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 대한 선한 뜻을 품고 출발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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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38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다니엘 1: 8 -21 하나님께 대한 선한 뜻을 품고 출발하자
두려워 말라 형통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한 축복의 한 해가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벌써 10여 일이 지나가고 있지만 축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답답하기만 한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한 해도 그저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축복된 삶이 될 것인가를 생각을 바로 가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작은 일 하나를 이루려고 해도 먼저 마음에 생각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능이전에 사고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없이 일이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이 마음에 계획과 뜻을 세우는 일이 언제든지 앞서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품든지 거기에는 길이 열리게 마련이고 또한 결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일이 나쁜 생각을 가지면 나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썩어 질 것을 거둘 것이고 성령의 생각을 하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지난주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든지 그 생각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축복된 한 해를 시작하려고 하면은 마음에 축복 받을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젊은 청년 다니엘이 나라를 잃고 자신의 처지는 종으로 잡혀간 희망이 없는 그런 신세가 되었지만은 그 마음에는 소망이 있는 복된 생각을 가졌습니다.
뜻을 정하여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이 얼마나 하나님의 복을 받을 희망적인 생각입니까?
꼭 망 할 사람은 그 생각부터 더럽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복을 받을 자는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긍정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품은 생각이 뿌리가 되어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좋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품은 희망적인 생각이 결실을 가져오게 되어 하나님의 여러 가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육신의 신상에 강건케 되는 축복이요 지식적으로 세상에 가장 뛰어난 자보다 10배나 더한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고 세상에서도 큰 능력과 힘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장차 되어질 일을 알게 되며 그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니엘이 받을 축복을 다 받을 줄로 기대 해도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다니엘과 같이 바로 가지고 올 한 해를 출발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무슨 생각이 축복을 가져 왔습니까? 세상에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곧 신앙의 작은 양심 하나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신앙의 양심은 내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느냐? 아니면 육신의 인도함을 따르느냐? 에 따라 결정 지어질 일 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육신의 영화보다는 영적인 신앙과 믿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금방 눈에 들어오는 물질보다는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에 참으로 모험 중에서도 대 모험입니다.
그러나 함께 발탁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안 좋아하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대다수가 우리는 불행 중에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와서 비참한 생활 가운데 우리는 왕의 진미를 먹데 되었으니 라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점점 바벨론화 되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당장의 사단의 미끼에 좋아하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결국은 그 일이 자기의 양심을 죽이는 일이요 양심을 죽이는 일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기독교 학교 교훈에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라는 이런 글이 써있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제발 무시하지 말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소리를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에 들을 귀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소리를 무시하고 육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다가 영육 간에 쫄딱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고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이 언제나 내주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계시는데 세상에 속된 것을 내 마음속에 품으면 성령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성령이 내 마음에서 근심하시고 내 스스로는 죽으면 죽었지 성령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하기가 싫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거슬리고 속이고 무시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밤에 잠이 잘 오고 음식물이 소화가 잘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내 자신이 믿음에 서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예 성령님이 나를 아주 떠나 버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다니엘이 어떠한 청년입니까? 아무리 왕이 주는 음식이라 할지라도 포도주 한 잔, 고기 한 점에 자신의 신앙양심에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률이 무엇을 말하든지, 풍습이 무엇을 말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땅에 있는 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오직 하나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풍습을 따릅니다. 신앙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만약 다니엘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스스로 다한다면 그것은 성별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는 음식을 날마다 먹고 지낸다면 그는 호의호식하며 왕 같은 생활을 누렸을 것입니다만 그는 갈대아 사람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이 주어진 이스라엘인 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일한 유혹은 오늘날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라고 허용합니다. 다만 세상 조류에 따라서 휩쓸리어 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도록 합니다. 시간마다 예배자리에 나가도록 허용합니다. 때가 되면 학습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는 것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거기까지이어야 하지 결코 사업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처신하라고 세상은 압력을 가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허용하지만 절대로 별나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들 하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라고 사탄은 간교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드는 원수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유혹 앞에서 과감히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올 한 해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축복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영적인 지도자인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면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돌아가서 죄를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므로 해서 얼마나 나로 죄를 짓게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함으로서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도하기를 힘을 써야 합니다.
