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
페이지 정보
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64회 작성일 2012-07-06 09:49본문
고전 15:12-22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새 생명
지난 한 주간 동안에 뉴스를 통하여 보니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강원 화천의 군인 모 상병은 총기사고로 사망, 신사동에는 화재 2명이 사망, 무면허 한의사 쑥뜸으로 환자 사망, 평소 무시한다고 직장 동료 살해, 보험금 타내기 위하여 여자 친구를 낙지를 먹다가 질식사 한 것으로 위장하여 남자 친구로부터 살해당한 여자, 나주서 버스 승용차 추돌로 한명 사망, 베트남 휴양지에서 한국인 2명 익사, 청주 야산서 중학교 교사 목메 자살, 청양 벽돌 공장서 50대 흙더미 무너져 매몰사, 하이마트 납품사 사장 검찰 조사 중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사망, 그 외에도 질고로 혹은 자연사 등으로 지난 한 주간에 운명을 다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에서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모르는 40대 남성에 의해 2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훼손 당한 20대 여성,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도 살려 달라고 경기 수원 경찰서에 위치와 상황을 알렸음에도 경찰은 오지 않고 그 여성은 아저씨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 귀하디귀한 생명 그 청춘을 비참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개죽음보다 못한 죽음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정치군인들을 박격포로 쏘아서 죽인다고 하니 말 그대로 산산이 부져진 이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인생에게는 죽음은 피 할 수 없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죽음을 피하여 보려고 하였으며 그리고 다시 살아 보려고 무던히도 노력도 하고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그들의 장사 지낼 때에 함께 묻었던 소장품이나 그리고 그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시 살아 난 자는 그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시신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지난 4월 6일 경북 안동시 정상동에서 260년 전으로 추정된 미이라가 발견됐다. 이번 발견된 미이라는 고성이씨 문중이장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팔회당(八懷堂) 이시항(李詩沆,1690-1749)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인생은 죽음을 피 할 수 없는가?
성경에서는 그 해답을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서 스스로 떠나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망은 죄의 값이라고 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요 그 생명을 떠났기 때문에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도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값인 사망을 대신 죽어 주시는 자가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주에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죽어갔지만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이의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있는 사람이 다른 이의 죄를 대신 하여 죗값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천하에 어떤 인간도 다른 이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가 없습니다.
다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만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인 대신 죽게 하신 것이니 이와 같은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많은 이들의 죽음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난 주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몸에 피물등 모든 액기를 다 빼버리고 그리고 사망 확인을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죽음을 확인하고는 예수를 돌무덤에다가 인봉하고 병사들에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오늘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새벽에 교회 예배를 참여 하였던 분들은 만나 보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들이 추종하는 교주의 무덤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마호맷, 공자, 등 모두가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속에는 그들의 유골이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있었지만 빈 무덤입니다.
저는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놀다가 나왔어요 경배 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무덤에 가서 조상 숭배를 하거나 죽은 날을 기념하는 일은 없으십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하루를 즐겁게 놀다가 저녁때가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 라고 하니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는 내일이 뭔데 하고 묻는데 메뚜기는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다시 오늘처럼 날이 밝아 오는데 그게 바로 내일이야 메뚜기는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적인 내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하루살이는 도무지 미덥지 못한 코웃음만 흘릴 뿐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뚜기가 개구리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도 지나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얘, 메뚝아! 우리 이젠 그만 놀아야 할까 보다. 날씨가 추워 오니까 우리 내년에나 다시 만나서 놀자라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메뚜기의 질문에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해 설명했지만 메뚜기는 시들은 꽃이 어떻게 다시 피어나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만 살다가는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철옹성 같은 난공불락 같은 것이고, 겨우 한 철을 살다가는 메뚜기에게는 내년이란 이해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어떤 사상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사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인간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죽은 사람만 보았지 살아난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러나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인지 몰라도 메뚜기에게는 내일이 오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개구리에게는 내년이 있듯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루살이가 밤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해서 우주의 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가 겨울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겨울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부활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냐? 가 문제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간직한 성도는 살아 있는 신앙의 삶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속에 부활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삶에 변화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잘 살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서 영생의 부활,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 당시의 사람들의 사상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영혼의 불멸은 믿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죽은 후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을 통해 다시 죄악의 근원인 육체에 감금된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줄 필요를 느껴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을 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이 부활에 대하여 역으로 그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가정 하에서 본문은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만일 ,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된 일이요 또한 우리의 믿음도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중인 즉 거짓말쟁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걸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말씀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부활의 약속이 된 것입니다.
