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 당신의 살맛나는 장래가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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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595회 작성일 2012-01-21 20:49본문
에스겔 37:1-10 주께 당신의 살맛나는 장래가 있습니다.
지금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집이 있습니다. 백 만권 이상 팔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시집을 펴낸 저자는 올해 100 세 난 시바따 도요라 이름하는 그 할머니는 기구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유복한 쌀 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10 대 때 집안이 기울어서 식당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학교도 많이 다닐 수 없었습니다. 20 대 때 결혼에 실패하고 33 세 때 주방장 시바따 에이키치 씨와 재혼하고, 아들 하나만 낳으며 재봉일 등 부업으로 가정 살림을 도왔습니다. 1992 년에 남편이 죽고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습니다. 92 세가 되었을 때 거동이 불편해져 취미로 하던 일본 무용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외아들이 힘들게 사는 어머니에게 시를 써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6000:1의 경쟁률을 뚫고 산케이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90평생 시 쓰는 법을 공부한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는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약해지지 마에서 그분의 의지를 보고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시 중 한 부분입니다, 나 말이야,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그렇지만 더 이상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아. 99세라도 사랑은 하는거야, 꿈도 꿔, 구름 타고 싶은 걸…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인생이란 늘 지금 부터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
일본 사람들이 그 할머니의 시를 애송하는 이유는 따뜻한 격려,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그 할머니의 시가 주기 때 문입니다.
본문에도 참으로 암담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마른 뼈로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전혀 불가능입니다. 아주 말랐더라고 하였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B. C586 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 안에서까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목 베어 죽이고 유다왕 시드기아는 그의 눈앞에서 왕자들이 살해를 당하고 자신은 눈알이 뽑히고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지식층들은 포로로 바벨론 땅에 잡혀 갔습니다.
고국에 남았던 사람들도 죽임을 피하여 애굽 등지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마른 뼈는 바로 이 같은 절망적인 상태를 비유한 것입니다.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완전한 절망, 회복 불가능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지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들의 생활의 모습을 가르쳐 무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상처로 얼룩져 있는 존재입니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하자면 시바따 도요 할머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다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말을 하면 아 그렇구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고통스러움을 다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느냐? 고 물으신 것입니다.
바짝 마른 뼈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바짝 말랐지만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 살아나니라 6절 살아나니라 9절 살아나게 하라
10절 살아나서 일어나 섰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올 한해는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살아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일어 설 수 있음은 나를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상처와 나의 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에스겔아 무엇을 보느냐 대상은 마른 뼈이지 잘난 놈이 아니었습니다.
2절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육적인 상태도 상태이지만 육적인 문제는 모두 영적인 것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무엇으로 죽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악한 사단은 어떻게 유혹합니까?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틀림없이 죽어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심은 물으셨다.
사람은 이 뼈를 보고 절망을 이야기 하고, 슬픔을 이야기 하고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소망을 이야기 하고, 기쁨을 이야기 하고 생명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칼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런 형편을 알려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는 철저하게 불가능하고 절망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굳은 의지이십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겠다는 내 의지의 교만함과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따라오는 실망감이 더 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아 들이 많습니다.
요15:5-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주가 아십니다. 라는 말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내 사정도 아시고 나를 살릴 것도 확신합니다.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으며 많이 상처 입은 사람일수록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치유해 줄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나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이에게 나를 알아 달라고 하다가 최고의 상처를 받지 않습니까?
다 알아 줄 수가 없고 안다고 해서 해결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미움 시기 질투 모욕 맞음 상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죽기까지 하셨던 분이시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다 이해하시고 치유와 회복을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연약한 인간은 현실을 보고 판단하고 그 현실과 비추어 자신의 능력을 보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매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어 하는 자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형제도 짐이요 부모도 짐이요 자식도 짐입니다.
저도 오늘 새벽에 이것저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부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닙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할렐루야!
왜요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 힘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지를 살펴보십시오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게 된 것은 내가 살겠다고 했던 것들이 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게 된 나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무엇으로 살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립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사를 볼 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는 말씀의 종이 있었을 때 그 시대는 소망이 있었고 교회가 살아났습니다.
