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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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7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누가복음 12:22-31 무엇을 위하여 살아야 하나?
만유인력을 발견한 존 뉴턴이 난로 가에 앉아서 책을 열심히 읽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부르더니 난로 불이 너무 뜨거우니 불 좀 낮추라고 말합니다. 그 난로는 장작을 사용해서 불을 지피는 것이므로 당장 줄이기는 힘듭니다. 요즘의 전깃불이나 가스 불처럼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어떻게 낮춥니까? 하녀는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시면 되지 않겠어요? 지금 뉴턴은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느라고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녀는 금방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에 따라, 즉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누가 물어도 누구에게 물어도 그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도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 한 목숨 위하여 살아간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바보가 아니고서는 아니 바보도 다 챙기는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이 순간까지 이 한 목숨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자 이만 하면 됐다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십대로부터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까지 계시는데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나를 위한 일을 살아 왔으니 이제는 만족하다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누구도 그렇다 할 자가 없습니다.
일직이 모세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논하였습니다.
시90편 10절에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인생의 년 수가 자신을 위하여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만을 위하여 살아 왔다면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자랑을 하려고 하면 공중에 나는 까마귀보다 나를 것이 무엇이 있고 들의 들풀보다 잘 살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은 많은 걱정과 근심이 따를 뿐입니다.
오늘날까지 살아오시면서 잠시 잠깐 이라도 이 세상의 생활의 염려에서 자유 하신 적이 있습니까?
결코 자유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에 나는 걱정이 많는 사람입니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도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살기를 계속한다면 이 세상의 염려에서 결코 자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멀리 바라보지 말고 지난 일 주일 동안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서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었는지 선뜻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난 한 주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었는지는 답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목숨 위하여 나를 위하여 열심히 돈 벌고 자식새끼 키우고 남에게 해 안 입히고 살았습니다.
이게 최상의 대답 일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질문 앞에 인류의 조상 아담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고는 숨어 버렸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질문 앞에 아담의 아들 가인은 한 순간의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해 동생 아벨을 들로 끌고 가 돌로 쳐죽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씻고 되돌아갔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생각조차 하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충분하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을 살해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나 나만을 위한 삶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 나는 일들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일러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 한 생명을 위한 삶은 오로지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결코 잘 사는 삶이 아니라 근심 걱정이 많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 증거로 현대인은 수 없이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있지만 밤잠을 설칠 만큼 심각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거리들 중의 어느 것이 진짜일까? 이런 것을 연구한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공연한 걱정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이고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을 이제 와서 걱정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이를테면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이다. 10%는 병에 관한 걱정인데 그 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고 아니면 쓸데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지극히 적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걱정하지 말고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이 염려는 지독한 전염성이 강한 못된 병입니다.
한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전염되어 같은 병을 앓게 됩니다. 남편이 염려하면 아내가 염려하게 됩니다. 부모가 염려하면 자녀들이 염려하게 됩니다. 사장이 염려하면 사원들이 염려하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아 염려하고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어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로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는 사실은 감사 할 일입니다. 그분은 세상 통치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종종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의 사정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문고를 두드리기도 했고 오늘날은 시위를 하기도 하고 시장이나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번거롭고 힘든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여러 가지 필요가 있음을 아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필요까지도 아십니다. 