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에 긍정이 하나님의 결실을 봅니다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700회 작성일 2011-09-13 10:37

본문

누가복음 5:1-11 말씀에 긍정이 하나님의 결실을 봅니다
핀란드 헬싱키에 가면 락크 처치라고 1969년도에 세워진 바위로 만든 템펠리아우키오 교회가 있습니다. 그 사연은 한 교회가 헬싱키 가운데 큰 교회를 짓기로 결정을 내렸지만 시에서 허락하지 않았습니다. 이미 교회가 충분히 많으니까 교회를 시내 한가운데 허락할 수 없다고... 그래서 그 교회에서 광고를 냈습니다. 누구든지 헬싱키 시내에 교회를 짓는 방법을 말해주면 큰 상급을 주겠다. 그런데 다 이 아이디어에 대해서 비웃는데 공과대학을 나온 한 젊은이가 도전을 했습니다. 바위산이기 때문에 개발도 못하고 집도 못 지어서 시내 한가운데 바위산으로 있었습니다. 그 위에 올라가서 시내를 바라보면서 헬싱키 시내에 교회를 지을 수 있도록 기도를 하고 있는데 성령께서 마음속에 말씀하기를 네가 앉아있는 그곳이 바로 교회다. 아무도 바위를 파서 교회를 만들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시에 가서 요청을 했습니다. 바위산을 교회로 파도록 허락해 달라고... 이미 버린 산인데 못할 이유가 없습니다. 시에서 허락해 주어서 바위를 파내서 교회를 만드는데 굉장히 아름답습니다.
자연 채광으로 조명을 하고 3100개의 파이프로 오르간을 만들고 자연과 조화된 교회를 만들어 놓으니까 교회도 좋고 시도 좋은 게 오는 사람마다 구경하러 가는 것입니다. 관광객이 늘었습니다. 시 수입이 늘었습니다.
사람의 생각과 하나님의 생각은 이처럼 다른 것입니다.
그 하나님께서는 바위 교회를 만들 수 있는 기회를 모든 사람에게 주었는데 다른 사람들은 아예 할 수 없다는 생각을 가졌기 때문에 하나님의 음성을 듣을 수가 없으니 이런 아름다운 교회를 지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내 생각을 버리고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이면 생활 속에 큰 기적이 일어날 때가 많습니다.
일반적인 내 생각으로는 도저히 이룰 수가 없는 방법이지만 이와 같이 기적적으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서 오는 것입니다.
사람으로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할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하나님께 귀를 기울이면 하나님께서 전혀 다른 곳에서 길을 열어 주시는 것입니다.
사55:8-9 이는 내 생각이 너희의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의 길과 다름이니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이는 하늘이 땅보다 높음 같이 내 길은 너희의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의 생각보다 높음이니라
본문에서도 어부로서 평생에 경험해보지 못한 상상 밖의 경험을 하고 주의 종이 된 사람 베드로의 놀라운 결과를 보고 있지 않습니까?
시간도 다르고 장소도 달랐지만 역사는 일어났습니다. 그러니 사람도 바꿔져 버렸습니다.
무엇을 먹을까? 마실까? 입을까? 일용할 양식에 목이 멘 사람이 하나님께 목이 멘 사람이 되었습니다.
자신하나 만족을 하지 못한 사람이 많은 사람을 만족시키는 사람이 되지 않았습니까?
10-11절 세베대의 아들로서 시몬의 동업자인 야고보와 요한도 놀랐음이라 예수께서 시몬에게 이르시되 무서워하지 말라 이제 후로는 네가 사람을 취하리라 하시니 그들이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조금 전만 해도 생활고에 메여 목구멍이 포도청이라 고기 잡기 위하여 그물을 챙기던 자가 모든 것을 버리고 예수를 따라 갔습니다.
인생의 희로애락을 생활고에 얽매여 있는 자가 아니라 그것에서 자유함을 얻고 많은 사람을 살리는 인격이 되시기를 기원합니다.
이 시간에 먹을 것 입을 것을 추구하다가 예수님을 만나 팔자가 바뀌는 여러분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어떻게 그런 인물이 될 수 있습니까?
