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일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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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30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디모데후서 4:9-18 주께서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일군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교회를 기둥같이 잘 받들 은 일군들을 인하여 교회가 성장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에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특히 교육관 문제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받들어 섬기고 헌신하는 일군들로 인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수고하신 여러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은 자가 다 되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또 뒤돌아보면 끝까지 잘 감당하지 못하여 축복의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자들도 간혹 있는 것을 볼 때에 마음이 매우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들을 그 때 그 때마다 들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사용되어 지는가? 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간증과 같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용하시는데 어떤 이는 악하게 사용되어 악역을 하고 어떤 이는 선하게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제 목회의 마지막 기로에 선 노(老)사도 바울이 자신이 교회를 받들 때에 스쳐간 일군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회고하는 그런 글을 쓴 내용입니다.
저는 결코 우리 성도들을 결코 평할 수도 없고 또한 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은 다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바라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귀하게 사용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도 귀한 일군들이 세워서 교회를 잘 받들었듯이 내년에 교회를 봉사 할 제직들을 세우기에 앞서 바울이 만나고 느낀 일군들을 소개하면서 과연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 왔다가 성전에서 잡히게 되였고 무고하게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다시 로마로 끌려가서 2년간 감옥에서 있다가 재판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인 서바나에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에 두 번째로 체포 되여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였고 또한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고 순교의 때가 가까워 왔다는 것을 예감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딤후4:6절에서 “나의 떠날 날이 가까이 왔도다” 라고 말한 것이며, 바울은 늘 아끼며 아들과 같이 생각하며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글을 써 빨리 나에게로 와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마지막 기로에서 자신을 스쳐간 인물들을 하나 하나 디모데에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디모데는 바울의 뒤를 이어 목회를 해야하는 일군입니다.
소개된 이들은 모두 바울과 복음을 위하여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바울에게는 다 다른 느낌을 주는 인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도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목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기억에 남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어떠한 인물로 남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피해를 주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 이였지만 배교를 하고 바울의 선교에 많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을 보면 지금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하여서 알렉산더를 경계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 거짓된 말을 가지고 교회에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목회자를 헐뜯고 성도들을 헐뜯고 그 사람의 입에 누구든지 오르기만 하면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얼마나 이 사람 때문에 바울이 괴로웠기에 요 주의 인물이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겠습니까?
교회마다 이런 사람들이 꼭 한 두명있기 마련입니다.
목회에 도움을 주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직접 알렉산더에게 보복하거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감당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일일이 대구를 하지 안아도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일군은 말로 다른 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은혜를 끼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다 들어 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하셨습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고향인 젊은 청년으로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의 제자가 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고 있던 사람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려고 하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위급한 시기에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 동안 사랑하며 섬기던 선생을 배신한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자기를 제자로 삼으시고 삼년동안 함께 동거동락하며 말씀을 가르치신 자신의 선생인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 버리듯이 데마도 감옥에 갇힌 자신의 선생이신 바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데살로가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롯유다는 돈 때문에 선생을 배신하였고 데마는 바울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에 가서 내 마음대로 편안히 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을 배신한 것입니다.
세상의 향락이 좋아 믿음을 져 버리는 일은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데마는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했던 사람인데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였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매를 맞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바울도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과에는 순교를 앞에 놓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고통도 없고 고난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바울을 내버려두고 믿음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세에 교회에 가장 큰 적은 배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살전2:3에서 보면 말세의 첫 번째 징조로 배교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세에는 주님을 배신하는 배교자들이 속출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여유가 있고 풍요로워 지니까 이제는 즐기려 합니다. 옛날에는 주일날에도 일을 해야 먹고살기 때문에 주일 날 특근을 하기 위해서 주일을 범했고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주일날 놀러 다니고 즐기러 다니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일을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현대는 바쁘고 피곤합니다. 4살 다섯살 아이들도 아침부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한 두 번 빠지게 되면 자연이 신앙이 약해지고 끝에 가서는 믿음을 버리는 데마와 같은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런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미있는 일거리가 생기면 언제든지 주의 일은 뒤로 던져 버리는 성도들이 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일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기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자입니다.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 요한 이라고도 부르는 사람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모든 무리들이 병정들에게 잡혀가매 베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였고 바나바와 그리고 바울과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에 참여하게 되였는데 선교여행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워서 도중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바울과 바나바는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떠나자 하니까 바울이 반대를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와 같이 심성이 나약하여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전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마가가 그 후에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가와 화해를 하게 되였고 마가는 바울과 함께 전도하다가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순교를 당한 후에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선교를 하고 그 곳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다가 원주민에게 순교를 당하였는데 지금도 이집트에는 이 마가가 전도한 복음을 믿고 믿음을 지키는 원주민 교회인 콥틱교회가 있고 약 800명이 상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와 대담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하므로 잠시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선교를 포기하기도 했었지만 후에는 굳센 믿음으로 순교를 당한 훌륭한 전도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육신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에게 실망을 안겨 준 적도 있었지만 마가는 바울 못지 않은 훌륭한 전도자였기 때문에 바울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뉘우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있습니다.
