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까지 따르는 믿음이 가져오는 결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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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53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열왕기하 2:1-14 끝까지 따르는 믿음이 가져오는 결실
바다와 노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노벨 문학상을 탄 훌륭한 작가요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 있는 그의 유명한 작품의 집필을 주로 했다는 아름다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안내하는 자의 말은 매우 낭만적이고 유모가 풍부한 자로 소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헤밍웨이에 대한 생각을 하며 저 망망한 대서양의 넓은 대해를 바라다보는 그의 집과 같은 시원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실상을 들어다 보면 결코 시원하다거나 또는 참으로 행복스럽다거나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보다는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의 삶의 결과를 볼 때에 오히려 그의 인생은 많은 방황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헤밍웨이의 막내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가 플로리다 마이애미 여자 교도소에서 사망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남자인 그가 왜 여자 교도소에서 죽었는가? 말입니다. 이 그레고리는 여성의 옷을 즐겨 입는 성도착 증세를 보이다가 마침내 여성이 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며 또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8월에는 마이애미 연안 키비스케인 섬에서 검은 하이힐과 목걸리 차림만을 하고서 나체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헤밍웨이의 가문을 보면 이 같이 변사를 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도 권총 자살을 했으며 그의 아버지도 권총으로 역시 자살을 했으며 그의 형제 자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문학의 대작을 남겼다 할지라도 끝까지 더 살아야 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아니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내가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를 느끼며 혹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방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와 갈등에서 무엇인가? 뚜렷한 삶의 방향이 설정이 되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위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내 자신이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못하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방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다 놓쳐 버리고 아까운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에게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에 숨을 지면서 하는 말이 있다면 아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할 말이 있다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숨 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주제요 주제가가 되어야 합니다 만은 그런데 그렇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는 데에는 참으로 우리의 불행입니다.
갈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오히려 사람과 사탄에게 조롱 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자체가 어두움이니 부정적이요, 폐쇄적이요, 혈육 적이요 그러니 여기에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 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의 삶에는 참으로 나는 행복하다는 마음과 그리고 내 삶이 가치가 있다라는 것을 한 번도 인생의 가치를 발견 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문득 문득 참으로 행복함을 느끼고 그리고 내가 이래봬도 내가 행하는 일이 참으로 가치가 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이 기대가 되어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사탄에게 조롱을 받는 인생의 삶과 신앙에 방황하는 자들이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고한 신앙을 가진 자가 되어 주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확고한 믿음의 의지를 가진 엘리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12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 중이었으니 그는 농사를 짓다가 부름을 받는 부농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의 삶의 목표가 더 많은 농사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보니 나의 삶이 농사를 짓는 그 일에만 목표를 두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엘리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농사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를 더 짓고 그리고 내 평생을 편안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자를 보시고 참으로 어리석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아가리라 그러면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인생의 최종의 목표가 너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까?
왜 우리 가운데서도 어리석고 허무한 삶을 좋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도 일러주어도 그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참으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는 말을 들을 찌니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 그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음은 그가 가진 세상의 목표를 과감히 던져 버릴 수가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면 그의 참된 목표인 곧 믿음으로 살겠다는 데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왕상 19:19-21 그 즉시 농사를 짓던 소를 버리고 그 소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사르고 백성들과 그 고기를 나눠먹고 엘리야를 쫓아 수종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엘리사는 내가 행해야 할 삶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쫓으라고 하실 때에 베드로는 배도 고기 잡은 그물도 그리고 부모도 처자도 버리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가지고 다 소유하고 갈려고 하니 어디 잘 갈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은 바람에 이는 물결 같으니 주께 무엇인가 받으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무슨 이유가 그렇게도 많고 무슨 핑계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러다가 언제 제대로 믿음의 삶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이 무슨 역사를 가져오겠습니까?
믿음 앞에서의 이유와 핑계는 결코 믿음으로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한 번도 믿음으로 살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결국은 이미 축복하신 가나안이 있지만 소유하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내가 받을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소유할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믿음의 비상한 각오를 몇 번씩이나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몫에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그 만큼의 희생의 대가가 따르지만 그것은 영광의 십자가요 그리고 그 기에는 내 믿음의 수고 그 이상으로 충분한 보상의 대가가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투자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식사고 증권사고 집사고 땅 사고 투자하기 보다 금으로 믿음을 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요구가 될 때에 복을 받을 자는 그 요구에 희생을 할 줄 아는 자가 되고요 복이 되지 못할 자는 믿음을 위한 희생을 죽어도 안 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다 좋다 말로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정적인 때에 인간적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말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수고하여 믿음이 성장되어 축복을 받을 만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믿음이 요구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그 요구를 피하여 버리더라구요
이것이 얼마나 슬픔이고 비극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신의 인간적인 요구대로 모든 일을 하여서 믿음의 요구를 따르지 않아서 좋은 결과가 되었느냐? 하면은 결코 그렇지 않더라구요?
