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받을 구원과 생명과 축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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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58회 작성일 2011-07-16 21:27본문
민수기 14:1-10 하나님의 뜻을 따르는 자가 받을 구원과 생명과 축복
일본의 한 작가는 인류에게 세 가지 여인상 혹은 인간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와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죄의식으로 인하여 번민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뜻을 좆지 못하고 죄 속에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있습니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고는 싶어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며, 이로 인해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비너스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헬라 적인 여인상으로서 비너스 적인 매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여인상에 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세상에서 멋진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낭만과 쾌락을 좆아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의 소망은 오직 이 세상의 향락에 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관심 밖에 있습니다.
셋째는 마리아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주님을 수태하고 오해와 변명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 속에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그녀도 하와처럼 고난을 받기는 하지만 그녀가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와 질투로 인해 받는 고난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쾌락과 매력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세상에서는 오해와 고난을 당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며, 결국 승리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쾌락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와 함께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40일간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열명은 그 땅이 척박한 땅이라 보고하고 두 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보고하였다. 왜 그랬을까?
어찌하여 같은 팀을 이루어 같은 기간에 같은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정반대의 보고를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차이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땅이라 보았기에 아름다운 땅이요, 축복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런 믿음이 없이 그냥 황량한 땅이라 보았기에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척박한 땅이라 보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보일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믿음이 없이 현실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심과 저주의 현실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땅이, 주어진 현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과 그 현실을 보는 내 믿음이 결정합니다.
그런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볼 때 내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삶이 될 수 있고 그렇지를 못하고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척박한 땅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 땅을 악평하였습니다.
그 인생을 악평하는 것입니다.
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인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고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모두 부정하고 싶고 믿음을 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7-8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똑같은 환경을 살아오고 똑같은 내일을 바라보는데 이렇게 달라 질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삶을 악평하며 한 많은 인생이라고 하며 장래를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구나하며 내 장래를 축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내 인생의 악평과 저주에서 벗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축복의 장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나의 삶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7단계 첫째로 하나님은 항상 내 곁에서 일하고 계신다.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하나님 없이 그 스스로 운행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과 사건들을 친히 주관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해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무슨 특별한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을 드려 복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일이며, 그가 이루실 일을 나에게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 가운데 있어도 사랑하십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가장 위대한 관계이자 가장 놀라운 성취이며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억지가 아닌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문제는 사실상 사랑의 문제입니다.
요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나를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동여자로 초청하십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세상을 홍수로 멸하시기에 앞서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을 위해 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 때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으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의 학대로 인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들, 곧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신 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는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일을 성취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것은 동시에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역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즉 구원에 대한 부르심과 사역에 대한 부르심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부르심의 서로 다른 측면인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에도 말씀하십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성경은 거의 모든 장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으로부터 밧모섬의 요한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요? 내가 친구와 함께 길을 걸을 때, 그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조용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참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나와 함께 나누길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좋은 아버지라면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간섭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초청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 자신의 계획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청은 오히려 나의 삶에 갈등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때 나의 믿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믿음의 위기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얼마나 인정하는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진실되다면 그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때가 그를 경험하는 순간이라면, 부르시는 때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리가 없어. 더구나 이 일은 내 은사와도 맞지 않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고자 하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들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자는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결코 즉흥적으로 혹은 우연히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삶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면 비록 돈이 없거나, 사람들이 없거나, 그 끝이 눈에 보이지 아니할 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간다면 그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날 내가 하니깐 내가 다 책임져야 할 것 뿐이지 않습니까?
여섯째 나의 삶은 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조정이 필요로 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것을 안다면 먼저 이전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이나 현재의 위치를 고집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그의 사역에 동참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진리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대가는 훨씬 더 혹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일곱째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살전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희생 제물로 드려질 양을 미리 준비해 두신 기사를 읽을 때 하나님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깊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계속 성장하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라고 의아해 한 적은 없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강에 먼저 발을 들여 놓으면 그들 앞에 놓인 요단 강물을 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이 이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말씀에 순종하였으며 그 결과 강물이 갈라져 안전하게 건너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강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강물을 갈라 주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순종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바로 그의 능력을 경험하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의 삶을 그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복종시키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분께서 나를 놀랍고도 영향력 있는 시역에 사용하시도록 드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내 안에 있는 엄청난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이북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이름,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사진,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북에서는 김정일의 왕국, 김정일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북에서는 김정일의 뜻, 김정일의 말, 김정일의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문제지요. 죄인인 내가 드러나니까 문제지요. 죄인인 내가 드러나니까 모두 죄인의 영향을 받아서 다 망하는 거야. 하나님의 이름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그 임금님이 누구인지 아시죠? 다윗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려다보시고 기쁨을 금치 못하셨어요.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어요.
