긍정적인 믿음을 갖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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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2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마가복음 9:14-29 긍정적인 믿음을 갖자
어떤 20대 후반의 어떤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자동차 엔진분야의 최고의 연구소에서 연구생으로 일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으며 20대에 박사 학위 그리고 최고의 연봉을 받을 것으로 여기며 소이 잘 먹고 잘 살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꿈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설악산을 다녀오는 길에서 자동차 정면 충돌로 목이 부러지고 척추 장애로 가슴 아래로 사지 전신 마비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이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들어올리려고 해도 꼼짝도 안 합니다.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어 보려고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밥 한 숟가락도 자신의 힘으로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으려고 밤중에 전화선을 끌어다가 목에 감았지만 죽을힘도 죽을 자유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겠구나? 할렐루야!
그가 구원의 문제를 해결을 함으로서 부정적인 그의 삶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손가락이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여자와 결혼하고 미국 올랜도 주립 대학으로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따고 지금은 캘리포니아주에서 개인 회사를 운영하며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헌신하는 권영직 집사입니다.
그는 이렇게 그의 간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삶에 기쁨이 있고 삶의 열쇠가 있습니다.
제가 본문의 설교 준비를 하든 중에 이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려 괴로움에 처한 한 소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의 인생이 새롭게 바꿔졌다는 것입니다.
소년과 그 아버지를 괴롭히던 귀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오늘 나를 괴롭히는 세상 적인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믿음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문제가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문제가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느냐? 에 따라서 행복해 질 수도 있고 불행해 질 수도 있고,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하여 무슨 생각을 가지느냐? 에 따라 문제가 해결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은 예수님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 밖에 죽이지 않지만, 부정적인 말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을 말하는 바로 그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의 주인공 이렇게 세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을 하면 자신도 죽고, 듣는 사람도 죽이고, 말의 대상자도 죽입니다.
대개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주역인 사단이 인간에게 부정적 의식을 집어넣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에 대해 그렇습니다.
이 아버지의 고백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 도와주려고 와 계시는 데, 만약에라고 말합니다. 못하시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하실 수 있으시면 이런 뜻입니다. 할 수 있다는 쪽이 아니라 못하시겠지만 쪽입니다. 이미 부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가짐으로 실패한 성경 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다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야! 하나님은 너를 이용하고 있어! 사단은 이렇게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자꾸 심어줍니다. 결국 그 싹은 무성하게 자라 하나님 배반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사단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밭에 부정의식이란 씨를 뿌립니다.
또 다음은 광야의 이스라엘입니다. 모세가 이끌던 광야의 이스라엘은 어려울 때 한껏 부정의식이 싹 텄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 졌을 때, 마라에서 쓴 물이 나올 때 하나님께 대한 부정의식에 폭발합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고 이끌어 냈구나 이런 부정의식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맙니다. 결국은 이방신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주인들 적극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주인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해해 주시겠지? 이렇게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이렇게 주인을 인색한 사람, 엄격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손해볼 때를 먼저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고 한 달란트 그대로 쏙 꺼내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게 부정적인 의식이에요. 특히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은, 대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는 겁니다. 부정적 의식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참으로 낫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으로 나서야지 인간적인 조건, 환경 등으로 부정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이 역사를 일으킨 것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부정적인 것을 몰아내므로 서 완전히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 매일 한 번씩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돕니다.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수6:10) 성을 도는 동안은 절대 침묵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또 성을 돌 때의 격식은 까다로웠습니다. 맨 앞에는 무장 군사들이 앞서고 본 대의 맨 앞에는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그 뒤에는 법궤가 따르고, 맨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따릅니다. 이렇게 격식을 차린 수 십만 군중이 절대 침묵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칠일 동안 즉 승리를 가져오는 날까지 쓸데없는 짓 같아 보이는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불평도 싹트고, 원망도 싹트고 한 숨도 싹텄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식이 날을 더해 갈수록 더 커졌을 것입니다. 일곱 째 날이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겠지요. 금방 중간에서 이 무슨 짓거리야! 나는 도저히 못해 먹겠다! 이런 어린 애같은 장난으로 난공불락의 성이 함락되는 줄 아쇼? 