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위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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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95회 작성일 2012-01-21 2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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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가복음2:25-35 당신의 위로가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
일본 베스트셀러 작가 사이토 교수가 쓴 위로가 필요해라는 글 속에는 다음과 같은 주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외로워 죽겠다, 우정 쌓을 시간이 없다, 존재감이 없다,
누가 내 마음 좀 꽉 잡아줬으면 좋겠다는 요즘 현대인들 젊은이들의 위로가 필요하다고 했습니다.
부모 세대에 비해 물질적으로 풍요로운 환경에서 성장했고, 역시 부모 세대의 교육열 덕에 수준 높은 교육적 혜택까지 누릴 수 있었지만, 이처럼 안락한 환경에서 성장했기에 의지와 끈기, 열정 등 모든 것이 부족하지만 자신들의 처지가 그리 편하지만은 않다고 항변한다.
이른바 신자유주의의 최대 피해자로서, 열심히 공부해 좋은 학교를 졸업하고도 청년 백수가 되는 현실이 무력하기만 하다는 것이다.
무상복지에 대하여 글을 읽는 중 씁씁한 내용을 보았습니다.
늙은이들은 무상복지 해도 좋고?
아이들과 젊은이들은 무상복지 하면 안 되는가?
이곳에는 한심한 늙은이들만 존재하는가?
무상복지 싫으면 65세 이상 노인들도 차비내고 지하철 타라!
경로우대가 무색합니다.
어느 세대 어느 누구 위로가 필요 없는 자가 없습니다.
길에서 생활하는 노숙자도 위로가 필요하고 이 시대의 대통령도 누구보다 위로가 필요합니다.
저 역시 위로가 많이 필요하고 이 자리에 함께한 한 사람 한 사람 모두가 위로가 필요하지 않습니까?
모두가 위로를 많이 받아야 갰다고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문제는 위로자가 없고 제대로 된 위로가 없다는 것 아닙니까?
본문의 시대에서도 약 2000년 전에도 역시 위로가 필요하였습니다.
25절 예루살렘에 시므온이라 하는 사람이 있으니 이 사람은 의롭고 경건하여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자라 고 했습니다.
말라기 선지자 이후 400년 동안이나 이스라엘에는 진정한 위로자가 없었습니다.
진정한 위로자 되시는 하나님의 위로가 끊어진 것입니다.
이러한 가운데 이스라엘의 정치적인 상황은 B.C. 1세기경 유다가 헬라의 식민통치에서 벗어났으나 다시 로마의 식민지 통치 하에 들어감으로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으로 암울한 침체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때 유대인들 사이에는 메시야 구세주 갈망하는 사상이 크게 무르익게 되었으며 대부분 유대인들은 이스라엘이 적국 로마의 압제에서 벗어나 정치적으로 해방을 가져다줄 다윗과 같은 전쟁 영웅의 지도자로서의 메시야 상을 그리게 되었습니다.
지금도 유대인들은 다윗을 얼마나 신봉하고 영웅시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다윗의 무덤이라는 곳을 가보니 석조 건물의 큰 석실 안에 있는 길이 2m, 폭 1m 정도의 석관은 붉은 빌로도 천으로 덮여 있다.
천 위에는 이스라엘 왕 다윗은 살아서 여기 있다고 히브리어로 수를 놓아 쓰여 있고 유태인의 상징인 다윗의 별이 그려져 있다
유대인들은 지금도 통곡의 벽에서 기도를 하며 메시야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모두가 정치적인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는 이때에 그럴 즈음에 소수의 경건한 신앙인들은 구약성경에서 예언한 메시야의 상 그대로 자기 백성들을 죄에서 구원하여 천국으로 인도할 메시야를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 대표적인 인물이 본문의 시므온이었습니다.
시므온은 메시야의 오심을 간절히 기도하며 성전 중심의 생활을 한 결과 하나님께서는 성령을 통하여 그가 죽기 전에 메시야가 오는 것을 보리라 알려주셨습니다.
26절 그가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하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
이스라엘의 위로자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가 메시야요 그리고 그들의 진정한 위로자입니다.
그런 시대 속에서 이 시몬은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의 참된 위로가 무엇인지 아는 사람이었습니다.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는 사람들이 힘을 모아서 반란을 일으켜 그리고 로마 나라를 쳐부수는 것이 아님을 알았던 것입니다.
그는 이스라엘의 위로를 로마와 이스라엘 백성들이 정치적으로 잘 타협해서 독립된 주권이 회복하는 것이 이스라엘의 위로라고 믿지를 않았습니다.
이스라엘의 위로는 무엇입니까?
주의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
이스라엘의 참된 위로는 그 한 아이의 태어남에 달렸다는 것이 시몬의 신앙이었습니다.