오스왈드 센더스(J. O. Sanders) 목사님은 그가 쓴 영적 지도력이라는 책에서 다른 어떤 기술처럼 기도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시간을 가져야 하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만큼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는 시간을 찾으려고 궁리한다.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는데 너무 짧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꽉 짜여진 많은 다른 일들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이 기도에 능숙해 지기 위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물론 이 훈련은 입만 열면 기도가 기계적으로 나오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에 진실함이 따르지 않는 기도는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기도 하며, 우리의 육신 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 이론을 몸에 배이도록 하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새로운 법이 공포가 되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자굴 속에 던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상황이나 형편에 좌우되지 않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고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틈을 아무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정치인으로서 다니엘이 신실하고, 태만하지 않으며, 부정부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를 고소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찾지 않고서는 고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고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아부하면서 30일 동안에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그것도 기도에 집중하여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법령에 도장을 찍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내용의 조서가 전국에 내려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조서가 내려진 것을 알고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 법령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30일 동안만 적당히 타협하고 기도하지 않음으로 사자 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상황이나 형편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기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바쁜 일이 있다든지, 기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실 바쁘고 문제가 발생할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생사가 달린 문제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의 두 번째 특징은 규칙적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끓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전에 행하던 대로(just as he had done before)라는 말씀은 다니엘의 기도가 과거부터 계속해 오고 있었다는 습관을 이야기해 줍니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습관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꾸준히 지속할 때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습관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변하면 말이 변하고, 말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한다. 생각이 변한다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에 맞는 말과 행동이 습관적으로 나타나도록 훈련할 때 변화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은 규칙적이었고 습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기도생활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하였다는 것은 그의 기도생활이 불규칙적이 아니고 규칙적이었고, 기도가 생활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예배시간에 기도하고, 식사시간에 기도한다고 규칙적으로 기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규칙적이고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가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무시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그 시간, 오늘도 그 시간, 내일도 그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규칙적인 기도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일을 위하여 따로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새벽에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앞서간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거의 새벽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루에 세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 세 시간 중에 아침 시간에 두 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은 사탄이 나의 하루를 지배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 세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일을 하나도 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루터처럼 하루 세시간을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기도한다면 하루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경험될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앞서간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른 새벽이나 아침에 기도하는 일을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해 왔습니다
또 기도는 축복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다니엘서 9:2절에 보면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던 예언의 말씀을 깊이 기도하고 상고하는 중에 예루살렘이 황무하여 70년만에 마치리라는 것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말씀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 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게 되는데 외면하지 않겠다. 결코 버리지 않겠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힘이 되고 축복이 되지 않겟습니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이 주는 진미를 거절하였지만 열흘 후에 진미를 먹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소년이 되었고 지혜는 10배나 더하고 왕의 앞에서 일을 하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2천6백여 년 전에 다니엘에게만 역사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그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을 찾아 역사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이 같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려워 말라 형통케 하리라는 하나님의 약속한 축복의 한 해가 출발하였습니다.
그러나 벌써 10여 일이 지나가고 있지만 축복의 기미는 보이지 않고 그저 답답하기만 한 사람도 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올 한 해도 그저 그렇게 의미 없이 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인물이 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그렇기 위해서는 하나님 앞에서 내가 어떻게 살아야 축복된 삶이 될 것인가를 생각을 바로 가지기만 하면 됩니다.
우리가 세상에서도 작은 일 하나를 이루려고 해도 먼저 마음에 생각을 품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사람에게 본능이전에 사고를 하도록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생각이 없이 일이 이루어 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소이 마음에 계획과 뜻을 세우는 일이 언제든지 앞서게 마련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무슨 생각을 품든지 거기에는 길이 열리게 마련이고 또한 결실이 따르게 마련입니다.
롬 10:10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좋은 생각을 가지면 좋은 일이 나쁜 생각을 가지면 나쁜 일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세상적인 것을 많이 생각하는 사람은 썩어 질 것을 거둘 것이고 성령의 생각을 하는 자는 영생을 거둔다고 지난주일 말씀을 드렸습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둘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의 글에서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든지 그 생각의 종이 된다고 했습니다.