내 의지가 아니라 하나님의 의지로 내 생각이 아니라 하나님의 생각으로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생각은 당연히 인간의 의지와 생각과는 다른 것입니다.
하나님의 의지, 하나님의 생각은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베드로가 어떻게 바꿔 씁니까?
그의 고집 삶의 고집 경험 지혜 생각 의지가 지금까지 이 나이 먹도록 형성 되어온 베드로가 자신과는 전혀 다른 일을 자기가 아닌 일을 어떻게 하였습니까?
5절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말씀에 의지하여 내가 그물을 내리리이다 하고
베드로가 이 일을 한 것은 예수님의 말씀 때문이라고 하였습니다.
말씀을 들음으로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생겼습니다.
17절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베드로가 언제 말씀을 들었습니까요?
오늘 한번 실패를 하고 내일 기대를 하는 그 삶의 현장에서 이었습니다.
1-2절 호숫가에 배 두 척이 있는 것을 보시니 어부들은 배에서 나와서 그물을 씻는지라 예수께서 한 배에 오르시니 그 배는 시몬의 배라 육지에서 조금 떼기를 청하시고 앉으사 배에서 무리를 가르치시더니
일은 하고 있었지만 귀는 예수님의 가르침에 기우리고 있었다는 것입니다.
흔히, 인도의 종교를 명상(瞑想)의 종교, 그리스-로마의 종교를 눈(目)의 종교, 셈 족계(유대교, 이슬람교, 그리스도교)종교를 귀(耳)의 종교라고 합니다.
이렇게 말하는 이유는, 인도 종교는 명상이 발달했고, 그리스-로마 종교는 미술과 관련해서 보는 것이 발달한 종교이고, 셈 족계 종교는 말씀을 듣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종교의 특색이 나누어지는 것은 그 종교가 속해 있는 지역과 상관관계가 높습니다.
인도는 건기와 우기가 따로 있습니다. 그래서 건기 때는 열심히 일을 하지만, 우기 때에는 별로 할 일이 없습니다. 그래서 명상이 발달했습니다.
그리스는 화려한 대리석과 에메랄드빛 바다가 아주 일품입니다. 다시 말해 주변 경관이 아주 수려하다는 뜻입니다. 그래서 이 지역에서는 일찍이 그림이 발달을 합니다. 보는 것에 아주 장점을 지니게 되었다는 뜻입니다.
셈 족계 종교는 사막과 관련이 있습니다. 사막은 허허벌판입니다. 인도처럼 명상을 할 수 있는 여건도 좋지 않습니다. 그리스처럼 볼 수 있는 것도 없습니다. 보이는 것이라고는 모래뿐입니다.
그러나 사막에서 듣는 것은 아주 중요한 것입니다. 아무 것도 보이지 않고, 아무것도 들리지 않다가 갑자기 무슨 소리가 들리면 그때부터는 비상입니다. 들리는 순간 뛰어야 합니다. 그것도 혼자만 피하면 되는 것이 아니라, 가축들도 함께 피해야 합니다.
사막에서 돌풍이 불기 때문입니다. 돌풍은 소리가 먼저 들리고, 한참이 지나서야 모습을 드러내기 때문입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난다고 사도바울은 이야기합니다.
이 말은 단순히 청각작용을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사막에서 듣지 못하면 죽는 것입니다. 따라서 듣는다는 것에 모든 것을 건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성경의 말씀으로 말하면, 마음과 뜻과 정성을 다한다는 의미입니다.
온 생명을 걸어야 믿음이 생긴다는 의미입니다. 삶의 전부를 다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는 나의 삶의 현장에서 생업을 위하여 밤낮 제대로 자지 못하고 먹지 못하고 입는 것 제대로 못 입고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살아오신 결과는 어떻습니까?
인간의 삶에는 만족이 없습니다.
사람의 욕심 때문만이 아니라 수고하여 행복을 누릴 만큼 세상은 기다려 주지 않습니다.
목표에 도달했다 싶으면 세상은 한 걸음 더 껑충 달아나고 맙니다.
베드로가 밤새 수고했지만 소득이 없었습니다.