제일 괴로운 때는 언제입니까? 말씀이 중단 될 때입니다.
말씀이 흥왕하면 역사가 많습니다.
18세기 미국은 초기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점점 퇴조하면서 영적 안일에 깊숙이 빠져 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륙으로부터 계몽주의 사상이 들어 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반 기독교 풍조가 만연해졌습니다. 종교적 무지와 함께 대학과 교회들도 거의 몰락했습니다. 이때 조나단 에드워드와 조지 휫필드 같은 위대한 말씀의 종이 나와서 미국에 제 1 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놀라운 부흥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디언 선교가 본격 시작되었고 반노예제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유수의 대학들이 세워졌습니다.
18세기 영국 역시 청도교주의의 경건함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급속히 타락하여 부정부패, 방탕, 술 취함, 도박이 곳곳에 만연하였습니다. 이신론과 회의론에 공격을 받은 영국 교회는 믿음의 힘을 잃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존 웨슬리가 나타나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전국을 다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영국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영국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존 웨슬리 때문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19세기 다시 영국이 인본주의, 진화론, 고등비평의 영향으로 신앙을 잃어 가고 때 하나님은 찰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말씀의 종을 세우셨습니다. 초창기에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조롱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영국교회 안에 복음 신앙이 지켜질 수 있었고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와 같은 위대한 복음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리는 소망 없는 자리입니다.
한국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경제 정치 국방이 아니라 신앙의 위기가 한국의 위기입니다.
나 자신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돈 어떤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이사야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성령이 살게 합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속사람이 지음을 받고 속사람이 겉사람인 육신 속에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속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살아있는데 영혼의 사람,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길거리에 가서 안 믿는 사람 붙잡고 난 다음 하나님 아냐고 물으면 당신 하나님 보았냐고 그러고 오히려 반문을 하며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보고 아무리 질문을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한 무신론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어요.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행복인데, 태어났으니 별도리 없이 빨리 죽는 것이 제일 좋다. 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니까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마음에 죄책과 정죄에 눌려 있고 허무와 무의미에 고통당하고 죽음과 절망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나면 은 그리스도가 구주로 마음속에 들어와서 속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독립운동이나 무장 투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 Buck) 여사는 어머니의 초상(The Exile) 이라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내 어머니는 22세에 결혼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가는 남편을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나서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직면하는 굶주림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으셨는데 그 중에 네 명이 병들어 어머니 앞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질병, 고독과 박해와 싸우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헤쳐 나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의 그 눈물어린 고통을 미처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얼굴 그 어느 곳에서도 고난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주시려고 언제나 쾌활하게 노래를 불러 주셨고 잡지 같은 데서 재미있는 그림을 찾으면 오려두었다가 우리들의 방을 예쁘게 꾸며주셨습니다. 그리고 낡은 옷이었지만 그 옷에 꽃무늬 하나라도 손수 달아주셨고 옷을 갈아입을 때면 마치 새 옷을 입는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세탁해 주셔서 우리가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펄벅 여사의 어머니 같은 모습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습 속에서 절망스러운 얼굴을 치워야 합니다.
내 입술에서 우울한 노래, 슬픈 노래를 멈추어야 합니다. 어두운 그림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절망의 이야기, 근심의 이야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살리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
지금 일본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시집이 있습니다. 백 만권 이상 팔릴 것으로 예상합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시집을 펴낸 저자는 올해 100 세 난 시바따 도요라 이름하는 그 할머니는 기구한 일생을 살아왔습니다. 유복한 쌀 집 외동딸로 태어났지만 10 대 때 집안이 기울어서 식당에서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러니 학교도 많이 다닐 수 없었습니다. 20 대 때 결혼에 실패하고 33 세 때 주방장 시바따 에이키치 씨와 재혼하고, 아들 하나만 낳으며 재봉일 등 부업으로 가정 살림을 도왔습니다. 1992 년에 남편이 죽고 혼자 외롭고 쓸쓸하게 살았습니다. 92 세가 되었을 때 거동이 불편해져 취미로 하던 일본 무용도 못하게 되었습니다. 외아들이 힘들게 사는 어머니에게 시를 써 보라고 권했습니다. 그래서 쓴 시가 6000:1의 경쟁률을 뚫고 산케이 신문에 실리게 되었습니다. 90평생 시 쓰는 법을 공부한 적도 없고 써 본 적도 없는 할머니가 자신의 삶을 부정에서 긍정으로 보는 시각을 가졌다는 것입니다.