행10:39-41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다 망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일이 모두가 헛된 일이며 아직도 우리 인간은 죄악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에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천사장의 소리와 주의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러므로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 반대로 다른 종교는 죽음의 종교이고 도덕과 윤리만을 강조하는 사회성 종교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역경을 당하였지만 영원한 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 죽음까지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과 영생의 부활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오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입니다.
기독교의 전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또 우리 믿음도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바뀐 사람입니다.
한줌의 재로 끝날 허망한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납골당에 가보십시오 한 줌의 흙을 진열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는 시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시체란 결코 친근감을 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낭만적이거나 희망적인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처절하리 만치 처참하고 단절적인 대상입니다.
오죽하면 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단 시체란 딱지가 붙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같은 방에 조차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낭만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시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죗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예수님이 시체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그저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그저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체 되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시체가 될 것이요 시체란 모든 것의 종결과 소멸의 의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시체가 되었다 한들, 감사의 대상은 될지언정 영원한 구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나다는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시체는 일어 날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는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순환이 멈추어져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시체가 된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체된 예수님을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으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체 되셨다가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나의 연수가 다하여 이 땅에서 나의 호흡이 멎고 내가 시체 되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허물을 벗는 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덧입은 열리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형수들은 이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면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부활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냐? 가 문제입니다.
자신을 잘 살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서 부활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삶은 이미 세상을 감당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15:55-58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
지난 한 주간 동안에 뉴스를 통하여 보니 유명을 달리한 사람들이 많이 있었습니다.
강원 화천의 군인 모 상병은 총기사고로 사망, 신사동에는 화재 2명이 사망, 무면허 한의사 쑥뜸으로 환자 사망, 평소 무시한다고 직장 동료 살해, 보험금 타내기 위하여 여자 친구를 낙지를 먹다가 질식사 한 것으로 위장하여 남자 친구로부터 살해당한 여자, 나주서 버스 승용차 추돌로 한명 사망, 베트남 휴양지에서 한국인 2명 익사, 청주 야산서 중학교 교사 목메 자살, 청양 벽돌 공장서 50대 흙더미 무너져 매몰사, 하이마트 납품사 사장 검찰 조사 중 자신의 아파트에서 투신 사망, 그 외에도 질고로 혹은 자연사 등으로 지난 한 주간에 운명을 다시한 사람들이 많다는 것입니다.
죽음은 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에서 어깨를 부딪쳤다는 이유로 모르는 40대 남성에 의해 20대 여성을 살해한 뒤 시신을 토막훼손 당한 20대 여성, 참으로 안타까운 사실은 그렇게도 살려 달라고 경기 수원 경찰서에 위치와 상황을 알렸음에도 경찰은 오지 않고 그 여성은 아저씨 살려 주세요 라고 하는데 그 귀하디귀한 생명 그 청춘을 비참하게 죽여 버렸습니다. 개죽음보다 못한 죽음이었습니다.
북한에서는 정치군인들을 박격포로 쏘아서 죽인다고 하니 말 그대로 산산이 부져진 이름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 왜 그렇게 인생에게는 죽음은 피 할 수 없는 것인가?
많은 이들이 이 죽음을 피하여 보려고 하였으며 그리고 다시 살아 보려고 무던히도 노력도 하고 희망을 가졌다는 것을 그들의 장사 지낼 때에 함께 묻었던 소장품이나 그리고 그 벽에 그려져 있는 벽화를 보고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지금까지 다시 살아 난 자는 그 아무도 없다는 사실입니다. 죽은 시신만이 나올 뿐이었습니다.
지난 4월 6일 경북 안동시 정상동에서 260년 전으로 추정된 미이라가 발견됐다. 이번 발견된 미이라는 고성이씨 문중이장 과정에서 발굴된 것으로서 팔회당(八懷堂) 이시항(李詩沆,1690-1749)으로 추정된다고 합니다.