이 현장에서 베드로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듣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물을 씻는 베드로 곁에서 갈릴리 해변에서 말씀을 가르치셨듯이 바로 지금 여러분이 살고 있는 주위에서 예수님의 말씀이 전파되고 있습니다.
베드로는 밤새 고기잡이에 지쳐 있었지만 실망하지 않고 다음 고기잡이를 위해서 그물을 씻으면서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있었습니다.
내 삶의 현실에서 실망하지 말고 최선을 다하십시오.
그리고 내 가까이에서 말씀하시는 예수님의 복음을 들어야 합니다.
베드로가 말씀을 듣고 있었듯이 주님의 말씀을 듣는 축복이 있기를 바랍니다.
말씀을 듣고 달려가야 하듯이 믿음이 생기면 일사불란의 행동하는 순종이 따라 옵니다.
신앙의 위력은 하나님의 말씀에 절대적인 순종으로 화답할 때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을 믿음은 항상 순종하는 믿음과 통하는 것입니다.
특별히 어떠한 위기적인 상황에서도 순종을 함으로 그 믿음은 구원을 가져 오는 것입니다.
순종하지 못하는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못하였기 때문이 아니라 믿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말씀에 믿음이 생기면 지금까지의 나를 버릴 수 있습니다.
그리고 말씀에 내 자신을 드립니다. 여기에 너 믿음대로 되는 것입니다.
믿음으로 나를 세우는 것이 아닙니다. 왜 예수님을 믿지만 내가 더욱 강하여지고 있습니까?
베드로는 말씀에 믿음이 생겼습니다.
자신의 힘으로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었지만 그가 자기 경험과 자기 생각을 부인하고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다시 그물을 내렸습니다.
자 놀라운 변화가 옵니다.
첫째는 그가 고기를 잡은 것이 심히 많게 되었고 고기 잡는 것 별거 아닙니다.
둘째는 이 사건을 통해 그가 예수님을 창조주 하나님으로 만나게 되었고,
셋째는 예수님께서 주시는 죄 용서를 받고 사람을 취하는 위대한 삶을 살게 되었음을 배웁니다.
이를 통해 볼 때 자기 생각이나 자기 경험을 주장하기보다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는 것이 아주 중요함을 배웁니다.
먹는 것 입는 것 이게 문제가 아닙니다.
내 인생의 그물에 잡은 것이 많은 아주 풍성한 인생을 살기를 원한다면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실제로 순종해야 합니다.
그러나 겸손히 예수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순종하지 않고서는 잡은 것이 많은 인생 곧 풍성한 인생, 예수님을 체험하는 인생, 죄를 용서 받고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불가능합니다.
실제로 베드로는 예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깊은 데로 가서 그물을 내렸을 때 그물이 찢어질 정도로 많은 물고기를 잡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과 창조주로서의 예수님을 체험하게 되었습니다.
지금까지 자기 경험과 자기 생각 이라는 얕은 세계에서 살아온 시몬에게 정말 깊은 세계라 할 수 있는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한 것입니다.
순종을 통하여 하나님의 깊은 세계를 경험 하시기를 축원합니다.
예수님의 말씀의 세계, 믿음의 세계, 하나님의 세계가 있습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교만하여 자신의 경험과 자기 생각이 전부인양 생각하고, 또 어떤 사람은 깊은 세계로 가면 자기를 잃어버리지는 않을까 두려워합니다.
깊은 데로 가는 것을 계속 주저하고 두려워한다면 그런 사람은 결코 예수님의 말씀의 능력의 세계, 창조주 하나님의 세계를 체험할 수 없습니다.
지금까지 교회를 다니지만 이런 경험을 하지 못하고 아직도 자신의 수준대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입니다.
말씀의 능력의 세계, 믿음의 깊은 세계로 나아갈 수 있기를 기도합니다.
순종은 결실을 봅니다.
믿음은 말씀 위에 세워져야 합니다.
말씀이 귀에 들리는 은혜도 귀한 은혜이지만, 더욱 더 큰 은혜는 들린 말씀대로 내가 순종하는 은혜가 더 큰 은혜입니다.