때려치웁시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로 고함을 치며 대열을 이탈할 사람이 금방 생길 것 같은 숨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정의식이 폭발할 것 같은 인간의 한계 지점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은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합니다. 평소처럼 한 바퀴도 아니요 줄여서 반 바퀴도 아닌, 일곱 배나 더 돌라고 합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가슴 깊이에서 끝내 부정의식을 극복하고 깊은 여호와 신뢰를 하느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성을 돈다고 무조건 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신뢰가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부정의식을 깨부수고 바위처럼 굳은 신뢰와 긍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적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의식, 불평과 원망, 절망과 투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 절대낙관, 절대 긍정, 절대 희망, 여기에서 기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나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가능하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가 불신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어떻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보아도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아들도 못 믿고 아버지도 못 믿고 부부도 서로 간에 못 믿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못 믿습니다. 나 자신도 못 믿습니다. 아무도 못 믿어요. 그 엄격한 이념을 유치원서부터 가르쳐놓고도 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게도 철저한 사상교육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믿지 못해요. 그래서 무엇 하나 시켜놓고는 딴 사람을 붙여서 감시를 하고, 감시자 뒤에 또 감시자가 있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 무능할 수 밖에요. 그러니 생산도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중국에 갔더니 공항에서 자동차 출입금을 내는데 한 군데서는 돈을 받고 한 군데 서는 표를 받고 이렇게 두 곳을 지나게 했어요 왜 그렇는가? 하는데 부정을 막기 위함이라 했는데 그래도 다 해 먹는다고 합니다.
모든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저를 믿어요. 내가 내 아내를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남편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자녀를 믿습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어떤 믿음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진리 위에 세워집니다. 사실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사건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연한 사실이더라도 안 믿으면 내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엄연히 일어난 일이요 확실한 사건이더라도 내가 안 믿는 한에는 내게는 사건이 아닙니다. 저기서 불이 났다 하더라도 불났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불난 것이지 “내가 안 믿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 일없소”하면 없는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증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마르튀리아---증거라고 하는 이 말은 사실을 말해서, 내가 증거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서, 증거해서 저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대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믿게 될 때에 사건이 사건 됩니다. 이제 사실이 되고, 이제 능력이 되고, 이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
진 케일이라고 하는 의사는 항상 “수술은 사람이 하되 하나님이 고치신다”고 하는 신앙으로 살고 그렇게 책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났지마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예수 안 믿었고, 의사가 되어 가지고도 간간이 교회에 그저 구경 삼아 나갔을 뿐,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들 휴가 가고 없어서 부득불 어머니를 손수 수술하게 됩니다. 그는 당황을 했습니다. 집도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세요. 저는 힘이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를 하고 수술을 해서 효험을 보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수술은 내가 하되,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수술에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없는 세대에 삽니다. 믿을 수도 없는 세대, 어쩌면 믿어서는 안 되는 세대에 삽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만은 믿어야 합니다. 세상사람 다 의심해도 예배드릴 때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까지 의심하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믿는 자가 되어야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죄도, 사망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왜 하는 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긍정적인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리기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무능을 인정한 것이고 누군가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분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 자세, 내가 약함을 인정하기에 중요한 것이고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보려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수단을 달성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긍정적인 믿음의 기도일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도록 나 자신을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모든 것이 가능한 데(All things are possible), 왜 부정적인 의식에만 머물러 있느냐? 이런 책망입니다.
이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곧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3절) 여기서 곧 이라는 말은 아주 급하게 황급히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식을 아주 격정적으로 돌이키는 순간입니다. 마치 앞을 향해 달리고 있던 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 유턴해서 갑자기 돌아서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긍정과 신뢰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식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턴을 해야 합니다.
어떤 20대 후반의 어떤 젊은 청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지금으로부터 12년 전에 자동차 엔진분야의 최고의 연구소에서 연구생으로 일하고 대학원에서 박사 학위 과정을 밟고 있는 장래가 촉망되는 엘리트 청년이었습니다. 그의 말을 빌자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는 생각으로 가득하였으며 20대에 박사 학위 그리고 최고의 연봉을 받을 것으로 여기며 소이 잘 먹고 잘 살 줄로 여겼습니다.