제목에서 보듯이 약해지지 마에서 그분의 의지를 보고 사람들은 매력을 느끼는 것입니다.
그 할머니의 시 중 한 부분입니다, 나 말이야, 죽고 싶은 적도 있었어…그렇지만 더 이상 우는 소리는 하지 않아. 99세라도 사랑은 하는거야, 꿈도 꿔, 구름 타고 싶은 걸…난 괴로운 일도 있었지만 살아 있어서 좋았어. 너도 약해지지 마… 인생이란 늘 지금 부터야. 그리고 아침은 반드시 찾아와. 그러니 약해지지 마!
일본 사람들이 그 할머니의 시를 애송하는 이유는 따뜻한 격려, 그리고 내일에 대한 희망을 그 할머니의 시가 주기 때 문입니다.
본문에도 참으로 암담한 이스라엘의 모습을 마른 뼈로 비유하고 있었습니다.
당시의 상황은 전혀 불가능입니다. 아주 말랐더라고 하였는데 어느 정도인가 하면
이스라엘은 B. C586 년 바벨론왕 느부갓네살은 예루살렘을 침입하여 성전 안에서까지 이스라엘의 젊은이들을 목 베어 죽이고 유다왕 시드기아는 그의 눈앞에서 왕자들이 살해를 당하고 자신은 눈알이 뽑히고 쇠사슬에 결박되어 바벨론으로 끌려갔습니다. 수많은 이스라엘의 지식층들은 포로로 바벨론 땅에 잡혀 갔습니다.
고국에 남았던 사람들도 죽임을 피하여 애굽 등지로 피난해야 했습니다.
본문에서 마른 뼈는 바로 이 같은 절망적인 상태를 비유한 것입니다.
11절 또 내게 이르시되 인자야 이 뼈들은 이스라엘 온 족속이라 그들이 이르기를 우리의 뼈들이 말랐고 우리의 소망이 없어졌으니 우리는 다 멸절되었다 하느니라
완전한 절망, 회복 불가능의 상태를 가리킵니다.
즉 당시 이스라엘인들은 사지에서 죽은 자와 같은 생활을 했다는 의미가 되겠습니다.
그들의 생활의 모습을 가르쳐 무덤이라고 표현했습니다.
우리 인생은 너나 할 것 없이 상처로 얼룩져 있는 존재입니다.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이야기하자면 시바따 도요 할머니보다 더했으면 더했지 덜하다 할 수 없을지도 모릅니다. 저도 말을 하고 있지 않아서 그렇지 말을 하면 아 그렇구나 할 것입니다.
그러나 내 고통스러움을 다 말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여기에서 하나님은 에스겔 선지자에게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느냐? 고 물으신 것입니다.
바짝 마른 뼈에 대하여 이야기 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라 비록 바짝 말랐지만 살아 날 수 있다는 것입니다.
5절 살아나니라 6절 살아나니라 9절 살아나게 하라
10절 살아나서 일어나 섰다고 했습니다. 할렐루야!
올 한해는 마른 뼈들이 일어나서 살아나는 한 해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내가 일어 설 수 있음은 나를 바로 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나의 상처와 나의 할 수 없음을 인정하자는 것입니다
에스겔아 무엇을 보느냐 대상은 마른 뼈이지 잘난 놈이 아니었습니다.
2절 나를 그 뼈 사방으로 지나가게 하시기로 본즉 그 골짜기 지면에 뼈가 심히 많고 아주 말랐더라
육적인 상태도 상태이지만 육적인 문제는 모두 영적인 것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엡2:1 그는 허물과 죄로 죽었던 너희를 살리셨도다
무엇으로 죽느냐? 하나님과의 관계성 때문입니다.
