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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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03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창세기 49:22-26 나의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하자
내일이면 우리 나라의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절기입니다.
수천 수백만 명이 이동하여 그 동안 헤어져 있었던 부모와 형제를 만나서 인간의 정을 나누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더욱이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계절이라 먹을 것 또한 풍성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벌써 우리 교회 성도들도 지방에 계신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즐거운 때에 우리 민족은 부모와 형제를 잊지 않고 수 천리 길을 찾아 나서며 안부를 묻고 그리고 감사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좋은 명절을 당하여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시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하나님도 형제가 함께 화목하고 화합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리고 축복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산에서 8가지의 축복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 중에 화평케 하는 자의 축복을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목하게 하는 것이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까지 얻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사는 비결은 나 자신이 분열과 다툼의 중앙에서는 자가 아니라 화목케 하는 일에 힘을 쓴다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인생은 축복된 삶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명절을 맞이하여 참으로 형제간에 화목케 하는 일에 여러분들이 앞장을 서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욕입니다.
멍텅구리, 바보 등등......
그러니 어쩌면은 우리의 삶이 축복이 되지 않음은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 바로 행치 못함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축복을 가져 올 수 있을까? 입니다.
피차 화목과 화평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제의 형제는 6남매입니다.
아들이 5형제요 그 위로 누이가 한 명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시고 또한 서로가 형제로 같이 희로애락을 같이 하였다는 정으로 인하여 남이 보기에도 부러운 형제들이다 이렇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모님도 돌아 가신지가 오래고 또 제 각각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다보니 같이 자랐다는 그러한 인정은 차츰 사라지고 각자 자신들의 가정을 돌보고 식구들을 돌보는 현실을 바라다보게 되니 본의 아니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 드릴 수 있기보다는 제 부터가 그러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그런 섭섭한 생각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이해와 용납은 고사하고 오해와 미움이 싹이 터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형제간에 불화와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건 참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겉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번에도 명절을 당하기는 하였지만은 별로 기분이 좋은 명절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형제간이 많은 것 같지 만은 결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한 명은 먼저 하나님께로 가버렸지요
참으로 형제간에 화목을 하고 화평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이제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게 지나는 자를 참으로 귀하게 보시고 축복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분리, 이간, 다툼등 이런 것은 일어나기 참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는 제 각기 하나님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고 있으니 하나님도 상당히 고민이 되실 거에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도 이런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 집안 이야기를 해서 안되었지만 제 집안 일이 여러분들의 집안 일이 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형제들이 불화 하는 다른 4촌들이나 집안의 어른들이 화목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고서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했는데 지금 우리 형제들이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사람은 아무도 큰 소리 칠 자가 없고 또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기도합니다.
제가 우리 부모님 대에도 생각해보니 아버지 형제간에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더라고요 특히 여자 동서들 간에 그래요 우리 어머니와 우리 큰어머니가 별로 사이가 안 좋아요
또 어머니 형제들은 어떠하고요 좋을 때에 좋은 것 같지만은요 이권 등이 개입되니 원수가 달리 없더라고요
어머니와 외삼촌이 그렇게 좋은 사이 였서요
우리 어릴 적에는 방학만 되면 시골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두 분의 사이가 어떻게 안 좋은지 시누이와 올게 사이는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예 상종조차 안 합니다.
또 두 큰집의 4촌들도 보니 형제간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고요 외가 쪽의 이종 사촌들도 보니까요 형제간에 화목하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원수가 내 집안 식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가운데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간에 화목의 정신을 잊지 말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형제라 함은 육신의 형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이웃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요셉이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배다른 형제들 12명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동생을 그 형제들이 얼마나 시기하고 질투를 하는지 동생하나 이해를 하고 용납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그 미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왔던지 죽이기까지 모함하고 결국은 남의 나라로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이제 그 형들은 동생과 형이라는 형제간의 혈육의 정도 그리고 형제지간의 우애도 모두 다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오와 질투와 단절가운데 요셉은 오히려 화목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형제들에 관한 글을 찾아 볼 때에 요셉은 한번도 그 형제들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로 인하여 남의 나라에서 종으로의 살이, 옥중에서의 고통을 당하면 서는 물론 이거니와 그리고 형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서까지 그는 오직 한마디로 그의 형제 화목의 표현을 할 수 있는 단어는 형님들은 죄가 없으십니다.
