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은 당신이 살아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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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78회 작성일 2011-05-13 1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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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1:22-26 복음은 당신이 살아 있어야 할 분명한 이유입니다.
지방 모 일간지에 북한의 김정일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에 대하여 북한은 희한한 나라이다. 군사적으로는 21세기형이고 정치적·사회적으로는 1000년 전이다. 저렇게 김정일이 시름시름 앓다가 세상을 떠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북한은 잘 알다시피 후계구도가 불분명하다. 과거 김일성은 20년 공들여 김정일을 후계작품으로 만들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나 현재 김정일은 그런 준비를 하지 못하였다.
숨어 우는 바람 소리라는 글에서 김대중 전 대통령이 살아있어야 할 이유 아직도 당신이 이 땅에 기둥처럼 버티고 있어야 할 이유가 너무도 많다 김대중 전 대통령이 위독하다 조국을 위해 한 번 더 벌떡 일어나기를 기도합니다
백만장자 데일 카네기는 경제 불황이 미국을 덮쳤을 때 뉴욕 맨하탄에서 살고 있었다. 그에게도 모든 상황이 나날이 악화되었다. 깊은 절망감에 빠진 데일 카네기는 차라리 이대로 인생을 끝내는 것이 낫다는 판단이 들었다. 더 이상 아무런 희망이 없었다. 어느 날 아침 그는 강물에 몸을 던지려고 집밖으로 나왔다. 강 쪽으로 가기 위해 모퉁이를 돌아섰을 때 한 남자가 그를 소리쳐 불렀다. 뒤돌아보니 두 다리를 잃은 사람이 바퀴 달린 판자 위에 앉아 미소를 짓고 있었다. 선생님, 연필 몇 자루만 사 주시겠습니까? 카네기는 1달러 한 장을 꺼내 주고는 돌아서서 강을 향해 걸어갔다. 남자가 카네기에게로 굴러오면서 소리쳤다. 선생님, 연필을 가져 가셔야죠. 카네기는 난 이제 연필이 필요 없는 사람이요. 하지만 그 남자는 포기하지 않고 두 블록이나 따라오면서 카네기에게 연필을 가져가든지 아니면 돈을 도로 가져가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마침내 연필 몇 자루를 받아든 카네기는 자신이 더 이상 자살을 원치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훗날 카네기는 난 내가 살아있어야 할 아무런 이유를 발견할 수 없다고 생각했었는데 두 다리가 없으면서도 미소 지을 힘을 갖고 있는 그 남자를 보는 순간 생각이 달라졌다.
내가 살아 있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람이 있습니다. 먹고 살기 위해 사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사람은 항상 불쌍한 사람입니다
일도 공부도 먹고 살기 위해서 합니다. 여기에서 삶의 의미를 얻는 사람입니다.
육체의 욕구를 따라 살아갑니다. 인간의 욕망이라고 하는 것은 끝이 없습니다.
그리고 이 욕망은 자칫하면 사람들을 멸망의 자리로 내몰게 되는 것입니다. 삶 자체가 짐이 될 수도 있습니다.
무엇이든지 최고가 되어야 한다는 야망을 가지고 성공이 무엇인지 모르지만 성공하기 위해 사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은 사업도, 공부도, 심지어는 목회도 성공하기 위해서 합니다.
저는 먹고 살기 위해 목회를 하는 것 같지는 않는데 성공하기 위한 목회를 하였으니 성공에 굉장히 스트레스를 받게 되는 것입니다.
성공에는 언제나 남을 이겨야 하는 경쟁심이 있습니다. 욕만이 얻어먹습니다.
남을 사랑과 신뢰로 만나지 않고 경쟁과 의심으로 만납니다. 언제나 긴장과 스트레스가 있습니다.
하나님의 목적과 계획에서 나의 인생의 보람과 의미를 찾는 삶을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사업도 공부도 정치도 하나님을 드러내는 복음적으로 한다는 것입니다.
목적과 꿈이 나에게가 아니라 하나님께 있기 때문입니다.
어려움이 있어도 좌절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열정을 품고 살아갑니다
본문에 그런 인물이 있습니다.