창2:17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는 먹지 말라 네가 먹는 날에는 반드시 죽으리라 하시니라
악한 사단은 어떻게 유혹합니까? 창3:4 뱀이 여자에게 이르되 너희가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
틀림없이 죽어 무덤에 들어갔습니다.
12절 그러므로 너는 대언하여 그들에게 이르기를 주 여호와께서 이같이 말씀하시기를 내 백성들아 내가 너희 무덤을 열고 너희로 거기에서 나오게 하고 이스라엘 땅으로 들어가게 하리라
하나님께서는 에스겔에게 인자야 이 뼈들이 능히 살 수 있겠느냐? 라고 하심은 물으셨다.
사람은 이 뼈를 보고 절망을 이야기 하고, 슬픔을 이야기 하고 죽음을 이야기 하지만 하나님은 지금 소망을 이야기 하고, 기쁨을 이야기 하고 생명을 이야기 하고 계십니다.
칼빈 선생이 말씀하시기를 모든 인간은 전적으로 타락(Total Depravity)했고 전적으로 무능력한 상태(Total Inability)에 있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에스겔에게 이런 형편을 알려주심으로 이스라엘의 영적인 상태를 볼 수 있는 영적인 눈을 가지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인간 편에서는 철저하게 불가능하고 절망하게 하시고 하나님 안에서는 얼마든지 가능하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겠다는 굳은 의지이십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문제가 아닙니다.
내가 하겠다는 내 의지의 교만함과 그리고 내가 그렇게 할 수 없어서 따라오는 실망감이 더 나를 문제아로 만들어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문제아 들이 많습니다.
요15:5-7 나는 포도나무요 너희는 가지라 그가 내 안에, 내가 그 안에 거하면 사람이 열매를 많이 맺나니 나를 떠나서는 너희가 아무 것도 할 수 없음이라 사람이 내 안에 거하지 아니하면 가지처럼 밖에 버려져 마르나니 사람들이 그것을 모아다가 불에 던져 사르느니라 너희가 내 안에 거하고 내 말이 너희 안에 거하면 무엇이든지 원하는 대로 구하라 그리하면 이루리라
주께 의지하는 믿음이 필요합니다.
이에 에스겔은 주 여호와여 주께서 아시나이다고 대답했습니다.
주가 아십니다. 라는 말은 전적인 신뢰입니다. 내 사정도 아시고 나를 살릴 것도 확신합니다.
헨리 나웬의 상처 입은 치유자(The Wounded Healer)라는 책에서 주장하는 것은 상처 입은 자만이 다른 사람을 치유할 수 있으며 많이 상처 입은 사람일수록 상처받은 사람을 더 잘 치유해 줄 수 있다고 역설하면서 가장 상처를 많이 받으신 그분이 예수 그리스도라고 말합니다.
나의 사정을 가장 잘 아시는 분은 그 어떤 사람도 아니요 나도 아니요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니 다른 이에게 나를 알아 달라고 하다가 최고의 상처를 받지 않습니까?
다 알아 줄 수가 없고 안다고 해서 해결할 능력도 없는 것입니다.
사람이 사람 때문에 받는 스트레스는 그 어떤 것보다 큰 것입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모든 상처를 치유할 수 있고 회복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사람들로부터 온갖 미움 시기 질투 모욕 맞음 상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결국 죽기까지 하셨던 분이시기에... 우리가 살아가면서 당하게 되는 여러 가지 상황들을 다 이해하시고 치유와 회복을 해 주실 수 있다는 것입니다
히4:14-16 그러므로 우리에게 큰 대제사장이 계시니 승천하신 이 곧 하나님의 아들 예수시라 우리가 믿는 도리를 굳게 잡을지어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
연약한 인간은 현실을 보고 판단하고 그 현실과 비추어 자신의 능력을 보고 가능과 불가능에 대한 결론을 내리고 매우 힘들어 하고 있습니다.
오히려 힘들어 하는 자에게 다 내게로 오라고 하십니다.