얼마나 교회와 교역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뉘우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 자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는 일군은 지난날의 잘 못을 뉘우치고 또 다시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사용되는 자입니다.
언제든지 교회가 필요로 하면 사용 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필요로 하여 부를 수 있는 자가 누구일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주 적은 일이라도 시킬 수 없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엇을 요구해도 다 응 할 수 있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놓은 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디모데 역시 그러한 일군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디모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어 매우 늙었고 자신이 순교할 때가 가까이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들과 같이 여기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나 있는 곳으로 어서 속히 오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서 “나와 함께 수고한 자”라 하고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 하였으며 “형제”라고도 불렸으며 동역자라, “믿음의 참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로마」옥에 갇혔다가 후에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다가 바울의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일군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필요로 할 때에 응하는 자입니다.
좋을 때는 자 좋지요 그러나 어려울 때에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사고락을 언제나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나를 떠나서 제 갈 길로 갔지만 누가만이 끝까지 나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방인으로 의사였습니다.
바울은 남들의 병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잘 고칠 수 있었지만 바울은 눈병과 간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만 은 자신의 병을 고침을 받지 못하는 육체적으로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늘 바울의 옆에 있어야 바울이 발작을 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늘 바울을 떠나지 않고 어디에서나 바울과 동행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힐 때에도 함께 있었고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 옥중생활을 할 때에도 함께 있었으며 로마로 잡혀갈 때에도 동행하여 그 무서운 유라굴라 광풍도 함께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할 때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재판을 받고 잠시 풀려났을 때에도 함께 동행하였고 다시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누가만 늙은 바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에 의료활동을 통하여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버리고 바울을 따라 나섰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누추한 감옥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바울과 똑같이 고생을 하였고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지키다가 바울의 시신을 그가 처리하였으리라 생각을 할 수 있는 의리 있고 충실된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누가만은 끝가지 내 곁을 지지키고 나를 돕고 있다는 말씀으로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로 때로는 비서로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운 바울의 동역자 이었고 후원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닌 교회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내년에는 이런 일군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지난 한 해 동안 우리 교회를 기둥같이 잘 받들 은 일군들을 인하여 교회가 성장하여 여기까지 오게 되었습니다.
한 해 동안에 교회의 재정적인 문제, 특히 교육관 문제등 그 외에도 여러 가지 어려움이 있었지만 잘 받들어 섬기고 헌신하는 일군들로 인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이 여기까지 이르게 된 것을 생각할 때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또한 수고하신 여러분들이 참으로 하나님의 칭찬과 축복을 받은 자가 다 되시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또한 그렇게 될 줄로 믿습니다.
그러나 또 뒤돌아보면 끝까지 잘 감당하지 못하여 축복의 기회를 놓치는 안타까운 자들도 간혹 있는 것을 볼 때에 마음이 매우 아프지 않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하나님의 교회는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들을 그 때 그 때마다 들어서 주의 일을 하게 하신다는 것입니다. 할렐루야!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서 나 자신이 어떻게 사용되어 지는가? 가 대단히 중요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바울의 간증과 같이 하나님은 모든 사람을 다 사용하시는데 어떤 이는 악하게 사용되어 악역을 하고 어떤 이는 선하게 사용되기도 한다는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서도 이제 목회의 마지막 기로에 선 노(老)사도 바울이 자신이 교회를 받들 때에 스쳐간 일군들을 한 사람 한 사람을 회고하는 그런 글을 쓴 내용입니다.
저는 결코 우리 성도들을 결코 평할 수도 없고 또한 평하고 싶지 않습니다만 은 다만 여러분 한 사람 한 사람이 교회를 위하여 수고한 것을 기억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한가지 바라는 것은 모든 성도들이 하나님과 교회에 귀하게 사용되는 복된 자가 되시기를 바랄 뿐입니다.
올해도 귀한 일군들이 세워서 교회를 잘 받들었듯이 내년에 교회를 봉사 할 제직들을 세우기에 앞서 바울이 만나고 느낀 일군들을 소개하면서 과연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들이 일어나기를 소원합니다.