그런데 이게 웬일입니까? 그 꿈은 한 순간에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설악산을 다녀오는 길에서 자동차 정면 충돌로 목이 부러지고 척추 장애로 가슴 아래로 사지 전신 마비가 되어, 자신의 힘으로 무엇이든지 잘 할 수 있다고 여긴 사람이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사람이 되고 말았습니다. 있는 힘을 다해 다리를 들어올리려고 해도 꼼짝도 안 합니다. 손에 힘을 주어 주먹을 쥐어 보려고 해도 손가락 하나 까딱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이제는 밥 한 숟가락도 자신의 힘으로 먹을 수 없는 신세가 되고 말았습니다. 나 자신이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다는 믿음이 이제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가 되고 말았습니다. 죽으려고 밤중에 전화선을 끌어다가 목에 감았지만 죽을힘도 죽을 자유도 없었습니다.
여러분 어떡하면 좋겠습니까?
그 때 이 사람은 예수 그리스도를 만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믿음이 생겼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겠구나? 할렐루야!
그가 구원의 문제를 해결을 함으로서 부정적인 그의 삶이 긍정적인 변화를 가져 왔다는 것입니다.
몸을 움직일 수 없어 휠체어에 앉아 있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손가락이 보조기의 도움을 받아야 한다는 장애가 문제가 아니라 더 중요한 내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이었습니다.
그 후 그는 자신에게 복음을 전해준 여자와 결혼하고 미국 올랜도 주립 대학으로 유학하여 박사 학위를 따고 지금은 캘리포니아주에서 개인 회사를 운영하며 남가주 사랑의 교회에서 헌신하는 권영직 집사입니다.
그는 이렇게 그의 간증을 마무리 지었습니다. 인생의 모든 문제는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아무런 문제가 될 수가 없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안에는 삶에 기쁨이 있고 삶의 열쇠가 있습니다.
제가 본문의 설교 준비를 하든 중에 이 간증을 듣게 되었는데 본문에 나오는 귀신들려 괴로움에 처한 한 소년이 예수 그리스도를 만남으로서 그의 인생이 새롭게 바꿔졌다는 것입니다.
소년과 그 아버지를 괴롭히던 귀신은 더 이상 문제가 되지를 못하였습니다.
오늘 나를 괴롭히는 세상 적인 여러 가지의 문제들을 가지고 고민하고 괴로워하고만 있을 때가 아니라 이제 예수 그리스도 앞으로 믿음으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그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여러분의 문제가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 축복을 받으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나의 문제가 더 이상의 문제가 되지 않는 은혜를 받으려고 한다면 모든 문제를 예수님께서 다 해결해 주실 것이라는 긍정적인 믿음이 필요합니다.
사람이 무슨 생각을 가지느냐? 에 따라서 행복해 질 수도 있고 불행해 질 수도 있고, 살기도 하고 죽을 수도 있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하여 무슨 생각을 가지느냐? 에 따라 문제가 해결 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그 생각은 예수님안에서는 모든 것이 다 해결 될 수 있다는 긍정적인 믿음입니다.
유대인의 탈무드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살인은 한 사람 밖에 죽이지 않지만, 부정적인 말은 반드시 세 사람을 죽인다 험담을 말하는 바로 그 자신, 그것을 반대하지 않고 듣고 있는 사람, 험담의 주인공 이렇게 세 사람입니다.
마찬가지로 부정적인 말을 하면 자신도 죽고, 듣는 사람도 죽이고, 말의 대상자도 죽입니다.
대개 부정적인 말은 부정적인 의식에 뿌리를 내리고 있는데 그 주역인 사단이 인간에게 부정적 의식을 집어넣습니다. 특히 하나님을 향한 인간의 생각에 대해 그렇습니다.
