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에서 생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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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96회 작성일 2009-05-27 09: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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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 7:11-17 사망에서 생명으로
지난 주중에 아들을 데리고 삼성동 코엑스 전시장을 다녀왔습니다.
방학중에 집에 가만히 두기도 그렇고 해서 갔더니 그 지하에 웬 사람들이 그렇게도 많든지 수 만 명은 족히 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간편복 차림을 하고 갔더니 그 안이 얼마나 냉방을 많이 틀어 놓았는지 추울 지경이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피서 방법을 하나 일러 드리겠는데 아이들 데리고 아침 일찍이 전철을 타고 그 곳으로 갔다가 저녁에 돌아오면 아주 멋있는 피서가 될 것 같아요
그 안에서 모든 용무를 다 볼 수 있으니까요
그런데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들었어요
비상사태가 발생하면 이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할까? 걱정이었습니다.
1923년 9월 1일에 일어났던 일본의 관동 대 지진은 10여 만의 생명과 수백만의 금화를 태워 버렸습니다.
그 때에 특히 피복매매 광장에서는 3만 명이나 되는 사람들이 한 자리에서 엉겨 죽었는데 그렇게 불꽃 가운데서도 살겠다고 어떤 사람은 의복가방을 들고 오고, 어떤 사람은 돈 뭉치를 가지고 오고 어떤 사람들은 과자봉지를 들고 나오고, 어떤 사람은 바이올린, 어떤 사람은 화장품을 가지고 광장 한복판에 모여 살겠다고 애를 쓰다가 불이 그렇게도 무심하게 그곳까지 붙어옴으로 하는 수 없이 최후엔 비명을 지르며 다 죽고 말았다고 합니다.
이 얼마나 허무한 삶의 모습이 아니고 무엇입니까?
그래도 삶의 희망을 잃지 않고 삶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손에 쥐고 달려왔는데 모두가 잿더미가 되고 말았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최후의 순간이 온다고 한다면 무엇을 붙잡겠습니까?
아마 우리 여성들은 최고의 아름다움이라고 할지도 모릅니다.
저는 옛날에는 별로 그렇게 느끼지 못했는데 요사이는 여성들이 아름다움을 위하여 목숨을 걸어 놓고 살아가는 것 같습니다.
중 고등 학생만 해도 야단입니다. 대한민국 전체가 야단입니다.
째고 칠하고 붙이고 야단입니다.
그리고는 사람을 쳐다보더라도 게츠므리한 눈으로 쳐다보니 참 겁이 나요
전부다 얼굴은 폐병 환자같이 하얗게 하고 다이어트 하느라고 말입니다.
또 하여튼 제대로의 개성의 얼굴을 가지기보다는 어디 붕어빵 찍어내듯이 똑같은 스타일로 아름다움을 연출하는데 남성인 제가 보기에도 이제는 좀 지겹다 하는 생각이 들어요
제가 우리 집 사람보고 왜 저렇게도 여성들이 야단이냐 라고 하니 다 남자들 때문에 그렇다는 것입니다.
당신부터 잘 생긴 사람에게 관심을 두고 있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할 말 없어요
다 똑같아요 그 얼굴이 그 얼굴이어요 그렇게 꾸며서 아름답지 않는 자가 어디 있겠습니까?
돼지도 그렇게 꾸미면 너무 아름다워 홀딱 반하겠습니다.
죄송합니다만 은 우리 딸도 그런 것 같아서...
너 요새 못생긴 사람 어디 있나 바라 다 꾸며서 똑같은데 그런 아름다움에 시간과 정력 낭비하지 말고 그것만큼 허무한 것 없어 속을 좀 꾸며 지식을 넣고 믿음을 좀 심어
그런 아름다움을 꾸미다가 결정적인 데에 그 아름다움이 무슨 유익이 되겠느냐? 는 것입니다.
잠언서 말씀에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고 했습니다.
우리 남성들은 그저 돈이나 벌고 출세하는 일일 것입니다.