내가 무엇이관데, 이 말은 다윗이 좋아하는 말이에요. 내가 무엇이관데, 내가 양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목동이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사울에게 다 죽게 된 것을 다 보호해 주시고 결국은 사울의 왕국을 빼앗아서 나에게 주시는가? 내가 무엇이관데. 내가 죄인 아닌가?
다윗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내 이름으로 하면 되나? 내 왕국을 세우면 되는가? 내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가? 하고 다윗이 다윗 성인 예루살렘에 와서 맨 처음에 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셨어요.
뜻을 따르는 자가 가장 복된 자가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는지만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
일본의 한 작가는 인류에게 세 가지 여인상 혹은 인간상이 있다고 말했습니다.
첫째는 하와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죄의식으로 인하여 번민하고 고민하는 사람을 말합니다.
이 세상에는 좋은 환경에서 태어났으나 하나님의 뜻을 좆지 못하고 죄 속에서 번민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이있습니다. 그들은 올바르게 살고는 싶어 하지만 실제의 삶 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을 따르지 못하며, 이로 인해 갈등하며 살아갑니다.
둘째는 비너스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헬라 적인 여인상으로서 비너스 적인 매력을 추구하며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합니다.
일반적으로 세상 사람들은 이러한 여인상에 속할 것입니다.
그들은 육체적인 매력과 아름다움을 가장 중요한 것으로 생각하며, 세상에서 멋진 사람을 만나 사랑하며 낭만과 쾌락을 좆아 사는 것을 가장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이들의 소망은 오직 이 세상의 향락에 있으며, 그들에게 하나님 나라는 관심 밖에 있습니다.
셋째는 마리아적인 여인상입니다.
이 여인상은 주님을 수태하고 오해와 변명 속에서도 하나님을 신뢰하며 순종 속에 살아가는 여인입니다.
그녀도 하와처럼 고난을 받기는 하지만 그녀가 받는 고난은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과정에서 생기는 오해와 질투로 인해 받는 고난입니다. 그녀는 세상의 쾌락과 매력보다는 하나님에 대한 신앙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을 이루려는 내적인 아름다움을 지니려고 노력합니다.
그러므로 그녀는 세상에서는 오해와 고난을 당하지만 신앙을 가지고 그것을 극복하며, 결국 승리합니다.
그녀는 세상에서의 일시적인 쾌락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며 살아갑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녀와 함께 항상 동행해 주십니다.
40일간에 가나안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 열명은 그 땅이 척박한 땅이라 보고하고 두 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보고하였다. 왜 그랬을까?
어찌하여 같은 팀을 이루어 같은 기간에 같은 땅을 정탐하고 돌아와서는 정반대의 보고를 할 수 있었을까?
그 이유는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그 땅을 본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간의 차이입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께서 그 땅을 약속의 땅으로 주신 땅이라 보았기에 아름다운 땅이요, 축복의 땅이요 젖과 꿀이 흐르는 땅으로 바라보았습니다.
그러나 다른 열 명의 정탐꾼들은 그런 믿음이 없이 그냥 황량한 땅이라 보았기에 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척박한 땅이라 보았습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나에게도 마찬가지입니다.
내가 처한 현실을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기회로 보는 사람들에게는 축복의 땅으로 보일 것이고 하나님이 주신 기회라는 믿음이 없이 현실을 대하는 사람들에게는 낙심과 저주의 현실로 보이게 될 것입니다.
내가 살아가는 땅이, 주어진 현실이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그 땅과 그 현실을 보는 내 믿음이 결정합니다.