20절 나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아무 일에든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고 지금도 전과 같이 온전히 담대하여 살든지 죽든지 내 몸에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게 하려 하나니
인생은 사명에 죽고 살고 합니다. 사명이 없으면 죽어도 그만이요 살아 있음에도 의미가 없습니다
죽어도 의미가 없는 자들이 있습니다. 살아 있지만 그 역시 의미가 없어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문제는 바로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문제입니다.
삶과 죽음은 서로 나누어져 있는 것 같고 둘인 것 같아도 그것은 하나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하나님 앞에, 복음 앞에는 사명 앞에는 하나입니다.
롬14:8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삶과 죽음은 둘이 아니라 하나입니다.
그럼으로 사느냐 죽느냐가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내가 살아야 하느냐 죽어야 하느냐입니다. 사도 바울도 고민을 하고 있습니다.
복음을 위하여 죽어도 좋고 복음을 위하여 살아도 좋고 그러나 복음을 위해서는 그 어느 것이 더 좋으냐는 것입니다.
21절에는 죽느냐? 이는 내게 사는 것이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
22절에는 사느냐? 그러나 만일 육신으로 사는 이것이 내 일의 열매일진대 무엇을 택해야 할는지 나는 알지 못하노라
죽느냐 사느냐 이것이 문제로다
이 둘 사이에 끼여서 있는데 차라리 죽어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23절 내가 그 둘 사이에 끼었으니 차라리 세상을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는 것이 훨씬 더 좋은 일이라 그렇게 하고 싶으나
사도 바울은 육신으로 사는 열매로 빌립보 성도들의 영혼을 얻었다고 했습니다.
다시 말해서 빌립보 교인들을 전도하여 가르치고, 돌보고 하는 것이 내 육신의 일의 열매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천국에 가고 싶은 마음, 천국에 가서 주님과 함께 거하고 싶은 마음이 더 많아서 무엇을 선택해야 될는지 알지 못하겠다는 말씀입니다.
지금 바울이 이러한 편지를 썼을 때에는 감옥에 갇힌 죄수의 몸이었다는 것입니다.
바울의 몸은 비록 감옥 속에 갇혀 있으나 이제 석방이 되어 자유의 몸이 되면 빌립보 교인들을 위하여 봉사할 수 있다는 것을 확신했다는 것입니다.
내가 두 사이에 끼었다고 그랬습니다. 여기 두 사이에 끼었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사도바울의 마음속에는 천국에 가서 아버지의 품에서 주님과 더불어 사는 것입니다.
그러나 빌립보 교인들을 볼 때 사도바울이 꼭 필요하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그 둘 사이에 끼어서 고민이라는 것입니다
여기서 세상을 떠난다는 것은 무슨 뜻입니까? 이 떠난다는 것은 몇 가지 뜻이 있습니다.
첫째, 야영지에서 텐트를 거두어 집으로 돌아간다는 의미입니다.
잠시 집을 떠나 여행하던 야영지의 말뚝을 빼고 로프를 풀고 천막을 걷어서 집으로 돌아가는 것을 말합니다.
여행 해본 자들은 알 것입니다. 집의 안식과 평안함 내 본향 아버지 집으로 가고 싶은 것은 당연한 것 아닙니까?
둘째, 배가 잠시 항구에 정박했다가 본향을 향해 출발한다는 의미입니다.
배가 원래의 항구로 가기 위해서 잠시 항구에 정박해서 거기서 주유를 하고 만반의 준비를 갖추고 자기의 본 항구로 떠나는 것을 의미합니다.
이 세상의 삶이란 것은 영원한 본향으로 가기 위해서 잠시 머물면서 준비하는 곳이지 영원히 머무는 곳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삶이 힘들지만 훈련을 받고 연단 받아 믿음이 점점 더 성장해서 그리스도인의 합당한 생활을 하고 준비를 잘 했다가 주님이 부르시는 그 날에 영원한 본향에 가는 것이 바로 떠난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바로 죽음이라는 것입니다.
셋째, 문제를 해결했다는 것입니다.
이 세상을 살 때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일들이 너무나 많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그렇게 하나님을 잘 믿는데도 아직 젊은 내 아내가 혹은 내 남편이, 자녀들이 먼저 이 세상을 떠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렇게 잘 믿는데 왜 어려움을 당하는 가 이해할 수가 없습니다. 왜 이런 일들이 일어납니까?
