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로 끝나는 행복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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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54회 작성일 2011-07-16 21:26본문
창세기 13:1-4 예배로 시작하여 예배로 끝나는 행복한 삶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진명 시인의 여행이라는 시에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 그것들은 삶이 아무리 성공적이고, 대단하고, 화려할지라도, 인생 그 자체가 다시 되 돌아 갈 수없는 편도여행이라는 것에 대하여 큰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거는 흘려 갔다 인생은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여행과 같습니다.
프랑스의 오르탕스 블루라는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이 짧은 시는 프랑스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8000편의 시, 콩코루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된 시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나가지만, 그러나 인생이라는 그 자체는 본질상 너무나 외롭고 고독한 나그네임을 묘사합니다.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사람의 물결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얼마나 외로움을 느꼈으면, 사막에 홀로 여행을 하다가, 너무나 사람이 그리워, 뒷걸음질 하여 자기의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는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의 실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자란 Living in the In-Between 곧 사이의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안과 바깥, 산 것과 죽은 것들, 떠남과 머묾, 나와 너, 영원과 찰나, 모순과 비모순, 있음과 없음 사이에 그 중간에 거처하는 존재가 우리의 삶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도 between의 상태에 있습니다.
between already not yet, 이미 구원 받은 already의 천국의 삶을 맛보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천국의 삶이 아닙니다. Not yet.
마치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광야의 삶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직 사이의 많은 긴장 속에 살아나갑니다.
사도 바울도 빌 1 :23,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0세기의 뛰어난 인류학자, Levi-Strauss, 레비스트로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책 슬픈 열대는 브라질에서의 인류학 현장 연구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이분이 인류학자로서 한 평생 많은 여행을 하고 난후에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 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외부의 세계를 체험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본질은 순례자의 삶이며, 특별히 홀로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이 인생의 여행은 round trip 이 아니라, one way trip 입니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롭고 아직도 무엇인가 이루어 지지 않는 불확실한 삶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 역시 여행자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애굽에서 네게브로 네게브에서 베델을 지나 아이 사이 곧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왔습니다.
애굽 역시 그의 본래의 거주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으로 오기 전의 여정을 유추해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그리고 베델과 아이를 거쳐 애굽으로 그리고 여기 제단을 쌓은 곳이 정착지가 아니라 그는 또 헤브론으로 마므레로 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여행을 합니다.
이삭을 얻기 전에 네게브에서 또 다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아비멜렉과의 갈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여행자와 아브라함의 여행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일반 여행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에 기식이 끊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여행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길이었습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을 아는 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히11:8-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같이 아브라함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받은 축복은 그가 예배를 드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가 장막을 치고 있는 베델과 아이 사이 이곳은 아브라함이 전에 예배를 드렸던 곳이요 지금 역시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3-4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베델에 이르며 베델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의 일상의 생활은 예배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번 노회 교직자 수련회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니 이 수련회를 이끈 주도력이 어디에 있었는 줄 아십니까?
예배드리는데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큰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귀국 하는 날 응급 환자가 생겼습니다.
작은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며 띠는 맥박이 불규칙 하게 되어 생명에 지장을 초래 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놀라운가 식사 중에 이 연락을 받은 저희 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고 각 차량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 할 때에 제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더 이상 이 사건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처리하시겠구나 두려움 공포 염려 걱정에서 자유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탁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 올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는 후에 차안에서 이번 여행을 주선한 여행사 사장인 차집사라는 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지금 자신의 아이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자신이 대학 4학년 시절에 어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려 3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고 집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그 병은 점점 우중하여 졌습니다.
심하게 불교에 심취하여 있던 분이라 치유를 위해 부적을 지닐 정도가 아니라 그 부적을 매일 밤 12시에 태워 그 재를 마시면 낳는다는 거에요 매일 밤 12시에 지극 정성을 드렸지만 허사였는데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울음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다니겠노라는 생각이 들고 울면서 그 어머니에게 엄마 이제부터 우리 교회 다녀 한 것이 시발이 되어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데 한번은 목사님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는 것이에요
내 아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여 첫 봉급 한번 써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소원이 하나가 생겼는데 큰 아들 결혼하여 손자를 한번 안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소원이 생겨 막내아들 결혼하는 것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지금까지의 복된 삶은 지난 번 드린 예배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2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풍성하게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가난이 물러가고 질고가 떠나고 어두운 권세가 물러가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는 앞으로의 삶을 예비하는데 있습니다.