나 일로 상념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는 말이 내가 형들과 형들의 식구들을 돌보겠습니다.
이 말이 요셉이가 그를 악하게 대한 형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소이 괜찮다는 것입니다. No Problem
그리고는 하는 말이 지금까지의 모든 일과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요셉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혈육을 가진 인간 요셉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인간의 조상에게서 받은 혈육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무슨 생산적이고 건설적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 있습니까?
결코 이렇게 요셉이는 혈육으로 대하는 형들에게 인간의 혈과 육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23절에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혈육을 혈육으로 대항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서 은혜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시 그의 글 갈라디아서에서 요셉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갈5:22-25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이 요셉이로 하여금 복된 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대단한 어려움에 쳐해 있습니다.
지난 9월 11일 테러 사건입니다, 건국 이래로 남북 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재난이라고 일컫어지는 이 사건을 두고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가 테러를 당한 이상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교회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4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국가 기도의 날로 정해 온 국민이 기도 하기를 촉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의 분위기는 하나님이 계셨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는가?
하며 혼란과 불안과 증오와 보복의 감정을 억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교회들은 인간적인 감정을 잠재우면서 점차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뉴욕세인트 폴 교회 찰스 쿨만 목사는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테러리스트일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것이라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타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함께 있을 수 없다 고 설교를 하며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번 일을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몬타나 교회의 폴 브록 목사도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 앞에 화내고 분노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밖에 없으며 전쟁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뿐이라며 하나님은 테러를 계획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그 자리에 계셨다. 그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셨고, 소방관의 옷을 입고 엘리베이터 안과 계단을 뛰어 다니시며 구조 활동을 하셨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이 느끼고 계시며 사랑하는 사람을 한 순간에 잃고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스스로를 각성하고 자성하는 분위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방송인 네트워크 CBN의 제리 파웰 목사는 우리는 그 동안 국내외적으로 테러의 위험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정작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그는 미국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타락하고 세속화 일변도로 가게된 것에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페미니스트(여성비하, 경시, 무관심, 가치 절하 등으로 생기는 문제들이 많다. 남자를 얻을 수 없는 여자. 남자를 원하지 않는 여자(동성애자),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남자를 증오하고 응징하는 여자가 생기고), 동성애자, 낙태옹호론자 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며 또한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적 상징물을 철거하는 시도나 낙태권을 주장하며 지금까지 4000만 이상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죽게 만드는 일, 창조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아온 게이 레즈비언들이 모두 재앙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라는 자성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미국은 신앙의 양심을 가진 나라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요셉은 그 모든 것을 인간적인 펑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리는 그리고 화목케 하기를 힘쓰는 그 모습이 그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을 비는데 그 어떤 아들도 요셉과 같은 축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요셉에게는 네 아비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옵니다.
우리 인간의 혈과 육으로 대해서 무엇인가 이룰 줄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정신이 요셉에게 나타났듯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역시 이번 명절을 맞이하여 모든 부모 형제와 화목하고 더 나아가 그 어떤 사람과도 원수를 만들지 말고 화목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용서가 되지 않는 원수 같은 분이 있습니까?
원수 갚은 것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사랑하며 화목케 하는 일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절대로 인간적인 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일이면 우리 나라의 최대의 명절이라는 추석절기입니다.
수천 수백만 명이 이동하여 그 동안 헤어져 있었던 부모와 형제를 만나서 인간의 정을 나누는 참으로 아름다운 명절입니다.
더욱이 오곡백과가 무르익은 계절이라 먹을 것 또한 풍성하기 이를 때가 없습니다.
벌써 우리 교회 성도들도 지방에 계신 분들을 만나기 위해서 지방으로 내려간 자들이 상당히 많은 것 같습니다.
이러한 즐거운 때에 우리 민족은 부모와 형제를 잊지 않고 수 천리 길을 찾아 나서며 안부를 묻고 그리고 감사하며 고마워하는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입니다.
이 좋은 명절을 당하여서 특별한 이유가 없다면 모두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즐거운 시간을 만들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은 인간의 인지상정(人之常情)인 동시에 또한 하나님이 원하시는 바입니다.
시133;1-3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 머리에 있는 보배로운 기름이 수염 곧 아론의 수염에 흘러서 그 옷깃까지 내림 같고 헐몬의 이슬이 시온의 산들에 내림 같도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복을 명하셨나니 곧 영생이로다 라고 하였습니다.