이 세상에서는 가난하고 병들고 때로는 고통을 당하고 많은 환난과 시련 때문에 고생하지만, 천국에 가보면 다 그 이유들을 알게 됩니다. 천국에 가면 모든 문제가 다 해결이 되는 것입니다.
잠시 잠간 후에 우리 다 천국에 갈 사람들입니다.
이산가족 30년 40년 50년 만에 만나는 자들을 보는데 먼저 천국간 사람들을 이들보다 빠른 시간에 만납니다.
이 땅에서 만나려고 하지 말고 천국에서 만나면 더 확실합니다
무디는 임종할 때에 이런 고백을 했습니다. 땅이 사라지고 지금 하늘이 열리는구나. 이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이 이렇게 아름다운 것인 줄 몰랐구나. 주님께서 나를 부르고 계신다. 나는 주님께 가야 한다. 오늘은 나의 대관식 날이다.
사실 여러분은 몰라서 그렇지 이 세상의 삶은 참으로 수고와 고생 그리고 슬픔이 많습니다.
그러나 아버지의 집은 너무 너무 좋은 곳이에요
계21:4 모든 눈물을 그 눈에서 닦아 주시니 다시는 사망이 없고 애통하는 것이나 곡하는 것이나 아픈 것이 다시 있지 아니하리니
그렇기에 바울 같은 이도 갈등이 생겼지요
그럼에도 이 땅의 삶을 살아야 하는 이유 나를 통하여 구원 받을 영혼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그러니 저도 힘들 때는 그냥 천국행 KTX를 타고 싶은데 하나님이 안 부르시고 계시는 것을 보면 할 일이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 땅에서 자기만족을 위하여 산다는 착각을 버리시기 바랍니다.
24-25절 내가 육신으로 있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내가 살 것과 너희 믿음의 진보와 기쁨을 위하여 너희 무리와 함께 거할 이것을 확실히 아노니
행19:21 거기에 갔다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는 말속에 어떤 의미가 들어 있나?
로마는 로마제국의 수도였으며 당시 세계의 중심지이니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그곳에 세상에 도취되어 죽어가는 자들에게 전하고 싶어서였을 뿐입니다.
많은 영혼이 나를 통하여 복음의 소식을 듣기를 원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가끔 이런 꿈을 꾸기도 했습니다.
행16:9-10 밤에 환상이 바울에게 보이니 마게도냐 사람 하나가 서서 그에게 청하여 이르되 마게도냐로 건너와서 우리를 도우라 하거늘 바울이 그 환상을 보았을 때 우리가 곧 마게도냐로 떠나기를 힘쓰니 이는 하나님이 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라고 우리를 부르신 줄로 인정함이러라
개꿈만 꾸지 마시고 영혼이 애타게 나를 기다리는 비젼이 있으시기를 축원합니다.
자신의 삶이 복음이라고 하니 어디에다가 올인을 해야 하느냐 입니다.
복음을 위하여 죽어야 합니다. 죽도록 충성하는 것입니다.
행20:23 환난이 기다린다 하시나 사도 바울은 제3차 전도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으로 올라가는 길에, 밀레도 섬에서 에베소 교회 장로들과 송별예배를 드립니다.
그는 송별예배를 드리면서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복음을 전하겠다고 뜻을 밝힙니다.
그런데 성도들은 바울에게 그러한 계획을 바꾸어 달라고 간절히 요청합니다.
만일 바울이 예루살렘에 올라간다면 신변의 위협을 면치 못할 것이라는, 사방에서 전해오는 소식 때문입니다. 그래도 사도 바울은 자신의 의지를 꺾지 않고 예루살렘 행을 강행합니다.
신변의 안전을 생각한다면 바울은 예루살렘 행을 단념해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사람들은 자기중심적으로 생각해서 성령이 핍박이 있음을 알려주는 것은 올라가지 말라고 내게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렇게 받아들이고 예루살렘 행을 포기합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하나님이 성령을 통하여 예루살렘에 올라가지 말라는 뜻이 아니라 핍박이 있고 생명에 위험이 있으니 믿음으로 무장하고 죽음을 각오하고 예루살렘에 올라가라는 뜻이라고 받아들였던 것입니다.