더 어려움을 당하고 또 다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다시 믿음으로 행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행치 아니해서 따를 어려움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어떤 성도를 상담했는데 그 인생이 괴로워 참으로 죽기 일보 전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행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는데 그 당시에 받아 드리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요 아무리 잘 된다고 여길 줄 모르지만 믿음으로 하지 않으니 어려움이 올 것이다. 저는 눈에 보여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그냥 두겠습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그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줄 아십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 줄을 아십니까?
똑 같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그리고 똑 같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는 일을 한 자이지만 베드로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고 가륫유다는 저주의 사람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믿음의 요구가 주어 질 때에 믿음의 자리에 서는 기회를 만들었고 가륫유다는 끝까지 믿음의 요구를 외면하고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결실을 가져오는 자가 되기 위하여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제발 나를 희생 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배와 그물과 부모와 처자를 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버렸나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목회칼럼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만은 로마 핍박 당시에 10명의 기독인들이 혹독한 추위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끝까지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참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도저히 이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들을 파수하던 로마 병정이 제가 이 젊은이 되신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그 로마 병사의 눈에 10명의 천사가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장면이 눈에 보이는데 로마 병사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믿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믿음으로 행 할 수 있음은 그 믿음으로 장차 받을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니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행해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은 믿음으로 나아갔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기에 자손 대대로 거할 성이 준비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역시 이삭을 드리는 일로 시험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드렸으니 이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을 통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하늘의 별같이 번창 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요구를 절대로 피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으로 감당하며 그 후에 받을 은혜와 축복에 가슴이 설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설레는 일이 없는 성도들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행해 보지를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아느니 약속의 축복을 받을 일이 없으니 교회를 다니지만 오히려 가슴만 답답하고 하나님 앞에 캄캄하고 받을 일도 없고 하니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세상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그 믿음의 수고가 그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능력을 가진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물질적인 기적을 가져와 가난이 떠나게 하고 악한 병든 자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믿음을 따르는 결과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요단 건너편으로 갈 때에 엘리사는 결코 엘리야와 떨어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더욱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길갈에서 출발하여 벧엘을 거쳐 여리고를 지나 요단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이 때마다 그 지역의 신학생들은 다 엘리야와 작별 인사를 했지만 유독히 엘리사만은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너 여기서 작별하자 하니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결국은 엘리야가 가진 영감을 배나 얻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오르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바라 볼 때에 그 영감의 갑절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의 믿음의 요구를 감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축복의 길도 믿음입니다.
끝까지의 믿음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하면 버릴 것이 없고 축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 올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믿음이 길이요 축복이요 생명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는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믿음으로 결실을 기대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 결실의 가을에 믿음으로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바다와 노인으로 노벨 문학상을 탄 어네스트 헤밍웨이를 기억하실 것입니다.
그에 대한 기억은 노벨 문학상을 탄 훌륭한 작가요 그리고 미국 플로리다의 키웨스트에 있는 그의 유명한 작품의 집필을 주로 했다는 아름다운 그의 집을 방문했을 때에 안내하는 자의 말은 매우 낭만적이고 유모가 풍부한 자로 소개를 받았습니다.
지금도 헤밍웨이에 대한 생각을 하며 저 망망한 대서양의 넓은 대해를 바라다보는 그의 집과 같은 시원함을 느끼곤 합니다.
그러나 그의 삶의 실상을 들어다 보면 결코 시원하다거나 또는 참으로 행복스럽다거나 할 만한 것을 찾아보기보다는 그저 답답하기만 합니다..
그의 삶의 결과를 볼 때에 오히려 그의 인생은 많은 방황을 하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어제 신문에 헤밍웨이의 막내아들 그레고리 헤밍웨이가 플로리다 마이애미 여자 교도소에서 사망을 했다는 소식입니다. 남자인 그가 왜 여자 교도소에서 죽었는가? 말입니다. 이 그레고리는 여성의 옷을 즐겨 입는 성도착 증세를 보이다가 마침내 여성이 되기 위해 성전환 수술을 받았으며 또 알코올 중독과 우울증에 시달려 왔다는 것입니다. 지난 8월에는 마이애미 연안 키비스케인 섬에서 검은 하이힐과 목걸리 차림만을 하고서 나체로 거리를 돌아다니다가 경찰에 체포되어 심문을 기다리다가 죽었습니다.