사도 바울은 3차에 걸쳐 선교 여행을 마치고 예루살렘에 돌아 왔다가 성전에서 잡히게 되였고 무고하게 빌립보 가이사랴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하고 다시 로마로 끌려가서 2년간 감옥에서 있다가 재판을 받고 무죄 판결을 받고 풀려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의 스페인인 서바나에가서 복음을 전하고 다시 로마로 돌아와서 복음을 전하는 중에 네로가 로마의 황제로 있을 때에 두 번째로 체포 되여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되였고 또한 바울은 자신의 생애가 다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즉 바울은 자신의 생명이 다하고 순교의 때가 가까워 왔다는 것을 예감하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딤후4:6절에서 “나의 떠날 날이 가까이 왔도다” 라고 말한 것이며, 바울은 늘 아끼며 아들과 같이 생각하며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마지막 글을 써 빨리 나에게로 와 달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목회의 마지막 기로에서 자신을 스쳐간 인물들을 하나 하나 디모데에게 소개를 하고 있습니다.
앞으로 디모데는 바울의 뒤를 이어 목회를 해야하는 일군입니다.
소개된 이들은 모두 바울과 복음을 위하여 관계를 맺었던 사람들이지만 그러나 바울에게는 다 다른 느낌을 주는 인물로 남아 있었습니다.
저도 결코 짧다고만 할 수 없는 목회에서 여러 모양으로 기억에 남은 성도들이 있습니다.
과연 여러분들은 하나님과 교회 앞에서 어떠한 인물로 남느냐? 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교회에 피해를 주어 결코 잊을 수 없는 그런 사람이 있습니다.
구리장색 알렉산더입니다.
그는 처음에는 예수님을 믿었던 사람 이였지만 배교를 하고 바울의 선교에 많은 해를 끼친 사람입니다. 그래서 본문 15절을 보면 지금 에베소에 있는 디모데에게 “너도 저를 주의하라 저가 우리말을 심히 대적하였느니라” 라고 하여서 알렉산더를 경계하게 하신 것입니다.
아마 거짓된 말을 가지고 교회에 상처를 많이 준 사람이라고 여겨집니다.
목회자를 헐뜯고 성도들을 헐뜯고 그 사람의 입에 누구든지 오르기만 하면 비판하고 정죄하는 그런 사람입니다. 얼마나 이 사람 때문에 바울이 괴로웠기에 요 주의 인물이니 주의하라고 일러주었겠습니까?
교회마다 이런 사람들이 꼭 한 두명있기 마련입니다.
목회에 도움을 주려면 가장 조심해야 할 일은 말을 함부로 하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나 바울은 자신이 직접 알렉산더에게 보복하거나 원수를 갚으려 하지 않고 “내게 해를 많이 보였으매 주께서 그 행한 대로 갚으시리라”라고 말씀하신 것을 보면 이런 사람은 사람들이 감당 할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감당 할 사람입니다.
그러니 사람들이 일일이 대구를 하지 안아도 하나님이 갚으신다는 이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기에 가장 합당한 일군은 말로 다른 이에게 함부로 하지 않고 은혜를 끼치는 자라 할 수 있습니다.
그 말을 하는 것을 보아서 그 사람의 인격이 다 들어 나는 것입니다.
세상을 사랑하여 믿음에서 떠나는 자들이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하셨습니다.
데마는 데살로니가 고향인 젊은 청년으로서 그는 예수님을 영접하고 바울의 제자가 되여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배우고 있던 사람으로 열심히 봉사를 하려고 하는 그런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지금 바울은 감옥에 갇혀 언제 사형을 당할지 모르는 위급한 시기에 있습니다. 이런 때에 그 동안 사랑하며 섬기던 선생을 배신한 것입니다.
가롯유다가 자기를 제자로 삼으시고 삼년동안 함께 동거동락하며 말씀을 가르치신 자신의 선생인 예수님을 은30냥에 팔아 버리듯이 데마도 감옥에 갇힌 자신의 선생이신 바울을 헌신짝 버리듯이 버리고 데살로가로 갔다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가롯유다는 돈 때문에 선생을 배신하였고 데마는 바울을 따르는 것보다 세상에 가서 내 마음대로 편안히 살고 싶은 유혹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을 배신한 것입니다.
세상의 향락이 좋아 믿음을 져 버리는 일은 하는 사람을 어떻게 믿을 수 있겠습니까?
