도 소망과 사랑 가운데 사는 자가 되어 넉넉히 이기는 삶을 사는 자가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이루어 진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