롬 6:16 너희 자신을 종으로 드려 누구에게 순종하든지 그 순종함을 받는 자의 종이 되는 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혹은 죄의 종으로 사망에 이르고 혹은 순종의 종으로 의에 이르느니라
그러므로 축복된 한 해를 시작하려고 하면은 마음에 축복 받을 정신을 가져야 합니다.
오늘 본문에는 젊은 청년 다니엘이 나라를 잃고 자신의 처지는 종으로 잡혀간 희망이 없는 그런 신세가 되었지만은 그 마음에는 소망이 있는 복된 생각을 가졌습니다.
뜻을 정하여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할렐루야! 이 얼마나 하나님의 복을 받을 희망적인 생각입니까?
꼭 망 할 사람은 그 생각부터 더럽고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어요 그러나 복을 받을 자는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깨끗하고 긍정적으로 가지고 있습니다.
그 마음에 품은 생각이 뿌리가 되어 싹이 나고 꽃이 피어 좋은 열매를 얻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품은 희망적인 생각이 결실을 가져오게 되어 하나님의 여러 가지의 축복을 주셨습니다.
육신의 신상에 강건케 되는 축복이요 지식적으로 세상에 가장 뛰어난 자보다 10배나 더한 지혜와 명철을 얻게 되고 세상에서도 큰 능력과 힘을 얻게 되고 영적으로 장차 되어질 일을 알게 되며 그의 삶이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된 자가 된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 성도들이 다니엘이 받을 축복을 다 받을 줄로 기대 해도 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여러분들이 생각을 하나님 앞에서 다니엘과 같이 바로 가지고 올 한 해를 출발하면 됩니다. 할렐루야!
그러면 무슨 생각이 축복을 가져 왔습니까? 세상에 더러운 것에서 자신을 지키기로 했습니다.
곧 신앙의 작은 양심 하나 지키기를 주저하지 않아야 합니다.
그 신앙의 양심은 내 스스로가 성령의 인도함을 따르느냐? 아니면 육신의 인도함을 따르느냐? 에 따라 결정 지어질 일 입니다.
본문 8절 말씀에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 고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육신의 영화보다는 영적인 신앙과 믿음을 선택하였습니다.
금방 눈에 들어오는 물질보다는 하나님의 영광된 일을 선택하였습니다.
이는 그 당시의 상황에서 볼 때에 참으로 모험 중에서도 대 모험입니다.
그러나 함께 발탁된 다른 사람들은 얼마나 좋아하였는지 안 좋아하였는지는 기록되지 않았지만 아마 대다수가 우리는 불행 중에 다행이다 라고 생각을 했을 지도 모릅니다.
나라가 망하고 포로로 끌려와서 비참한 생활 가운데 우리는 왕의 진미를 먹데 되었으니 라고 말입니다.
자신들이 점점 바벨론화 되어 가는 것도 깨닫지 못하고 당장의 사단의 미끼에 좋아하고 있어야 되겠습니까?
결국은 그 일이 자기의 양심을 죽이는 일이요 양심을 죽이는 일은 결국 자기를 망치는 일입니다.
제가 아는 어떤 기독교 학교 교훈에 양심의 소리에 귀를 기울이자 라는 이런 글이 써있었습니다.
오늘의 성도들은 성령이 우리의 양심을 통하여 하시는 말씀을 제발 무시하지 말고 성령이 하시는 말씀에 귀를 기울이는 자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성령의 소리를 따르는 길이 생명의 길이요 축복의 길입니다.
성령이 하시는 말에 들을 귀를 가지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나니아와 삽비라는 성령의 소리를 무시하고 육의 소리에 귀를 기우리다가 영육 간에 쫄딱 망한 사람이 되었습니다.
나의 몸은 하나님이 계시는 하나님의 거룩한 성전입니다.
바울은 “너희 몸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그런즉 너희 몸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라”(고린도전서 6:19-20)고 했습니다.
예수를 구주로 영접한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성령이 언제나 내주하고 있습니다.