이같이 하나님도 형제가 함께 화목하고 화합하는 것을 얼마나 기뻐하시고 그리고 축복을 하셨는지 모릅니다.
예수님은 처음으로 공적인 생애를 시작하실 때에 산에서 8가지의 축복을 말씀 하셨습니다.
그 중에 화평케 하는 자의 축복을 말씀하시기를 화평케 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저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얼마나 화목하게 하는 것이 축복이 있기에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이름까지 얻을 수가 있습니까?
그러므로 인생을 참으로 복되게 사는 비결은 나 자신이 분열과 다툼의 중앙에서는 자가 아니라 화목케 하는 일에 힘을 쓴다면 반드시 그 사람의 인생은 축복된 삶이 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이번 명절을 맞이하여 참으로 형제간에 화목케 하는 일에 여러분들이 앞장을 서시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은 자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마5:22-24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 그러므로 예물을 제단에 드리다가 거기서 네 형제에게 원망들을 만한 일이 있는 줄 생각나거든 예물을 제단에 두고 먼저 가서 형제와 화목하고 그후에 와서 예물을 드리라고 하셨습니다.
라가라는 말은 욕입니다.
멍텅구리, 바보 등등......
그러니 어쩌면은 우리의 삶이 축복이 되지 않음은 우리의 형제 자매에게 바로 행치 못함이 그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우리가 형제를 사랑함으로 축복을 가져 올 수 있을까? 입니다.
피차 화목과 화평을 가져오도록 하는 역할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이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가 없습니다.
제의 형제는 6남매입니다.
아들이 5형제요 그 위로 누이가 한 명입니다.
부모가 살아 계시고 또한 서로가 형제로 같이 희로애락을 같이 하였다는 정으로 인하여 남이 보기에도 부러운 형제들이다 이렇게 보이기도 하였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모님도 돌아 가신지가 오래고 또 제 각각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 키우다보니 같이 자랐다는 그러한 인정은 차츰 사라지고 각자 자신들의 가정을 돌보고 식구들을 돌보는 현실을 바라다보게 되니 본의 아니게 서로가 서로를 이해하고 용납하고 받아 드릴 수 있기보다는 제 부터가 그러했습니다.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하는 그런 섭섭한 생각이 들어가기 시작하니 이해와 용납은 고사하고 오해와 미움이 싹이 터기 시작하더니 드디어 형제간에 불화와 분리가 일어나기 시작하는데 이건 참으로 사람의 힘으로는 겉잡을 수가 없더라고요
이번에도 명절을 당하기는 하였지만은 별로 기분이 좋은 명절이 아닌 것 같습니다.
형제간이 많은 것 같지 만은 결코 그렇지가 않더라고요
한 명은 먼저 하나님께로 가버렸지요
참으로 형제간에 화목을 하고 화평을 한다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이 아님을 이제 절실히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러니 하나님은 형제와 화목하게 지나는 자를 참으로 귀하게 보시고 축복을 하시는 것 같습니다.
분리, 이간, 다툼등 이런 것은 일어나기 참 쉬운 일입니다.
그리고는 제 각기 하나님의 이름을 열심히 부르고 있으니 하나님도 상당히 고민이 되실 거에오
한 부모에게서 태어난 형제들도 이런데 그렇지 않는 사람들 사이에는 더 말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제 집안 이야기를 해서 안되었지만 제 집안 일이 여러분들의 집안 일이 라고 여겨집니다.
우리 형제들이 불화 하는 다른 4촌들이나 집안의 어른들이 화목을 하지 못하는 일들을 보고서 어찌 그럴 수가 있을까? 했는데 지금 우리 형제들이 이러고 있으니 참으로 사람은 아무도 큰 소리 칠 자가 없고 또한 하나님 앞에 부끄러운 일이 기도합니다.
제가 우리 부모님 대에도 생각해보니 아버지 형제간에도 별로 사이가 좋지 않더라고요 특히 여자 동서들 간에 그래요 우리 어머니와 우리 큰어머니가 별로 사이가 안 좋아요
또 어머니 형제들은 어떠하고요 좋을 때에 좋은 것 같지만은요 이권 등이 개입되니 원수가 달리 없더라고요
어머니와 외삼촌이 그렇게 좋은 사이 였서요
우리 어릴 적에는 방학만 되면 시골에 가서 살았습니다.
