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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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65회 작성일 2012-04-05 10: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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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한복음14:1-6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유일한 길 되신 예수 그리스도
지금으로부터 약 2천 3백 년 전에 동양과 서양에서 대규모 토목공사가 벌어졌습니다. 중국은 이민족을 방어하기 위해 5천 킬로미터에 이르는 만리장성을 쌓아 길을 막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차단했습니다. 그러나 로마는 이민족을 공격하기 위해 15만 킬로미터에 이르는 도로를 건설했습니다. 로마는 길을 닦고 이민족과의 왕래를 촉진했습니다. 중국은 패쇄적이었고 로마는 개방적이었습니다. 그 결과는 어떠했을까요?
길을 차단한 중국은 이민족의 침략에 시달렸지만 길을 건설한 로마는 세계를 제패했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는 길이 너무나도 잘 뚫어져 있습니다.
차만 길에 올려놓으면 어디든지 갑니다. 그러나 이 길이 쉽게 뚫어지지 않았습니다.
나라가 가난하여 먹을 것 구하기가 힘든 60년대에 박정희 대통령은 느닷없이 서울과 부산을 잇는 고속도로를 짓겠다고 발표를 했을 때에 사람들은 정신 나간 짓을 한다고 야단이었습니다.
그러나 지금은 어떻습니까? 결국 경부고속도로는 개통되었고 뒤에 경제성장을 이루는데 지대한 공을 세웠습니다. 그러나 길을 만들고 보면 판도는 달라졌습니다.
오늘 본문에 길은 고속도로 정도가 아니라 생명의 길을 소개하고 있습니다.
6절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예수님 자신이 길이 되십니다. 그 길은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입니다.
내가 나아가는 길을 아는 자는 근심 걱정에서 자유 할 수 있습니다.
근심은 길이 없기 때문이다 길은 근심을 해결합니다.
1절 너희는 마음에 근심하지 말라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길이라는 낱말은 매우 다양한 뜻으로 사용됩니다.
길은 어떤 목적이나 목표에 이르게 해주는 수단이나 과정입니다.
길은 문제 해답이나 해결의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길이 막혔다, 길을 모른다, 길을 잃어버렸다, 길이 없다는 상황은 목표와 목적에 이룰 수 없고 문제의 해답이 없기 때문에 사람에게 근심과 불안, 좌절과 절망에 처하게 합니다.
이런 상태에 직면한 사람에게는 길을 찾았다, 길이 있다는 말은 더할 수 없이 기쁜 소식입니다.
예수께서 내가 곧 길이라고 하셨습니다.
사람이 이 말씀의 뜻을 알게 되면 다할 수 없는 희열을 느끼게 됩니다
그러나 누구인들 근심하고 싶어서 근심하겠습니까?
아무리 근심하지 말라고 해도 이 상황에서 어떻게 근심을 안 할 수 있겠습니까?
아무리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잊어버리라고 해서 잊어지고 긍정적으로 바꾸기가 쉽지 않습니다.
근심을 하지 않으려면 근심을 멈추게 할 수 있는 확실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길이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을 믿으니 또 나를 믿으라. 근심에는 답이 있습니다. 바로 예수님이 길이심을 믿는 믿음입니다.
존재에 대한 불안, 미래에 대한 불안은 믿음으로만 해결됩니다.
믿음과 불안은 반비례 관계에 있습니다.
믿음이 있으면 불안이 없어지고, 믿음이 없으면 불안이 지배하게 됩니다.
예수님보다 6개월 전에 온 세례요한은 길을 닦는 도로 공사를 한 사람입니다.
당시에 사람들은 근심 속에서 살았습니다.
지금까지 살아온 길도 캄캄한데 살았는데 앞으로 살아 갈 길도 캄캄하다는 말입니다.
구세주는 나타나지 않고 로마의 식민지는 너무나도 혹독하고 생활은 구차해지고 자신의 세대가 염려지만 더 염려는 자손들의 세대가 더 염려가 됩니다.
이때에 길을 닦아 안내하는 자가 있어서니 세례 요한입니다.