거룩한 성령이 계시는데 세상에 속된 것을 내 마음속에 품으면 성령께서 좋아하시겠습니까? 그리고 내 마음이 편안하시겠습니까? 성령이 내 마음에서 근심하시고 내 스스로는 죽으면 죽었지 성령이 기뻐하지 않는 일은 하기가 싫은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령을 거슬리고 속이고 무시하는 생활을 하면서도 밤에 잠이 잘 오고 음식물이 소화가 잘 되는 사람이 있다면 다시 한번 내 자신이 믿음에 서 있는가 살펴보아야 합니다.
아예 성령님이 나를 아주 떠나 버리지 않았는지 생각해 볼일입니다.
다니엘이 어떠한 청년입니까? 아무리 왕이 주는 음식이라 할지라도 포도주 한 잔, 고기 한 점에 자신의 신앙양심에 상처를 주는 그런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법률이 무엇을 말하든지, 풍습이 무엇을 말하든지 상관없이 하나님의 사람들은 땅에 있는 임금보다 더 높은 임금을 섬기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은 오직 하나의 법을 가지고 있으며 하나의 풍습을 따릅니다. 신앙인의 대답을 들어보십시오. 하나님 앞에서 너희 말 듣는 것이 하나님의 말씀 듣는 것보다 옳은가 판단하라 그들은 사람보다 하나님께 복종하기를 원하는 이들입니다.
만약 다니엘이 그에게 요구되는 것을 스스로 다한다면 그것은 성별된 삶을 포기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주는 음식을 날마다 먹고 지낸다면 그는 호의호식하며 왕 같은 생활을 누렸을 것입니다만 그는 갈대아 사람 가운데 하나로 전락했을 것입니다. 하나님의 고귀한 약속이 주어진 이스라엘인 되기를 포기했을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동일한 유혹은 오늘날도 도사리고 있습니다. 세상은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지 말라고 그렇게 이야기하지는 않습니다. 우리보고 그리스도인이라고 말하라고 허용합니다. 다만 세상 조류에 따라서 휩쓸리어 가도록 요구하는 것입니다. 기독교인이라는 이름을 가지도록 합니다. 시간마다 예배자리에 나가도록 허용합니다. 때가 되면 학습세례도 받고 성찬에도 참여하는 것을 시비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신앙은 거기까지이어야 하지 결코 사업에 가지고 들어와서는 안 된다고 합니다. 직장에서는 다른 많은 사람들이 하는 것처럼 처신하라고 세상은 압력을 가합니다. 교회 다니는 것은 허용하지만 절대로 별나게 믿어서는 안 된다고 말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유혹은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는데 너도 그렇게 하여야 한다고 속삭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렇게 말들 하니까 너도 그렇게 말하라고 사탄은 간교하게 유혹하고 있습니다. 이 모든 것이 이 시대의 교회를 파괴하려고 드는 원수의 전략입니다. 그러나 다니엘은 이런 유혹 앞에서 과감히 자기의 신앙을 지키기로 결단합니다.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의 진미와 그의 마시는 포도주로 자기를 더럽히지 아니하리라고 결심합니다.
올 한 해를 신앙의 양심에 따라 살기를 다짐하는 성도가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어떻게 하여야 축복된 마음으로 살 수 있을까요? 기도를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합니다.
선지자요 제사장이요 영적인 지도자인 사무엘은 하나님께 기도하기를 쉬는 것이 죄가 된다고 했습니다.
이 말을 다르게 해석한다면 기도하지 않으면 인간적으로 돌아가서 죄를 짓게 된다는 말입니다.
기도하지 않으므로 해서 얼마나 나로 죄를 짓게 하는지 모릅니다.
기도함으로서 죄에서 자유롭게 된다는 말이기도 합니다.
그러므로 무슨 수를 쓰더라도 기도하기를 힘을 써야 합니다.