영적인 필요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이미 범죄한 가인을 찾아오시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물으신 것은 그 범죄의 문책을 위함이 아니라 다시 한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그 질문 앞에서 가인은 비로소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한 피를 나눈 형제를 쳐죽인 부끄러운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엎지르진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 앞에서 가인은 남아 있는 여생만큼은 다시 새롭게 바로 가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향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 모든 인간을 향하여 매순간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여태까지 네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온 결과가 무엇이냐? 이제부터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그 이유에 합당한 삶을 살고 남은 생애가 참으로 복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네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31).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염려는 그만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은 좀더 자세하게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염려가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을 것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삶을 둘러싼 환경이 추하고 가혹하게 여겨질지라도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생명이 있는 이 기회를 무엇을 먹을까? 만을 위하는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한 삶에서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더 나아가 사람의 영혼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일시적인 삶도 그처럼 귀한데 영원한 삶은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영원한 삶 즉 영생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그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짐꾼입니다. 저 높은 정상을 올라가기 위해 많은 장비가 필요 하는데 산 중턱까지 짐을 옴겨주는사람을 헬퍼(helper)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도 절대적인 능력과 힘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헬퍼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헬퍼가 되십니다. 우리 주 성령님이 우리의 헬퍼이십니다. 네 짐을 내게 다 맡겨라 염려도 맡겨라 네 길도 맡겨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짐을 맡긴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짐을 맡기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짐을 맡기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무얼 택하겠느냐? 여러분, 택하십시오. 생명과 사망, 뭘 택하실겁니까? 입으로 시인하세요. 그러면 생명을 택하는데 어디가 생명이 있습니까? 눈에 보입니까? 어디에 표가 써 붙여 있나요? 당연히 누구나 생명을 택하고 복을 택하는 것이지만, 그런 막 연한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죠. 어떻게 하는 게 생명을 택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그 길을 또한 예비해 두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해답이 여기에 나와있어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생명을 택하는데 어떻게 생명을 택하는 건지 그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예수님을 믿는 자, 그 예수님을 붙잡는 자만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붙잡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냐. 밤이나 낮이나 예수님, 어디를 가나 예수님. 왜요? 예수님만이 내 생명 줄이니까 어디를 가나 예수님을 붙잡고 살고,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 이것을 어디 가서나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뭐 보이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자만이 그 나라를 위하여 사는 자요 또한 세상의 염려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도록 눈과 날개와 부리를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십니다. 까마귀가 직접 심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백합화에게 아름다운 모양과 영광을 주십니다. 아무리 잘 만든 조화라 할지라도 물기를 머금기도 하고 성장의 변화가 나타나는 생화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백합화 한 송이를 가리키며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은 이처럼 하찮은 새 한 마리와 꽃 하나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물 중 하나님께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것들을 붙들고 안 주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본문 32절에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고, 디모데전서 6:17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
만유인력을 발견한 존 뉴턴이 난로 가에 앉아서 책을 열심히 읽다가 갑자기 큰 소리로 하녀를 부르더니 난로 불이 너무 뜨거우니 불 좀 낮추라고 말합니다. 그 난로는 장작을 사용해서 불을 지피는 것이므로 당장 줄이기는 힘듭니다. 요즘의 전깃불이나 가스 불처럼 쉽게 조절되는 것이 아닙니다. 타오르는 장작불을 어떻게 낮춥니까? 하녀는 잠시 바라보더니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선생님께서 의자를 조금 뒤로 물리시면 되지 않겠어요? 지금 뉴턴은 매우 중요한 것을 생각하느라고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된다는 사소한 사실을 깨닫지 못했지만 그러나 하녀는 금방 의자를 뒤로 물리면 되겠다는 생각을 가졌던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무엇부터 생각하느냐? 에 따라, 즉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에 따라 그 결과가 달라집니다.
오늘날의 대다수의 사람들은 어떤 생각을 가지고 무엇을 위하여 살아가느냐? 그러므로 그 결과가 어떠하냐는 것입니다.
누가 물어도 누구에게 물어도 그 대답은 한결 같았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하신 여러분들도 이렇게 대답을 할 것입니다.
이 한 목숨 위하여 살아간다고...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바보가 아니고서는 아니 바보도 다 챙기는 사실이 아닙니까?
사실 저와 여러분들은 오늘 이 순간까지 이 한 목숨 위하여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이렇게 살아오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그 결과가 어떠하십니까?
만족하십니까? 자 이만 하면 됐다 싶습니까? 그렇지 않습니다.
오늘 이 자리에는 십대로부터 20대, 30대, 40대, 50대, 60대, 70대, 80대까지 계시는데 이 나이 먹을 때까지 나를 위한 일을 살아 왔으니 이제는 만족하다 할 수가 있습니까?
그 누구도 그렇다 할 자가 없습니다.
일직이 모세는 우리 인생을 이렇게 논하였습니다.