눅3:4-6절 선지자 이사야의 책에 쓴 바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가 있어 이르되 너희는 주의 길을 준비하라 그의 오실 길을 곧게 하라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지고 굽은 것이 곧아지고 험한 길이 평탄하여질 것이요 모든 육체가 하나님의 구원하심을 보리라 함과 같으니라
그 길을 통하여 하나님의 구원을 볼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역사이래로 많은 인물들이 사람이 살 수 있는 길을 모색하고 있습니다.
대체로 이들이 찾는 길은 사는 길이 아니라 망한다는 결론을 내리기가 일 수였습니다.
사람이 인도하는 길은 바른 길이 아니었습니다.
사람이 닦는 길은 어떤 길이라도 자타를 속이는 길에 불과합니다.
잠14:12 어떤 길은 사람의 보기에 바르나 필경은 사망의 길이니라
어떤 목적지를 향하여 가려고 할 때에 길을 잘못 들게 되면 아무리 착한 마음으로 부지런히 힘써서 가더라도 헛수고를 하고 맙니다.
그러므로 사람들이 가르치는 길들은 자기 나름대로 깨치고 추리하여 하는 말들에 불과합니다.
그리고 그 모두가 실은 멸망의 길입니다.
구약의 열 왕의 시대에는 그들이 살아가는 유명한 길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길은 하나님의 길이 아니라 사람이 만들은 사람의 길이었습니다.
여로보암의 길입니다.
왕상15:34 바아사가 여호와 보시기에 악을 행하되 여로보암의 길로 행하며 그가 이스라엘에게 범하게 한 그 죄 중에 행하였더라
이 길은 멸망의 길이었습니다. 북쪽 이스라엘의 멸망의 원인은 여로보암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입니다.
반면에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있습니다. 다윗의 길입니다.
왕하22:2 요시야가 여호와 보시기에 정직히 행하여 그의 조상 다윗의 모든 길로 행하고 좌우로 치우치지 아니하였더라
이 길은 끊어 질 것 같았지만 결코 끓어지지 않았습니다. 이 다윗의 길이 곧 예수 그리스도의 길입니다.
마1:1 아브라함과 다윗의 자손 예수 그리스도의 계보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살 길입니다
행4:12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 하였더라
그러면 그 길에 대하여 어떤 믿음을 가져야 합니까?
즉 하나님을 신뢰하고 예수님을 신뢰하여 모든 것을 맡기라는 의미입니다.
내가 믿는 하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독생자를 보내 주시기까지 나를 사랑하신 사랑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하나님께 나 자신을 맡기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 있겠습니까?
하나님을 믿으면 아무 염려하지 않고 내 장래와 인생 전체를 얼마든지 다 맡길 수 있는 분이십니다.
또한 내가 믿는 예수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십자가에서 피를 흘려 그 피 값으로 나를 사신 분이십니다.
그런데 예수님이 피 값으로 사신 자기 사람들을 광야 같은 세상에서 고아와 같이 그냥 방치해두시겠습니까?
예수님은 그를 의뢰하는 자를 안전히 지키시고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근심하는 것은 의지할 대상을 의지하지 않고 헛된 것을 의지해 왔기 때문입니다.
길이 없기 때문이 아닙니다.
렘2:14 이스라엘이 종이냐 씨종이냐 어찌하여 포로가 되었느냐
렘2:17-19 네 하나님 여호와가 너를 길로 인도할 때에 네가 그를 떠남으로 이를 자취함이 아니냐 네가 시홀의 물을 마시려고 애굽으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며 또 네가 그 강물을 마시려고 앗수르로 가는 길에 있음은 어찌 됨이냐 네 악이 너를 징계하겠고 네 반역이 너를 책망할 것이라 그런즉 네 하나님 여호와를 버림과 네 속에 나를 경외함이 없는 것이 악이요 고통인 줄 알라 주 만군의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근심은 내가 돈을 의지해 왔고 다른 사람을 의지해 왔고 내 자신을 의지해 왔다는 증거입니다.
