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에 합당한 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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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393회 작성일 2012-04-05 10: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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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태복음4:18-25 부르심에 합당한 삶
스탠리 존스 목사는 인도 선교사는 밀림지역에서 선교를 하다가 돌아오는 길에 그만 길을 잃고 말는데 아무리 감각을 되살려 길을 찾아 헤매었지만,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습니다. 몸은 지칠 대로 지치고, 방이라도 사나운 맹수가 달려들어 잡혀 먹힐 것 같은 불안과 공포, 두려움이 몰려왔습니다. 그러던 차에 어느 원주민이 톱으로 나무를 베고 있기에 너무 기뻐서 뛰어가며 원주민에게 마을로 돌아가는 길을 좀 가르쳐 달라는 선교사의 요청에 좀 기다리시오. 라는 말만 남기고선 계속 나무를 베고 있었습니다. 선교사는 조급한 마음에 안절부절 하며, 그가 나무 베기를 끝내는 때까지 무려 8시간을 기다렸습니다. 나무 베는 일을 끝내고 그동안 기다리고 있던 선교사를 향해 나를 따라오시오. 라는 말만 남기고 성큼성큼 걷기 시작했습니다. 주위는 온통 어두움에 잠겨 길이라고 짐작할 만한 어떤 것도 보이지 않았습니다. 선교사는 원주민을 놓칠세라 땀을 뻘뻘 흘리며 바싹 달라붙어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가도 가도 길은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원주민에게 물었습니다. 도대체 길은 어디에 있습니까? 이곳에는 길이 없습니다. 내 발을 내딛는 곳이 곧 길입니다. 하마터면 길을 잃고 죽을 뻔 한 선교사는 왜 원주민이 길을 가르쳐주지 않고 자기를 따라오라 했는지 마을에 도착하고서야 알게 되었습니다
본문에도 세상에 있는 자들에게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곧 그 분은 친히 길이시기 때문입니다.요14:6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히10:20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그 길은 새로운 살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곧 예수님 자신이 길이시기 때문에 나를 따라오라고 하십니다.
인류 역사에 등장한 수많은 위인들의 어록에서 바로 이 예수님의 말씀보다 더 큰 영향을 끼친 말은 없을 겁니다.
역사의 기록도 예수 오시기전과 오신후로 갈리지 않습니까?
기원전 기원후라는 기원이란 말은 예수님이 태어 난 해를 원년으로 삼아 기준하여 이르는 말입니다.
역사가 그렇다고 하더라도 개인 역시 예수님을 만나기 전의 나가 있었고 만난 후의 나가 있습니다.
그런데 이 명령문은 두 단어로 되어 있습니다.
나라는 주어와 그리고 따라오라는 동사입니다.
그리스도교 신앙의 핵심은 바로 나를 가리키는 예수님께 있습니다.
그 예수님을 따르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는 그의 일거수일투족이 신앙의 절대적인 중심입니다.
이 예수에게 발생한 모든 사건, 그의 운명이 신앙의 뿌리이면서 열매이기도 합니다.
이 예수는 2천 년 전 목수의 아들로 살았던 역사적인 인물을 가리킵니다.
아무도 예수가 될 수 없으며, 그리스도가 될 수 없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오직 한분이며, 그분에 의해서만 구원, 새로운 살길이 있습니다.
만약 이 사실을 인정한다면 삶이란 온통 이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집중해야 합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관심을 기울인다는 사실 자체가 그렇게 간단한 게 아닙니다.
사람은 육체적인 것에 습관화되어 있고 그들과 더 친하기 때문입니다.
아는 만큼 믿어지는 것입니다. 아는 것을 믿는 것이 진정한 믿음입니다.
오늘날 믿으려고 하는 자들이 참 많이 있습니다.
예수님에 관해서 알려는 노력은 기울이지 않고 무조건 믿으려고만 합니다.
이게 큰 문제입니다. 역시 제대로 알려 주지도 않고 믿으라고 합니다.
역사적으로 볼 때에 예수를 믿으려고 오는 자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뱃세다 광야에서 보리떡 5개 물고기 2마리로 장정 오천이 먹고도 남았던 일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경험한 사람들은 모두가 흥분되어 예수님을 따라 나섰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이 십자가의 처형이 선고 될 때는 몇 명의 여자를 제외하고는 다 피신을 가고 말았습니다.