사람들은 앞날을 미리 앎을 통해 자신의 이득을 얻으려고 합니다.
어떤 이들은 재수 없을까봐 하지 않는 일도 많습니다. 동쪽을 조심하라면 동쪽 이름만 들어가도 안합니다. 물을 조심하라면 마시는 물 한 컵도 삼갑니다.
무엇이 미신입니까? 단지 눈에 보이지 않는 것을 믿고 점쟁이의 말을 들어서 미신입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자신의 유익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성공을 위해서라면 동쪽도 조심하고 물도 조심하고 서쪽에서 오는 귀인을 기다리는 것이야말로 미신입니다.
앞날에 관한 모든 일들이 자신의 유익과 안전을 위해서만 쓰이게 될 때, 그것은 무엇을 의지하든 미신일 뿐입니다.
하나님께 복채내는 것이 아니고 은혜에 감사하고 선교를 위해 교회 운영을 위해 기쁨으로 헌금하시되, 하나님이 주실 복을 바라고 헌금하지 마십시요.
몇 년 전에 사도 바울의 전도 여정을 따라 터어키 그리스를 거쳐 이태리 로마까지 다녀왔습니다. 터어키의 수도 이스탐풀에 보스포러스해협에서 예배가 있었습니다. 마침 제가 설교를 하게 되었는데 묵상하는 가운데 내가 후에 로마도 보아야 하리라 바울의 선교의지를 말씀했습니다.
사실 저희들의 여행도 사도 바울의 선교 여정을 따라 로마까지입니다.
여기에서 예배를 드리는데 참으로 은혜가 되지 않을 수가 없었고 과연 사도 바울이 어떤 심정을 가지고 로마로 가게 되었는가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저희들은 비행기를 타고 훼리선을 타고 버스를 타고 로마로 가지만 바울은 그렇지 못하였습니다.
걸어서 그리고 불편한 교통수단을 이용하여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아주 안전하게 보험도 들어가면서 갔지만 바울은 생명의 위협을 느끼며 갔을 것입니다.
우리는 때를 따라서 주는 일용한 양식을 먹고 공급되는 물을 마시며 갔지만 바울은 굶주려 가면서 목말라 하면서 갔습니다.
그렇게 위협하고 힘든 여정의 길을 왜? 바울이 로마로 가야만 한다고 하였을까요?
저희들도 최대한 편리하게 며칠 만에 다녀왔지만 죽을 고생을 하고 왔는데 바울은 그렇게 힘든 여정을 왜 가려고 하였을 까요?
고후11:23-28 내가 수고를 넘치도록 하고 옥에 갇히기도 더 많이 하고 매도 수없이 맞고 여러 번 죽을 뻔 하였으니 유대인들에게 사십에서 하나 감한 매를 다섯 번 맞았으며 세 번 태장으로 맞고 한 번 돌로 맞고 세 번 파선하고 일주야를 깊은 바다에서 지냈으며 여러 번 여행하면서 강의 위험과 강도의 위험과 동족의 위험과 이방인의 위험과 시내의 위험과 광야의 위험과 바다의 위험과 거짓 형제 중의 위험을 당하고 또 수고하며 애쓰고 여러 번 자지 못하고 주리며 목마르고 여러 번 굶고 춥고 헐벗었노라 이 외의 일은 고사하고 아직도 날마다 내 속에 눌리는 일이 있으니 곧 모든 교회를 위하여 염려하는 것이라
분명한 목적이 그에게 있었기 때문입니다.
복음이 삶의 이유요 삶은 복음을 위하여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바울이 로마를 향하여 간 것은 세상의 최고를 누리기 위함이 아니라 그들에게 진정한 생명을 전하고 구원을 전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러므로 로마는 나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아야 하는 세상입니다.
바울이 이 로마를 향하여 나아갔듯이 내가 향하여 나아 갈 로마를 한번 생각해 보시기 바랍니다.
이 로마는 내 가족이요 내 가정이요 내 친족이요 그리고 내가 속한 삶의 현장이 되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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