딤전6:9-10 부하려 하는 자들은 시험과 올무와 여러 가지 어리석고 해로운 욕심에 떨어지나니 곧 사람으로 파멸과 멸망에 빠지게 하는 것이라 돈을 사랑함이 일만 악의 뿌리가 되나니 이것을 탐내는 자들은 미혹을 받아 믿음에서 떠나 많은 근심으로써 자기를 찔렀도다
그러므로 근심은 죄입니다. 근심을 가져 온 불신앙의 죄를 반드시 회개해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평생토록 근심의 노예가 되어 인생을 낭비하게 될 것입니다.
길은 없는 것이 아니라 길은 항상 내 곁에 있습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고 하셨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은 이제까지 여러 번 십자가와 부활의 길을 가실 것을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의심 많은 도마가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고 또 엉뚱한 말했습니다.
이 말은 길 되신 예수님을 알지 못해 방황할 수밖에 없는 답답하고 고뇌에 찬 인간들의 질문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자신이 길이며 나아가는 목적지가 어디이고 어떻게 갈 수 있는가를 분명히 말씀해 주십니다.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세상에 어느 누가 자신이 길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감히 아무도 말 할 수 없고 길을 찾아 나서고 있을 뿐입니다.
많은 성인들이 인생의 참 길을 찾고자 몸부림쳤습니다.
도(道)를 가르치신 공자도 조문도 석사가의(朝聞道 夕死可矣) 즉 아침에 길을 찾으면 저녁에 죽어도 한이 없겠다며 참된 길을 찾아 방황하였습니다.
석가모니도 백팔번뇌 인생길에서 참된 길을 찾기 위해 고뇌하였습니다.
그들은 구도자였지 결코 길 자체는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신이 아버지께로 가는 바로 그 길이라고 하십니다.
여기서의 길은 a way가 아니라 the way입니다. 유일한 길이란 뜻입니다.
그러면 어째서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십니까?
인류는 죄 때문에 하나님 아버지께 돌아갈 수 있는 길이 막혀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범죄한 아담과 하와를 에덴에서 쫓아내시고 동편에 그룹들과 화염검을 두시어 생명나무에 이르는 길을 차단하셨습니다
창3:24 이같이 하나님이 그 사람을 쫓아내시고 에덴동산 동쪽에 그룹들과 두루 도는 불 칼을 두어 생명나무의 길을 지키게 하시니라
이제 인간들은 그 길을 갈 수도 찾을 수도 없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합니다.
벧전2:25 너희가 전에는 양과 같이 길을 잃었더니 이제는 너희 영혼의 목자와 감독 되신 이에게 돌아왔느니라
길을 잃었기에 각기 제 길로 갔습니다
사53:6 우리는 다 양 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
내가 보기에 선해 보이고 내가 보기에 올바르다 싶으면 그 길을 갔습니다.
그러니 인본적이고 상대주의적인 생각이 판을 쳤습니다.
죄와 죽음의 고통뿐인 세상이 되었습니다.
공동번역 렘9:2-8 한번 혀를 놀렸다 하면 남의 가슴에 칼을 꽂는구나. 신실은 스러지고 거짓만이 판치는 세상이 되었다. 내 속생각을 모르고 못된 일만 골라서 하는 세상이 되었다. 야훼의 말이다. 친구도 조심하여야 할 세상, 동기마저 믿지 못할 세상이 되었다. 동기들끼리 서로 걸어 넘어뜨리고 친구들끼리 서로 모함하며 돌아치는 세상이 되었다. 참말이라고는 할 줄 모르는 세상, 서로 속고 서로 속이니, 거짓말만이 입에 익어 돌이킬 길 없이 입이 비뚤어진 세상이 되었다. 백성을 억누르는 일이 계속되고 사기치는 일만이 꼬리를 무는 세상이 되었다. 내 말이니, 잘 들어라. 내 심정을 알려는 자 하나 없구나. 그래서 나 만군의 야훼는 이렇게 말한다. 나의 이 백성을 도가니 속에서 녹여 시험하여 보리라. 그렇게 못되게 구는데, 어찌 그냥 내버려두겠느냐? 독약 묻은 활촉 같은 혀를 놀리는 것들, 입에 담는 것은 남을 속이는 말뿐이다. 이웃을 보고 '안녕하시오?' 하면서 속으로는 올가미를 씌우는 것들, 이렇게 못되게 구는데, 어찌 벌하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 내 말이니, 잘 들어라. 이런 족속을, 내가 어찌 분풀이하지 않고 내버려두겠느냐?"