조카 롯과의 재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드리는 예배가 그를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배를 등하시 여기는 조카 룻은 문제를 통하여 망하는 길로 갔고
10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리는 아브라함은 문제를 통하여 재물과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그 일이 있는 후에 역시 아브라함은 또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려고 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분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의 그때 형편으로 보면 하나같이 실현 불가능한 축복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행 한 일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잠시 후 그 땅에 기근이 오자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 결국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믿음 없고 형편없는 모습이다. 같은 사람에게서 왜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온 자신을 보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움의 손길을 그에게서 제하시자 아브라함 본연의 형편없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풍성케 하셨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삶은 그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기 이전에 아브라함을 75세가 되기까지 자식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고 어느 누구도 소망이 될 수 없는 혈혈단신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여러 자식들이 있고 또 하는 일마다 잘되고 모든 것이 풍성했다면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과연 말씀을 좇아갈 수 있었겠는가?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간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를 말씀을 좇아갈 수밖에 없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자로 부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대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잘할 때나 부족하고 연약할 때나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에게 많은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13장에 이르면 자신에게 기대를 두었던 아브라함이 자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기대를 두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 즉 제단 위에서는 어떤 것도 살아있을 수 없고, 어떤 형체도 남아있지 않고 재가 된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다 불태워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곳이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지난날 자신이 믿음으로 했다고 자랑할 만한 것도, 또한 믿음이 없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빼앗기는 형편없는 모습도 다 불태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남았다. 여호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만 남은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만 남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예배를 통하여 다 타버린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듯이, 나의 선행과 악행 또 내가 잘한 것이나 못한 것이 다 불태워지고 나의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장막을 옮길 때 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이사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베델과 아이 사이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과 나누어지고 난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삶의 처소를 헤브론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특징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요소는 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도 예배하는 공동체, worshipping community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만남 입니다. Encounter with God in worship.
이 만남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혜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큰 힘과 능력과 위로를 받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에는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
현대인들에게 여행은 삶의 중요한 한 부분으로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기도 합니다.
이진명 시인의 여행이라는 시에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 그것들은 삶이 아무리 성공적이고, 대단하고, 화려할지라도, 인생 그 자체가 다시 되 돌아 갈 수없는 편도여행이라는 것에 대하여 큰 슬픔을 느끼고 있습니다.
과거는 흘려 갔다 인생은 다시 돌이 킬 수 없는 여행과 같습니다.
프랑스의 오르탕스 블루라는 시인의 사막이라는 시가 있습니다.
그 사막에서 그는 너무 외로워 때로는 뒷걸음질로 걸었다. 자기 앞에 찍힌 발자국을 보려고.
이 짧은 시는 프랑스 파리 지하철 공사에서 공모한, 8000편의 시, 콩코루 가운데 1등으로 당선된 시라고 합니다.
현대인들은 많은 사람들과 더불어 살아나가지만, 그러나 인생이라는 그 자체는 본질상 너무나 외롭고 고독한 나그네임을 묘사합니다.
파리라는 거대한 도시에서 사람의 물결 속에 파묻혀 살면서도, 얼마나 외로움을 느꼈으면, 사막에 홀로 여행을 하다가, 너무나 사람이 그리워, 뒷걸음질 하여 자기의 발자국을 바라보면서 그 외로움을 달래는 현대인들의 고독한 삶의 실존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여행자란 Living in the In-Between 곧 사이의 존재한다고 했습니다.
안과 바깥, 산 것과 죽은 것들, 떠남과 머묾, 나와 너, 영원과 찰나, 모순과 비모순, 있음과 없음 사이에 그 중간에 거처하는 존재가 우리의 삶이라고 합니다.
사실 우리 크리스천의 삶의 본질도 between의 상태에 있습니다.
between already not yet, 이미 구원 받은 already의 천국의 삶을 맛보고 있지만 그러나 아직 완전한 천국의 삶이 아닙니다. Not yet.
마치 출애굽은 했지만 아직 가나안에는 들어가지 못한 광야의 삶과 비슷합니다.
우리는 이미, 아직 사이의 많은 긴장 속에 살아나갑니다.
