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의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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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949회 작성일 2012-04-05 10: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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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11:13-16 하늘에 있는 본향을 향하는 순례자의 삶
민족의 대 명절 아시아인 특히 중국과 한국이 음력으로 설날을 지키는 유일한 나라입니다. 이 명절에는 고향을 생각하고 그 고향을 찾아 나서지 않습니까? 한국은 약 3천만 명이 움직이는데 중국은 이 기간 동안 당국이 예상하는 귀향을 포함한 여행인구는 31억5800만 명에 달한다. 전 세계 70억 인구의 절반에 육박하며 13억4000여만 명인 중국사람 모두가 2-3번 정도는 이 기간 동안 여행을 하는 셈이다.
고향을 향한 열기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사실 인생 자체가 영원히 머무름이 없는 나그네와 객이 되어 이 세상의 삶을 살아가고 있지 않습니까?
본문에서도 먼저 살았던 믿음의 선진들이 이 세상을 나그네로 살았다고 하지 않습니까?
13-14절 이 사람들은 다 믿음을 따라 죽었으며 약속을 받지 못하였으되 그것들을 멀리서 보고 환영하며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여기 이 사람들은 믿음으로 살았던 자들을 가리키는데 아브라함과 이삭, 야곱을 말합니다.
나이 130년을 산 야곱은 애급왕 바로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창47:8-9 바로가 야곱에게 묻되 네 나이가 얼마냐 야곱이 바로에게 아뢰되 내 나그네 길의 세월이 백삼십 년이니이다 내 나이가 얼마 못 되니 우리 조상의 나그네 길의 연조에 미치지 못하나 험악한 세월을 보내었나이다 하고
야곱은 형 에서를 피해 밧단아람으로 가서 20년 동안 4명의 아내와 아들 12명을 얻는 가운데 외삼촌과의 경제적인 갈등 그는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얍복강가에서 형과의 문제로 고민하는 영적인 투쟁, 세겜에서 외동딸이 성폭행으로 인한 부족과의 싸움에서 가족 몰살과 죽음을 모면했던 일, 14년 동안 사랑하여 얻은 아내 라헬이 막내아들 베냐민을 해산하다가 죽는 것을 보아야 했고, 사랑하는 요셉을 잃고 20년을 가슴에 묻고 지내야 하는 고통도 겪기도 했습니다. 그는 그동안 제대로 정착하지 못하고 이곳저곳을 전전해야 했으며 역시 흉년 가운데 양식을 구하러 왔다가 바로 앞에 선 그의 130년의 세월이 나그네의 생활이었다는 것입니다.
인생은 나그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런데 성경에서 말하는 나그네는 순례자라는 뜻으로 유랑자나 방랑자와는 다릅니다.
그들은 목적이 있는 여행자이며 특히 거룩한 목적 종교적 목적을 가지고 성지를 순례하는 여행자입니다.
성도들 또한 이스라엘을 중심한 성지를 순례하는 것과 같이 믿는 사람들은 마치 순례자와 같습니다.
순례자가 거룩한 땅을 순례하는 것처럼 성도는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아가는 순례자로서의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은 거룩한 목적을 가지고 거룩한 목표를 향하여 나가는 거룩한 순례자들입니다.
♬1. 나는 순례자 낯선 나라에 언젠가 집에 돌아가리 어두운 세상 방황치 않고 예수와 함께 돌아가리
후렴 나는 순례자 돌아가리 날 기다리는 밝은 곳에 곧 돌아가리 기쁨의 나라 예수와 함께 길이 살리
2. 나는 순례자 방황하지만 예수 내 구주 이끄시네 영광의 나팔 소리 들릴때 천사 날 위해 찾아오리
3. 나는 순례자 피곤한 몸을 하늘나라에 누이시네 주 볼 때마다 영광 나타나 승리를 위해 찬양하리
순례자의 삶은 어떤 삶입니까? 외국인과 나그네 같은 삶을 사는 자입니다.
나그네는 영어로 stranger, 이방인이란 뜻입니다.
그리스도인은 세상 사람과 참 다른 자입니다. 왜요 이방인이요 나그네이기 때문입니다.
미네르바 부엉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미네르바는 로마의 지혜의 여신입니다. 그리고 보니 제가 중고등 학교 시절에 미네르바 독서실에 다닌 적이 기억이 나는데 미네르바 독서실에 다니면서 미네르바가 무슨 뜻인지를 모르고 다녔지요 지혜의 여신인 미네르바는 부엉이를 좋아하여 항상 부엉이를 데리고 다닌다고 하는데, 독일의 철학자 헤겔이 법철학에서 미네르바 부엉이는 황혼이 짚어지자 날기 시작한다는 데서 미네르바 부엉이란 용어가 나왔습니다. 이 말은 이성적인 철학이나 진리에 대한 인식은 일이 다 끝난 무렵에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 무슨 일을 하다가 한참 후에야 비로소 깨닫게 된다는 뜻입니다.
