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의 첫 열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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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273회 작성일 2015-04-05 19: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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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린도전서15:16-20 부활의 첫 열매
런던 성바울 교회는 유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교회로서 영국왕의 대관식이 거행되는 교회입니다.
그 교회 지하에는 큰 공로를 세운 영국 위인들의 묘가 있습니다.
각 묘비에는 이름만 들어도 알 수 있는 유명한 정치인, 장군, 예술가, 목사의 이름이 새겨져 있습니다.
영국의 국민들은 성바울 교회 지하 묘소에 묻히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하지만 그 곳에서는 아무리 위대한 사람이라도 결국은 이렇게 죽는 것을 하는 인생의 허무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한 시대를 호령하던 영웅호걸이라도 결국은 한 줌의 흙으로 돌아가는 것이 인생입니다.
하지만 예수 그리스도의 묘실은 어떠했습니까?
그 곳에 여기 예수의 몸이 누워있다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천사에 의해 남겨진 묘비명은 여기 그가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였습니다.
마28:1-6 안식일이 다 지나고 안식 후 첫날이 되려는 새벽에 막달라 마리아와 다른 마리아가 무덤을 보려고 갔더니 큰 지진이 나며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내고 그 위에 앉았는데 그 형상이 번개 같고 그 옷은 눈 같이 희거늘 지키던 자들이 그를 무서워하여 떨며 죽은 사람과 같이 되었더라 천사가 여자들에게 말하여 이르되 너희는 무서워하지 말라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를 너희가 찾는 줄을 내가 아노라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 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렇습니다. 기독교는 빈 무덤의 종교입니다.
아무리 훌륭한 위인이라 할지라도 결국 무덤에서 그들의 인생이 끝이 났습니다.
그러나 오직 예수만은 그 무덤을 헤치고 일어나셔서 온 세계에 참 생명을 전해 주셨습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문제를 해결하고 다시 살아나신 이는 예수 외에는 그 누구도 없습니다.
20절 그러나 이제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사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도다
첫 열매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약에서 첫 열매는 하나님의 은혜를 기억하며 감사하는 예물로 드려졌습니다.
곡식을 추수하기 전에 가장 먼저 익은 것을 하나님께 드렸는데, 첫 열매를 드리면서 이렇게 풍성한 소출을 주신 분이 바로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고 감사했던 것입니다.
첫 열매가 익으면 사람들은 이제 들판에 있는 모든 열매들이 그 첫 열매처럼 곧 익게 된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고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다는 것은 그 분을 믿는 자들은 죽어도 부활하게 된다는 분명한 증거요 보장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입니다.
당시 고린도 교회에는 죽은 자들의 부활이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울은 먼저 이렇게 죽은 자들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은 곧 그리스도의 부활도 부인하는 결과를 낳게 된다는 것을 상기시켰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이 편지를 쓰던 당시에는 부활하신 주님을 만난 증인들이 많이 살아 있었습니다.
그런데 죽은 자들이 다시 사는 것을 부인한다면 그렇게 확실한 그리스도의 부활을 부인하는 것이 되고 맙니다.
그것은 또 우리가 믿는 모든 것을 다 헛된 것으로 만들어 버립니다.
만일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지 않으셨다면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모든 수고가 헛되게 되며, 더 나아가서 그들은 사기꾼들이 되고 맙니다.
부활이 없다면 전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될 뿐만 아니라 복음을 듣고 믿는 자들의 모든 믿음도 헛된 것이 되고 맙니다.
예수 믿는 자들은 죄 사함을 받지 못할 것이며, 구원도 받지 못할 것입니다.
부활이 없다면 예수 믿고 죽은 사람들에 대해서 어떤 소망도 가질 수 없게 됩니다.
그뿐 아니라 지금 살아서 예수 믿고 있는 우리들 역시 아무 소망 없는 자들이 됩니다.
우리가 주님을 위해 참고 견디며 수고한 모든 것이 다 헛것이 됩니다.
그리고 예수 믿는 사람들은 거짓에 속아 일생을 허비한 것이 되기 때문에 가장 불쌍한 자들이 되고 맙니다. 부활이 없다면 이렇게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모든 우울한 결과들은 그리스도가 다시 살아나시지 않았다는 가정에서 나온 것입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서는 분명히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20절에는 그러나라는 말로 시작됩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이러한 모든 염려와 불안과 우울한 것들을 완전히 날려버립니다.