이 머리 속에 어떡하면 돈을 벌고 출세할까? 에 만 온 생각을 하고 정력을 기울이고 그렇게 인생을 다 보내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그러다 보니 부정 부폐등 온갖 잘 못된 유혹에 다 빠져 버리고 말 것입니다.
지금 우리 나라는 사람이 사람답게 살아야 하는 것을 귀중하게 여기기보다는 그저 물질적인 동물로 돈버는 기계로 전략을 시켜 놓았습니다.
도덕과 정신적인 부패는 결국에는 모든 것을 다 망쳐 버릴 것입니다.
경제도 건전한 정신적인 바탕에서 이루어져야 탄탄한 것입니다.
소돔과 고모라가 돈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니요 로마가 권력이 없어서 망한 것이 아닙니다.
건전한 정신 문화가 없기 때문에 불타고 멸망을 한 것입니다.
돈과 권세가 세상이 무엇을 여러분들에게 유익을 줄 수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오히려 여러분이 움켜잡은 것만큼 크게 허무할 것입니다.
오늘 우리의 문화와 삶은 점점 소돔화 되어 가고 고모라화가 되어 가고 있습니다.
물질과 쾌락을 우선 시하는 그런 사회입니다.
교회 안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의 판단 기준과 능력의 기준이 모두가 물질적인 것으로 전락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가 얼마나 크냐 잘 지었나? 몇 명이나 모이느냐? 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그렇게 잘지는 예루살렘 성전을 보시고 장차 돌 위에 돌 하나가 놓이지 못할 정도로 폐허가 될 것을 아시고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하시며 울지 않으셨습니까?
암탉이 제 새끼를 날개 아래 모음같이 내가 너희의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냐 그러나 너희가 원치 아니 하였도다 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잘지는 교회가 성도들을 구원하는 것이 아닙니다.
교회도 가정도 개인도 나라도 예수님이 없는 문화와 삶의 결국은 멸망에 이르고 말 것입니다.
아니 지금 나의 모습은 어떠하십니까? 외형적인 아름다움을 추구하고 돈과 출세만을 위하면서 잘 살고 있다고 여겨지십니까?
그렇다면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 주님이 보실 적에는 거의 죽게 생겼습니다.
어쩌면 사망이라고 진단을 내려도 괜찮을 것입니다.
그런데 본문의 어미는 자녀의 죽음을 애도하는데 저희들은 전혀 슬픔이 없습니다.
십자가를 지고 가시는 에수님을 애처롭게 바라보는 여인들에게 에수님은 나를 위하여 울지 말고 너와 너희 자녀를 위하여 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여기도 죽고 저기도 죽고 경제도 죽고 정치도 죽고 사회도 죽고 도덕도 죽고 양심도 죽고 너도 죽고 나도 죽고 다 죽었습니다.
어디에 소망을 걸만한 것이 있습니까?
마치 본문에 죽은 아들을 그 관에 시신을 담아 이제 끝이다 죽었다 하고 장지로 슬픔의 애곡을 부르면서 가는 장면이 우리 주위 곳곳 곳에서 연출이 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울지를 안아요
여름의 무더운 날씨보다 더 답답해요
열대야 때문에 밤에 잠 한시간도 못 잦다는 사람은 있는데 죽어 가는 우리의 주위를 보며 참으로 답답해하는 사람은 별로 없는 것 같습니다.
이 세상에서 느낄 수 있는 가장 큰 슬픔과 비극이 무엇일까요?
더 이상의 기대와 소망을 가질 수 없는 일들입니다.
기대와 소망이 있다는 것은 살맛이 있다는 것이요 기대 할 수가 없는 일은 죽을 맛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근본적으로 해결해야 할 일은 무엇입니까?
우리의 이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그 은혜에 동의를 하고 동감을 하자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아니 그 사랑과 그 은혜를 알지 못하고 그냥 죽은 자가 가장 불쌍한 것입니다.
그냥 죽도록 버려 두어서는 안되겠다는 것입니다.
청년이라는 나이가 다 되도록 예수님을 만난 적인 없는 과부의 아들이 죽었다는 것은 참으로 불쌍한 일임에는 틀림이 없습니다.