인간의 삶도 미네르바의 부엉이와 같습니다. 삶을 다 살아 보고 인생을 안다는 것입니다.
죽을 때나 되어야 그제야 인생이 무엇인가를 안다는 것입니다.
야곱도 말년에 자신의 삶을 나그네 인생이라고 고백하지 않았습니까?
그런데 아직도 나그네의 삶이 인생임을 잘 모르고 사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제 인생은 나그네, 거룩한 순례자임을 알게 되었으니 얼마나 행복한 일입니까?
인생 허무를 노래하는 것이 아니라 본향을 향해 더욱 확실하게 살아가는 자입니다.
목적이 분명하기 때문에 허송세월 아무렇게나 보내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본향을 사모하며 사는 인생을 사는 자입니다.
13-14절 또 땅에서는 외국인과 나그네임을 증언하였으니 그들이 이같이 말하는 것은 자기들이 본향 찾는 자임을 나타냄이라
아브라함은 큰 희망을 가지고 약속의 땅 가나안에 도착했습니다.
그런데 막상 가보니 기골이 장대한 가나안 원주민들이 살고 있었습니다.
가나안 땅은 약속의 땅이지만 아브라함에게는 시민권도 없었습니다. 발붙일 만큼의 유업도 주시지 않았습니다
행7:4-5 아브라함이 갈대아 사람의 땅을 떠나 하란에 거하다가 그의 아버지가 죽으매 하나님이 그를 거기서 너희 지금 사는 이 땅으로 옮기셨느니라 그러나 여기서 발붙일 만한 땅도 유업으로 주지 아니하시고 다만 이 땅을 아직 자식도 없는 그와 그의 후손에게 소유로 주신다고 약속하셨으며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약속을 조금도 의심하지 않고 약속의 땅에서 외국인과 나그네로 살았습니다.
가나안은 각종 우상이 난무하였습니다 역시 음란과 물질 만능이요 그리고 방탕의 삶입니다.
그러나 그는 가나안 문화에 동화되지 않았습니다. 왜요 본향을 향해 가는 자이기 때문입니다.
오늘날 많은 성도들은 세상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것을 이상히 여기지 않고 당연히 여깁니다.
동화되어 살아가지 않는 자들을 이상하게 여깁니다.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를 이상히 여기는 세태가 되었습니다.
특히 그리스도인이라는 자들이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롯은 소돔 속에서 이 문제로 상당히 고민하였습니다.
벧후2:7 무법한 자들의 음란한 행실로 말미암아 고통당하는 의로운 롯을 건지셨으니
믿음의 거장들은 본향을 생각하고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15-16절 그들이 나온 바 본향을 생각하였더라면 돌아갈 기회가 있었으려니와 그들이 이제는 더 나은 본향을 사모하니 곧 하늘에 있는 것이라
그리스도인들이 세상 사람들과 같은 방법으로 살지 못해서 그렇게 살지 않는 것이 아니라 다시는 그렇게 살 이유가 없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러니 외국인같이 살아가는 것입니다.
말도 안통하고 음식도 안 맞고 생각도 다르고 생활 습관도 맞지 않는 것입니다.
사실 믿음의 조상들의 순례자의 삶이 아픔과 고통이 있었습니다. 희생과 헌신이 요구되었습니다.
때로는 동료들로부터의 소외와 오해, 그리고 많은 불이익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자기를 부인해야 하며, 자기 십자가를 지고 그 정과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야 했습니다.
죄와 선을 긋고 거룩한 삶을 살아야 했습니다.
이 때 내가 무엇 때문에 이 고생을 해 하며 과거에 세상에서 즐기던 삶으로 돌아갈 수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순례자는 돌아가지 않습니다.
딤후4:10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
아직도 세상의 미련을 버리지 못하고 끼웃끼웃 거리고 있으니...
그러나 아브라함은 정든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뒤로 돌아가지 않았습니다.
떠나라 할 때에 떠났습니다.
창12:1-4 여호와께서 아브람에게 이르시되 너는 너의 고향과 친척과 아버지의 집을 떠나 내가 네게 보여 줄 땅으로 가라 내가 너로 큰 민족을 이루고 네게 복을 주어 네 이름을 창대하게 하리니 너는 복이 될지라 너를 축복하는 자에게는 내가 복을 내리고 너를 저주하는 자에게는 내가 저주하리니 땅의 모든 족속이 너로 말미암아 복을 얻을 것이라 하신지라 이에 아브람이 여호와의 말씀을 따라갔고 롯도 그와 함께 갔으며 아브람이 하란을 떠날 때에 칠십오 세였더라
그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약속의 땅에 뿌리를 내렸고, 뼈를 묻었습니다. 이삭과 야곱에게도 약속의 땅을 떠나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때 그들은 믿음의 조상, 믿음의 거장들이 될 수 있었습니다.