사도 바울도 빌 1 :23,24 내가 그 두 사이에 끼였으니 떠나서 그리스도와 함께 있을 욕망을 가진 이것이 더욱 좋으나 그러나 내가 육신에 거하는 것이 너희를 위하여 더 유익하리라
20세기의 뛰어난 인류학자, Levi-Strauss, 레비스트로스라는 분이 있습니다.
이분의 책 슬픈 열대는 브라질에서의 인류학 현장 연구 경험을 담고 있습니다. 이분이 인류학자로서 한 평생 많은 여행을 하고 난후에 이러한 말을 했습니다.
여행이라는 것은 나를 둘러싸고 있는 이 황야를 탐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내 마음 속의 황야를 탐색하는 일이다.
여행을 하면서 외부의 세계를 체험하지만 그러나 사실은 그 외부의 세계를 바라보는 나의 마음의 활동이라는 말입니다.
여러분, 우리 인생의 본질은 순례자의 삶이며, 특별히 홀로 나그네의 길을 걷고 있는데, 이 인생의 여행은 round trip 이 아니라, one way trip 입니다. 왕복이 아니라, 편도여행을 하고 있다는 말입니다.
그리고 외롭고 아직도 무엇인가 이루어 지지 않는 불확실한 삶입니다.
본문의 아브라함 역시 여행자의 삶을 살아 왔습니다.
애굽에서 네게브로 네게브에서 베델을 지나 아이 사이 곧 전에 제단을 쌓았던 곳으로 왔습니다.
애굽 역시 그의 본래의 거주가 아니었습니다.
애굽으로 오기 전의 여정을 유추해 보면 갈대아 우르에서 가나안으로 그리고 베델과 아이를 거쳐 애굽으로 그리고 여기 제단을 쌓은 곳이 정착지가 아니라 그는 또 헤브론으로 마므레로 간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또 아브라함은 여행을 합니다.
이삭을 얻기 전에 네게브에서 또 다시 옮겨 가데스와 술 사이 그랄에 거류하며 아비멜렉과의 갈등을 볼 수 있었습니다.
그렇다면 일반 여행자와 아브라함의 여행의 차이점이 무엇입니까?
일반 여행자는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지를 모르는 여행을 하는 것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먹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코에 기식이 끊어져 버리면 모든 것이 끝나버립니다.
그러나 아브라함은 그의 여행길에는 하나님이 함께 하는 길이었습니다.
어디서 왔다가 어디로 가는 것을 아는 확실한 인생을 살아가는 삶입니다.
생명이 있으니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생명의 가치를 귀하게 여기고 사는 것입니다.
히11:8-9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의 유업으로 받을 땅에 나아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아갔으며 믿음으로 그가 이방의 땅에 있는 것 같이 약속의 땅에 거류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 및 야곱과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그가 하나님이 계획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라
이같이 아브라함이 나그네 인생길에서 받은 축복은 그가 예배를 드리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지금 그가 장막을 치고 있는 베델과 아이 사이 이곳은 아브라함이 전에 예배를 드렸던 곳이요 지금 역시 예배를 드렸던 곳입니다.
3-4절 그가 네게브에서부터 길을 떠나 베델에 이르며 베델과 아이 사이 곧 전에 장막 쳤던 곳에 이르니 그가 처음으로 제단을 쌓은 곳이라 그가 거기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더라
그의 일상의 생활은 예배가 함께 하였다는 것입니다.
예배란 하나님이 하신다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번 노회 교직자 수련회에서 최고의 하이라이트가 무엇인 줄 아십니까?
아니 이 수련회를 이끈 주도력이 어디에 있었는 줄 아십니까?
예배드리는데 있습니다. 예배를 드리지 않으면 아무런 일이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이름을 부르는 예배는 큰 역사하심이 있습니다.
이번 여행 중에 귀국 하는 날 응급 환자가 생겼습니다.
작은 병원에서 큰 병원으로 옮기며 띠는 맥박이 불규칙 하게 되어 생명에 지장을 초래 한다는 통보가 왔습니다.
예배가 얼마나 놀라운가 식사 중에 이 연락을 받은 저희 들이 할 수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함께 슬퍼하고 두려워하고 안타까워하고만 있을 일이 아니지 않습니까?
그 자리에서 합심하여 기도하고 각 차량에서 기도하였습니다.
이렇게 기도 할 때에 제 마음에 이런 감동이 왔습니다.