마11:28-30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 그리하면 너희 마음이 쉼을 얻으리니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
어떤 사람이 감히 이런 말을 할 수 있습니까?
형제도 짐이요 부모도 짐이요 자식도 짐입니다.
저도 오늘 새벽에 이것저것을 구하는 기도를 드리는 것이 아니라 모든 무거운 짐을 주님 앞에 다 내려놓았습니다.
그리고 찬양을 부릅니다. ♬내 주여 뜻대로 행하시 옵소서 온 몸과 영혼을 다 주께 드리니 이 세상 고락간 주 인도 하시고 날 주관 하셔서 뜻대로 하소서
더 이상도 아니고 더 이하도 아닙니다.
주께서 아십니다. 할렐루야!
왜요 내가 도와주고 싶지만 힘의 한계를 느끼기 때문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의지를 살펴보십시오 죽이겠다는 것이 아니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내가 죽게 된 것은 내가 살겠다고 했던 것들이 나를 죽게 만들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죽게 된 나를 살리겠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반드시 그렇게 하시겠다는 강한 의지의 표현이다.
무엇으로 살리십니까? 하나님의 말씀이 살립니다
4절 또 내게 이르시되 너는 이 모든 뼈에게 대언하여 이르기를 너희 마른 뼈들아 여호와의 말씀을 들을지어다
교회사를 볼 때 각 시대마다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대언하는 말씀의 종이 있었을 때 그 시대는 소망이 있었고 교회가 살아났습니다.
제일 괴로운 때는 언제입니까? 말씀이 중단 될 때입니다.
말씀이 흥왕하면 역사가 많습니다.
18세기 미국은 초기 청교도들의 영향력이 점점 퇴조하면서 영적 안일에 깊숙이 빠져 들고 있을 때였습니다. 대륙으로부터 계몽주의 사상이 들어 와 예수님의 신성을 부인하는 등 반 기독교 풍조가 만연해졌습니다. 종교적 무지와 함께 대학과 교회들도 거의 몰락했습니다. 이때 조나단 에드워드와 조지 휫필드 같은 위대한 말씀의 종이 나와서 미국에 제 1 차 대각성 운동이 일어나고 놀라운 부흥과 회심의 역사가 일어났습니다. 인디언 선교가 본격 시작되었고 반노예제 운동도 일어났습니다. 그리고 이때에 유수의 대학들이 세워졌습니다.
18세기 영국 역시 청도교주의의 경건함을 잃어버리고 사회가 급속히 타락하여 부정부패, 방탕, 술 취함, 도박이 곳곳에 만연하였습니다. 이신론과 회의론에 공격을 받은 영국 교회는 믿음의 힘을 잃고 사회에 대한 영향력을 상실해가고 있었습니다. 이때 존 웨슬리가 나타나 말 위에서 잠을 자면서 전국을 다니면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을 때 영국은 다시 하나님께 돌아왔습니다. 후세 역사가들은 영국에서 유혈 혁명이 일어나지 않은 까닭은 존 웨슬리 때문이다라고 평가하였습니다.
그 후 19세기 다시 영국이 인본주의, 진화론, 고등비평의 영향으로 신앙을 잃어 가고 때 하나님은 찰스 스펄전이라는 위대한 말씀의 종을 세우셨습니다. 초창기에 스펄전은 하나님의 말씀을 있는 그대로 전한다는 이유로 얼마나 조롱을 받았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를 통해서 영국교회 안에 복음 신앙이 지켜질 수 있었고 20세기 마틴 로이드 존스, 존 스토트, 제임스 패커와 같은 위대한 복음주의자들이 나올 수 있는 토대가 마련되었습니다.
약속의 말씀을 잃어버린 자리는 소망 없는 자리입니다.
한국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경제 정치 국방이 아니라 신앙의 위기가 한국의 위기입니다.
나 자신의 위기가 무엇입니까? 돈 어떤 사람 때문에가 아니라 신앙입니다.
이사야55:2 너희가 어찌하여 양식이 아닌 것을 위하여 은을 달아 주며 배부르게 하지 못할 것을 위하여 수고하느냐 내게 듣고 들을지어다 그리하면 너희가 좋은 것을 먹을 것이며 너희 자신들이 기름진 것으로 즐거움을 얻으리라
성령이 살게 합니다.
