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전파가 당신의 생명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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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15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요 나 1:1-3 복음전파가 당신의 생명입니다
제 마음에 늘 갈등으로 남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떡하면은 이 교회를 통하여 영혼을 구원 할 수 있을까? 입니다.
누구든지 우리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를 하면 제 마음이 우울해지며 또한 눈에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을 억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해야 할 일은 많은 영혼들을 복음을 통하여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져 있는 의미를 찾는 다면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인 저로서는 상당한 근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고 또한 어떻게 하여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가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우리 집사람하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적으로 먹고사는 일이 라면은 이렇게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영혼의 구원을 위한 염원이 여기 담임 목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성도들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생명의 의미가 있고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전도자 사도 바울에게도 늘 고민하며 침통해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역시 복음의 문제 이었습니다.
어떡하면 내 친척 내 골육이 구원함을 받느다면은 내가 무슨 어려움을 받아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의 일상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주로 무엇입니까?
아마도 복음적이기 보다는 세상적인 것이 더 많을 줄로 여겨집니다.
어떻게 하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등등의 생각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얼굴에 그렇게 써있습니다.
물론 일용할 생활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걱정 안 하실 여러분들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많은 걱정 중에서 먼저 걱정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이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잘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하면 그 걱정하는 데로 그렇게 될 확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필요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답답함도, 내 마음의 소원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도 주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당 할 위험한 일도 면케 해 주실 수도 있고 형통하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한 집사님을 위하여 제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주관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삶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때에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붙잡은 축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주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자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 어떤 사람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도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복음을 위하여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할렐루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나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나의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삶의 자세를 새롭게 설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인간의 형편이 조금도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생리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화장실 가고 싶다고 가고 가기 싫다고 안가고 합니까?
밥을 먹고 싶다고 먹고 먹기 싫다고 해서 안 먹어도 됩니까?
숨을 쉬고 싶어서 쉬고 쉬기 싫어서 안 쉴 수 있습니까?
복음 역시 전하고 싶다고 전하고 전하기 싫다고 해서 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찰스 알렌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교인들 중의 대부분이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않으면서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것과 그 교인들이 천당을 믿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고 더욱이 천당 가기를 원하는 것도 더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자기 혼자만 믿고 있다면 가장 교만하고 악한 자라 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동감이 가는 말입니다.
누가 교회 부흥이 안 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전도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게 좋은 천국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면은 어찌 소개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가실 때 맡기신 것을 다시 오실 때 정산 회계하는 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면서 맡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맡기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주님 앞에서 전도에 대한 것을 계산 할 날이 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전도로서 자신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1달란트 받은 자가 1달란트 그대로 내는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달란트, 5달란트 받은 자가 배를 남긴 것같이 남기는 자를 주님은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바로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요 전도하지 않는 삶이란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 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전도의 삶입니다.
복음 전파는 남을 살리는 일이요 또한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일을 피하는 것은 곧 자신을 망하게 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요나의 전도로 10만을 헤아리는 멸망당할 니느웨 사람이 멸망을 당치아니하고 그 가운데 구원함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나 자신도 복음이라는 사명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서 그 또한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를 상당히 주저하고 꺼리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가 되지만 선을 행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핑계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죄가 됨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동원하시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만드시고 말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본인이 살고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라는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복음이 요구되는 그 자리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자기 마음대로 가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니느웨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그 입을 열어 전도자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4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라고 하였습니다.
배가 소용돌이를 치고 사람들은 거의 죽게 생겼습니다.
배를 타본 경험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의 배가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사이 큰배도 꼼짝하지를 못하는데 말입니다.
말 그대로 배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나 때문입니까?
요나가 무슨 잘 못이 있기 때문입니까?
니느웨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요나 때문에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풍랑으로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스리고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항상 복음을 거스리는 죄악 속에 빠진 문화를 차단시키셨습니다.