풍성한 말씀의 홍수 속에 살고 있다는 것이 큰 축복임에도, 내 삶이 변화되지 않고 그 자리에 머물러 있는 듯 함은 순종하는 마음이 발달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13장의 씨뿌리는 비유를 통하여 씨는 하나님 말씀으로서 씨 자체에는 하자가 없습니다.
그러나 그 씨를 받는 우리 마음의 상태, 곧 마음 밭이 문제가 됩니다.
마음 밭은 길가, 돌밭, 가시떨기, 좋은 땅의 네 가지로 비유됩니다.
결국 네 가지의 모든 밭은 동일하게 하나님의 말씀을 들었고, 또 하나님의 말씀을 듣는 데에는 전혀 문제가 없었습니다.
그렇지만 문제는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발생한다는 것입니다.
말씀을 듣는데서 멈추고 거기서 끝내면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결국 하나님의 말씀을 듣기만 하고 지켜 행하지 않는 데에 문제가 있습니다.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해서 축복이 오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복된 삶은 싸움은 말씀을 듣고 난 이후에, 들은 말씀을 삶 속에서 얼마나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에 따라 결정됩니다.
마음의 중심을 보시는 하나님은(삼상16:7) 우리의 행함까지도 달아보시는 분이십니다(삼상2:3).
말씀을 많이 들었다고 해도 듣고 난 이후의 과정에서 그 말씀에 순종치 아니하면 그 말씀이 지식으로만 쌓여 남을 정죄하는 교만함에 빠져버리게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듣고 지켜 행하느냐, 그렇지 않느냐는 천국과 지옥만큼 그 차이가 납니다.
하나님의 축복은 신앙생활의 시간과 비례해서 결정되는 것이 아닙니다.
들은 말씀에 순종하는 것에 비례해서 하나님의 축복의 열매가 맺혀집니다.
신앙생활의 연륜은 감사의 조건이기는 하나, 결코 자랑할 것이 아닙니다.
세상에 직업의 수가 아주 많아요. 그러나 삶은 크게 두 종류로 나눌 수 있습니다.
생활을 위해 물고기를 취하는 생활인의 삶과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사람을 취하는 사명인의 삶입니다.
베드로는 지금까지는 물고기를 취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게네사렛 호수에서 물고기를 잡아 시장에 내다 팔고 그것으로 처자식을 먹여 살리는 것이 시몬의 이제까지의 삶의 전부였습니다.
시몬은 물고기를 많이 잡는 날이면 기뻤겠지만 물고기를 잡지 못하는 날이면 실의와 절망에 빠졌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물고기 잡는 것 자체가, 다른 말로 생활 자체가 인생의 목적이 되면 인생은 참으로 허무하고 무의미합니다.
반면 사람을 취하는 삶은 참으로 보람 있는 위대한 삶입니다.
이는 그들의 삶의 우선순위가 물고기에서 사람으로 바뀐 것입니다.
즉 사람을 돕고 살리는 일에 최우선 순위를 둔 것입니다.
예수님은 각자 다양한 직업을 가지고 살면서도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문제는 직업의 종류가 아니라 무슨 직업을 가졌는가 아니라 삶의 방향과 우선순위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인간조건에도 불구하고 만족이 없고 자존감이 없고 내적인 힘과 빛이 없이 살아가는 것을 봅니다. 너무 절망이 커서 안타깝게도 해서는 안 되는 자살을 선택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사람은 사람을 취하는 사람입니다.
이 일은 학교 선생님도, 대학 교수님도 못합니다. 의사 선생님도 이 일은 못합니다. 각 분야의 뛰어난 전문가들도 못합니다.
오직 사람을 취하는 사람 곧 복음의 말씀을 전하는 사람들만이 할 수 있습니다.
독일이 낳은 세계적인 대문호 괴테는 내 인생의 최고의 순간은 내가 모태로부터 태어나는 순간도 아니고, 어여쁜 여인과 결혼한 날도 아니고, 바로 사명을 깨달은 그 순간이라는 말을 남겼습니다.
그러니 내가 이제라도 사람을 취하는 삶을 사는 것이 얼마나 귀합니까?




Total 914 건 | 1 / 92 page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