이 아버지의 고백이 너무 부정적입니다. 그러나 무엇을 하실 수 있거든 우리를 불쌍히 여기사 도와주옵소서(22절) 창조의 능력을 가지신 예수님이 바로 눈앞에 있는 데, 도와주려고 와 계시는 데, 만약에라고 말합니다. 못하시겠지만, 만에 하나라도 하실 수 있으시면 이런 뜻입니다. 할 수 있다는 쪽이 아니라 못하시겠지만 쪽입니다. 이미 부정적인 말은 하나님의 은혜를 담을 그릇이 되지 않았습니다.
능력이 한이 없으신 하나님께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가짐으로 실패한 성경 적인 사례는 얼마든지 있습니다.
제일 먼저는 아담과 하와입니다. 동산 모든 나무의 실과를 따먹지 말라고 하더냐?.. 아니다 네 눈이 밝아져서 하나님과 같이 되는 거야! 하나님은 너를 이용하고 있어! 사단은 이렇게 하와에게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자꾸 심어줍니다. 결국 그 싹은 무성하게 자라 하나님 배반으로 이어집니다. 이렇게 사단은 믿음을 가진 사람의 마음 밭에 부정의식이란 씨를 뿌립니다.
또 다음은 광야의 이스라엘입니다. 모세가 이끌던 광야의 이스라엘은 어려울 때 한껏 부정의식이 싹 텄습니다. 홍해를 앞두고 애굽 군대의 추격을 받을 때, 신 광야에서 먹을 것이 떨어 졌을 때, 마라에서 쓴 물이 나올 때 하나님께 대한 부정의식에 폭발합니다. 우리를 광야에서 죽이려고 이끌어 냈구나 이런 부정의식입니다. 그러더니 결국은 모세가 시내 산에서 십계명을 받으러 갈 때는 금송아지 우상을 섬기고 맙니다. 결국은 이방신의 소유물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들의 말대로 광야에서 죽고 말았습니다.
다음은 한 달란트 받은 자입니다. 다섯 달란트 받은 자, 두 달란트 받은 자는 모두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열심히 일을 합니다. 주인들 적극적인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있습니다. 내가 열심히 하면 주인은 손해를 보더라도 이해해 주시겠지? 이렇게 신뢰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한 달란트 받은 자는 주인은 굳은 사람이라 심지 않은 데서 거두고.. 이렇게 주인을 인색한 사람, 엄격한 사람으로 생각합니다. 손해볼 때를 먼저 생각합니다. 주인에 대한 신뢰가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묻어 두고 한 달란트 그대로 쏙 꺼내 가지고 오는 겁니다. 이게 부정적인 의식이에요. 특히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은, 대개 하나님에 대한 신뢰 상실로 나타납니다. 그러니 사단의 공격에 무너지는 겁니다. 부정적 의식은 사단이 주로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참으로 낫기를 원한다면 긍정적으로 나서야지 인간적인 조건, 환경 등으로 부정적으로 만들지 말아야 합니다.