죄악된 인간의 문화가 계속 발전하는 일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가정, 죄를 지은 사업, 죄를 지은 권력, 죄를 지은 국가는 하나님께서 차단하십니다. 계속 진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의 짐을 벗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위하여 살겠다는 고백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회개합니다. 풍랑이 심한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고백할 때에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자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더 이상 요나는 자신의 의지로 다시스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한 큰 고기 배속에서 보호를 받고 회개하고 또 다시 제 사명을 알고 그 고기 배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명의 바른 길에는 언제든지 구원의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나아가는 길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조나의 피닉스에 살고 있던 사람이 자기를 형무소에 보낸 사람을 쏘아 죽이기로 작정하고, 하루하루 출감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으로 풀려 나오는 날 집에 가보니 어린 아들 둘만이 있었는데 두 아들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이제 자기가 사람을 쏘아 죽이면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는 불행한 운명으로 이러한 길을 가지만 자식들만은 잘 되기를 원해서 그날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톰프손 이라는 목사가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생명의 말씀은 이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 때에 말씀을 끝낸 목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새로운 인생으로 살 사람은 앞으로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아들의 손목을 양편에 잡은 채로 중앙 통로를 걸어서 강단 앞으로 나아갔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 사람은 품에 품고 온 권총을 꺼내서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밤에 한 사람을 쏘아 죽이려고 총을 품에 품고 나온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은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롭게 살렵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권총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고 나를 감옥에 보냈던 사람을 계속 찾아다니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복음이 남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고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심은 복음의 전도자로 부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당신도 살고 나도 사는 구원의 축복이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절대로 가로막히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삶에 무엇인가가 장애로 가로막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이제는 복음을 위한 삶으로 바꿔 보십시오
돈만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하니 돈이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장사를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그러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체제로 내 삶을 다 바꿔버리십시오
그 문제는 더 이상 장애거리와 문제 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과 우리 교회에 임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제 마음에 늘 갈등으로 남는 것이 하나가 있습니다.
어떡하면은 이 교회를 통하여 영혼을 구원 할 수 있을까? 입니다.
누구든지 우리 교회의 성장을 위하여 기도를 하면 제 마음이 우울해지며 또한 눈에서는 눈물이 날 것만 같은 그런 감정을 억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제가해야 할 일은 많은 영혼들을 복음을 통하여 구원해야 하는 사명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우리 교회가 이곳에 세워져 있는 의미를 찾는 다면은 세상에서 방황하는 영혼들을 구원하기 위함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담임 목사인 저로서는 상당한 근심거리가 아닐 수가 없고 또한 어떻게 하여야 영혼을 구원할 수 있을까? 가 최대의 관심사가 될 수밖에 없습니다.
가끔 우리 집사람하고 이런 이야기를 합니다.
세상적으로 먹고사는 일이 라면은 이렇게까지는 걱정하지 않을 것이라고 말입니다.
우리 예수님은 분명히 이 시간에도 저와 여러분을 향하여 말씀하시고 계십니다.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를 염려하지 말고 그 나라와 그 의를 위하여 염려하라고 하셨습니다.
이 영혼의 구원을 위한 염원이 여기 담임 목사만의 것이 아니라 오늘 이 자리에 함께한 우리 성도들이 함께 고민하고 생각해야할 문제이기도 합니다.
여기에 여러분의 생명의 의미가 있고 축복이 있기 때문입니다.
복음의 전도자 사도 바울에게도 늘 고민하며 침통해 하고 있는 것이 있는데 역시 복음의 문제 이었습니다.
어떡하면 내 친척 내 골육이 구원함을 받느다면은 내가 무슨 어려움을 받아도 좋다는 말을 하지 않았습니까? 과연 여러분들의 일상의 생활을 지배하고 있는 생각은 주로 무엇입니까?
아마도 복음적이기 보다는 세상적인 것이 더 많을 줄로 여겨집니다.
어떻게 하여 많은 돈을 벌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출세를 할 수 있을까?
이런 등등의 생각이 여러분을 괴롭히고 밤잠을 제대로 이룰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지금 여러분의 얼굴에 그렇게 써있습니다.
물론 일용할 생활을 걱정하지 말라는 말이 아닙니다.
제가 걱정하지 말라고 해서 걱정 안 하실 여러분들도 아닙니다.
다만 우리가 많은 걱정 중에서 먼저 걱정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들이 내가 걱정한다고 해서 잘 되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걱정하면 그 걱정하는 데로 그렇게 될 확률이 훨씬 더 많습니다.
심리적으로 그렇게 되어 질 수가 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여러분의 필요를 더 잘 아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내 마음의 답답함도, 내 마음의 소원도, 그리고 앞으로 내가 나아가야 할 길도 주님은 아시고 계십니다.
그 뿐만 아니라 내가 당 할 위험한 일도 면케 해 주실 수도 있고 형통하게 해 주실 수도 있습니다.
지난 철야 기도 시간에 한 집사님을 위하여 제가 기도 할 때에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주관하는 삶이 아니라 오히려 나는 죽고 그리스도가 주관하는 삶이 되기를 원했습니다. 할렐루야!
그 때에 하나님을 위한 삶이 될 것이요 하나님이 크게 사용하실 것입니다.
그러므로 오늘 우리 성도들은 내가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할 것인가를 분명히 붙잡은 축복된 시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예 바로 이것입니다.
누가 무슨 소리를 하든지 주의 복음 사업을 위하여 살아가야 할 자입니다.
이 자리에는 그 어떤 사람도 여기에 해당되지 않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습니다.