야곱과 요셉은 약속의 땅에 묻히기를 원했습니다.
창47:27-31 이스라엘 족속이 애굽 고센 땅에 거주하며 거기서 생업을 얻어 생육하고 번성하였더라
야곱이 애굽 땅에 십칠 년을 거주하였으니 그의 나이가 백사십칠 세라 이스라엘이 죽을 날이 가까우매 그의 아들 요셉을 불러 그에게 이르되 이제 내가 네게 은혜를 입었거든 청하노니 네 손을 내 허벅지 아래에 넣고 인애와 성실함으로 내게 행하여 애굽에 나를 장사하지 아니하도록 하라 내가 조상들과 함께 눕거든 너는 나를 애굽에서 메어다가 조상의 묘지에 장사하라 요셉이 이르되 내가 아버지의 말씀대로 행하리이다 야곱이 또 이르되 내게 맹세하라 하매 그가 맹세하니 이스라엘이 침상 머리에서 하나님께 경배하니라
창50:12-13 야곱의 아들들이 아버지가 그들에게 명령한 대로 그를 위해 따라 행하여 그를 가나안 땅으로 메어다가 마므레 앞 막벨라 밭 굴에 장사하였으니 이는 아브라함이 헷 족속 에브론에게 밭과 함께 사서 매장지를 삼은 곳이더라
창50:24-26 요셉이 그의 형제들에게 이르되 나는 죽을 것이나 하나님이 당신들을 돌보시고 당신들을 이 땅에서 인도하여 내사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에게 맹세하신 땅에 이르게 하시리라 하고 요셉이 또 이스라엘 자손에게 맹세시켜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당신들을 돌보시리니 당신들은 여기서 내 해골을 메고 올라가겠다 하라 하였더라 요셉이 백십 세에 죽으매 그들이 그의 몸에 향 재료를 넣고 애굽에서 입관하였더라
출13:19 모세가 요셉의 유골을 가졌으니 이는 요셉이 이스라엘 자손으로 단단히 맹세하게 하여 이르기를 하나님이 반드시 너희를 찾아오시리니 너희는 내 유골을 여기서 가지고 나가라 하였음이더라.
왜 그러했습니까? 이는 그들이 더 나은 본향을 사모했기 때문입니다.
사모라는 말은 간절히 바라고 사랑한다는 뜻입니다.
하나님 나라는 더 나은 본향입니다. 이 세상 그 어떤 것과 비교할 수 없는 나라입니다.
이 세상 나라보다 더 아름답고, 더 고귀하고, 더 가치가 있습니다.
어떤 어려움과 고난과 핍박도 능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세상에 매이지 않고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걸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청춘과 물질, 땀과 눈물과 몸을 헌신 할 수 있습니다.
피해의식에 사로잡히지 않고, 좌절과 절망을 극복할 수 있습니다.
더욱 이 땅에 온 내 인생을 아름다움을 창출 할 수 있습니다.
미국의 2살배기 여아가 7명의 어린 생명을 구한 뒤 세상을 떠났다. 미국 시카고트리뷴 인터넷 판은 19일(현지시간) 사고로 숨진 2살 여아가 장기를 기증했다는 제목으로 이 소식을 전했다. 인디애나 개리의 자리아 헨더슨(2)은 지난 16일 의사로부터 사망했다는 선고를 받았다. 하지만 시카고 메디컬 센터는 여전히 헨더슨의 인공호흡기를 떼지 않고 놔두었다. 장기 기증 때문이다. 헨더슨은 지난 주말 친척집에서 사촌들과 함께 놀던 중 머리에 총상을 입어 병원에 후송됐다. TV 아래 놓여 있던 총이 자동으로 발사되면서 이 같은 끔찍한 사고가 발생했다. 시카고 메디컬 센터 의료진은 헨더슨 부모의 동의로 7명의 아이가 새 생명을 얻을 수 있게 됐다며 고마움을 표시했다.
어린 아이지만 너무나도 아름다운 일을 했습니다.
그런데 오래 살아 장수를 자랑하지만 참으로 수치스럽고 부끄러운 일을 행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막14:21 인자는 자기에 대하여 기록된 대로 가거니와 인자를 파는 그 사람에게는 화가 있으리로다 그 사람은 차라리 나지 아니하였더라면 자기에게 좋을 뻔 하였느니라 하시니라
사실 나그네 인생길이 그리 길지 않습니다.