긍정적인 믿음이 역사를 일으킨 것은 여리고 성을 무너뜨린 사건입니다. 그때에 이스라엘은 부정적인 것을 몰아내므로 서 완전히 승리를 가져 왔습니다. 매일 한 번씩 엿새 동안 돌고, 일곱째 날에는 성을 일곱 번 돕니다. 음성을 들레지 말며 너희 입에서 아무 말도 내지 말라 그리하다가 내가 너희에게 명하여 외치라 하는 날에 외칠찌니라(수6:10) 성을 도는 동안은 절대 침묵을 유지해야 했습니다. 또 성을 돌 때의 격식은 까다로웠습니다. 맨 앞에는 무장 군사들이 앞서고 본 대의 맨 앞에는 일곱 제사장이 일곱 양각 나팔을 불며 나갑니다. 그 뒤에는 법궤가 따르고, 맨 뒤에 이스라엘 백성이 따릅니다. 이렇게 격식을 차린 수 십만 군중이 절대 침묵을 유지한다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입니다. 칠일 동안 즉 승리를 가져오는 날까지 쓸데없는 짓 같아 보이는 이 어려운 일을 해야 했습니다. 그 사이 불평도 싹트고, 원망도 싹트고 한 숨도 싹텄을 것입니다. 무엇보다 부정적인 의식이 날을 더해 갈수록 더 커졌을 것입니다. 일곱 째 날이 가장 위기의 순간이었겠지요. 금방 중간에서 이 무슨 짓거리야! 나는 도저히 못해 먹겠다! 이런 어린 애같은 장난으로 난공불락의 성이 함락되는 줄 아쇼? 때려치웁시다 이렇게 부정적인 말로 고함을 치며 대열을 이탈할 사람이 금방 생길 것 같은 숨막히는 순간이었습니다. 그런데 설상가상으로 부정의식이 폭발할 것 같은 인간의 한계 지점인 일곱째 날에는 하나님은 일곱 바퀴를 돌라고 합니다. 평소처럼 한 바퀴도 아니요 줄여서 반 바퀴도 아닌, 일곱 배나 더 돌라고 합니다. 여기에 깊은 뜻이 있어요! 하나님에 대한 부정적인 의식을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가슴 깊이에서 끝내 부정의식을 극복하고 깊은 여호와 신뢰를 하느냐 시험하시는 것입니다. 성을 돈다고 무조건 성이 무너지는 것은 아닙니다. 여호와 신뢰가 여리고 성을 무너트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부정의식을 깨부수고 바위처럼 굳은 신뢰와 긍정을 해야 합니다. 이것이 기적을 낳습니다. 부정적인 의식, 불평과 원망, 절망과 투쟁해야 합니다. 하나님에 대한 절대신뢰, 절대낙관, 절대 긍정, 절대 희망, 여기에서 기적이 나오는 것입니다.
긍정적인 믿음은 전적으로 하나님을 믿고 나를 포기해 버리는 것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 이 말씀은 믿지 않는 자는 아무 것도 못한다는 뜻입니다. 믿으면 가능하고, 믿지 않으면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공산주의가 무너지는 가장 큰 이유가 불신입니다.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이데올로기가 어떻고, 철학이 어떻고, 마르크스--레닌주의가 어떻고, 아무리 이야기를 해보아도 공산주의자들은 아무도 믿지 못합니다. 아들도 못 믿고 아버지도 못 믿고 부부도 서로 간에 못 믿습니다. 왜요? 하나님을 믿지 않기 대문입니다. 하나님을 믿지 않는 사람은 아무도 못 믿습니다. 나 자신도 못 믿습니다. 아무도 못 믿어요. 그 엄격한 이념을 유치원서부터 가르쳐놓고도 그 사람을 믿지 못합니다. 그렇게도 철저한 사상교육이라고 하면서 아무도 믿지 못해요. 그래서 무엇 하나 시켜놓고는 딴 사람을 붙여서 감시를 하고, 감시자 뒤에 또 감시자가 있고.... 아무도 믿지 못하는 사회입니다. 그러니 무능할 수 밖에요. 그러니 생산도 결과도 없는 것입니다. 이래서 망하는 것입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중국에 갔더니 공항에서 자동차 출입금을 내는데 한 군데서는 돈을 받고 한 군데 서는 표를 받고 이렇게 두 곳을 지나게 했어요 왜 그렇는가? 하는데 부정을 막기 위함이라 했는데 그래도 다 해 먹는다고 합니다.
모든 믿음의 뿌리가 하나님께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음으로써 내가 저를 믿어요. 내가 내 아내를 믿는 게 아닙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남편을 믿습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자녀를 믿습니다. 하나님 믿는 믿음이 아니고는 어떤 믿음도 성립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이제 더욱 중요한 문제가 있습니다. 믿음은 사실에 근거하고 진리 위에 세워집니다. 사실과 진리라고 하는 것은 믿을 때에만 사건이 되고 진리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엄연한 사실이더라도 안 믿으면 내게는 사실이 아닙니다. 엄연히 일어난 일이요 확실한 사건이더라도 내가 안 믿는 한에는 내게는 사건이 아닙니다. 저기서 불이 났다 하더라도 불났다는 것을 믿을 때에만 불난 것이지 “내가 안 믿어”하면 그만입니다. “그런 일없소”하면 없는 것입니다. “내 증인이 되리라.” 증거라는 게 무엇입니까? 마르튀리아---증거라고 하는 이 말은 사실을 말해서, 내가 증거해서 그 사람으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증거입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셨습니다. 이 사실을 사실대로 말해서, 증거해서 저로 하여금 사실을 사실대로 믿게 하는 것입니다. 사실을 믿게 될 때에 사건이 사건 됩니다. 이제 사실이 되고, 이제 능력이 되고, 이제 생명이 되는 것입니다. .