그런 믿음의 눈으로 현실을 볼 때 내 삶이 젖과 꿀이 흐르는 축복의 삶이 될 수 있고 그렇지를 못하고 세상적인 기준으로만 보는 사람에게는 허우적거리며 살아갈 척박한 땅으로 보일 것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무시하는 믿음이 없는 자들은 그 땅을 악평하였습니다.
그 인생을 악평하는 것입니다.
민1332 이스라엘 자손 앞에서 그 정탐한 땅을 악평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그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요 거기서 본 모든 백성은 신장이 장대한 자들이며
그래서 그들은 지금까지의 하나님의 인도를 깡그리 무시하고 있고 그들의 지도자인 모세와 아론을 원망하고 있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인생을 모두 부정하고 싶고 믿음을 져버리는 사태가 발생한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뜻을 신뢰하는 자들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7-8절 이스라엘 자손의 온 회중에게 말하여 이르되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
똑같은 환경을 살아오고 똑같은 내일을 바라보는데 이렇게 달라 질 수 있습니다.
나는 내 인생의 삶을 악평하며 한 많은 인생이라고 하며 장래를 저주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아니면 내 인생이 이렇게 아름다운 삶이구나하며 내 장래를 축복하며 살아가고 있습니까?
이제 내 인생의 악평과 저주에서 벗어나시기를 축원합니다.
내 인생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며 축복의 장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이렇게 살 수 있는 근거가 무엇입니까? 나의 삶속에서는 하나님의 뜻이 있습니다.
헨리 블랙가비의 하나님을 경험하는 삶의 7단계 첫째로 하나님은 항상 내 곁에서 일하고 계신다.
요5:17 예수께서 그들에게 이르시되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 하시매
하나님께서는 세상이 하나님 없이 그 스스로 운행되도록 그냥 내버려 두지 않으십니다.
그는 지금 이 순간까지 그 모든 시간과 사건들을 친히 주관해 오셨을 뿐만 아니라 잃어버린 영혼을 찾아 구원하는 일을 적극적으로 행해 오셨습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 항상 우리의 삶 속에서 일하고 계신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께 쓰임받기 위해 무슨 특별한 일을 해야 할 필요는 없습니다. 단지 어느 때든지 하나님께 기꺼이 자신을 드려 복종하려는 마음만 있으면 됩니다.
하나님은 결코 사람이 하나님을 위해 무엇인가를 해보겠다는 생각을 원치 않으십니다.
따라서 나에게 필요한 것은 오히려 나 자신을 하나님께 복종시키는 일이며, 그가 이루실 일을 나에게 보여주실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둘째로 하나님은 나와 사랑의 관계를 맺기 원하십니다.
요일4:10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하나님께서 이미 나를 사랑하기로 작정하셨습니다. 죄를 지어도 죄 가운데 있어도 사랑하십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다는 것, 그것은 가장 위대한 관계이자 가장 놀라운 성취이며 내가 누릴 수 있는 최상의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내가 하나님을 진심으로 사랑한다면 하나님에 대한 순종은 억지가 아닌 즐거움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순종의 문제는 사실상 사랑의 문제입니다.
요14:23-24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사람이 나를 사랑하면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그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그에게 가서 거처를 그와 함께 하리라 나를 사랑하지 아니하는 자는 내 말을 지키지 아니하나니 너희가 듣는 말은 내 말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아버지의 말씀이니라
세번째 하나님께서는 나를 자신의 사역에 동참하도록 동여자로 초청하십니다.
빌2:13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에게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
세상을 홍수로 멸하시기에 앞서 하나님은 노아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는 또한 자신을 위해 한 나라를 세우고자 했을 때 아브라함을 찾아오셨으며, 자기 백성 이스라엘이 애굽의 학대로 인해 고통 중에 부르짖을 때 떨기나무 가운데서 모세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사51:2 너희의 조상 아브라함과 너희를 낳은 사라를 생각하여 보라 아브라함이 혼자 있을 때에 내가 그를 부르고 그에게 복을 주어 창성하게 하였느니라
이들, 곧 하나님께서 부르셔서 위대한 일을 감당하게 하신 자들은 모두 세상에서 평범한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놀랍게 쓰임 받을 수 있었던 이유는 이는 온 세상으로 하여금 그 일을 성취하는 자가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이심을 보여주기 위함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불러 구원하신 것은 동시에 하나님과 동역하는 사역으로의 부르심이기도 합니다.