사람은 지음을 받았을 때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으로 속사람이 지음을 받고 속사람이 겉사람인 육신 속에 살도록 그렇게 만들어진 것입니다.
그런데 아담과 하와가 하나님께 범죄하고 하나님께 에덴에서 쫓겨나올 때 속사람이 죽어버렸습니다. 육신의 사람은 살아있는데 영혼의 사람, 속사람은 죽어버렸습니다.
길거리에 가서 안 믿는 사람 붙잡고 난 다음 하나님 아냐고 물으면 당신 하나님 보았냐고 그러고 오히려 반문을 하며 믿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영이 죽었기 때문에 죽은 사람보고 아무리 질문을 해봤자 소용이 없습니다.
신은 죽었다라고 주장한 무신론자 니체는 이렇게 말했어요. 현대인은 두 가지 병(病)을 갖고 있다. 하나는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것이요,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잃어버리고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것이 인간의 비극이다. 라고 말한 것입니다.
염세주의자 쇼펜하우어는 인생은 의미가 없다. 그러므로 태어나지 않는 것이 제일 행복인데, 태어났으니 별도리 없이 빨리 죽는 것이 제일 좋다. 고 그렇게 말한 것입니다.
이러한 사람들은 겉사람이 이 세상을 살아가니까 헛되고 헛되며 또 헛되고 헛되며 모든 것이 헛된 것을 보고 낙심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늘 마음에 죄책과 정죄에 눌려 있고 허무와 무의미에 고통당하고 죽음과 절망에 탄식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모든 사람들은 그 속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가 예수의 복음을 듣고 나면 은 그리스도가 구주로 마음속에 들어와서 속사람이 다시 살아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형상과 모양대로 지음 받은 속사람이 살아나는 것입니다.
이스라엘의 회복은 독립운동이나 무장 투쟁을 통해서 이뤄진 것이 아닙니다. 다만 에스겔이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함으로서 시작되었고 완성되었습니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펄벅(Pearl S. Buck) 여사는 어머니의 초상(The Exile) 이라는 작품 속에서 자신의 어머니에 대해 이렇게 회고하였습니다. 내 어머니는 22세에 결혼하여 중국의 선교사로 가는 남편을 따라 영문도 모른 채 나서게 되었습니다. 날마다 직면하는 굶주림과 생명의 위협 속에서도 그녀는 일곱 명의 아이를 낳으셨는데 그 중에 네 명이 병들어 어머니 앞에서 죽어갔습니다. 그녀는 가난과 질병, 고독과 박해와 싸우면서 눈물의 골짜기를 헤쳐 나가야만 하였습니다. 그러나 나와 형제들은 어머니의 그 눈물어린 고통을 미처 깨달을 수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어머니의 얼굴 그 어느 곳에서도 고난의 어두운 그림자를 찾아볼 수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어머니는 우리들을 조금이라도 즐겁게 해 주시려고 언제나 쾌활하게 노래를 불러 주셨고 잡지 같은 데서 재미있는 그림을 찾으면 오려두었다가 우리들의 방을 예쁘게 꾸며주셨습니다. 그리고 낡은 옷이었지만 그 옷에 꽃무늬 하나라도 손수 달아주셨고 옷을 갈아입을 때면 마치 새 옷을 입는 것처럼 아주 깨끗하게 세탁해 주셔서 우리가 항상 즐거운 마음을 가질 수 있도록 세심하게 보살펴주셨습니다.
펄벅 여사의 어머니 같은 모습이 이 땅을 살아가는 그리스도인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나의 모습 속에서 절망스러운 얼굴을 치워야 합니다.
내 입술에서 우울한 노래, 슬픈 노래를 멈추어야 합니다. 어두운 그림들을 다 치워야 합니다.
절망의 이야기, 근심의 이야기를 멈추고 하나님의 희망의 이야기를 들려주어야만 합니다.
그러면 성령의 살리는 역사가 일어 날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