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변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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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64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사도행전5:17-32 두려움에서 믿음으로 변한 사람들
옛날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내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여러 가지 훈련이 있었지만 그 중의 한가지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산림 한 가운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훈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사내아이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공포의 밤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간신히 두려움의 밤을 다 지나고 먼동이 틀 무렵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아버지가 화살을 뽑아들고 언제라도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나무 뒤에 숨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밤새껏 바로 옆에서 뜬눈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가 이 밤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면은 그 캄캄한 공포의 밤을 두려움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믿고 평안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더욱이 용기가 생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불과 한 2달 전까지만 해도 관원들이 무섭고 종교 지도자들이 횡포가 무서워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어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는 그 두려움이 어디에 갔는지 사라지고 아주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변화였습니다.
도리어 죄수로 끌려온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법관들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법관들이 예수님을 심문하던 그 자리에 서서 의연하고 조리 있게 법관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자리에 서서 계집종들에게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던 그 비겁하고 연약했던 그 인격이 왜 이토록 담대하게 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두 달만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데 있습니다. 할렐루야!
죽지 않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 후로는 삶의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삶의 두려움으로 가득찬 여러분들을 우리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용기 있게 살아가는 복된 자로 바뀌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거의 죽을 것 같은 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의 질고로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로 해결이 되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 어떠한 문제로 두려워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예수님이 그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신 후에 체험하게 된 변화를 노래한 R. H. McDaniel는 What a Wonderful Change! 무엇이 나를 놀랍게 변화를 가져왔나 곧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찬208)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화여 새 사람 되고,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맥 다니엘씨는 평안과 안식을 노래한 이 시를 적은 때가 언제 인줄로 아십니까?
참으로 삶의 회의를 느끼며 괴로워하며 번민할 때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지는 찬송 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토록 번민하는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이 되고 누리는 모든 체험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놀랍고 복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자로 바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16년간 아프리카 정글의 고독과 위험과 싸우다가 고국에 돌아와 글라스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간을 살수가 있었습니까?
이때에 리빙스턴은 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두 마디의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대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했습니다.
첫 번 째 약속은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이고(요14:18), 두 번째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28:20)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 하시는 사랑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그 말씀을 붙잡고 의지 할 때에 어떤 인생의 풍랑도 극복 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가만히 계시지 말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좀 불러 보십시오
그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가까이 에서 아주 가까이 에서 계실 것입니다.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126-182호에 살고있는 정동진씨가 이런 간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정동진씨가 늦게 군대 영장이 나와서 25세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공병대로 들어가 용접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근무한 지 3개월쯤 지났는데 어느 날 상관이 정씨를 부르더니 최전방에 용접할 것이 있으니 갔다오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에게 불순종 할 수가 없어 용접준비를 갖추어서 작업장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북한에서 불과 2킬로 떨어진 지점인데 그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북한에서 듣고 대답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아마 남방 한계선 정도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곳에 설치해 놓은 철조망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짤라져서 새로 만든 관측소 둘레에 철조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철조망 문을 열고 군사분계선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 일개 분대의 호위를 받으며 용접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날씨가 무척 더워서 그런지 발동기가 열을 받아 잘 돌아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동기도 고칠 겸 또, 땀도 식힐 겸해서 작업장에서 북으로 1백 50미터 지점에 시원한 우물이 있어서 분대장에게 허락을 받고 재빨리 뛰어가서 급하게 물을 몸에 끼얹고 서둘러서 옷을 입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손들고 이리 나와!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만 피가 멈추는 듯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떨면서 옷을 마저 입고 소리난 지점을 향해 갔더니 북괴군 세 명이 정씨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살려 달라고 하니까 한 북괴군이 총 머리로 정씨 머리를 쳤으나 피하는 바람에 옆구리에 맞았습니다.
그들이 정씨에게 여러 가지를 묻더니 노끈으로 묶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근처에 있는 구덩이에 밀어 넣어 버렸습니다.