시90편 10절에 우리의 년 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년 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 뿐이요
인생의 년 수가 자신을 위하여서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입을까? 만을 위하여 살아 왔다면 결코 자랑 할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차라리 그러한 자랑을 하려고 하면 공중에 나는 까마귀보다 나를 것이 무엇이 있고 들의 들풀보다 잘 살았다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오히려 그것들 보다 못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삶은 많은 걱정과 근심이 따를 뿐입니다.
오늘날까지 살아오시면서 잠시 잠깐 이라도 이 세상의 생활의 염려에서 자유 하신 적이 있습니까?
결코 자유 할 수가 없었을 것입니다.
여러분들의 얼굴에 나는 걱정이 많는 사람입니다 라고 쓰여져 있습니다.
왜 그런 줄 아십니까?
나을 위하여 무엇을 해야 할 것인가 만을 생각하고 그렇게 살아 왔기 때문입니다.
만약에 앞으로도 여러분 자신만을 위하여 살기를 계속한다면 이 세상의 염려에서 결코 자유 할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제 여러분들께 묻겠습니다. 우리의 삶을 살펴봅시다.
멀리 바라보지 말고 지난 일 주일 동안 여러분들께서는 무엇을 하고 계셨습니까?
이 질문을 받고서 내가 지난 일주일 동안 무엇을 했었는지 선뜻 기억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바로 지난 한 주간 동안 내가 무엇을 하며 살았었는지는 답변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이 한 목숨 위하여 나를 위하여 열심히 돈 벌고 자식새끼 키우고 남에게 해 안 입히고 살았습니다.
이게 최상의 대답 일 것입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질문 앞에 인류의 조상 아담은 자기 자신의 만족을 위해 선악을 알게 하는 과일을 따먹고는 숨어 버렸습니다.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하나님의 질문 앞에 아담의 아들 가인은 한 순간의 질투심을 억누르지 못해 동생 아벨을 들로 끌고 가 돌로 쳐죽이고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손을 씻고 되돌아갔습니다. 자신이 도대체 무엇을 하였는지 생각조차 하려 하지를 않았습니다. 죄의식을 느끼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에게는 아벨을 죽일 수밖에 없는 충분하고도 합리적인 이유가 있다고 여겼기 때문이었습니다. 동생을 살해하는 것으로 모든 문제는 다 해결되었다고 생각했습니다.
오직 나 나만을 위한 삶 이것은 문제의 해결이 아니라 또 다른 문제의 시작이었습니다.
우리 주위에서 흔히 일어 나는 일들이 아닙니까?
오늘 본문에서도 우리에게 일러주는 말씀이 무엇입니까?
나 한 생명을 위한 삶은 오로지 세상의 걱정과 근심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니 결코 잘 사는 삶이 아니라 근심 걱정이 많은 인생이 될 것입니다.
그 증거로 현대인은 수 없이 많은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중에는 순간적으로 머리를 스치고 지나가는 것도 있지만 밤잠을 설칠 만큼 심각한 것도 있습니다. 그런 걱정거리들 중의 어느 것이 진짜일까? 이런 것을 연구한 어느 미국 대학의 심리학 팀이 있었습니다.
그 조사결과를 보면 사람들의 걱정거리 중 40%가 실제로 일어나지 않는 공연한 걱정을 그 만큼 많이 한다는 것이고 걱정거리 중의 30%는 이미 과거에 있었던 지나간 일에 대한 것을 이제 와서 걱정을 한다고 되는 일이 아닌 이를테면 쓸데없는 걱정거리들이다. 10%는 병에 관한 걱정인데 그 중엔 실제는 걸리지 않을 병에 관한 것도 많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진짜로 걱정할만한 것은 8% 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8% 중에서도 정말로 머리를 싸매고 걱정할만한 것은 별로 없다는 결론이었습니다,
그러니 사람은 아무리 걱정해야 소용도 없는 일들에 대해 걱정들을 하고 있고 아니면 쓸데없는 걱정들을 가지고 괴로워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 주님이 지극히 적은 것도 마음대로 못하니 걱정하지 말고 능력이 많으신 주님께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러고 이 염려는 지독한 전염성이 강한 못된 병입니다.