그러면 왜 인생은 죽음을 피 할 수 없는가?
성경에서는 그 해답을 확실히 말하고 있습니다.
생명에서 스스로 떠나갔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다른 말로 한다면 사망은 죄의 값이라고 합니다.
롬6:23 죄의 삯은 사망이요
그러므로 사람은 생명이 되시는 하나님을 떠난 것이 죄요 그 생명을 떠났기 때문에 사망이 오는 것입니다.
오늘 이 자리에 함께 한 여러분들도 나에게 찾아오는 죽음은 피 할 수 없는 일입니다.
그런데 이 죄의 값인 사망을 대신 죽어 주시는 자가 있다니 얼마나 놀라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지난주에 수많은 사람들은 자신들의 죄로 인하여 죽어갔지만 자신의 죄가 아닌 다른 이의 죄의 값을 치루기 위하여 대신 죽으신 분이 계십니다.
그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 이신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20:28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죄있는 사람이 다른 이의 죄를 대신 하여 죗값을 치룰 수가 없습니다.
천하에 어떤 인간도 다른 이를 위해서 대신 죽을 수가 없습니다.
다 자신의 죗값으로 죽어만 갈 수 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죄 없으신 당신의 아들을 이 땅에 보내서 죄인 대신 죽게 하신 것이니 이와 같은 사건을 가리켜 하나님의 사랑이라는 것입니다.
롬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많은 이들의 죽음과 다른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이 지난 주간에 있었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처형을 당하셨던 것입니다.
양손과 양발에 못을 박고 가시로 만든 관을 씌우고 몸에 피물등 모든 액기를 다 빼버리고 그리고 사망 확인을 위하여 창으로 옆구리를 찌르고 죽음을 확인하고는 예수를 돌무덤에다가 인봉하고 병사들에게 지키라고 하였습니다.
그런데 더 놀라운 사실이 오늘 아침에 일어났습니다.
오늘 새벽에 교회 예배를 참여 하였던 분들은 만나 보았습니다.
십자가 처형으로 죽으셨던 예수님이 다시 살아 나셨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의 모든 종교는 그들이 추종하는 교주의 무덤이 있습니다. 불교의 석가모니, 마호맷, 공자, 등 모두가 무덤이 있습니다. 그 무덤 속에는 그들의 유골이 묻혀있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무덤은 없습니다. 무덤이 있었지만 빈 무덤입니다.
저는 그 무덤 안에 들어가서 놀다가 나왔어요 경배 할 이유가 없어요 왜냐하면 예수님은 부활하셨기 때문입니다.
기독교는 부활의 종교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러므로 기독교인은 무덤에 가서 조상 숭배를 하거나 죽은 날을 기념하는 일은 없으십니다.
이솝 우화에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어느 여름날 하루살이와 메뚜기가 함께 하루를 즐겁게 놀다가 저녁때가 되자 메뚜기가 하루살이에게 얘, 하루살이야 오늘은 그만 놀고 내일 놀자 라고 하니 내일이 없는 하루살이는 내일이 뭔데 하고 묻는데 메뚜기는 내일이란, 캄캄한 밤이 지나면 다시 오늘처럼 날이 밝아 오는데 그게 바로 내일이야 메뚜기는 분명히 존재하는 미래적인 내일에 대해 열심히 설명했지만 하루살이는 도무지 미덥지 못한 코웃음만 흘릴 뿐 이해를 못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번에는 메뚜기가 개구리와 함께 놀게 되었습니다.
여름이 가고, 가을도 지나자 개구리는 메뚜기에게, 얘, 메뚝아! 우리 이젠 그만 놀아야 할까 보다. 날씨가 추워 오니까 우리 내년에나 다시 만나서 놀자라고 말했습니다. 내년이 뭔데? 메뚜기의 질문에 개구리는 열심히 내년에 대해 설명했지만 메뚜기는 시들은 꽃이 어떻게 다시 피어나니? 하는 것이었습니다.
하루만 살다가는 하루살이에게는 내일이란 이해할 수 없는 그 어떤 철옹성 같은 난공불락 같은 것이고, 겨우 한 철을 살다가는 메뚜기에게는 내년이란 이해할 수 없는, 넘을 수 없는 어떤 사상입니다.