데마는 바울을 통하여 예수님을 영접하고 구주로 고백했던 사람인데 바울을 따라다니면서 보니 예수님을 믿고 따르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러운 것인가를 알게 되였습니다. 또 그 당시에는 예수를 믿는 것 하나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잡혀가서 매를 맞고 죽어 가는 모습을 보았습니다. 또한 자신이 선생으로 모시고 있는 바울도 평생토록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증거 하였지만 결과에는 순교를 앞에 놓고 감옥에 갇혀 있습니다. 이런 것을 볼 때 두려움이 생겼습니다.
자신이 신앙을 버리고 세상으로 다시 돌아간다면 고통도 없고 고난도 받지 않을 것입니다. 그리고 죽음에 대한 두려움도 없을 것입니다. 그래서 데마는 바울을 내버려두고 믿음도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돌아간 것입니다.
말세에 교회에 가장 큰 적은 배교하는 일입니다. 교회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을 버리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들이 점점 더 많아 질 것입니다. 살전2:3에서 보면 말세의 첫 번째 징조로 배교하는 일이 일어난다고 하였습니다. 즉 말세에는 주님을 배신하는 배교자들이 속출한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의 삶에 여유가 있고 풍요로워 지니까 이제는 즐기려 합니다. 옛날에는 주일날에도 일을 해야 먹고살기 때문에 주일 날 특근을 하기 위해서 주일을 범했고 그런데 지금은 그 반대로 주일날 놀러 다니고 즐기러 다니기 위해서 교회를 떠나고 있습니다.
또한 주의 일을 바쁘고 피곤하다는 핑계로 나오지 못하는 사람이 점점 더 많아지게 됩니다.
현대는 바쁘고 피곤합니다. 4살 다섯살 아이들도 아침부터 바쁘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세상에서 해야할 일이 너무도 많고 만나야 할 사람도 너무도 많이 있습니다.
그래서 예배시간에 한 두 번 빠지게 되면 자연이 신앙이 약해지고 끝에 가서는 믿음을 버리는 데마와 같은 배교자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서도 이런 경우가 허다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세상의 재미있는 일거리가 생기면 언제든지 주의 일은 뒤로 던져 버리는 성도들이 잇습니다.
참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지 않을 일입니다.
오히려 세상을 이기고 주께로 나아오는 자가 되셔야 할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일군은 세상의 유혹을 이기는 자입니다.
교회에 유익을 주는 사람이 있습니다.
마가는 마가 요한 이라고도 부르는 사람으로 마가복음을 기록한 사람을 말합니다.
예수님을 따라가다가 모든 무리들이 병정들에게 잡혀가매 베 홑이불을 벗어버리고 벗은 몸으로 도망을 가기도 하였고 바나바와 그리고 바울과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에 참여하게 되였는데 선교여행이 너무나 힘들고 어렵워서 도중에서 바울과 바나바를 떠나서 예루살렘으로 돌아오고 말았습니다.
그 일로 후에 예루살렘으로 돌아왔던 바울과 바나바는 제 2차 전도여행을 떠날 때 바나바가 마가를 데리고 떠나자 하니까 바울이 반대를 합니다. 왜냐하면 마가와 같이 심성이 나약하여 고난을 이기지 못하는 사람을 전도자로 세울 수가 없다는 이유에서입니다.
이런 마가가 그 후에는 훌륭한 전도자가 되였다는 소식을 들은 바울은 마가와 화해를 하게 되였고 마가는 바울과 함께 전도하다가 함께 옥에 갇히기도 하였다고 합니다. 그 후에 바울이 순교를 당한 후에 마가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 가서 선교를 하고 그 곳에서 교회를 설립하고 전도하다가 원주민에게 순교를 당하였는데 지금도 이집트에는 이 마가가 전도한 복음을 믿고 믿음을 지키는 원주민 교회인 콥틱교회가 있고 약 800명이 상이 예수님을 믿고 있다고 합니다.
마가는 어렸을 때부터 믿음의 사람 이였습니다. 그러나 어린 나이와 대담한 성품을 소유하지 못하므로 잠시 하나님의 사명을 거역하고 선교를 포기하기도 했었지만 후에는 굳센 믿음으로 순교를 당한 훌륭한 전도자이었습니다. 오늘 본문 말씀에도 바울은 디모데에게 말씀하시기를 “네가 올 때에 마가를 데리고 오라 저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하였습니다. 젊은 시절에 육신의 고난을 이기지 못하고 바울에게 실망을 안겨 준 적도 있었지만 마가는 바울 못지 않은 훌륭한 전도자였기 때문에 바울은 “나의 일에 유익하니라” 라고 말한 것입니다.