오스왈드 센더스(J. O. Sanders) 목사님은 그가 쓴 영적 지도력이라는 책에서 다른 어떤 기술처럼 기도의 기술을 습득하기 위해서도 시간을 가져야 하고, 기도의 중요성에 대한 우리의 생각만큼 많은 시간을 할당해야 할 것이다. 우리는 항상 가장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하여는 시간을 찾으려고 궁리한다. 대부분의 경우 기도하는데 너무 짧은 시간을 보내는 이유 중의 하나는 꽉 짜여진 많은 다른 일들 때문이다. 우리가 기도의 중요성을 인식하게 된다면 이 기도에 능숙해 지기 위해서 훈련해야 합니다. 물론 이 훈련은 입만 열면 기도가 기계적으로 나오도록 훈련해야 한다는 말은 아닙니다. 삶에 진실함이 따르지 않는 기도는 가증스럽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기도를 훈련해야 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뜻에 따라 기도하며, 또한 하나님의 뜻을 이루기 위하여 기도하기도 하며, 우리의 육신 적인 필요를 위해 기도한다든지, 다른 사람들의 필요를 위해 기도하는 것들이 자연스럽게 할 수 있도록 훈련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 일을 위하여 기도에 대하여 체계적으로 배우고 그 이론을 몸에 배이도록 하기 위해 훈련해야 합니다.
다니엘은 환난과 어려움 속에서도 자신을 죽이려고 하는 새로운 법이 공포가 되었고 이를 어기는 자는 사자굴 속에 던진다는 사실을 알고도 예루살렘을 향하여 창문을 열고 하루에 세 번씩 기도를 하였습니다.
(단6:10) 다니엘이 이 조서에 어인이 찍힌 것을 알고도 자기 집에 돌아가서는 그 방의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에서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꿇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
그러므로 진정한 기도는 상황이나 형편에 좌우되지 않는 기도입니다.
다니엘을 시기하던 사람들은 그를 고소하기 위하여 여러 가지 틈을 아무 허물도 발견하지 못하였습니다. 그것은 정치인으로서 다니엘이 신실하고, 태만하지 않으며, 부정부패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그를 고소하기 위해서는 다니엘이 섬기는 하나님의 율법과 관련하여 찾지 않고서는 고소할 수 없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런데 그들은 다니엘이 하루 세 번 예루살렘으로 향하여 열린 창으로 기도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생활로 고소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판단하였습니다. 그래서 왕에게 아부하면서 30일 동안에 다리오 왕 외에 다른 신을 섬기면, 그것도 기도에 집중하여 왕 외에 어느 신에게나 구하면 사자 굴에 넣는다는 법령에 도장을 찍게 하였습니다. 다니엘은 이러한 내용의 조서가 전국에 내려진 것을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다니엘은 왕의 조서가 내려진 것을 알고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 법령이 무엇을 의미하고 있는지, 그의 신변에 어떤 위험이 있는지를 알았습니다. 하지만 그는 전에 행하던 대로 하나님께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30일 동안만 적당히 타협하고 기도하지 않음으로 사자 굴에 들어가지 않을 수도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러한 상황 가운데 우선적으로 하나님을 신뢰하였습니다. 그는 상황이나 형편에 좌우되지 않았습니다. 이것이 다니엘의 기도의 첫 번째 특징입니다.
오늘날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바쁜 일이 있다든지, 기타 여러 가지 문제가 있으면 기도하지 않습니다. 사실 바쁘고 문제가 발생할수록 더욱 기도해야 합니다. 아무리 바쁜 일이 있고 생사가 달린 문제 앞에서도 기도해야 합니다.
기도는 규칙적으로 드려야 합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의 두 번째 특징은 규칙적인 기도였다는 것입니다. 10절에 보면 전에 행하던 대로 하루 세 번씩 무릎을 끓고 기도하며 그 하나님께 감사하였더라고 하였습니다. 여기에 전에 행하던 대로(just as he had done before)라는 말씀은 다니엘의 기도가 과거부터 계속해 오고 있었다는 습관을 이야기해 줍니다. 사람의 습관이라는 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일반적으로 습관이라는 것은 오랜 기간 꾸준히 지속할 때 형성됩니다. 그리고 이 습관은 한 사람의 인격과 삶에 영향을 미치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말 가운데 이런 말이 있습니다. 생각이 변하면 말이 변하고, 말이 변하면 행동이 변하고, 행동이 변하면 습관이 변하고, 습관이 변하면 인격이 변한다. 생각이 변한다고 모든 것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생각에 맞는 말과 행동이 습관적으로 나타나도록 훈련할 때 변화가 있습니다. 다니엘의 기도생활은 규칙적이었고 습관적이었습니다. 그것은 그의 기도생활이 잘 훈련되어 있었다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전에 행하던 대로 기도하였다는 것은 그의 기도생활이 불규칙적이 아니고 규칙적이었고, 기도가 생활화되었음을 의미합니다.