그런데 나중에 두 분의 사이가 어떻게 안 좋은지 시누이와 올게 사이는 돌아 가셨다는 소식을 듣고도 아예 상종조차 안 합니다.
또 두 큰집의 4촌들도 보니 형제간에 별로 사이가 좋지 않고요 외가 쪽의 이종 사촌들도 보니까요 형제간에 화목하기가 쉽지 않구나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예수님도 말씀하시지 않으셨습니까?
원수가 내 집안 식구이니라고 하셨습니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합니까?
이 가운데서도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형제간에 화목의 정신을 잊지 말고 화목하기를 힘써야 합니다.
형제라 함은 육신의 형제만이 아니라 우리 모든 믿는 자들을 가리키며 더 나아가서는 모든 이웃을 가리킵니다.
본문의 요셉이의 경우를 살펴봅시다.
배다른 형제들 12명중에서 아버지의 사랑을 받는 동생을 그 형제들이 얼마나 시기하고 질투를 하는지 동생하나 이해를 하고 용납을 해 주지 못했습니다.
형제간이라 할지라도 그 미움이 얼마나 무서운 결과를 가져 왔던지 죽이기까지 모함하고 결국은 남의 나라로 종으로 팔아 버렸습니다.
이제 그 형들은 동생과 형이라는 형제간의 혈육의 정도 그리고 형제지간의 우애도 모두 다 끊어 버렸습니다.
그러나 놀랍게도 그 증오와 질투와 단절가운데 요셉은 오히려 화목하기를 쉬지 않았다는 것에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와 형제들에 관한 글을 찾아 볼 때에 요셉은 한번도 그 형제들을 원망하는 장면이 나오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그는 형제들로 인하여 남의 나라에서 종으로의 살이, 옥중에서의 고통을 당하면 서는 물론 이거니와 그리고 형들의 생명을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애굽의 총리의 자리에서까지 그는 오직 한마디로 그의 형제 화목의 표현을 할 수 있는 단어는 형님들은 죄가 없으십니다.
나 일로 상념하지 말고 염려하지 마십시오
오히려 하는 말이 내가 형들과 형들의 식구들을 돌보겠습니다.
이 말이 요셉이가 그를 악하게 대한 형들에게 하는 말이었습니다.
소이 괜찮다는 것입니다. No Problem
그리고는 하는 말이 지금까지의 모든 일과 그리고 오늘에 이르기까지의 모든 일은 하나님이 주관을 하셨습니다.
여러분 어떻게 요셉이의 입에서 이런 말이 나올 수가 있다는 말입니까?
결코 혈육을 가진 인간 요셉에게서는 나올 수 없는 말입니다.
인간의 조상에게서 받은 혈육에서 나오는 것은 무엇입니까?
갈5;19-21 육체의 일은 현저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술수와 원수를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리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전에 너희에게 경계한 것같이 경계하노니 이런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 라고 했습니다.
여기에 무슨 생산적이고 건설적이고 하나님의 축복을 받을 것이 있습니까?
결코 이렇게 요셉이는 혈육으로 대하는 형들에게 인간의 혈과 육으로 대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본문23절에 활 쏘는 자가 그를 학대하며 그를 쏘며 그를 군박하였으나 요셉의 활이 도리어 견강하며 그의 팔이 힘이 있으니 야곱의 전능자의 손을 힘입음이라고 하였습니다.
혈육을 혈육으로 대항 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힘입어서 은혜로 대하였다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역시 그의 글 갈라디아서에서 요셉이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말하였습니다.
갈5:22-25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선과 온유와 절제니 이 같은 것을 금지 할 법이 없느니라. 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삶이 요셉이로 하여금 복된 자의 삶을 살게 하였습니다.
지금 미국에서는 대단한 어려움에 쳐해 있습니다.
지난 9월 11일 테러 사건입니다, 건국 이래로 남북 전쟁 이후 최대의 국가재난이라고 일컫어지는 이 사건을 두고 어떻게 처리 할 것인가? 가 테러를 당한 이상의 고민입니다.
그런데 미국은 지금 교회 중심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를 노력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지난 14일에는 부시 대통령이 국가 기도의 날로 정해 온 국민이 기도 하기를 촉구하고 그리고 많은 사람들이 교회로 몰려들었다는 것입니다.
그들은 처음의 분위기는 하나님이 계셨다면 어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셨는가?
하며 혼란과 불안과 증오와 보복의 감정을 억 누를 수가 없었습니다.