고후3:2-6 찬송하리로다 그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이시요 자비의 아버지시요 모든 위로의 하나님이시며 우리의 모든 환난 중에서 우리를 위로하사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 받는 위로로써 모든 환난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하게 하시는 이시로다 그리스도의 고난이 우리에게 넘친 것 같이 우리가 받는 위로도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넘치는도다 우리가 환난 당하는 것도 너희가 위로와 구원을 받게 하려는 것이요 우리가 위로를 받는 것도 너희가 위로를 받게 하려는 것이니 이 위로가 너희 속에 역사하여 우리가 받는 것 같은 고난을 너희도 견디게 하느니라
부모 잃은 고아는 그 어떤 것으로도 위로를 받지 못합니다.
저들은 비단옷을 못 입어서 슬픈 것이 아니고, 진수성찬을 못 먹어서 슬픈 것이 아니라, 부모에게서 받아야 할 사랑을 받지 못해 슬픔이 가득합니다.
오늘의 시대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에 굶주려 있습니다.
극도의 개인주의로만 살아온 사람들이 이제는 저마다 자기 이외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두지 않고 사는 버릇이 생겼습니다.
그러다가 모든 사람들은 모두 제각기 천애(天涯) 고아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의 마음은 사랑을 받아보지 못하고 자란 거칠고, 표독하고, 가시 돋친 인간상이 되고 말았습니다. 각박하고, 발악적이고, 서로 쥐어뜯고 사는 인간들이 되고 말았습니다.
뿐만 아니라 고통 받는 백성들에게 위로와 희망을 심어주어야 할 예루살렘의 종교는 영적으로 침체되고 타락하여 기득권 계층이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도구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는 십계명을 613개의 세부조항으로 나누어놓고 지키도록 했습니다.
율법을 하라는 계명 365개, 하지 말라는 248개로 세분하여 놓고 백성들에게 맹목적인 복종만을 강요했습니다.
당시의 유대교는 서민의 종교가 아니었고 귀족을 위한 종교였습니다.
바리새인들과 서기관 그리고 제사장으로 불리는 엘리트 계층을 위한 귀족 종교로 전락하고 말았습니다.
유대교는 당시에 죄인으로 불렸던 세리와 창녀, 그리고 사마리아 사람들에게 대하여 끊임없는 미움과 정죄만 했을 뿐 그들을 구원하기 위해 어떤 노력이나 어떤 프로그램도 없었습니다.
오히려 예수님이 오셔서 그들과 함께 먹고 교제하자 비난하였습니다. 일반 대중들은 분별력을 잃고 함께 비난하였습니다.
종교가 귀족화 되면 안 됩니다.
누구나 다 들어올 수 있고 누구나 다 들을 수 있는 것이 교회요 복음입니다.
그러나 당시의 유대교는 가난하고 병든 일반 서민들은 들을 수 없는 교훈이었고 지킬 수 없는 무거운 계율만이 있었습니다
이때에 진정한 위로자가 필요했습니다.
사40:1 너희의 하나님이 이르시되 너희는 위로하라 내 백성을 위로하라
위로자 되시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기에 시므온은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습니까?
28-29절 시므온이 아기를 안고 하나님을 찬송하여 이르되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
위로자 되시는 예수 그리스도가 이 땅에 오신 계절이 왔습니다.
이 위로자의 위로를 받으니 죽어도 여한이 없이 기쁘다는 것입니다.
오늘 이런 위로를 성탄에 받아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하는 은혜를 받으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은 구원이십니다.
천사가 전해준 예수란 이름은 구원(救援)이란 뜻입니다.
마 1:21 아들을 낳으리니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그가 자기 백성을 그들의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하니라
유대인과와 기독인의 차이는 어디에 있습니까?
세상 사람과 그리스인의 차이가 무엇입니까?
유대인은 자신들을 구원할 구원자가 아직도 세상에 오시지 않았고 믿고 지금도 여전히 메시야를 기다리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나 기독인은 구약에서 예언된 메시야 즉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셨다는 사실을 믿고 신앙하는 사람들입니다.
왜 이런 일이 생긴 겁니까? 거기에는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한 구원자가 세상에 오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를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불행하게도 예수님을 알아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요1:10-11절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하지 아니하였으나
그러나 시므온은 죽기 전에 본다고 했는데 사실 그는 보았습니다.
30절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욥은 그가 당한 많은 환난 가운데 구원의 주님을 보았다고 했습니다.
욥42:5 내가 주께 대하여 귀로 듣기만 하였사오나 이제는 눈으로 주를 뵈옵나이다
옛날에 왕 앞에 나아갈 때에 이렇게 말들을 하지 않습니까?
제가 왕을 뵈옵나이다 이것보다 더 확실한 고백이 어디 있습니까?