더 이상 이 사건은 인간의 손에 있는 것이 아니구나 하나님이 처리하시겠구나 두려움 공포 염려 걱정에서 자유하며 전적으로 하나님의 손에 의탁 할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입니까?
물론 하나님이 같은 비행기를 타고 돌아 올수 있도록 하셨습니다.
이 일이 있는 후에 차안에서 이번 여행을 주선한 여행사 사장인 차집사라는 분이 간증을 하였습니다.
지금 자신의 아이가 대학을 다니고 있는데 자신이 대학 4학년 시절에 어머니가 불치의 병에 걸려 3개월의 시한부 판정을 받고 집에서 간호를 하고 있는데 그 병은 점점 우중하여 졌습니다.
심하게 불교에 심취하여 있던 분이라 치유를 위해 부적을 지닐 정도가 아니라 그 부적을 매일 밤 12시에 태워 그 재를 마시면 낳는다는 거에요 매일 밤 12시에 지극 정성을 드렸지만 허사였는데
지푸라기도 잡는 심정으로 목사님을 초청하여 예배를 드렸다는 것입니다.
예배를 드리는데 얼마나 울음이 나오는지 그리고 그 마음에 이제부터 교회를 다니겠노라는 생각이 들고 울면서 그 어머니에게 엄마 이제부터 우리 교회 다녀 한 것이 시발이 되어 목사님을 모시고 예배를 드리는데 한번은 목사님이 한 가지 소원을 말해 보라는 것이에요
내 아들 대학 졸업하고 취직하여 첫 봉급 한번 써보고 죽으면 여한이 없겠다고 한 것입니다.
이것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런데 또 소원이 하나가 생겼는데 큰 아들 결혼하여 손자를 한번 안아 보고 싶다는 것입니다.
이것 역시 들어 주셨다는 것입니다. 또 소원이 생겨 막내아들 결혼하는 것보고 죽었으면 좋겠다는 것입니다.
이것 또한 하나님이 들어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지금까지의 복된 삶은 지난 번 드린 예배로 이루어 진 것입니다.
2절 아브람에게 가축과 은과 금이 풍부하였더라
풍성하게 드리는 예배를 통하여 우리 가운데 가난이 물러가고 질고가 떠나고 어두운 권세가 물러가는 축복을 받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예배는 앞으로의 삶을 예비하는데 있습니다.
조카 롯과의 재산 문제가 발생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가 드리는 예배가 그를 축복의 사람으로 만들었습니다.
예배를 등하시 여기는 조카 룻은 문제를 통하여 망하는 길로 갔고
10절 롯이 눈을 들어 요단 지역을 바라본즉 소알까지 온 땅에 물이 넉넉하니 여호와께서 소돔과 고모라를 멸하시기 전이었으므로 여호와의 동산 같고 애굽 땅과 같았더라
가는 곳마다 예배를 드리는 아브라함은 문제를 통하여 재물과 자손의 축복을 받았습니다.
14-17절 롯이 아브람을 떠난 후에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눈을 들어 너 있는 곳에서 북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과 서쪽을 바라보라 보이는 땅을 내가 너와 네 자손에게 주리니 영원히 이르리라 내가 네 자손이 땅의 티끌 같게 하리니 사람이 땅의 티끌을 능히 셀 수 있을진대 네 자손도 세리라 너는 일어나 그 땅을 종과 횡으로 두루 다녀 보라 내가 그것을 네게 주리라
그 일이 있는 후에 역시 아브라함은 또 다시 예배를 드렸습니다.
18절 이에 아브람이 장막을 옮겨 헤브론에 있는 마므레 상수리 수풀에 이르러 거주하며 거기서 여호와를 위하여 제단을 쌓았더라
하나님이 나를 불러 주신 것은 하나님이 나의 삶을 인도해 주시려고 하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신 이유는 분명하십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너는 너의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케 하리니, 너는 복의 근원이 될지라고 하셨습니다.
이 약속들은 아브라함의 그때 형편으로 보면 하나같이 실현 불가능한 축복들이었다.
아브라함이 자신이 행 한 일들을 보면 그렇습니다.
잠시 후 그 땅에 기근이 오자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가나안에 머물러 있지 않고 애굽으로 내려가 버렸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지키려는 마음에 아내 사래를 누이라고 속이고 결국 아내를 바로에게 빼앗겼습니다.
이때의 아브라함은 믿음 없고 형편없는 모습이다. 같은 사람에게서 왜 이런 극과 극의 모습이 나타나는 것일까?