그리스도께서 죽으셨다가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복음을 전하는 자들의 수고가 헛것이 아니며, 우리의 믿는 것이 헛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우리가 죄 사함 받은 것이 확실하고 구원이 확실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예수 믿고 죽은 성도들도 다시 살아나게 될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그 분을 믿는 자들은 가장 복된 자들인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것은 부인될 수 없는 분명한 사실이며, 이렇게 중요하고 복된 진리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생명의 종교라고 합니다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심으로 죄에서 해방되었음을 일어 주는 것입니다.
16-17절 만일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나는 일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었을 터이요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아나신 일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현재 인간의 평균 수명은 무척이나 많이 연장되었습니다.
예전에는 회갑이 돌아오면 큰 잔치를 베풀곤 했지만 최근에는 회갑연을 생략하는 사람들이 많고 아직 젊음을 유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각종 신약들이 개발되어서 인간의 수명을 심지어 배로 연장시킬 수도 있다고 장담하기까지 합니다.
하지만 아무리 과학과 의학이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의 생명과 사망을 주장할 수 없습니다.
이 땅에 태어난 모든 사람은 결국은 다 죽음을 맛보게 됩니다.
그래서 혹자는 인생은 사는 것이 아니라 죽어가는 것이라고 말하기까지 합니다.
그러므로 인생에 있어서 참으로 공평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누구나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입니다.
누구든지 죽기를 원하지는 않지만 누구든지 결국은 죽게 된다는 사실입니다.
게다가 그 죽음과 죽음 이 후에 대해서도 명확하게 이야기 해 줄 수 있는 사람도 없습니다
실제로 이죽음의 문제는 최고의 난제입니다.
공자 같은 이는 위대한 사람도 삶에 대하여서도 모르는데 어찌 죽음에 대해서 알 수 있으라고 말할 뿐이었습니다.
그런데 성경은 이와 달리 죽음에 대해서 명확하고 자신 있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아담 이 후 모든 인간은 죄로 인해 죽음에 이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성경은 죽음의 원인을 바이러스나 다른 질환에서 찾는 것이 아니라 바로 죄 때문이라고 선언하고 있습니다. 약1:14-15 오직 각 사람이 시험을 받는 것은 자기 욕심에 끌려 미혹됨이니 욕심이 잉태한즉 죄를 낳고 죄가 장성한즉 사망을 낳느니라
아담 이후에 모든 인류는 죄의 그늘에서 살아가게 되었고 그 이후로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죄의 삯으로 죽음을 맛보게 되었습니다.
사람들은 살아서 호흡을 하며 활동하고 있으나 실상은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모태로부터 나오자마자 모든 사람은 이제 무덤을 향해 가고 있는 것입니다.
비록 육은 살아 숨을 쉬고 있으나 영적으로는 이미 다 죽은 상태입니다.
그 증거로 이 세상은 미움, 시기, 질투, 간음, 분쟁, 분열, 전쟁으로 참된 평안을 잃어버렸습니다.
결국 모든 인간은 죽음으로 종말을 맞이합니다.
어떻게 인류가 이 사망의 몸에서 구원을 받을 수 있습니까?
고전15:55-57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로 가장 행복한 자 되었습니다.
19절 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바라는 것이 다만 이 세상의 삶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이리라 고 합니다.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눈에 보이는 이 세상의 영광이 목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세상에서 성공하고 세상에서 복 받고 잘 된다는 것만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부활을 믿은 많은 믿음의 선진들이 어떤 삶을 살았는지를 잘 증거 해 주고 있습니다.
히11:24-26 믿음으로 모세는 장성하여 바로의 공주의 아들이라 칭함 받기를 거절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잠시 죄악의 낙을 누리는 것보다 더 좋아하고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
모세가 세상의 보장된 부귀영화의 삶을 버리고 왜 하나님의 백성과 함께 고난 받기를 원하였습니까?
이 세상의 삶이 전부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약1:10-11 부한 자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그가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
세상에서 복된 사람들이 어디 있겠습니까?
나를 위해 죽으실 정도로 나를 사랑하시는 분이십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 부활하사 지금도 살아 계시는 주님께서 나와 함께 하십니다.
이 주님께서 나를 도우시고 위로하시며 능력을 주십니다.
그래서 무슨 일을 만나도 참된 평안과 기쁨을 누리며 삽니다.
그리고 이 세상을 떠날 때는 주님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부활하게 될 것입니다.
이 부활 소망과 능력을 가지고 늘 승리하는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나의 부활의 소망 가운데 살게 합니다.
사도 바울은 예수 믿고 죽은 자들이 다시 살아나게 된다는 것을 말하면서 잠자는 자들이라는 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성경은 죽는 것을 잠자는 것으로 묘사할 때가 많습니다.