이 가운데 주님은 구원의 주로 계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스3:17절 너의 하나님 여호와가 너의 가운데에 계시니 그는 구원을 베푸실 전능자이시라 그가 너로 말미암아 기쁨을 이기지 못하시며 너를 잠잠히 사랑하시며 너로 말미암아 즐거이 부르며 기뻐하시리라 하리라
예수님은 길이십니다.
지난 11월 28일 불륜 현장을 들켜 한강으로 투신해 사망한 여성이 있었습니다.
남편에게 들켜서 여성이 투신했는데 만약에 상대방 남자가 그의 아내에게 들켰다면 그 남자가 한강으로 떨어질 수도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사실 너나 할 것 없이 들키지 않아서 안도하고 있지 그렇다고 여러분들이 모두 바람을 피우고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한겨레신문에 사실 기존 남성 10명중 4명은 지난해 성매매한 사실이 있답니다.
그것도 미혼보다 기혼이 못배운자 보다 배운 대학원 이상자 수입이 없는 자보다 많을수록 세계적으로 보면 성매매 1위가 짐바브웨 그 다음 우리나라
비단 성문제 뿐 아니라 돈 때문에 수능 때문에 생활고 때문에 사람관계 때문에 들통이 나면 다 떨어집니다.
절개로 그렇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이 절대로 그런 일들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성직자, 지도자, 엄마 아빠 내 아들 딸들입니다.
사실 인생은 정도를 걸어가는 존재가 아닙니다.
모두가 그것을 요구하고 그 잣대로 사람을 바라보고 있으니 피곤하고 힘든 존재입니다.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구원받을 죄인이요
용서 받을 죄인이요 인도함을 받아야 할 죄인 일 뿐입니다.
도움을 받아야 할 약한 존재요 위로를 받아야 할 불쌍한 자들입니다.
이런 시각으로 보십시오
어려움을 당했을 때 문제는 앞이 캄캄하니 길이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세상은 정말로 한치 앞을 보지 못하는 캄캄함입니다.
시므온은 예수님은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불렀습니다.
32절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이스라엘 말고 이방에 예수님이 전해짐으로 인하여 역사는 AD와 BC로 나뉘어 지게 되었고 예수님은 이 세상을 비추는 빛이 되었습니다.
한 분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심으로 온 세상이 달라졌습니다
세상을 색깔로 표현하자면 검은색입니다. 세상은 어둡습니다.
아무리 거리를 밝게 네온사인으로 밝게 해도 집안에 창문을 많이 만들어도 고층 아파트를 지어 세상을 다 내다봐도 세상은 영적으로 시커멓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인간은 아담과 하와 이후에 타락했습니다.
그래서 태어날 때부터 허물과 죄로 죽은 채로 태어납니다.
사람은 태어나서 죄를 짓는 것이 아니라 이미 죄인인 상태에서 태어납니다.
나는 이미 허물과 지로 죽었던 사람들입니다.
타락한 인간은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서 방황하며 서로 미워하고 시기하고 죽이고 있습니다.
몇 사람 죽이고 왔습니까? 앞으로 몇 사람 더 죽여야지요
내가 아무리 착하게 살아보려고 애를 써도 매일 다짐하고 또 다짐해 보아도 마음은 있지만 짓는 것은 죄 뿐입니다. 세상은 세월이 갈수록 더 악해집니다.
인간이란 존재는 사망의 땅과 그늘에 앉아있는 자들이며 죽을 존재가 아니라 이미 죽은 존재이며 지옥에 갈 존재가 아니라 이미 지옥에 살고 있는 존재들입니다.
성경은 이것을 가리켜 흑암에 앉은 백성이라고 했습니다.
사9:2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 큰 빛을 보고 사망의 그늘진 땅에 거주하던 자에게 빛이 비치도다
요8:12 예수께서 또 말씀하여 이르시되 나는 세상의 빛이니 나를 따르는 자는 어둠에 다니지 아니하고 생명의 빛을 얻으리라
예수가 빛입니다. 어둠을 비추는 세상의 빛입니다.
예수님의 생명의 빛이 사람들에게 비춰지지만 사람들이 이 빛을 몹시 싫어했습니다.
예수님의 나의 영광입니다.
32절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 이다
모든 피조물의 가치는 창조자의 용도에 따라 사용될 때에 그 진가가 거기에 있습니다.
사람이 사람의 대접을 받지 못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나라의 대통령도 가정에 부모도 학교에 스승도 가치 전략이 되었습니다.
별 짓을 다해도 안 됩니다. 주를 인격적으로 만날 때에 존귀한 인생이 회복 됩니다.
시16:1-3 하나님이여 나를 지켜 주소서 내가 주께 피하나이다 내가 여호와께 아뢰되 주는 나의 주님이시오니 주 밖에는 나의 복이 없다 하였나이다 땅에 있는 성도들은 존귀한 자들이니 나의 모든 즐거움이 그들에게 있도다
이번 성탄절에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내 인생의 큰 위로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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