이후 인류 역사는 에덴으로 돌아갈 길을 찾는 역사라고 할 수 있습니다.
비록 에덴이라는 말을 사용하지는 않지만 사람들은 유토피아니 극락이니 이상적 세계를 찾고자 끊임없이 노력해 왔습니다.
사람들은 때로는 경제나 정치 제도로, 때로는 과학과 의학 같은 기술로, 때로는 종교와 도덕을 통해 낙원을 회복할 수 있으리라 믿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발버둥쳐 보아도 세상은 점점 더 구렁텅이로 빠져들어 갈 뿐 낙원에 가까이 갈 수 없었습니다. 캄보디아에는 킬링필드라는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해골들이 묻힌 곳이 있습니다. 이곳은 프랑스 유학까지 갔던 지성인인 폴 포트라는 사람이 캄보디아를 낙원으로 만들기 위해서는 악습에 물든 기성세대를 몰아내야 한다며 무차별 살육을 벌인 곳입니다. 인간 스스로 낙원으로 가는 길을 만들어 보겠다고 나선 결과 캄보디아는 낙원이 아니라 생지옥을 경험해야 했습니다.
길을 찾고 찾아도 도무지 나오질 않으니 현대 사상은 니체의 허무주의, 자크 데리다의 해체주의까지 이르러 이제 길은 원래 없었다고 선언하게 되었습니다.
예수님만이 유일한 길이 되시는 이유는 예수님만이 인생의 근본문제인 죄와 죽음문제를 해결하시고 하나님 아버지께 이르는 길을 열어놓으셨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거룩하신 분이시기 때문에 죄 범한 인간이 감히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습니다.
죄 문제 해결을 언급하지 않으면서 에덴을 회복할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다 거짓입니다.
죄는 오직 예수님의 십자가로만 해결됩니다.
히10:19-20 그러므로 형제들아 우리가 예수의 피를 힘입어 성소에 들어갈 담력을 얻었나니 그 길은 우리를 위하여 휘장 가운데로 열어 놓으신 새로운 살 길이요 휘장은 곧 그의 육체니라
예수님께서 영원한 거처를 예비해 놓으신 것을 믿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아버지 집의 거할 곳 혹은 거처는 무엇을 말할까요? 거할 곳이란 하나님께서 새 성전에 참여한 각 사람 안에 머무르시며 교제하시는 자리를 말합니다.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께서 성전 건물 안에 거하셨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부활 승천하신 이후에는 이제 하나님께서 사람 안에 거하십니다.
크신 하나님께서 이렇게 보잘 것 없는 인간 안에 거하시다니! 그런 신비한 일이 어떻게 가능할까요?
이는 예수님께서 보내신 성령님이 나에게 오셨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제자들 곁을 떠나가는 것 같지만,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시기 위해 성령을 예비하러 가시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시공간의 제약을 받으셨지만, 성령님께서는 무소부재 하셔서 언제 어디서든지 나와 늘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은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제 성령님께서 내 가운데 거하셔서 영원히 함께 하십니다. 예수님께서 공생애 기간 동안 제자들을 섬기고 돌보아 주셨던 것과 똑같이 이제는 보혜사 성령님께서 곁에서 나를 돕고 계십니다.
성령님께서는 근심 대신 나에게 세상이 줄 수 없는 평안과 기쁨을 선물로 주십니다.
나는 갈 바를 알지 못하지만 성령께서 나를 가장 좋은 길로 인도하십니다.
나는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성령께서 나를 대신하여 탄식하며 기도하십니다.
나는 할 수 없으나 성령이 임하시면 권능을 받고 능력 있는 인생을 살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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