헤밍웨이의 가문을 보면 이 같이 변사를 한 자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그 자신도 권총 자살을 했으며 그의 아버지도 권총으로 역시 자살을 했으며 그의 형제 자매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것입니다.
누구를 위하여 종은 울리나, 무기여 잘 있거라 등의 문학의 대작을 남겼다 할지라도 끝까지 더 살아야 할 인생의 의미를 찾지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가운데서도 저 사람은 왜 저렇게 밖에 살지 못할까? 아니 자기 자신을 보면서 내가 왜 인생을 이렇게 살아야 하나 회의를 느끼며 혹은 살아야 할 이유가 없어서 방황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 너무나도 많다는 것입니다.
이 같은 생각은 누구든지 한번쯤은 가졌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러한 회의와 갈등에서 무엇인가? 뚜렷한 삶의 방향이 설정이 되지 못한다면 참으로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게 될 것입니다.
저는 우리 주위에서 그러한 사람들을 만나 보게 됩니다.
무엇인가? 내 자신이 붙잡아야 할 것을 붙잡지 못하고 여기 기웃 저기 기웃 방황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다가 이것저것 다 놓쳐 버리고 아까운 세월을 보내는 사람들이 한 두명이 아닙니다.
이와 같은 모습이 오늘날 우리 신앙인들 에게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 시간에 숨을 지면서 하는 말이 있다면 아니 죽었다가 다시 깨어난다고 해도 할 말이 있다면 내 구주 예수를 더욱 사랑 숨 질 때 하는 말 이것일세 이것이 우리 성도들의 주제요 주제가가 되어야 합니다 만은 그런데 그렇지 않는 성도들이 있다는 데에는 참으로 우리의 불행입니다.
갈길 못 찾아 애쓰며 이리 저리로 헤매는 내 모양 저 원수 조롱하도다
오히려 사람과 사탄에게 조롱 받는 삶을 사는 성도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삶의 자체가 어두움이니 부정적이요, 폐쇄적이요, 혈육 적이요 그러니 여기에 무슨 희망을 볼 수 있으며 여기에 무슨 하나님의 축복을 가져 올 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자의 삶에는 참으로 나는 행복하다는 마음과 그리고 내 삶이 가치가 있다라는 것을 한 번도 인생의 가치를 발견 할 수가 없는 자입니다.
문득 문득 참으로 행복함을 느끼고 그리고 내가 이래봬도 내가 행하는 일이 참으로 가치가 있고 그리고 무엇인가 하나님의 축복이 기대가 되어 그러한 삶이 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자신을 한번 살펴봅시다.
저는 오늘 이 자리에 참여한 모든 성도들이 한 사람도 사탄에게 조롱을 받는 인생의 삶과 신앙에 방황하는 자들이 없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께 대한 믿음의 확고한 신앙을 가진 자가 되어 주의 축복을 받은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확고한 믿음의 의지를 가진 엘리사를 소개하려고 합니다.
엘리사가 엘리야의 부름을 받았을 때에 12겨리 소를 앞세우고 밭을 가는 중이었으니 그는 농사를 짓다가 부름을 받는 부농을 소유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는 지금까지의 삶의 목표가 더 많은 농사를 짓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나 엘리야의 부름을 받고 보니 나의 삶이 농사를 짓는 그 일에만 목표를 두고 머물러 있어서는 안 된다, 더 나은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야 하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약에 엘리사가 그것을 깨닫지 못했다면 누가복음에 나오는 어리석은 부자 농사꾼 같이 되었을 것입니다.
어리석은 부자는 창고를 더 짓고 그리고 내 평생을 편안하게 살 것이라는 생각이 그의 목표였습니다.
하나님은 이와 같은 부자를 보시고 참으로 어리석다 오늘밤에 네 영혼을 찾아가리라 그러면 네가 그렇게도 사랑하던 인생의 최종의 목표가 너 하고는 아무런 상관이 없느니라
이 얼마나 허무하게 끝날 것입니까?
왜 우리 가운데서도 어리석고 허무한 삶을 좋아하고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렇게도 일러주어도 그 말씀이 내 귀에 들어오지 않은 것이 참으로 불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들을 귀 있는 자는 성령이 하는 말을 들을 찌니 라고 했습니다.
엘리사 그가 참으로 복된 사람이라 할 수 있음은 그가 가진 세상의 목표를 과감히 던져 버릴 수가 있었다는데 있었습니다.