즉 구원에 대한 부르심과 사역에 대한 부르심은 따로 분리될 수 없는, 동일한 부르심의 서로 다른 측면인 것입니다.
넷째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십니다. 이 시간에도 말씀하십니다.
요10:27 내 양은 내 음성을 들으며 나는 그들을 알며 그들은 나를 따르느니라
성경은 거의 모든 장에서 볼 수 있는 한 가지 진리가 있다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들에게 말씀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에덴동산의 아담으로부터 밧모섬의 요한에 이르기까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에 이르기까지 하나님은 자기 백성들이 들을 수 있도록 말씀하고 계십니다.
그런데 이 사실을 믿는 것이 왜 이토록 어려울까요? 내가 친구와 함께 길을 걸을 때, 그가 한 마디 말도 없이 그저 당신 곁에 조용히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참 좋은 친구이신 하나님과 동행하고 있을 때, 그가 자신의 마음에 있는 생각들을 나와 함께 나누길 원하신다는 것은 당연한 것 아닌가요?
좋은 아버지라면 자녀들과 대화하는 것을 즐겨하지 않을까요?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삶의 모든 영역에 하나님이 역사하시며 간섭하심을 의미하기 때문입니다.
다섯째 하나님의 초청은 믿음이 요구됩니다. 히11:6 믿음이 없이는 기쁘시게 못하나니
하나님께서 나에게 말씀하실 때에는 언제나 행함이 따르는 믿음을 요구하십니다.
우리는 항상 나만을 생각하며, 하나님의 뜻보다는 나 자신의 계획을 먼저 생각하기 때문에 하나님의 초청은 오히려 나의 삶에 갈등을 초래합니다. 그리고 이때 나의 믿음의 위기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사실 이러한 믿음의 위기는 삶의 전 영역에 대한 하나님의 통치권을 얼마나 인정하는가에 대한 시험입니다.
이러한 때 하나님을 진정으로 신뢰한다면 하나님의 말씀에 온전히 순종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믿는다는 고백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표현이 진실되다면 그의 명령에 어떻게 반응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는 바로 그때가 그를 경험하는 순간이라면, 부르시는 때는 즉시 행동으로 옮겨야 할 순간이라는 것입니다.
많은 사람들은 하나님의 명령을 받고서도, 이것은 하나님의 말씀일 리가 없어. 더구나 이 일은 내 은사와도 맞지 않아 라고 말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하나님의 명령을 회피하고자 하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 안에 하나님의 일을 성취할 수 있는 자연적인 능력들도 주셨기 때문입니다.
하고자 하는 자는 도우십니다. 하나님은 나를 결코 즉흥적으로 혹은 우연히 부르시는 분이 아닙니다.
그는 언제나 삶을 위한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나를 부르시는 분입니다.
그러므로 만일 하나님의 부르심을 들었다면 비록 돈이 없거나, 사람들이 없거나, 그 끝이 눈에 보이지 아니할 지라도 믿음으로 나아가십시오.
내가 믿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따라 나아간다면 그 일의 결과는 하나님께서 책임지실 것이기 때문입니다.
만날 내가 하니깐 내가 다 책임져야 할 것 뿐이지 않습니까?
여섯째 나의 삶은 사역에 동참하기 위한 조정이 필요로 한다. 마 6:24 한 사람이 두 주인을 섬기지 못할 것이니 하나님께서 나를 사용하실 것을 안다면 먼저 이전의 삶을 완전히 포기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전의 삶이나 현재의 위치를 고집하면서 하나님과 동행하거나 그의 사역에 동참하려 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기 때문입니다.
자신을 하나님께 맞추어야 한다는 사실은 성경 전체에 나타나는 진리입니다.
이렇듯 하나님을 순종하는 데는 희생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불순종의 대가는 훨씬 더 혹독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명령에 불순종함으로 치러야 할 엄청난 대가에 대해서 생각하는 사람은 거의 없습니다.