정씨가 끙끙거리며 몸부림을 치니까 입에 수건을 빼주면서 소리지르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꼭 죽게 될 것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 정씨에게 문득 기도 할 감동이 와서 그 구덩이 속에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고 나니까 어느 정도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조그만 하게 불렀습니다.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 앞에 빨리 나갑시다. 그때, 괴뢰군 중 한 명이 그 에게 가까이 오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정씨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자기의 부모님들이 공산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웃 사람의 고발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는 정씨를 풀어주면서 빨리 도망가슈! 하고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정씨는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찾는 것을 잃지 않으므로 살아 날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비견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시50:15)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는 말씀은 오늘날도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고만 있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로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셔서 큰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는 분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시 사신 이 예수의 이름으로 두려움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이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축복된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삶은 어떻게 삶을 사는 자입니까?
그 어떠한 생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몸으로 자신의 전부를 가지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그 어떠한 환경도 그들이 에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헌신 앞에는 결코 장애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툭하면 사람의 소리를 듣는 우리하고는 상당히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편리를 위한다면은 이들은 오직 예수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 할렐루야!
여기에 무슨 죽음이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들어내는 자들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의 이름을 자신 있게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예수를 만나보지 못함에 있고, 예수를 만났다고는 하나 그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하지 못함에 있고, 그 예수를 위하여 우리 자신들 드리지 못함에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 기대만 하고 있지, 무엇인가 잘해주지 않나 하고...
그 크신 은혜에 내 자신이 헌신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은 당연히 여기고 자신이 주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하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헌신한다는 것은 거리끼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큰 특징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수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꾸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기는커녕 부족한 것뿐입니다.
내 자신을 드려 예수를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루는 어느 분이 기도의 용사요 기도 한 것마다 응답을 받은 생애에 10만번 이상 응답을 받았다는 죠지 뮬러에게 찾아와서 묻기를 당신의 능력 있는 믿음의 비결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말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뮬러가 조심스럽게 겸손히 대답하기를 나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큰 믿음의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영국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죠지 뮬러는 이렇게 자신을 다짐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죠지 뮬러는 사망 처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죠지 뮬러가 생겨난 것입니다.
죠지 뮬러의 평애와 기호와 의지와 뜻이 죽었습니다.
그 때부터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헌신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꽉 들어찬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의심하는 나, 나 자신 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십자가 아래서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믿음의 사람,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헌신의 새사람이 탄생되므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풍랑과 시험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음직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군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더 이상 나로 말미암아 두려움의 사람으로 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축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옛날에 아메리카 인디언들은 사내아이들에게 용기를 심어주는 훈련을 시켰습니다.
여러 가지 훈련이 있었지만 그 중의 한가지는 맹수들이 우글거리는 산림 한 가운에서 홀로 밤을 지새우는 훈련이었습니다.
밤새도록 사내아이는 죽음의 두려움으로 공포의 밤을 지나야만 했습니다.
간신히 두려움의 밤을 다 지나고 먼동이 틀 무렵이 되었을 때, 그 아이는 아버지가 화살을 뽑아들고 언제라도 아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반의 준비를 갖춘 채 나무 뒤에 숨어있는 모습을 발견하게 됩니다.
아들은 몰랐지만 아버지는 사랑하는 아들을 보호하기 위하여 밤새껏 바로 옆에서 뜬눈으로 지켰던 것입니다.
만약에 아들이 아버지가 이 밤에 함께 하신다는 사실을 알았다 면은 그 캄캄한 공포의 밤을 두려움으로 보내지 않고 오히려 아버지를 믿고 평안하게 보냈을 것입니다.
더욱이 용기가 생겼을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러한 내용입니다.
불과 한 2달 전까지만 해도 관원들이 무섭고 종교 지도자들이 횡포가 무서워 두려움에 떨며 문을 걸어 잠그고 꼭꼭 숨어있었던 예수님의 제자들이 이제는 그 두려움이 어디에 갔는지 사라지고 아주 용기가 있는 사람으로 변화였습니다.