이때에 예수님은 이들에게 예수 자신을 바로 일러 주려고 했습니다.
요6:26-27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적을 본 까닭이 아니요 떡을 먹고 배부른 까닭이로다 썩을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인치신 자니라
그러나 그들은 알려고 하지 않고 떠나 버렸습니다.
요6:66-69 그 때부터 그의 제자 중에서 많은 사람이 떠나가고 다시 그와 함께 다니지 아니하더라 예수께서 열두 제자에게 이르시되 너희도 가려느냐 시몬 베드로가 대답하되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 우리가 주는 하나님의 거룩하신 자이신 줄 믿고 알았사옵나이다
알고 믿었다고 했습니다.
이 중에도 믿으려 왔다가 예수를 제대로 알려 주면 가 버릴 자도 있습니다.
분명히 있습니다. 이 사실을 두고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책망을 하였습니다.
눅24:25-27 이르시되 미련하고 선지자들이 말한 모든 것을 마음에 더디 믿는 자들이여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 이에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모든 성경에 쓴 바 자기에 관한 것을 자세히 설명하시니라
예수를 바로 알지 못하는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진지한 관심이라기보다는 자신의 만족감을 채우기 위함입니다.
기도로 병이 나았다든지, 그 단체, 즉 교회를 크게 키웠다는 사실을 부각시키고 있습니다만 그런 일들은 그리스도교만이 아니라 다른 이방 종교에서도 이단에서도 얼마든지 나타나는 현상에 불과합니다
교회가 이런 유행에 휩쓸린 것은 교회 지도자들의 자업자득입니다.
예수를 가르치기 보다는 믿으라고만 하였기 때문입니다.
이제는 더 이상 홍수처럼 이런 데 휩쓸린 신자들을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을 정도로 힘들게 되었습니다.
의식과 사고를 바꾸는데는 상당한 시간과 노력이 필요 할 것입니다.
예수가 아니라 자기의 종교적 만족이 최고의 관심이 되어 버린 마당에 다시 그들을 끌어다가 나를 따르라는 말씀으로 치유하기는 불가능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이 시간에도 주님은 나를 따르라고 하십니다.
한 때 엘리야 선지자는 크게 낙심이 되어 자신만이 주님을 따른다고 생각을 하고 불만을 표했습니다.
이때에 하나님은 말씀했습니다.
왕상19:18 그러나 내가 이스라엘 가운데에 칠천 명을 남기리니 다 바알에게 무릎을 꿇지 아니하고 다 바알에게 입맞추지 아니한 자니라
실망할 필요는 전혀 없습니다. 아니 이런 게 정상인지 모릅니다. 제정신 똑바로 차린 사람 중에서 나를 따르라! 는 말씀을 진리로 받아들이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 것 같지만 크게 드러나지 않지만 마치 숨겨진 자같이 이 땅에 남아 있을 것입니다.
자 그러면 왜 나를 부르셨을까? 예수 중심의 삶을 살도록 하실까?
무조건 믿습니다 에는 이런 오해가 따를 수 있습니다.
따라 오라해서 따라 갔더니 왜 이렇게 나를 힘들게 하나
그래서 하는 말이 왜 나를 부르셨어. 이 고생을 다 시키나
출애굽 할 때에 이스라엘은 신이 나서 하나님을 찬양했습니다.
그러다가 도중에 어려움이 다가왔습니다. 그랬더니 왜 나를 불러서 이 고생시키나가 나왔습니다.
출14:11-12 그들이 또 모세에게 이르되 애굽에 매장지가 없어서 당신이 우리를 이끌어 내어 이 광야에서 죽게 하느냐 어찌하여 당신이 우리를 애굽에서 이끌어 내어 우리에게 이같이 하느냐 우리가 애굽에서 당신에게 이른 말이 이것이 아니냐 이르기를 우리를 내버려 두라 우리가 애굽 사람을 섬길 것이라 하지 아니하더냐 애굽 사람을 섬기는 것이 광야에서 죽는 것보다 낫겠노라
이같이 많은 사람들이 신앙을 육체적인 소욕과 견주어 생각을 합니다.