눅14:27 누구든지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좇지 않는 자도 능히 나의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
하나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하다.
일곱째 순종하는 만큼 하나님을 경험하게 된다.
살전5:24 너희를 부르시는 이는 미쁘시니 그가 또한 이루시리라
아브라함에게 그 아들 이삭을 바치라고 명령하신 하나님께서 이삭 대신 희생 제물로 드려질 양을 미리 준비해 두신 기사를 읽을 때 하나님을 예비하시는 하나님으로 생각합니다.
그런데 이렇듯 하나님을 실제적으로 깊이 경험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순종이 선행되어야만 합니다.
왜 다른 사람들은 계속 성장하는데 나만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가라고 의아해 한 적은 없습니까?
그것은 당신이 하나님께서 분명하게 보여주신 것에 순종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요단강을 건널 때 하나님은 언약궤를 맨 제사장들이 강에 먼저 발을 들여 놓으면 그들 앞에 놓인 요단 강물을 가르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때 그들이 이 진리를 깨닫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즉시 말씀에 순종하였으며 그 결과 강물이 갈라져 안전하게 건너는 기적을 경험하였습니다.
흔히 하나님께서 강에 발을 들여놓기 전에 강물을 갈라 주셨다면 더 좋지 않았을까 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그들에게 순종을 요구하셨고, 그 순종으로 인해 그들은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였습니다. 하나님에 대한 순종이 바로 그의 능력을 경험하는 열쇠였던 것입니다.
하나님을 경험하기 위해서는 날마다 자신의 삶을 그에게 복종시켜야 합니다.
또한 자신의 의지를 그의 의지에 복종시키며 하나님을 하나님 되시게 해야 합니다.
순종을 통해 하나님의 계획을 알게 된다. 하나님의 말씀에 그대로 순종하는 것은 그분께서 나를 놀랍고도 영향력 있는 시역에 사용하시도록 드리는 것이며, 이를 통해 내 안에 있는 엄청난 가능성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집니다.
이북에는 김일성의 이름이 드러나게 하기 위해서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이름,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사진, 가는 곳마다 김일성의 동상이 있습니다. 이북에서는 김정일의 왕국, 김정일의 나라가 이루어지고 있어요. 이북에서는 김정일의 뜻, 김정일의 말, 김정일의 생각밖에 없어요. 그러니까 문제지요. 죄인인 내가 드러나니까 문제지요. 죄인인 내가 드러나니까 모두 죄인의 영향을 받아서 다 망하는 거야. 하나님의 이름만, 하나님의 나라가 임하시고, 하나님의 뜻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스라엘에 하나님의 이름만이 영화롭게 되고, 하나님의 뜻만이 이루어지고,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지기를 원하는 임금님이 있었어요. 그 임금님이 누구인지 아시죠? 다윗 왕입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내려다보시고 기쁨을 금치 못하셨어요.
다윗은 내 마음에 합한 자라했습니다. 다윗은 언제나 하나님의 은혜를 감사했어요.
내가 무엇이관데, 이 말은 다윗이 좋아하는 말이에요. 내가 무엇이관데, 내가 양 뒤꽁무니를 따라 다니는 목동이 하나님께서 나를 택하셔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주시고 사울에게 다 죽게 된 것을 다 보호해 주시고 결국은 사울의 왕국을 빼앗아서 나에게 주시는가? 내가 무엇이관데. 내가 죄인 아닌가?
다윗이 예루살렘에 와서 제일 처음에 한 것이 무엇인지 아세요? 내가 어떻게 이 나라를 다스릴 수 있는가? 내 이름으로 하면 되나? 내 왕국을 세우면 되는가? 내 뜻이 이루어지면 되는가? 하고 다윗이 다윗 성인 예루살렘에 와서 맨 처음에 한 것은 하나님의 임재를 상징하는 언약궤를 예루살렘에 모셨어요.
뜻을 따르는 자가 가장 복된 자가 됩니다.
갈렙과 여호수아는 하나님의 영광이 임했는지만 불신자에게는 하나님의 심판이 임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