한 사람이 염려하게 되면 그의 주변 사람들이 전염되어 같은 병을 앓게 됩니다. 남편이 염려하면 아내가 염려하게 됩니다. 부모가 염려하면 자녀들이 염려하게 됩니다. 사장이 염려하면 사원들이 염려하게 됩니다. 부자는 재물이 많아 염려하고 가난한 사람은 재물이 없어 염려합니다. 예수님은 먹고 마시는 문제로 걱정하는 제자들에게 염려하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왜요?
예수님은 너희는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하여 구하지 말며 근심하지도 말라 이 모든 것은 세상 백성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아버지께서 이런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될 줄을 아시느니라고 하셨습니다. 할렐루야!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아신다는 사실은 감사 할 일입니다. 그분은 세상 통치자들과 같지 않습니다. 종종 개인이나 단체가 자신들의 사정을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해서 노력하고 있습니다. 옛날에는 신문고를 두드리기도 했고 오늘날은 시위를 하기도 하고 시장이나 대통령에게 진정서를 보내기도 합니다.
우리는 우리의 필요를 하나님께 알리기 위해서 그렇게 번거롭고 힘든 절차를 밟을 필요가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현재와 과거를 아시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의식주가 필요함을 아십니다. 그뿐만 아니라 우리에게 다른 여러 가지 필요가 있음을 아십니다. 더 나아가서 우리 자신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는 필요까지도 아십니다. 영적인 필요가 바로 그런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알고 계십니다. 그러니 염려하지 마시기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필요를 채워 주기를 기뻐하시기 때문입니다. 할렐루야!
그렇기 때문에 자신을 위하여 이미 범죄한 가인을 찾아오시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 물으신 것은 그 범죄의 문책을 위함이 아니라 다시 한번 새로운 인생을 살게 하기 위하심입니다.
하나님의 그 질문 앞에서 가인은 비로소 인류 최초의 살인자, 그것도 한 피를 나눈 형제를 쳐죽인 부끄러운 자기 자신의 실상을 보았지만, 그것은 이미 엎지르진 물이었습니다. 그러나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는 하나님의 이 질문 앞에서 가인은 남아 있는 여생만큼은 다시 새롭게 바로 가꿀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있다는 것입니다.
가인을 향해 네가 무엇을 하였느냐고 물으셨던 하나님께서는 그 이후 모든 인간을 향하여 매순간마다 네가 무엇을 하고 있느냐 묻고 계십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지 아십니까?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여태까지 네 자신만을 위하여 살아온 결과가 무엇이냐? 이제부터라도 인간으로 태어난 그 이유에 합당한 삶을 살고 남은 생애가 참으로 복 되라고 하시는 말씀입니다. 할렐루야!
네가 지금까지 무엇을 하였느냐?
우리가 먼저 해야 할 것이 있기 때문입니다(31).
예수님은 자기 자신을 위한 염려는 그만하고 오직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구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6:33은 좀더 자세하게 주님의 말씀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이것은 우리가 제일 먼저 해야 할 일이 염려가 아님을 깨닫게 해 줍니다. 할렐루야!
예수님은 목숨이 음식보다 귀하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먹을 것이 없더라도 살아 있는 것이 중요합니다. 입을 것이 없어도 마찬가지입니다. 몸이 의복보다 중요한 것입니다. 삶을 둘러싼 환경이 추하고 가혹하게 여겨질지라도 삶은 아름다운 것입니다. 살아 있다는 것이 고통이라고 생각하지 말고 선을 위한 가장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살아 있는 사람에게만 주어지는 기회입니다.
생명이 있는 이 기회를 무엇을 먹을까? 만을 위하는 자신만을 위하지 말고 하나님의 나라를 위하여 살아가라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한다는 것은 무엇입니까?
자신을 위한 삶에서 다른 이들을 생각하며 더 나아가 사람의 영혼을 위한 삶을 사는 것을 말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뜻이요 하나님을 위하여 사는 삶입니다.
이 땅위에서의 일시적인 삶도 그처럼 귀한데 영원한 삶은 얼마나 더 귀하겠습니까? 영원한 삶 즉 영생에 관심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회개하고 예수님을 구주로 영접하면 구원받고 영생을 얻습니다.
그리고 그를 믿고 그의 말씀에 따라 살아가면 됩니다.