그리면 그의 참된 목표인 곧 믿음으로 살겠다는 데에 있습니다. 할렐루야!
왕상 19:19-21 그 즉시 농사를 짓던 소를 버리고 그 소를 잡고 소의 기구를 불사르고 백성들과 그 고기를 나눠먹고 엘리야를 쫓아 수종을 드렸다고 했습니다.
이제부터 엘리사는 내가 행해야 할 삶의 목표가 뚜렷하다는 것입니다.
신약 시대의 베드로를 연상케 하는 장면입니다.
예수님께서 나를 쫓으라고 하실 때에 베드로는 배도 고기 잡은 그물도 그리고 부모도 처자도 버리고 따랐다는 것입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예수님을 믿는 믿음을 위하여 무엇을 버렸습니까?
하나도 안 버리고 다 가지고 다 소유하고 갈려고 하니 어디 잘 갈 수가 있습니까?
이 사람은 바람에 이는 물결 같으니 주께 무엇인가 받으려고 생각하지 말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으로 살아가는데 무슨 이유가 그렇게도 많고 무슨 핑계가 그렇게도 많은지 그러다가 언제 제대로 믿음의 삶을 살수가 있겠습니까?
이러한 믿음이 무슨 역사를 가져오겠습니까?
믿음 앞에서의 이유와 핑계는 결코 믿음으로 살아 보겠다는 의지를 가지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광야의 이스라엘은 한 번도 믿음으로 살아 보지를 못했습니다.
결국은 이미 축복하신 가나안이 있지만 소유하지 못하고 다 죽고 말았습니다.
내가 받을 하나님의 축복은 오직 믿음으로만 소유할 축복이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를 따르는 자들에게 믿음의 비상한 각오를 몇 번씩이나 말씀 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라 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제 몫에 진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 라고 했습니다.
믿음에는 그 만큼의 희생의 대가가 따르지만 그것은 영광의 십자가요 그리고 그 기에는 내 믿음의 수고 그 이상으로 충분한 보상의 대가가 따르는 것입니다.
믿음의 투자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주식사고 증권사고 집사고 땅 사고 투자하기 보다 금으로 믿음을 사라고 했습니다.
마가복음 10:29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나와 및 복음을 위하여 집이나 형제나 자매나 어미나 아비나 자식이나 전토를 버린 자는 금세에 있어 집과 형제와 자매와 모친과 자식과 전토를 백 배나 받되 핍박을 겸하여 받고 내세에 영생을 받지 못할 자가 없느니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요구가 될 때에 복을 받을 자는 그 요구에 희생을 할 줄 아는 자가 되고요 복이 되지 못할 자는 믿음을 위한 희생을 죽어도 안 하는 것입니다.
믿음 좋다 좋다 말로만 하면 무엇하겠습니까? 결정적인 때에 인간적으로 돌아가 버리는데 말입니다.
저는 성도들에게 믿음을 성장시키기 위하여 수고하여 믿음이 성장되어 축복을 받을 만한 단계에 이르러서는 믿음이 요구하는 것을 해야 하는데 그 요구를 피하여 버리더라구요
이것이 얼마나 슬픔이고 비극인지 모릅니다.
그러면 그 사람이 자신의 인간적인 요구대로 모든 일을 하여서 믿음의 요구를 따르지 않아서 좋은 결과가 되었느냐? 하면은 결코 그렇지 않더라구요?
더 어려움을 당하고 또 다시 하나님은 그 사람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또 다시 믿음으로 행하도록 기회를 주시는 것입니다.
여러분 믿음으로 행치 아니해서 따를 어려움을 어떻게 감당하시려고 합니까?
제가 어떤 성도를 상담했는데 그 인생이 괴로워 참으로 죽기 일보 전이었습니다.
믿음으로 행해야 할 일을 일러주었는데 그 당시에 받아 드리지 않더라고요 그런데 그 결과가 어떠하였습니까?
저는 벌써부터 알고 있었지요 아무리 잘 된다고 여길 줄 모르지만 믿음으로 하지 않으니 어려움이 올 것이다. 저는 눈에 보여요 하나님이 사랑하시는데 그냥 두겠습니까?
믿음으로 살지 않는 그 자체가 얼마나 두려운 줄 아십니까?
그리고 믿음으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인 줄을 아십니까?
똑 같은 예수님의 제자이지만 그리고 똑 같이 예수님께 합당하지 않는 일을 한 자이지만 베드로는 축복의 사람이 될 수가 있었고 가륫유다는 저주의 사람이 된 이유가 무엇입니까?