그런데 우리의 기도생활은 어떻습니까? 예배시간에 기도하고, 식사시간에 기도한다고 규칙적으로 기도한다고 생각하지 마십시오. 규칙적이고 습관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기도가 생활화되었다는 것을 말합니다. 기도가 생활화되어야 한다는 것은 우리의 생활을 무시하고 기도하라는 것은 아닙니다. 어제도 그 시간, 오늘도 그 시간, 내일도 그 시간에 기도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규칙적으로 기도한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입니다. 하지만 규칙적인 기도가 그의 삶을 변화시키고, 그가 처해 있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 있습니다. 하나님께서 성도의 기도를 하나님의 약속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기도 하고, 하나님의 뜻을 이루시는 방편으로 사용하시기도 합니다. 또한 하나님께서는 성도의 기도를 통하여 우리의 필요를 채우시기도 합니다. 그래서 기도는 우리의 삶을 변화시키고 역사를 바꾸게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기도한 일을 위하여 따로 시간을 정하는 것이 필요합니다. 성경에 보면 예수님은 새벽에 자주 한적한 곳을 찾으셔서 기도하셨습니다. 앞서간 우리 믿음의 조상들도 거의 새벽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었습니다. 우리가 잘 아는 마틴 루터(Martin Luther)는 하루에 세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었다고 하는 것은 잘 알려진 일입니다. 그 세 시간 중에 아침 시간에 두 시간을 기도하였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하셨습니다. 만약에 내가 매일 아침 두 시간을 기도하지 않으면 그날은 사탄이 나의 하루를 지배해 버릴 것이다. 그래서 나는 하는 일이 너무 많기 때문에 하루 세 시간을 기도하는 일에 보내지 않으면 도저히 다른 일을 하나도 할 수 없다. 물론 우리는 루터처럼 하루 세시간을 기도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하루를 시작하는 첫 시간에 기도한다면 하루 전체가 하나님의 은혜의 지배를 받으며 살게 될 것입니다. 모든 좋은 것이 이 기도를 통하여 우리에게 전달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이론이 아니고 실제로 경험될 수 있는 실천적인 지식입니다. 그래서 앞서간 많은 믿음의 조상들은 이른 새벽이나 아침에 기도하는 일을 위하여 오랫동안 씨름해 왔습니다
또 기도는 축복의 말씀을 깨닫게 합니다.
다니엘서 9:2절에 보면 다니엘은 예레미야에게 임하였던 예언의 말씀을 깊이 기도하고 상고하는 중에 예루살렘이 황무하여 70년만에 마치리라는 것과 세계의 종말에 대한 말씀까지 깨닫게 되었습니다.
(단9:2) 곧 그 통치 원년에 나 다니엘이 서책으로 말미암아 여호와의 말씀이 선지자 예레미야에게 임하여 고하신 그 년 수를 깨달았나니 곧 예루살렘의 황무함이 칠십 년만에 마치리라 하신 것이니라
기도하는 가운데 하나님은 말씀을 깨닫게 되는데 외면하지 않겠다. 결코 버리지 않겠다. 그러니 기도가 얼마나 힘이 되고 축복이 되지 않겟습니까?.
다니엘은 뜻을 정하여 왕이 주는 진미를 거절하였지만 열흘 후에 진미를 먹은 사람들 보다 오히려 더욱 아름다운 소년이 되었고 지혜는 10배나 더하고 왕의 앞에서 일을 하는 자로 그리고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놀라운 축복의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 계셔서 역사하고 계십니다. 하나님은 지금으로부터 2천6백여 년 전에 다니엘에게만 역사 하신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지금도 살아 계셔서 하나님의 종들과 하나님의 자녀들을 통하여 그 뜻을 나타내고 있습니다. 영원토록 변함이 없으시며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하신 하나님이 오늘도 다니엘과 같이 뜻을 정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기 위해 기도하고 애쓰는 사람을 찾아 역사하시고 계심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오늘 이 시간에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들이 이 같은 축복의 주인공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