죽음이 불쌍하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님을 모르고 죽었다는데 불쌍한 이유가 그기에 있습니다.
이제 예수님도 이러한 장면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 슬픔을 기쁨으로 바꿀 수 있는 기적 같은 축복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그 조건은 무엇일까요?
지금도 예수님이 우리를 보실 때에 표현하실 수 있는 단어는 그저 불쌍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를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는 데에 우리의 소망이 있는 것입니다.
그 아들을 잃은 과부의 여태까지의 인생의 삶이 불쌍하다의 전제 조건이 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그가 지금까지 이 나이가 되도록 무엇을 하고 살아 왔는가는 전혀 문제가 되지 아니하였습니다.
오직 예수님 당신의 눈에는 우리 인생을 오직 불쌍히 여겨 보이신다는 것입니다.
목자 없는 양같이 유리 하는 인생을 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 여인을 보고하시는 말씀이 울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오늘 주님은 이 자리에 직접 찾아 오셔서 여러분들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시고 그리고 슬픔에 있는 우리들의 모습을 보시고 하시는 말씀이 슬퍼하지 말라고 하시고 계십니다.
우리를 불쌍히 여기심은 우리를 더 이상 목자가 없는 양같이 방황, 유리하는 불쌍한 자가 되지 않게 하시려고 하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므로 대단히 중요한 것은 예수님께서 나를 불쌍히 여기신다는 대해 내 자신이 그 불쌍하심의 대상이 된다는 사실을 인정하느냐? 하지 않는냐?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아들을 잃어버린 이 여인은 자신의 처량한 신세를 한하고 슬퍼서 눈물을 흘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이 자신을 불쌍히 여기시는 데에 크게 기대를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나는 불쌍한 심령이야 나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의 대상이 됨이 당연합니다 주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하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혹시 예수님께 불쌍히 여김을 받을 자가 아니라고 여기시지만 그러나 역시 불쌍한 자 일 수밖에 없는 것이 우리 인생입니다.
부족한 것이 없다는 라오디게아 교회를 향하여 하시는 말씀이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 라고 하였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이런 말이 유행한 적이 있지요 네 주제를 알아라 는 이 말은 일찍이 철학자 소크라테스가 한 말이기도 하지 않습니까?
너 자신을 알라는 말입니다.
그 여인의 형편을 알고서 돕고 있는 모든 인간은 이제 이 아이에게는 더 이상의 생명의 가능성을 찾지 못함을 결론을 내리고는 관 체로 들고 가서 시신을 묻고 썩도록 내 버릴 도리 밖에 없었습니다.
그래서 관을 메고 장지를 향하여 가는 판입니다.
더 이상의 인간의 힘으로는 생명의 기대는 없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더 이상의 생명 적인 일을 할 수 없음을 알고는 예수님의 불쌍히 여김에 기대하였다는 것은 아주 당연하고 잘 한 일입니다. 할렐루야!
그리고 그의 슬픔의 주체인 그 아이의 시신을 예수님의 의지에 두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는 더 이상의 인간적인 의지가 힘을 발휘하지 않았고 아니 할 수도 없고 오직 예수 당신의 의지만이 있을 뿐이었습니다.
예수님의 의지는 오직 이것이었습니다.
불쌍히 여기시고 그 청년을 사망의 자리에서 일어나게 하시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래서 예수님은 그 청년에게 일어나라고 하셨습니다.
전혀 인간의 의지가 아닌 예수님의 전적으로 불쌍히 여기시는 그 의지만이 있을 때에 죽었던 청년이 그 자리에서 일어나 앉아 말도 하였습니다.
오늘 예수님은 나의 처한 모습을 보시고 불쌍히 여기고 계십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의 선하신 의지아래에서 내가 그렇게도 고심하고 고민된 가망이 없는 그 곳에서 일어서게 하실 것입니다. 할렐루야!
저를 불쌍히 여기소서
그리고 일으켜 주옵소서 이렇게 우리 주님을 향하여 나아가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그러면 주님은 여러분을 향하여 다시 일으켜 세워 주시는 축복을 받을 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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