진 케일이라고 하는 의사는 항상 “수술은 사람이 하되 하나님이 고치신다”고 하는 신앙으로 살고 그렇게 책도 써서 유명해진 사람입니다. 그는 예수 믿는 가정에 태어났지마는 대학을 다닐 때에도 예수 안 믿었고, 의사가 되어 가지고도 간간이 교회에 그저 구경 삼아 나갔을 뿐, 믿음이 없었습니다. 아주 유명한 의사가 되었고 돈도 많이 벌었습니다. 어느 날 갑자기 가장 사랑하는 어머니가 차 사고를 당했습니다. 다들 휴가 가고 없어서 부득불 어머니를 손수 수술하게 됩니다. 그는 당황을 했습니다. 집도하기 전에 그는 하나님 앞에 간절히 기도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살려주세요. 저는 힘이 없습니다.” 눈물로 기도를 하고 수술을 해서 효험을 보았습니다. 그후로 그는 “수술은 내가 하되, 고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라는 믿음을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 믿음이 그로 하여금 수술에 능력의 사람이 되었던 것입니다.
우리는 믿음 없는 세대에 삽니다. 믿을 수도 없는 세대, 어쩌면 믿어서는 안 되는 세대에 삽니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예수님만은 믿어야 합니다. 세상사람 다 의심해도 예배드릴 때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하나님 말씀만은 의심하지 마세요. 이것까지 의심하면 끝난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고, 하나님의 말씀을 믿을 때에 믿는 자가 되는 것입니다. 긍정적으로 믿는 자가 되어야 능력의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세상도, 죄도, 사망도 이길 수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기도는 왜 하는 지를 아셔야 합니다. 우리의 모든 문제를 긍정적인 믿음으로 즉 하나님의 뜻을 받아 드리기 위한 기도를 드려야 합니다.
기도한다는 것은 이미 자신의 무능을 인정한 것이고 누군가 나에게 힘을 줄 수 있는 분이 존재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청지기 자세, 내가 약함을 인정하기에 중요한 것이고 자신이 주인이 아니라 청지기에 지나지 않음을 고백하는 것이기에 중요한 것입니다. 단순히 이기적인 욕망을 채워보려는 식의 기도가 아니라 철저하게 하나님을 의지하기 위함이어야 합니다. 수단을 달성하기 위한 기도가 아니고,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기 긍정적인 믿음의 기도일 때 하나님은 영광을 받으십니다.
예수님이 하시도록 나 자신을 도구로 사용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 아버지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할 수 있거든 이 무슨 말이냐? 책망하시는 말씀입니다. 믿는 자에게는 능치 못할 일이 없느니라(23절) 모든 것이 가능한 데(All things are possible), 왜 부정적인 의식에만 머물러 있느냐? 이런 책망입니다.
이 책망을 들은 아이의 아버지는 곧 소리를 질렀습니다. 내가 믿나이다 나의 믿음 없는 것을 도와주소서(23절) 여기서 곧 이라는 말은 아주 급하게 황급히 소리를 지르는 것입니다. 부정적인 의식을 아주 격정적으로 돌이키는 순간입니다. 마치 앞을 향해 달리고 있던 차가 갑자기 급브레이크를 밟고 유턴해서 갑자기 돌아서듯이 말이지요.
그래서 이 아버지는 위대했습니다. 긍정과 신뢰의 전환점을 마련한 것입니다. 이래야 합니다. 부정적인 의식은 급브레이크를 밟고 턴을 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