이와 같이 부활의 세계도 마찬가지입니다.
다시 사는 경험을 해보지 못한 인간들은 부활을 믿으려 하지 않습니다.
여태까지 죽은 사람만 보았지 살아난 사람은 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다시 사는 것을 믿지 못하는 것은 그 생명의 근원이 되시는 하나님을 믿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유명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요11:25 예수께서 이르시되 나는 부활이요 생명이니 나를 믿는 자는 죽어도 살겠고
그러나 하루살이가 내일이 무엇인지 몰라도 메뚜기에게는 내일이 오고 메뚜기가 내년을 몰라도 개구리에게는 내년이 있듯이 주님의 부활을 믿는 성도들에게 주님은 부활의 첫 열매가 되셨습니다.
하루살이가 밤의 존재를 부인한다고 해서 우주의 밤이 없는 것이 아닙니다.
메뚜기가 겨울을 알지 못한다고 해서 겨울이 존재하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부활을 볼 줄 아는 믿음의 눈을 가져야 할 줄로 믿습니다.
부활은 반드시 있습니다.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부활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냐? 가 문제입니다.
부활의 생명을 간직한 성도는 살아 있는 신앙의 삶이 자연스럽게 나타날 것입니다.
그러나 모양은 갖추었으나 그 속에 부활의 생명이 없는 사람은 삶에 변화가 있을 수가 없을 것입니다. 이미 죽어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내 자신을 잘 살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서 영생의 부활, 영광의 부활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본문에 당시의 사람들의 사상에는 다시 살아난다는 것을 생각해 보지 못했습니다.
당시 고린도 지역에는 영혼의 불멸은 믿으나 육신의 부활은 믿지 않는 헬라 사상의 영향을 받은 사람들이 많았습니다.
이들은 기독교를 받아들이기는 했어도 죽은 후 영혼이 육신을 떠나 자유롭게 된 영혼이 부활을 통해 다시 죄악의 근원인 육체에 감금된다는 생각 때문에 육체의 부활을 믿지 않았던 것이다.
그래서 이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자세히 알려줄 필요를 느껴 육체의 부활에 대하여 기술을 하였던 것입니다. 기독교가 주장하는 이 부활에 대하여 역으로 그 부활이 없다면 어떻게 될 것인가 하는 가정 하에서 본문은 풀어 나가고 있습니다.
만일 , 만약에, 부활이 없다면 어떤 일이 일어날 것인가?
우리의 전도하는 것도 헛된 일이요 또한 우리의 믿음도 헛된 일이 될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또 우리가 하나님의 거짓 중인 즉 거짓말쟁이가 된다고 말했습니다. 또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예수님도 다시 살리시지 않았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그걸 믿고 살아가는 성도들 역시 가장 불쌍한 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는 성경의 말씀대로 3일 만에 다시 살아나셨고 이 사실을 믿는 모든 자들에게도 부활의 약속이 된 것입니다.
행10:39-41 우리는 유대인의 땅과 예루살렘에서 그가 행하신 모든 일에 증인이라 그를 그들이 나무에 달아 죽였으나 하나님이 사흘 만에 다시 살리사 나타내시되 모든 백성에게 하신 것이 아니요 오직 미리 택하신 증인 곧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하신 후 그를 모시고 음식을 먹은 우리에게 하신 것이라
만일 그리스도의 부활이 없다면
우리가 여전히 죄가운데 있으며 그리스도 안에서 잠자는 자들이 다 망하였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인간들이 죄가운데 있을 때에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인간의 몸을 입으시고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런데 만약 부활이 없다면 이 모든 일이 모두가 헛된 일이며 아직도 우리 인간은 죄악가운데 있을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롬4:25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고 말씀해 주셨습니다.
만일 부활이 없다면 모든 사람가운데 우리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이 가장 불쌍한 사람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부활의 소망이 없다면 예수를 믿을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예수께서 부활의 첫열매가 되셨기에 그를 믿는 모든 성도들이 부활의 소망을 얻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마지막 날에 천사장의 소리와 주의 호령과 하나님의 나팔소리를 들을 때에 모두 부활하게 될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살전4:16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러므로 기독교는 영원한 생명의 종교입니다. 그 반대로 다른 종교는 죽음의 종교이고 도덕과 윤리만을 강조하는 사회성 종교입니다.