삼하712 네 수한이 차서 네 조상들과 함께 누울 때에 내가 네 몸에서 날 네 씨를 네 뒤에 세워 그의 나라를 견고하게 하리라
유다 왕국의 역사를 기록한 사람들은 다윗을 비롯한 모든 왕들의 죽음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죽는 것을 잔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마9:24-25 이르시되 물러가라 이 소녀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 그들이 비웃더라 무리를 내보낸 후에 예수께서 들어가사 소녀의 손을 잡으시매 일어나는지라
사도행전에서는 스데반이 순교하는 장면을 기록하면서 이 말을 사용했습니다.
행7:59-60 그들이 돌로 스데반을 치니 스데반이 부르짖어 이르되 주 예수여 내 영혼을 받으시옵소서 하고 무릎을 꿇고 크게 불러 이르되 주여 이 죄를 그들에게 돌리지 마옵소서 이 말을 하고 자니라
왜 성경이 이렇게 죽는 것을 자는 것으로 표현했을까요?
그것은 사람이 죽는 것으로 완전히 끝나는 것이 아니라 이제 곧 다시 살아날 것이기 때문입니다.
뿐만 아니라 사람의 육신이 죽어도 그의 영혼은 여전히 살아있기 때문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사람은 한 번 죽으면 완전히 끝나는 줄로 생각합니다.
사람이 자는 것은 고단한 생활을 쉬고 회복하기 위해 필수적인 것입니다.
그래서 자는 것은 쉬는 것이기도 합니다.
죽는 것도 이와 비슷합니다.
인생은 매우 고달프고 힘듭니다.
그러나 아무리 인생이 고달파도 죽으면 안식을 누리게 됩니다.
성도는 죽음을 통하여 인생의 모든 고생과 아픔과 죄를 다 벗어버리고 참된 안식에 들어가게 됩니다.
그러므로 죽는 것은 잠자는 것과 같습니다.
성경이 죽는 것을 자는 것으로 표현한 것은 그 말속에 이미 부활을 암시하고 있는 것입니다.
첫 열매는 이제 다른 열매들도 곧 익게 될 것을 미리 보여줍니다.
첫 열매는 다른 모든 열매들이 그렇게 익을 것을 보여주는 증거이며 보증인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셔서 잠자는 자들의 첫 열매가 되셨다는 말은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도 다시 살아난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셨기 때문에 죽은 사람들 역시 부활합니다.
이것은 너무나도 당연하고 분명한 일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죽은 사람들은 다시 살아날 뿐만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얻은 자로서, 그리고 그리스도처럼 변화된 모습으로 다시 살아나게 됩니다.
21-23절 사망이 한 사람으로 말미암았으니 죽은 자의 부활도 한 사람으로 말미암는도다 아담 안에서 모든 사람이 죽은 것 같이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사람이 삶을 얻으리라 그러나 각각 자기 차례대로 되리니 먼저는 첫 열매인 그리스도요 다음에는 그가 강림하실 때에 그리스도에게 속한 자요
이것이 대표성의 원리인데, 이 원리를 가지고 아담과 모든 사람들과의 관계,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와 모든 믿는 자들과의 관계를 설명하는 것입니다.
모든 사람이 아담 안에서 범죄하고 죽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은 그리스도 안에서 다시 살며, 영원한 생명을 얻게 되었습니다.
장로교의 창시자인 칼빈은 생전에 남긴 업적도 대단했지만 세상을 떠날 때도 큰 영적 교훈을 남기고 갔습니다.
칼빈은 죽을 때 내 무덤에 묘비를 세우지 말고 내 무덤의 흔적이 없도록 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그의 유지를 따라 지금도 제네바에 가면 칼빈의 무덤에는 이름이 없습니다.
단지 그를 추모하는 많은 사람들이 너무 아쉬운 나머지 무덤 위에 J. C라고 이름 약자만 새겨 놓았을 뿐입니다.
그래서 칼빈의 유언을 음미하는 사람들은 그의 무덤가에서 더 큰 은혜를 받는다고 합니다.
부활의 소망을 간직하고 잠들어 있는 칼빈을 만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과연 참된 소망은 무엇입니까?
많은 사람들이 땅에서 영원한 행복과 만족을 찾고 있지만 들려오는 소식들은 모두 사망의 소식뿐입니다. 인류의 참된 희망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부활의 신앙뿐입니다.
부활의 첫 열매인 예수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에 비로소 인생은 행복과 만족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언젠가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에 모든 성도들이 함께 부활의 영광에 동참하게 되기를 간절히 기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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