아브라함은 말씀을 좇아 본토 친척 아비의 집을 떠나온 자신을 보고 스스로를 대견하게 생각하고 믿음 있는 사람으로 여겼을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도움의 손길을 그에게서 제하시자 아브라함 본연의 형편없는 모습이 나타났습니다.
반대로 만약 하나님이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주시고 풍성케 하셨다면 아브라함이 가나안을 떠나 애굽으로 가는 일은 없었을 것입니다.
따라서 아브라함의 삶은 그의 조건이 아니라 전적으로 하나님의 도우시는 손길에 달려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복을 주기 이전에 아브라함을 75세가 되기까지 자식이 없어서 사람들 앞에서 부끄럽고 어느 누구도 소망이 될 수 없는 혈혈단신으로 있게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셨습니다.
만약 아브라함에게 여러 자식들이 있고 또 하는 일마다 잘되고 모든 것이 풍성했다면 하나님이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내가 네게 지시할 땅으로 가라고 했을 때 과연 말씀을 좇아갈 수 있었겠는가?
아브라함이 말씀을 좇아간 것은 아브라함의 믿음이라기보다는 그를 말씀을 좇아갈 수밖에 없도록 이끄신 하나님의 손길 덕분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나를 하나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 자로 부르셨음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에게 기대를 두신 적이 없습니다.
아브라함이 잘할 때나 부족하고 연약할 때나 하나님은 개의치 않으셨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오직 하나님의 계획과 섭리에 의해서 모든 일이 이루어지도록 해 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자기 자신에게 많은 기대를 두었습니다.
그러다가 창세기 13장에 이르면 자신에게 기대를 두었던 아브라함이 자신에서 벗어나 하나님께 기대를 두는, 하나님의 마음과 하나가 된 모습을 볼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은 애굽에 내려갔다가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 그가 처음으로 단을 쌓았던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다.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 즉 제단 위에서는 어떤 것도 살아있을 수 없고, 어떤 형체도 남아있지 않고 재가 된다.
선한 것도 악한 것도 다 불태워지고 오직 주님의 은혜로 구원받는 곳이다.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으로 돌아왔을 때 비로소 지난날 자신이 믿음으로 했다고 자랑할 만한 것도, 또한 믿음이 없어 아내를 누이라고 속여 바로에게 빼앗기는 형편없는 모습도 다 불태워진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오직 여호와 하나님만 남았다. 여호와, 스스로 계신 하나님! 아브라함의 조건과 상관없이 오직 스스로 일하시는 하나님만 남은 것이다.
예배는 하나님만 남는 것입니다.
이 시간에 여러분은 예배를 통하여 다 타버린자로 여기시기 바랍니다.
신앙은 아브라함이 처음으로 단을 쌓은 곳에서 여호와의 이름을 불렀듯이, 나의 선행과 악행 또 내가 잘한 것이나 못한 것이 다 불태워지고 나의 조건과 상관없이 스스로 일하시는 여호와 하나님 그분의 이름을 부르는 것입니다.
나그네 인생길에 가장 중요한 일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가나안에 들어와서, 장막을 옮길 때 마다,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고, 이사를 할 때마다 하나님께 제단을 쌓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애급에서 가나안으로 돌아온 후에, 베델과 아이 사이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그리고 조카 롯과 나누어지고 난후에,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아브라함은 삶의 처소를 헤브론으로 옮겨서, 그곳에서 하나님께 예배를 드렸습니다. 아브라함의 삶의 특징 가운데, 참으로 중요한 요소는 늘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이었습니다.
오늘 우리 그리스도인의 삶의 특징도,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데 가장 우선순위를 두어야합니다.
이 세상에 있는 주님의 교회도 예배하는 공동체, worshipping community입니다.
이것이 교회의 존재의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 하나님의 백성과의 만남 입니다. Encounter with God in worship.
이 만남에서 하나님은 그의 백성에게 임재하시고, 하나님의 백성들은 찬양과 감사로 하나님께 응답합니다. 이렇게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하나님으로부터 크신 은혜를 받습니다.
예배를 통하여, 전능하신 하나님으로부터 큰 힘과 능력과 위로를 받습니다.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을 만나는 이 예배에는 더 많은 기쁨과 즐거움과 감격이 있습니다.
성도들은 예배하는 사람들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