요3:16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
기독교 역사상 수많은 성도들이 이 세상에 살면서 온갖 고난과 핍박과 역경을 당하였지만 영원한 나라의 기쁨과 소망을 바라보면서 살아 죽음까지도 웃음으로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을 믿고 자신의 부활과 영생의 부활도 믿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오늘 본문에서 말씀하기를 만일 죽은 자의 부활이 없으면 그리스도도 다시 살지 못하셨으리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 라고 하였습니다.
믿음의 대상은 예수 그리스도이시오 그의 죽으심과 살아나심입니다.
기독교의 전제는 그리스도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사실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께서 다시 살지 못하셨으면 우리의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며 또 우리 믿음도 헛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자는 영원한 생명을 가졌습니다.
신자는 그리스도 안에서 신분이 바뀐 사람입니다.
한줌의 재로 끝날 허망한 인간이 영원한 존재로 신분이 바뀐 것입니다
납골당에 가보십시오 한 줌의 흙을 진열하고 있지 않습니까?
생명이 없는 시체는 사실 아무 것도 아닙니다. 시체란 결코 친근감을 주는 대상이 아닙니다.
낭만적이거나 희망적인 대상은 더더욱 아닙니다. 그것은 처절하리 만치 처참하고 단절적인 대상입니다.
오죽하면 한 가족이라 할지라도 일단 시체란 딱지가 붙기만 하면 그 순간부터 같은 방에 조차도 두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낭만적으로 죽은 자처럼 되신 것이 아닙니다.
죄의 노예된 인간은 모두 하나님 앞에서 시체가 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 죗값을 예수님께서 십자가 위에서 대신 치루어 주시므로 예수님이 시체가 되신 것입니다.
사람들은 흔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구원을 그저 주셨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하나님 입장에서 본다면 그것은 사실이 아닙니다.
하나님 아버지께서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구원은 절대로 그저 이루어 진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께서 우리를 대신하여 시체 되시는 것만으로 모든 것이 끝나 버렸다면, 그것은 우리에게 별다른 의미를 가져다주지 못합니다.
우리 역시 언젠가는 시체가 될 것이요 시체란 모든 것의 종결과 소멸의 의미 이상은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 경우라면 예수님께서 우리의 죗값을 치르시기 위하여 시체가 되었다 한들, 감사의 대상은 될지언정 영원한 구원자가 될 수는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죽은 자 가운데서 살아나셨다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살아나다는 일어났다는 뜻입니다. 시체는 일어 날수가 없습니다. 움직일 수조차도 없습니다.
그래서 시체는 시체가 되는 순간부터 모든 순환이 멈추어져 썩어질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시체가, 시체가 된 예수님이 일어나신 것입니다.
우리를 구원하시기 위하여 당신의 독생자를 시체 되게까지 하셨던 하나님께서 시체된 예수님을 시체 가운데서 영원히 일으켜 세우신 것이었습니다.
예수님이 시체 되셨다가 영원히 일어나셨기에 예수 안에 있기만 하면, 나의 연수가 다하여 이 땅에서 나의 호흡이 멎고 내가 시체 되는 죽음의 순간이야말로 그리스도 안에서 육체의 허물을 벗는 순간이요, 영원한 생명을 덧입은 열리는 순간이 되는 것입니다.
사형수들은 이 사실을 확신하였기에, 죽음 앞에서 오히려 살아 있는 자들을 감동시키면서 죽음을 통과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부활이 있느냐 없느냐? 가 문제가 아니라 이 부활에 참여 할 수 있을 것이냐? 가 문제입니다.
자신을 잘 살펴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 삶을 살아서 부활에 참여하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 삶은 이미 세상을 감당하고 승리하게 될 것입니다.
고전15:55-58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이 쏘는 것은 죄요 죄의 권능은 율법이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승리를 주시는 하나님께 감사하노니 그러므로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견실하며 흔들리지 말고 항상 주의 일에 더욱 힘쓰는 자들이 되라 이는 너희 수고가 주 안에서 헛되지 않은 줄 앎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