한번 따라합시다.
나도 복음을 위하여 부름을 받은 사람이다.
복음을 위하여 내가 죽지 않고 살아 있구나! 할렐루야!
이러한 이유 때문에 살아 있습니다.
나의 존재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아는 것은 나의 삶의 방향을 바로 잡아 주기도 합니다.
그 뿐만 아니라 삶의 자세를 새롭게 설정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 성도들에게 삶의 방향이 무엇인가를 본문을 통하여 일러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닌 가서 복음을 전하라는 말씀입니다.
여호와의 말씀이 아밋대의 아들 요나에게 임하니라 이르시되 너는 일어나 저 큰 성읍 니느웨로 가서 그것을 쳐서 외치라
너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복음을 전하라
복음을 전하는데 있어서는 우리 인간의 형편이 조금도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주의 뜻을 이루는데 있어서는 장애가 될 수 없습니다.
복음은 생리적인 현상과 같은 것이라 하겠습니다.
화장실 가고 싶다고 가고 가기 싫다고 안가고 합니까?
밥을 먹고 싶다고 먹고 먹기 싫다고 해서 안 먹어도 됩니까?
숨을 쉬고 싶어서 쉬고 쉬기 싫어서 안 쉴 수 있습니까?
복음 역시 전하고 싶다고 전하고 전하기 싫다고 해서 안 전하는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가 없는 것입니다.
찰스 알렌이라는 사람은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교인들 중의 대부분이 단 한 사람도 전도하지 않으면서도 교회가 부흥되지 않는다고 말을 하는 것과 그 교인들이 천당을 믿고 있다는 것이 이상하고 더욱이 천당 가기를 원하는 것도 더 이상하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사실을 알고도 자기 혼자만 믿고 있다면 가장 교만하고 악한 자라 할 수 있다. 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동감이 가는 말입니다.
누가 교회 부흥이 안 된다는 말을 가장 많이 합니까?
전도하지 않는 자입니다.
그렇게 좋은 천국이라는 사실을 믿는다 면은 어찌 소개를 하지 않겠습니까?
주님은 가실 때 맡기신 것을 다시 오실 때 정산 회계하는 주인과 같다고 하셨습니다.
주님이 가시면서 맡기신 것이 무엇입니까?
주님이 맡기신 것은 복음을 전하라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인생은 주님 앞에서 전도에 대한 것을 계산 할 날이 올 것을 알아야 합니다.
모든 성도는 전도로서 자신의 삶을 주님 앞에 내어놓아야 할 것입니다.
1달란트 받은 자가 1달란트 그대로 내는 악한 자가 되어서는 안 될 것입니다.
2달란트, 5달란트 받은 자가 배를 남긴 것같이 남기는 자를 주님은 잘했다고 칭찬하시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땅에서 주님을 시인하는 것은 바로 전도를 의미하는 것이요 전도하지 않는 삶이란 실제적으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성도가 가장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사역에 동참 할 수 있는 것도 역시 전도의 삶입니다.
복음 전파는 남을 살리는 일이요 또한 자신을 살리는 일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전도의 일을 피하는 것은 곧 자신을 망하게 하고 남도 망하게 하는 일입니다.
요나의 전도로 10만을 헤아리는 멸망당할 니느웨 사람이 멸망을 당치아니하고 그 가운데 구원함을 받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한 요나 자신도 복음이라는 사명 때문에 죽음의 자리에서 그 또한 구원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놀라운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복음을 전하기를 상당히 주저하고 꺼리고 있다는 사실은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선을 알고도 행치 않는 것도 죄가 되지만 선을 행하기를 차일피일 미루거나 핑계하는 것도 하나님에게는 죄가 됨을 아셔야 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성도들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무슨 일을 동원하시더라도 복음을 전하는 자로 만드시고 말 것입니다.
그래야만 그 본인이 살고 축복을 받기 때문입니다.
요나는 니느웨라는 성에 가서 복음을 전하기를 싫어하고 자신이 원하는 대로 다시스로 가는 배를 타고 복음이 요구되는 그 자리를 모면하였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요나를 자기 마음대로 가도록 두지 않았습니다.
기필코 니느웨성으로 다시 돌아오게 하여 그 입을 열어 전도자의 일을 하게 하였습니다.
4절의 말씀에 보면 하나님이 대풍을 바다 위에 내리시매 라고 하였습니다.
배가 소용돌이를 치고 사람들은 거의 죽게 생겼습니다.
배를 타본 경험들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만 은 지금으로부터 3000여년 전의 배가 풍랑을 만났다고 한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요사이 큰배도 꼼짝하지를 못하는데 말입니다.
말 그대로 배가 깨어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의 생사의 갈림길에 서게 되었습니다.