예수님께서 사역을 시작하시기 전에, 복음을 전파하기 전에 이것 때문에 사탄과 싸운 것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이 아 우리가 육체이기 때문에 그렇다는 생각을 가졌다고 합리화시킵니다.
그래서 많은 선현들이 나와서 육체를 어떻게 하면 극복하나에 대해 많은 노력을 했습니다.
육체를 극복하는 것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육체를 극복하려면 할수록 또 다른 의미로 말려들어가 쓸데없이 인생을 버리게 되었다. 단지 육체를 극복하기 위해 인생을 살았던 사람도 일생동안 수도원에 들어가 오직 자기 자신의 육신적인 욕망을 극복하려고 평생을 살다가 죽었다. 그것도 역시 헛된 것입니다.
세속을 떠나 고행을 하며 도를 닦았다 그게 뭐 그리 중요합니까?
무엇을 위해서 한 것은 없고 단지 그것이 나쁜 것이니까, 그 나쁜 것을 극복해야 되겠다, 그것이 사람답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하며 평생을 살았다. 알고 보면 그것도 편안하자는 것입니다.
고행도 하지만 결국은 자기 편하고자 한 일입니다.
정치에 힘을 쏟고 경제에 힘을 쏟는 사람들 보고 정치욕이니 물욕이 있니 하며 산에서 도만 닦고 있으면 되겠습니까?
정신적인 쾌락을 위해서 육신적인 고행을 하는 것이다. 그것 밖에는 다른 것이 없습니다.
예수님의 부르심은 육체적인 만족 정신적인 만족이 아니었습니다.
만일 나에게 계획을 두신 이가 없고 부르심이 없다면, 사람은 무슨 계획을 하든지 간에 자기가 한 모든 계획이 전부 다 자기 편하자고 하는 것으로 동물적 본성에서 살아 갈 것에 불과합니다.
동물들도 보면 어떻게 하면 내가 편할까에 대해 잘 알고 그렇게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파주 지역의 독수리들이 충청도 옥천 등으로 대거 이주했는데 왜 했습니까?
나라와 민족을 위해 선한 뜻을 이루기 위해서가 아닙니다.
먹을 것 찾아 제 편한 데로 갔습니다. 제 편한 데로 이것이 인간의 만족이 아닙니다.
전9:1-3 이 모든 것을 내가 마음에 두고 이 모든 것을 살펴본즉 의인들이나 지혜자들이나 그들의 행위나 모두 다 하나님의 손 안에 있으니 사랑을 받을는지 미움을 받을는지 사람이 알지 못하는 것은 모두 그들의 미래의 일들임이니라 모든 사람에게 임하는 그 모든 것이 일반이라 의인과 악인, 선한 자와 깨끗한 자와 깨끗하지 아니한 자, 제사를 드리는 자와 제사를 드리지 아니하는 자에게 일어나는 일들이 모두 일반이니 선인과 죄인, 맹세하는 자와 맹세하기를 무서워하는 자가 일반이로다 모든 사람의 결국은 일반이라 이것은 해 아래에서 행해지는 모든 일 중의 악한 것이니 곧 인생의 마음에는 악이 가득하여 그들의 평생에 미친 마음을 품고 있다가 후에는 죽은 자들에게로 돌아가는 것이라
내가 뭔가를 얻은 것 같은데 공친다, 사실은 뭘 많이 얻은 것 같은데 소망도 많이 있고 소득도 많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은 알고 보면 아무 것도 알맹이는 없는 것입니다.
세상을 살아 보십시오 빨리 알면 알수록 좋은 것입니다.
만약에 부르심이 없다면 나의 생업의 모든 일들이 말한 대로 편하게 잘 먹고 잘사는 것 외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되는 것이 아닙니다.
직장도 가고 일도 하는데 공부를 하는 데 밥 먹기 위해 다니는 것밖에는 되지 않습니다.
이 복된 주일도 밥 먹고 살기 위하기 때문에 지키지 못하는 것입니다.
이것을 절실히 느끼는 자가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이 부르심에 만사를 다 버려두고 따를 수 있습니다.
20절 그들이 곧 그물을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22절 그들이 곧 배와 아버지를 버려 두고 예수를 따르니라
이들이 이와 같이 따른 이유가 있습니다.