도리어 죄수로 끌려온 신세임에도 불구하고 법관들에게 큰 소리를 치고 있었습니다.
법관들이 예수님을 심문하던 그 자리에 서서 의연하고 조리 있게 법관들에게 진리를 선포하고 있는 것입니다.
두 달 전까지만 해도 바로 이 자리에 서서 계집종들에게 예수의 제자가 아니라고 세 번이나 부인하던 그 비겁하고 연약했던 그 인격이 왜 이토록 담대하게 변한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두 달만에 이렇게 바뀔 수가 있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죽은 줄로만 알았던 예수님이 죽지 않고 다시 살아났다는데 있습니다. 할렐루야!
죽지 않고 다시 사신 예수님을 만났다는데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들을 떠나지 않고 함께 하시는데 있습니다.
그들과 함께하시는 예수님 때문에 그 후로는 삶의 두려움에서 해방이 되고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사는 용기있는 사람으로 바뀌고 말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삶의 두려움으로 가득찬 여러분들을 우리 예수님을 믿는 믿음 안에서 용기 있게 살아가는 복된 자로 바뀌게 하실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물질 때문에 거의 죽을 것 같은 자들이 여기에 있습니다.
육신의 질고로 어떻게 될까봐 두려워하고 있는 자들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리고 죄의 문제로 해결이 되지 않아 두려워하고 있습니다.
그 외에도 그 어떠한 문제로 두려워하고 있는 여러분들에게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예수님이 그 두려움에서 자유하게 하실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 계신 예수님을 만나시기 바랍니다.
여러분의 마음속에 영접하시기 바랍니다.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수님께서 내 마음속에 들어오신 후에 체험하게 된 변화를 노래한 R. H. McDaniel는 What a Wonderful Change! 무엇이 나를 놀랍게 변화를 가져왔나 곧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찬208) 이런 변화를 가져왔다는 것입니다.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변화여 새 사람 되고, 주 예수 내 맘에 들어와 계신 후 망령된 행실을 끊고, 내 맘에 소망을 든든히 가짐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물밀 듯 내 맘에 기쁨이 넘침은 주 예수 내 맘에 오심
맥 다니엘씨는 평안과 안식을 노래한 이 시를 적은 때가 언제 인줄로 아십니까?
참으로 삶의 회의를 느끼며 괴로워하며 번민할 때입니다.
그의 사랑하는 둘째 아들이 세상을 떠난 후에 지는 찬송 시입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가 이토록 번민하는 그에게 놀라운 은혜를 베풀어주신 것입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새 사람이 되고 누리는 모든 체험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로만으로 누릴 수 있는 축복인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가 문 밖에 서서 두드리나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누구든지 예수 그리스도를 마음에 모시기만 하면 놀랍고 복된 은혜를 체험하게 되는 자로 바뀔 것입니다.
아프리카의 성자, 리빙스턴이 16년간 아프리카 정글의 고독과 위험과 싸우다가 고국에 돌아와 글라스고 대학에서 강연을 했을 때 한 학생이 질문을 했습니다.
그렇게 고생스럽고 고독한 환경에서 어떻게 16년간을 살수가 있었습니까?
이때에 리빙스턴은 이런 대답을 하였다고 했습니다.
나는 주님의 두 마디의 약속이 나로 하여금 신음이나 불평대신 찬송을 부르며 승리하게 했습니다.
첫 번 째 약속은 [ 내가 너희를 고아와 같이 버려두지 않겠다]는 말씀이고(요14:18), 두 번째 약속은 [내가 세상 끝날 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마28:20)
하나님의 보호와 함께 하시는 사랑을 전폭적으로 신뢰하며, 그 말씀을 붙잡고 의지 할 때에 어떤 인생의 풍랑도 극복 할 수 있게될 것입니다.
가만히 계시지 말고 나와 함께 하는 하나님의 이름을 좀 불러 보십시오
그 하나님은 저 멀리 계시지 않으시고 여러분의 가까이 에서 아주 가까이 에서 계실 것입니다.