누구 때문에 이 일이 일어났습니까?
요나 때문입니까?
요나가 무슨 잘 못이 있기 때문입니까?
니느웨에서 복음 전하는 일을 피하였기 때문입니다.
순전히 요나 때문에 모두가 죽게 생겼습니다.
오늘 본문에 나오는 요나는 하나님의 말씀에 불순종하여 하나님께서 가라고 하시는 곳, 니느웨 성으로 가지 않고 다시스로 가려고 했지만 하나님께서 그 길을 풍랑으로 가로막으셨습니다.
그렇습니다. 우리 인간은 하나님의 선한 뜻을 거스리고는 성공할 수가 없습니다.
역사를 통해 볼 때 하나님은 항상 복음을 거스리는 죄악 속에 빠진 문화를 차단시키셨습니다.
죄악된 인간의 문화가 계속 발전하는 일이 없습니다.
죄를 지은 가정, 죄를 지은 사업, 죄를 지은 권력, 죄를 지은 국가는 하나님께서 차단하십니다. 계속 진행할 수 없습니다. 아무리 힘쓰고 애써도 되지 않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여호와는 공의로우시기 때문에, 죄의 용서함을 받고 죄의 짐을 벗는 길은 하나님 앞에서 복음을 위하여 살겠다는 고백하는 길밖에 없습니다.
요나는 나의 연고인 줄을 내가 아노라고 회개합니다. 풍랑이 심한 것은 자신의 잘못 때문이라고 고백할 때에 사람들이 요나를 바다에 던져 버립니다. 그러자 풍랑이 잔잔해졌습니다.
더 이상 요나는 자신의 의지로 다시스로 갈 수가 없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준비한 큰 고기 배속에서 보호를 받고 회개하고 또 다시 제 사명을 알고 그 고기 배속에서 구원을 받게 되었습니다.
사명의 바른 길에는 언제든지 구원의 길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그 나아가는 길이 형통하게 될 것입니다.
아리조나의 피닉스에 살고 있던 사람이 자기를 형무소에 보낸 사람을 쏘아 죽이기로 작정하고, 하루하루 출감되는 날만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드디어 자유의 몸으로 풀려 나오는 날 집에 가보니 어린 아들 둘만이 있었는데 두 아들을 바라보는 이 사람의 마음에는 이제 자기가 사람을 쏘아 죽이면 아이들을 다시는 볼 수 없게 된다는 사실을 알고 자기는 불행한 운명으로 이러한 길을 가지만 자식들만은 잘 되기를 원해서 그날 저녁에 아이들과 함께 교회를 찾아갔습니다. 마침 톰프손 이라는 목사가 부흥집회를 인도하고 있는데 하나님의 말씀이 선포될 때에 생명의 말씀은 이 사람의 가슴을 파고들었고, 그 때에 말씀을 끝낸 목사는 그리스도를 모시고 새로운 인생으로 살 사람은 앞으로 나와서 주님을 영접하라고 했습니다. 성령의 감동을 받은 이 사람은 복음의 말씀에 순종하여 두 아들의 손목을 양편에 잡은 채로 중앙 통로를 걸어서 강단 앞으로 나아갔고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을 줄줄 흘리며 이 사람은 품에 품고 온 권총을 꺼내서 목사에게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다음과 같이 말을 했습니다. 여러분, 나는 오늘밤에 한 사람을 쏘아 죽이려고 총을 품에 품고 나온 악한 사람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사랑의 복음은 나를 새 사람으로 만들어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나는 이제부터 새롭게 살렵니다. 오늘 이후로 나는 권총을 들고 가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을 들고 나를 감옥에 보냈던 사람을 계속 찾아다니겠습니다. 라고 하였습니다.
참으로 이 복음이 남을 살리고 자신을 살리고 자녀들을 행복하게 만들었습니다.
하나님은 저와 여러분을 부르심은 복음의 전도자로 부르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이 복음이 전해지는 곳마다 당신도 살고 나도 사는 구원의 축복이 일어 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복음은 절대로 가로막히는 법이 없습니다.
만약에 여러분들의 삶에 무엇인가가 장애로 가로막히는 것이 있습니까?
그것을 이제는 복음을 위한 삶으로 바꿔 보십시오
돈만을 벌기 위하여 장사를 하니 돈이 벌리지 않습니다.
복음을 위해 장사를 하십시오
모든 것이 다 그러해야 합니다.
복음을 위한 체제로 내 삶을 다 바꿔버리십시오
그 문제는 더 이상 장애거리와 문제 거리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크신 축복으로 여러분의 가정과 생업과 우리 교회에 임할 것입니다.
이런 놀라운 축복을 받는 성도들이 다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