히10:36-39 너희에게 인내가 필요함은 너희가 하나님의 뜻을 행한 후에 약속하신 것을 받기 위함이라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나의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또한 뒤로 물러가면 내 마음이 그를 기뻐하지 아니하리라 하셨느니라 우리는 뒤로 물러가 멸망할 자가 아니요 오직 영혼을 구원함에 이르는 믿음을 가진 자니라
뒤로 물러나면 세월이 아까워요 그러므로 성도는 세상에 한 눈 팔지 말고 오직 하나님 나라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거룩한 순례자의 길을 가야 합니다
다시 돌아서지 않습니다.
벧전2:22 참된 속담에 이르기를 개가 그 토하였던 것에 돌아가고 돼지가 씻었다가 더러운 구덩이에 도로 누웠다 하는 말이 그들에게 응하였도다
영국 선교사 콜룸바는 12명의 선교팀을 이끌고 스코틀랜드에 상륙한다. 당시 스코틀랜드에는 피크츠 족이 살았다. 몹시 잔악한 족속으로 외부인은 무조건 죽였다. 콜룸바는 타고 온 배 위에 흙과 바위들을 쌓게 하였다. 피크츠 족의 습격이 있을 때 도망갈 길을 포기한 것이다. 그리고 기도하기를 하나님, 우리는 배를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만을 의지하겠습니다. 이제 이 땅을 밟은 이상 후퇴는 없고 전진만이 있나이다.
한 세기에 가장 커다란 발자취를 남겼던 실존주의 철학자 샤르트르(Chartre)는 1980년 3월에 불란서 파리의 부르세 병원에 폐수종으로 입원했습니다. 그는 한 달 동안을 이 병원에서 발악하며 소리를 지르고 찾아온 사람들을 향하여 고함을 치며 절규했습니다. 그는 죽음에 대한 불안과 공포 때문에 자기의 병명이 무엇인지 곁에 있는 아내에게조차 묻지 못했습니다. 그는 현대인에게 깊은 감동을 주었고 자유라는 수많은 수필과 글을 남겼지만 그의 마지막은 실로 비참했습니다. 그는 1980년 4월 16일 입원한 지 한 달 만에 몹시 괴로워하다가 병원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가 세상을 떠나고 난 후 불란서의 신문들은 샤르트르의 죽음에 대하여 떠들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으로부터의 자유를 그렇게도 외쳤던 그의 말로가 이렇게 비참했던 이유에 대해서 샤르트르의 말로가 그렇게도 비참했던 이유는 샤르트르에게 돌아갈 고향이 없었기 때문이다.
샤르트르에게는 진정으로 돌아갈 고향이 없었습니다.
반면 독일 고백교회 신학자인 디트리히 본 훼퍼(Dietrich Bonhoeffer)는 세계 대전 중에 독일의 수용소에서 나치에게 항거하다가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1939년 7월 7일, 뉴욕 유니언신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본회퍼 목사가 독일로 돌아가는 배에 오른다. 그의 양심은 결코 히틀러에게 굴복하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죽으러 가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그는 유니언신학교 교장에게 이런 편지를 썼다. 나는 내가 할 일을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그러기에 내 마음에는 평화가 있습니다. 신념을 따라 앞으로 달리는 것은 행복이 아니겠습니까. 어느 날 갑자기 한 간수가 문을 두드리고 들어오는데 그는 직감적으로 이것이 자기의 마지막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는 벌떡 일어나 감방에 있던 자기의 동지들에게 이렇게 인사를 했습니다. 동지 여러분! 이제 나에게는 죽음이 왔습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이것은 마지막이 아니고 시작입니다. 주님께서 나를 위해서 예비하신 아버지의 집에서 만날 때까지 여러분! 안녕히 계십시오. 마지막 인사를 하고 감방을 나서는 그에게서 놀라운 평안과 기쁨이 넘쳐 났습니다. 그 감옥에 있었던 사람들은 하나님을 신뢰하는 사람의 마지막 모습을 충격과 감동으로 보았습니다.
본 훼퍼에게는 돌아갈 고향이 있었습니다.
나는 언젠가는 반드시 이 땅을 떠나 본향인 하나님의 품안으로 돌아가야 할 여행자입니다.
나는 거룩한 나그네입니다. 나는 거룩한 순례자입니다. 따라서 나는 되를 돌아보지 말고 하나님 나라를 향하여 한걸음 한걸음 기쁘고 감사하고 은혜롭게 살아 갈 자입니다.
빌리, 그레이엄 목사는 인생은 영광스러운 기회이다. 우리가 짧은 인생에서 영원을 확보하지 못하면 영원히 후회할 것이다. 라고 말하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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