서울 서대문구 옥천동 126-182호에 살고있는 정동진씨가 이런 간증을 하였다고 합니다.
정동진씨가 늦게 군대 영장이 나와서 25세에 군에 입대하여 논산 훈련소에서 훈련을 마치고 공병대로 들어가 용접 기술을 배웠다고 합니다.
그곳에서 근무한 지 3개월쯤 지났는데 어느 날 상관이 정씨를 부르더니 최전방에 용접할 것이 있으니 갔다오라는 명령을 하였습니다.
군대에서는 상관에게 불순종 할 수가 없어 용접준비를 갖추어서 작업장을 찾아갔는데 그곳은 북한에서 불과 2킬로 떨어진 지점인데 그곳에서 크게 소리를 지르면 북한에서 듣고 대답할 정도로 가까운 곳이었습니다.
아마 남방 한계선 정도가 되는 모양입니다.
그곳에 설치해 놓은 철조망이 모종의 사건으로 인해 짤라져서 새로 만든 관측소 둘레에 철조망을 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철조망 문을 열고 군사분계선이 있는 안쪽으로 들어가 일개 분대의 호위를 받으며 용접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그 날 따라 날씨가 무척 더워서 그런지 발동기가 열을 받아 잘 돌아가지를 않았습니다.
그래서 발동기도 고칠 겸 또, 땀도 식힐 겸해서 작업장에서 북으로 1백 50미터 지점에 시원한 우물이 있어서 분대장에게 허락을 받고 재빨리 뛰어가서 급하게 물을 몸에 끼얹고 서둘러서 옷을 입고 있는데 어디선가 나지막한 목소리로 손들고 이리 나와! 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그만 피가 멈추는 듯 소스라쳐 놀라고 말았습니다.
떨면서 옷을 마저 입고 소리난 지점을 향해 갔더니 북괴군 세 명이 정씨를 향해 총을 겨누고 있었습니다.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제발 살려 달라고 하니까 한 북괴군이 총 머리로 정씨 머리를 쳤으나 피하는 바람에 옆구리에 맞았습니다.
그들이 정씨에게 여러 가지를 묻더니 노끈으로 묶고 수건으로 입을 틀어막더니 근처에 있는 구덩이에 밀어 넣어 버렸습니다.
정씨가 끙끙거리며 몸부림을 치니까 입에 수건을 빼주면서 소리지르면 당장 죽여 버리겠다고 위협했습니다.
꼭 죽게 될 것만은 두려움으로 가득 찼습니다.
그때 정씨에게 문득 기도 할 감동이 와서 그 구덩이 속에서 기도를 드리기 시작했습니다.
간절하게 눈물로 기도하고 나니까 어느 정도 마음에 평안이 왔습니다.
그래서 찬송을 조그만 하게 불렀습니다.
갈 길을 밝히 보이시니 주 앞에 빨리 나갑시다. 그때, 괴뢰군 중 한 명이 그 에게 가까이 오더니 하늘을 가리키며 하나님을 믿느냐고 물었습니다.
그래서 그렇다고 대답하니 정씨에게 다음과 같은 이야기를 들려 주며 빨리 도망가라고 했습니다.
벌써 오래 전에 자기의 부모님들이 공산당의 경고를 무시하고 지하 교회에서 예배를 드리다가 이웃 사람의 고발로 공개 처형을 당했다는 것을 말하고는 정씨를 풀어주면서 빨리 도망가슈! 하고는 자기를 위해 기도해 달라는 것이었습니다.
이리하여 정씨는 위기의 순간에 주님을 찾는 것을 잃지 않으므로 살아 날수 있었습니다.
이것은 한 비견한 예에 지나지 않지만 (시50:15)에 환란 날에 나를 부르라 내가 너를 건지리니 네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하는 말씀은 오늘날도 여전히 진리입니다.