사람은 누구든지 실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 실수를 뉘우칠 수 있는 사람은 참으로 아름다운 사람입니다.
우리 가운데서도 있습니다.
얼마나 교회와 교역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지만 뉘우치고 새로운 마음가짐을 가지는 자 얼마나 하나님이 사랑하시는지 모릅니다.
그러므로 주께서 쓰시는 일군은 지난날의 잘 못을 뉘우치고 또 다시 복음의 사역을 위하여 사용되는 자입니다.
언제든지 교회가 필요로 하면 사용 할 수 있는 자가 있습니다.
저는 가끔 제가 필요로 하여 부를 수 있는 자가 누구일가를 생각한 적이 있습니다.
어떤 이는 아주 적은 일이라도 시킬 수 없는 자가 있는가 하면 어떤 이는 무엇을 요구해도 다 응 할 수 있는 자도 있을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자신의 목이라도 내어놓은 자라 하지 않았습니까?
디모데 역시 그러한 일군입니다.
“너는 어서 속히 내게로 오라” 이 말씀은 지금 로마 감옥에 갇혀 있는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하고 있는 디모데를 애타게 기다리는 마음을 글로 표현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나이가 들어 매우 늙었고 자신이 순교할 때가 가까이 되였다는 것을 알게 되였습니다. 그래서 자신이 아들과 같이 여기고 사랑하는 디모데에게 나 있는 곳으로 어서 속히 오라고 당부하고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가리켜서 “나와 함께 수고한 자”라 하고 “내 귀하고 신실한 아들이라” 하였으며 “형제”라고도 불렸으며 동역자라, “믿음의 참 아들이라” “사랑하는 아들이라” 하였습니다. 그는 바울과 함께 「로마」옥에 갇혔다가 후에 바울의 후임으로 에베소에서 사역하고 있다가 바울의 편지를 받게 된 것입니다.
진정한 일군은 어떠한 어려움에도 필요로 할 때에 응하는 자입니다.
좋을 때는 자 좋지요 그러나 어려울 때에도 필요로 하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생사고락을 언제나 함께 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하였습니다.
모든 사람들이나를 떠나서 제 갈 길로 갔지만 누가만이 끝까지 나와 함께 있다는 말씀입니다.
누가는 이방인으로 의사였습니다.
바울은 남들의 병은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잘 고칠 수 있었지만 바울은 눈병과 간질병을 앓고 있었습니다만 은 자신의 병을 고침을 받지 못하는 육체적으로는 힘든 삶을 살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누구입니까? 누가입니다.
그래서 자신이 늘 바울의 옆에 있어야 바울이 발작을 할 때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래서 누가는 늘 바울을 떠나지 않고 어디에서나 바울과 동행한 것입니다.
예루살렘에서 바울이 유대인들에게 잡힐 때에도 함께 있었고 바울이 가이사랴 감옥에서 2년간 옥중생활을 할 때에도 함께 있었으며 로마로 잡혀갈 때에도 동행하여 그 무서운 유라굴라 광풍도 함께 당한 것입니다. 그리고 로마에서 2년간 감옥살이를 할 때도 누가는 바울 곁을 떠나지 않았으며 재판을 받고 잠시 풀려났을 때에도 함께 동행하였고 다시 잡혀서 감옥에 갇혀 있는 지금도 누가만 늙은 바울의 곁을 지키고 있는 것입니다.
그는 의사이기 때문에 의료활동을 통하여 수입을 보장받을 수 있는 안정된 환경을 버리고 바울을 따라 나섰으며 바울과 함께 복음을 전하는데 최선을 다했고 누추한 감옥에서 함께 생활을 하면서 바울과 똑같이 고생을 하였고 바울이 순교할 때까지 지키다가 바울의 시신을 그가 처리하였으리라 생각을 할 수 있는 의리 있고 충실된 사람임을 우리는 알 수 있는 것입니다.
본문 11절을 보면 “누가만 나와 함께 있느니라”라는 말씀도 누가만은 끝가지 내 곁을 지지키고 나를 돕고 있다는 말씀으로 누가는 바울의 주치의로 때로는 비서로 바울이 복음을 증거 하도록 최선을 다하여 도운 바울의 동역자 이었고 후원자였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쓰시기에 합당한 사람은 언제든지 교회와 함께 생사고락을 함께 하는 사람입니다.
자기 중심적인 사람이 아닌 교회 중심적인 사람입니다.
내년에는 이런 일군들이 우리 가운데 많이 일어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