그 전의 그들의 삶의 형태가 누가복음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눅5:5 시몬이 대답하여 이르되 선생님 우리들이 밤이 새도록 수고하였으되 잡은 것이 없지마는
그날 저녁에 빈 그물을 던졌다는 말은 결국 주님을 만날 때는 그 배가 빈 배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세상 앞에 나가면 내놓을 것이 더러 있는데 하나님 앞에 나가면 아무 것도 내놓을 것이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 것 가지고 내 마음대로 먹고 살았는데 뭘 자랑 할 것이 있겠습니까?
이번 기회에 내가 밤새도록 그물을 던졌더니 건진 것이 아무 것도 없구나. 그것만 안다면 복은 나를 따르라는 주님의 음성이 가슴에 와 닿을 줄로 믿습니다.
이 부름에 응하는 자야말로 가장 존귀한 인생이 될 것입니다.
후회 없고 그리고 어떤 삶도 극복 할 수 있습니다.
반드시 이란 말을 할 것입니다.
떡으로만 산다고 하는 자에게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고 할 것입니다.
너희로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리라 할 때에 인정사정을 감안하고 따를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모든 것을 버려두고 따라 갔다는 것은 내가 아무 것도 안하고 따라 갔다는 말이 아니고 일상적인 일에만 관심을 가짐이 아니라 사람을 살리는 복음에 이 모든 것들이 사용되어 져야 함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나 중심에서 예수 중심의 삶이 되는 것입니다.
복음에 나의 가치가 있습니다.
갈릴리 어부들이라는 것은 이스라엘 사람들 속에서는 변방입니다.
이 말은 갈대아우르에서 아브라함을 불렀다는 말과 같은 말입니다.
당시의 아브라함 시대에 중심에 있는 사람들은 바벨론에 있는 사람들이다. 아무리 중심에 있었어도 오늘날로 말하면 문명 속에 있고 내 손 안에 세계가 다 있는 스마트한 속에 있다 해도 부름이 없는 인생은 그냥 성을 쌓다가 마는 것이다. 자기 이름을 위해서 우리 이름을 빛내자하고 성을 쌓는 것밖에 안 된다.
그 성은 크게 무너져 내렸습니다.
저 변방 갈대아우르의 아브라함은 부름을 받았기 때문에 하나님 성이 있는 땅으로 이동하게 되었습니다.
이 같은 부름이 없으면 결국은 바벨론 사람들하고 똑 같고 장차 멸망 할 바벨론 성을 쌓을 뿐입니다.
롬10:17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우리가 성을 쌓고 모이자, 뭉쳐서 흩어짐을 면하자, 그리고 높이 올라가서 우리 이름을 세상에 빛내자, 그것 밖에는 할 일이 없는 것이 인생이다. 별 것을 다해 봐도 마찬가지이다.
세상은 그때나 지금이나 바벨론이다. 계속 바벨론의 형태이고 결국 무너질 수밖에 없다는 뜻입니다.
부름이 없는 삶은 어디로 갈지를 모르는 사람들이다. 잘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지만 하나님께 배울 것이 없는 사람은 너나 할 것 없이 다 똑 같다.
그런 사람들에게 왜 우리가 할 말이 없겠는가. 기회를 봐서 내가 할 말이 있을 것이다. 물론 그것도 지혜가 필요하지만 아무렇게나 가서 이야기할 일은 아니지만 기회를 노리고 기회를 봐서 언젠가는 틈을 봐서 말씀을 전해야 될 사람입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예수를 말해야 합니다. 이게 내 진정한 직업이요 삶이요 인생입니다.
1967년 군병력이 열세에 있던 이스라엘은 막강한 아랍군울 6일 만에 격파하여 세계 전쟁사에 경이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당시 이스라엘의 베긴총리는 전쟁 후 미국의 한 기자와 인터뷰를 가졌는데 막강한 아랍 군을 이길 수 있었던 비결이 무엇이냐 는 질문에 이스라엘 군대에서는 절대로 내려서는 안 되는 명령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앞으로 가라는 것입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그러면 진정한 명령은 무엇입니까? 베긴 총리는 짤막하게 대답했습니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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