그런데 오늘 우리가 세상을 두려워하고만 있지 그 이름을 부르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우리 예수님은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죽은 자로 계시지 않고 우리 가운데 살아 계셔서 큰 구원의 역사를 가져오는 분으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이제 다시 사신 이 예수의 이름으로 두려움 가운데 삶을 살아가는 자가 아니라 이 예수를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축복된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살아 계신 예수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믿음으로 살아가는 자는 삶은 어떻게 삶을 사는 자입니까?
그 어떠한 생활 가운데서도 예수 그리스도의 구주 되심을 몸으로 자신의 전부를 가지고 전하는 자들입니다.
오늘 본문의 사도들은 그들에게 다가오는 그 어떠한 환경도 그들이 에수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헌신 앞에는 결코 장애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사람보다 하나님을 순종하는 것이 마땅하니라
툭하면 사람의 소리를 듣는 우리하고는 상당히 대조가 되는 모습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편리를 위한다면은 이들은 오직 예수를 위한 삶이었습니다.
너희가 나무에 달아 죽인 예수를 우리 조상의 하나님이 살리시고 이스라엘로 회개케 하사 죄사함을 얻게 하시려고 그를 오른 손으로 높이사 임금과 구주를 삼으셨느니라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라 할렐루야!
여기에 무슨 죽음이 두려움이 되겠습니까?
어떠한 모양으로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 되심을 들어내는 자들입니다.
왜 우리 가운데는 구원을 가져오는 예수의 이름을 자신 있게 부르지 못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는 줄 아십니까?
예수를 만나보지 못함에 있고, 예수를 만났다고는 하나 그 예수를 내 마음에 영접하지 못함에 있고, 그 예수를 위하여 우리 자신들 드리지 못함에 있습니다.
아직도 예수님께 기대만 하고 있지, 무엇인가 잘해주지 않나 하고...
그 크신 은혜에 내 자신이 헌신한다는 생각은 추호도 없기 때문입니다.
자신이 은혜를 받은 것은 당연히 여기고 자신이 주를 위하여 헌신한다는 것은 내가 이렇게 까지 할 필요가 있나하고, 이상하게 여기고 있다는 것입니다.
혹시 여러분들은 은혜를 받아야 하는 것은 당연하고 헌신한다는 것은 거리끼지 않습니까?
여러분 예수님을 만난 자들의 큰 특징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예수를 위하여 사는 자로 바꾸어진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내 모든 것을 드려도 아깝기는커녕 부족한 것뿐입니다.
내 자신을 드려 예수를 존귀케 하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하루는 어느 분이 기도의 용사요 기도 한 것마다 응답을 받은 생애에 10만번 이상 응답을 받았다는 죠지 뮬러에게 찾아와서 묻기를 당신의 능력 있는 믿음의 비결이 어디에서 나타나는지 말해 달라고 간청했습니다.
그러자 뮬러가 조심스럽게 겸손히 대답하기를 나 죠지 뮬러에 대하여 죽은 것입니다. 그것이 큰 믿음의 비결입니다.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영국에서 고아의 아버지로 잘 알려진 죠지 뮬러는 이렇게 자신을 다짐한다고 했습니다.
저는 모든 것에 대해 죽었습니다.
언제부터인가 죠지 뮬러는 사망 처리되었고,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죠지 뮬러가 생겨난 것입니다.
죠지 뮬러의 평애와 기호와 의지와 뜻이 죽었습니다.
그 때부터 칭찬과 비난에 흔들리지 않고 헌신 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두려움과 불안으로 꽉 들어찬 이 세상에서 믿음으로 승리하려면 무엇보다 의심하는 나, 나 자신 만을 위해 존재하는 나, 불안해하며, 두려워하는 나 자신이 십자가 아래서 못 박혀 죽어야만 합니다.
그리고 거기서 새로운 믿음의 사람, 말씀의 사람, 순종의 사람, 헌신의 새사람이 탄생되므로 강하고 담대한 믿음으로 세상의 모든 풍랑과 시험을 극복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참으로 믿음직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일군으로 다시 태어날 것입니다.
더 이상 나로 말미암아 두려움의 사람으로 살지 마시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믿음의 축복된 사람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