이러한 가운데 미국의 교회들은 인간적인 감정을 잠재우면서 점차적으로 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을 쥐고 계시는 하나님을 강하게 드러내고 있었습니다.
뉴욕세인트 폴 교회 찰스 쿨만 목사는 예수님은 모든 죄인을 구하러 이 세상에 오셨고 테러리스트일지라도 그들의 영혼을 구원하실 것이라며 우리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과 타인에 대한 증오와 원망이 함께 있을 수 없다 고 설교를 하며 용서하는 마음으로 이번 일을 극복하자고 했습니다.
몬타나 교회의 폴 브록 목사도 무고한 사람들이 테러 앞에 화내고 분노하지만 우리 기독교인들은 이웃을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 할 수밖에 없으며 전쟁은 또 다른 희생자를 만들뿐이라며 하나님은 테러를 계획하시지 않으셨다. 하나님은 항상 계시는 그 자리에 계셨다. 그 사람들과 함께 비행기를 타셨고, 소방관의 옷을 입고 엘리베이터 안과 계단을 뛰어 다니시며 구조 활동을 하셨으며 우리가 느끼는 것과 똑 같이 느끼고 계시며 사랑하는 사람을 한 순간에 잃고 울부짖는 우리의 기도와 부상자들의 신음소리를 지금도 듣고 계신다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스스로를 각성하고 자성하는 분위기도 있었다는 것입니다.
기독교방송인 네트워크 CBN의 제리 파웰 목사는 우리는 그 동안 국내외적으로 테러의 위험에 노출돼 있으면서도 정작 이런 엄청난 대가를 치르게 될 줄은 생각도 못했다며 그는 미국 사회가 하나님의 뜻에 벗어나 타락하고 세속화 일변도로 가게된 것에는 자유주의를 주장하는 시민단체, 페미니스트(여성비하, 경시, 무관심, 가치 절하 등으로 생기는 문제들이 많다. 남자를 얻을 수 없는 여자. 남자를 원하지 않는 여자(동성애자), 남자가 되고 싶어하는 여자, 남자를 증오하고 응징하는 여자가 생기고), 동성애자, 낙태옹호론자 들의 책임이 크다고 하며 또한 공공장소에서 기독교적 상징물을 철거하는 시도나 낙태권을 주장하며 지금까지 4000만 이상의 하나님이 주신 생명을 죽게 만드는 일, 창조 섭리에 어긋나는 행동을 일삼아온 게이 레즈비언들이 모두 재앙의 근원이며 하나님의 뜻이 아닌 인간의 뜻대로 살려고 노력하였기 때문이라는 자성의 소리까지 나오고 있으니 참으로 미국은 신앙의 양심을 가진 나라라는 말을 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하여튼 요셉은 그 모든 것을 인간적인 펑을 하기 전에 하나님의 뜻 가운데로 돌리는 그리고 화목케 하기를 힘쓰는 그 모습이 그에게는 참으로 놀라운 축복이 되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야곱이 하나님을 대신하여 축복을 비는데 그 어떤 아들도 요셉과 같은 축복을 말하지 않았습니다.
오직 요셉에게는 네 아비 하나님께로 말미암나니 그가 네게 복을 주실 것이라 위로 하늘의 복과 아래로 원천의 복과 젖먹이는 복과 태의 복이로다 네 아비의 축복이 내 부여조의 축복보다 나아서 영원한 산이 한없음같이 이 축복이 요셉의 머리로 돌아오며......
여러분 속지 마십시오
각양 좋은 은사와 온전한 선물이 다 위로부터 빛들의 아버지께로서 내려옵니다.
우리 인간의 혈과 육으로 대해서 무엇인가 이룰 줄로 여기지 마시기를 바랍니다.
그리스도의 화목케 하는 정신이 요셉에게 나타났듯이 우리 사랑하는 성도들 역시 이번 명절을 맞이하여 모든 부모 형제와 화목하고 더 나아가 그 어떤 사람과도 원수를 만들지 말고 화목 하는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정말로 용서가 되지 않는 원수 같은 분이 있습니까?
원수 갚은 것도 하나님께 있습니다.
오직 우리 인간이 해야 할 것은 사랑하며 화목케 하는 일이 우리 성도들에게 있을 뿐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절대로 인간적인 감정이 앞서지 않도록 하시고 하나님의 선한 뜻을 따를 수 있는 성령 충만한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