베드로는 믿음의 요구가 주어 질 때에 믿음의 자리에 서는 기회를 만들었고 가륫유다는 끝까지 믿음의 요구를 외면하고 인간의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였다는데 있습니다.
오늘 우리 성도들이 믿음의 결실을 가져오는 자가 되기 위하여 주를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제발 나를 희생 할 줄 아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베드로는 주와 복음을 위하여 배와 그물과 부모와 처자를 버렸나이다 라고 하였는데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주와 복음을 위하여 내가 무엇을 버렸나이다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번 목회칼럼에서도 기록되었습니다 만은 로마 핍박 당시에 10명의 기독인들이 혹독한 추위에 예수님을 믿는다는 이유 때문에 얼음 구덩이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모두가 끝까지 순교의 정신을 가지고 참고 있는데 그 중에 한 사람이 도저히 이 고통을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그 자리에서 나오고 말았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서 그들을 파수하던 로마 병정이 제가 이 젊은이 되신 예수를 믿겠습니다. 라고 하며 달려가는 것입니다.
그 이유인 즉은 그 로마 병사의 눈에 10명의 천사가 면류관을 가지고 내려오다가 한 천사가 눈물을 흘리면서 하늘로 다시 올라가는 장면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 장면이 눈에 보이는데 로마 병사이지만 가만히 있을 수가 있겠습니까?
바로 이것입니다. 네가 믿겠다는 것입니다.
모든 것을 희생하면서 믿음으로 행 할 수 있음은 그 믿음으로 장차 받을 은혜와 축복을 생각하니 그냥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믿음으로 행해보십시오
믿음은 바라는 것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라 하면서 믿음의 조상 아브라함은 갈 바를 알지 못했지만은 믿음으로 나아갔으니 이는 하나님의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하였습니다. 그기에 자손 대대로 거할 성이 준비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 역시 이삭을 드리는 일로 시험을 받았지만 믿음으로 드렸으니 이는 능히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리실 줄로 생각을 하였다는 것입니다. 그 자식을 통해 바닷가의 모래알 같이 하늘의 별같이 번창 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그러니 참으로 믿음의 사람은 믿음의 요구를 절대로 피하지 아니하며 오히려 믿음으로 감당하며 그 후에 받을 은혜와 축복에 가슴이 설레는 사람들입니다.
한번도 하나님의 은혜와 축복을 받을 것을 생각하면서 가슴을 설레는 일이 없는 성도들은 무엇인가 믿음으로 행해 보지를 못하였다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행치 아느니 약속의 축복을 받을 일이 없으니 교회를 다니지만 오히려 가슴만 답답하고 하나님 앞에 캄캄하고 받을 일도 없고 하니 바라보는 것이라고는 세상 밖에 없는 것입니다.
엘리사의 그 믿음의 수고가 그로 하여금 참으로 많은 능력을 가진 복된 자가 되었습니다.
많은 물질적인 기적을 가져와 가난이 떠나게 하고 악한 병든 자를 치유하고 심지어는 죽은 자를 살리고 나라를 구하는 엄청난 일을 했습니다.
이것이 모두 믿음을 따르는 결과입니다.
엘리야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고 하늘로 올라가기 위하여 요단 건너편으로 갈 때에 엘리사는 결코 엘리야와 떨어 질 수가 없었습니다.
그것은 더욱 큰 믿음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는 간절한 마음이었습니다.
길갈에서 출발하여 벧엘을 거쳐 여리고를 지나 요단을 건너가야만 했습니다.
이 때마다 그 지역의 신학생들은 다 엘리야와 작별 인사를 했지만 유독히 엘리사만은 엘리야를 끝까지 따르겠다는 것입니다.
너 여기서 작별하자 하니 아닙니다.
생명을 걸고 서라도 따라가겠습니다.
결국은 엘리야가 가진 영감을 배나 얻었습니다.
엘리야가 하늘로 오르는 그 순간까지 끝까지 바라 볼 때에 그 영감의 갑절이 임할 것이라는 것입니다.
끝까지의 믿음의 요구를 감당하였다는 말입니다.
여러분의 희망은 믿음입니다.
그리고 여러분의 축복의 길도 믿음입니다.
끝까지의 믿음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 하면 버릴 것이 없고 축복이 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믿음으로 아름다운 결실을 가져 올 것들이 너무나도 많습니다.
믿음이 길이요 축복이요 생명입니다.
무엇이든지 믿음으로는 할 수 있는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여러분들은 이 믿음으로 결실을 기대 할 수 있는 자들입니다.
이 결실의 가을에 믿음으로 풍성한 결실을 가져오는 참으로 믿음의 사람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