세계의 지붕 에베레스트산을 올라가기 위해서는 반드시 도움을 받아야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로 짐꾼입니다. 저 높은 정상을 올라가기 위해 많은 장비가 필요 하는데 산 중턱까지 짐을 옴겨주는사람을 헬퍼(helper)라고 합니다. 우리의 인생의 길에서도 절대적인 능력과 힘으로 우리를 인도하시는 헬퍼가 필요합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헬퍼가 되십니다. 우리 주 성령님이 우리의 헬퍼이십니다. 네 짐을 내게 다 맡겨라 염려도 맡겨라 네 길도 맡겨라고 하십니다. 우리에게는 우리들 자신이 감당할 수 없는 무거운 짐이 있습니다. 주님 앞에 내려놓아야 합니다.
성도 여러분! 짐을 맡긴다는 것은 그렇게 쉽지만은 않습니다. 그것은 반드시 믿음이 있어야 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그 짐을 맡기지 못합니다. 믿음이 없는 사람은 짐을 맡기는 방법도 알지 못합니다.
너와 네 자손이 살기 위해서 무얼 택하겠느냐? 여러분, 택하십시오. 생명과 사망, 뭘 택하실겁니까? 입으로 시인하세요. 그러면 생명을 택하는데 어디가 생명이 있습니까? 눈에 보입니까? 어디에 표가 써 붙여 있나요? 당연히 누구나 생명을 택하고 복을 택하는 것이지만, 그런 막 연한 소리가 어디에 있습니까? 구체적인 방법이 있어야죠. 어떻게 하는 게 생명을 택하는 것이냐. 하나님께서 그 길을 또한 예비해 두셨습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 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바로 해답이 여기에 나와있어요.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고, 생명을 택하는데 어떻게 생명을 택하는 건지 그 구체적인 방법은 우리에게 생명을 누리게 하시려고 독생자를 보내셔서 그 예수님을 믿는 자, 그 예수님을 붙잡는 자만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는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살기 위해서 살아 계신 하나님의 영광을 보여주기 위해서 간절히 마음을 다하여 붙잡는 것입니다. 너는 누구를 붙잡고 사는 사람이냐. 밤이나 낮이나 예수님, 어디를 가나 예수님. 왜요? 예수님만이 내 생명 줄이니까 어디를 가나 예수님을 붙잡고 살고, 그분을 바라보고 의지하고 사는 사람. 이것을 어디 가서나 확실히 보여 주어야 합니다. 뭐 보이려고 해서 그런 게 아니라 그렇게 사는 자만이 그 나라를 위하여 사는 자요 또한 세상의 염려에서 자유 할 수 있는 사람이 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까마귀에게 먹을 것을 구할 수 있도록 눈과 날개와 부리를 주시고 먹을 것도 주십니다. 까마귀가 직접 심지 않은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것을 먹도록 하십니다.
하나님은 백합화에게 아름다운 모양과 영광을 주십니다. 아무리 잘 만든 조화라 할지라도 물기를 머금기도 하고 성장의 변화가 나타나는 생화와 비교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은 백합화 한 송이를 가리키며 솔로몬의 모든 영화로도 견줄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의 돌보시는 손길은 이처럼 하찮은 새 한 마리와 꽃 하나에까지 미치고 있습니다. 하물며 너희일까 보냐? 사람은 하나님의 형상을 닮도록 만들어졌기 때문에 만물 중 하나님께 가장 귀한 존재입니다. 그 하나님은 사람들을 사랑하십니다. 특히 구원받은 자녀들을 사랑하십니다. 그분은 우리를 사랑하셔서 독생자까지 아낌없이 주셨습니다. 그런데 그보다 훨씬 못 미치는 것들을 붙들고 안 주실 이유가 어디 있겠습니까?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은사로 주지 아니하시겠느뇨(롬8:32)
본문 32절에는 하나님께서 그 나라를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신다고 기록되어 있고, 디모데전서 6:17은 하나님을 우리에게 모든 것을 후히 주사 누리게 하시는 하나님으로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분은 신자들에게 모든 것을 주시기 원하십니다. 따라서 염려하지 말아야 합니다.
참으로 우리가 구하여야 할 것은?
먼저 하나님의 나라를 구하는 삶이 되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