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르심과 상을 위해 달려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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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댓글 0건 조회 461회 작성일 2009-05-27 09:41본문
빌립보서3:7-14 부르심과 상을 위해 달려가자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Nobody)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의 가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렇다고 합니다. 대통령 감이 있는가? 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이 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들은 No족속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으며 목표도, 초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믿음을 갖지 못한 분들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는 거지요. 그럽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냥 열심히 살다가 깨끗하게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깔끔한 해답 없이 그냥 열심히 삽니다. 그 뒷일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들에게 가치가 없다거나 삶의 고상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분명한 존재의 목표가 흐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에게로 와서 주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단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탕자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분명한 목표가 있는, 올바른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그런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 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역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 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러한 것을 추구하여 살아가면서 만족을 얻고 있느냐?고 반문해 본다면 만족하기는커녕 불만이 가득하고 피곤해하며 모두가 우울 증세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알 수 없는 장래를 두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영역이 자기라는 조그마한 하고 불완전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기에 하나님이 함께 자리 할 공간이 있겠습니까?
순전히 인간적이고 너무 나도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두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육신의 생각은 그 결론부터 먼저 내린 다면 사망입니다.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육신 적인 생각은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살맛이 나도록 하기보다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헛되게 하고 허무하게 할뿐입니다.
인생은 5-60이 넘으면 목표가 엷어집니다. 그저 곱게 늙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마지막 순간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목표가 없어지면 불행해 집니다.
삼손은 참으로 그가 죽은 순간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목표를 가지고 이룬 사람입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확고한 삶의 모습입니까? 죽은 순간까지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그 모습이
저에게 요사이 와서는 더욱 호감이 가는 모습입니다. 제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삼손이 아름다워집니다.
어떤 부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아파트 한 체를 마련하려고 지독하게 내핍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초대를 받아도 초대하는 걸 자제하고, 남들에게 대접을 받아도 입을 닦고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억척스럽게 노랭이 생활을 해서 드디어 아파트를 한 채 마련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뒤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까지 아파트 내 집 마련을 위해 지독하게 달려 왔는 데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고 보니 갑자기 허무해 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통 살맛이 없어지고, 무얼 해야 하나 하고 허망하다는 생각뿐이 라고 합니다.
어디 이 부인만의 생각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루어도 허무해 질 것을 위해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을 가진 자는 결코 그런 생각에서 매여 있기보다는 자유 하는 자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자입니다. 결코 허무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두고 영의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영의 생각의 결론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의 삶은 제한된 인간의 영역에서 헤매는 자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으니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 질 뿐만 아니라 참으로 행복한 삶이 되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되 지혜로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생각에서 영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소망하고 그러한 삶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여러분 자신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내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자유 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내 중심적인 삶이 가장 추하고 헛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그기에 메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유익만을 위한 삶이 더 이상 나를 위할 수가 없는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 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내 중심적으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살아 왔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게 하였는지 내가 아니어도 인생이 잘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만을 위하고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아오다 보니 참으로 내가 약하고 지쳐버릴 때에 어디에다 의지하고 바라 볼 만한 곳, 안식을 얻을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나를 위한 삶이 한계를 들어내고 그리고 나를 피곤케하며 허무하게 하며 얼마나 절망적으로 몰아 넣습니까? 이 문제 해결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나만을 위한 삶이 최고로 알고 나 중심적인 삶이 완전하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 인생을 삶을 살아보고 깨달은 자가 일러 줄 때에 아멘 하고 감사하게 여기고 받아 드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요 자신을 버리는 삶이요 한 알의 섞어지는 밀 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에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는 소극적인 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바뀌고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신앙인 은 무조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술에 술탄 듯이 물에 물탄 듯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미지그한 신앙은 토하여 내쳐버린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자포 자기 하는 자요 그리고 아주 무능력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고 합니다. 눈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들이 대답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 여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목적은 사냥인데,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요. 목적이 사냥이면 화살이 꽂힐 곳 독수리의 가슴 그 과녁을 목표로 확고히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확고한 과녁의 목표는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위한 일을 위하여 곧 그를 부르신 이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유익한 것을 버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함이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것도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이미 얻었다 함이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결코 우리를 소극적인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에스더와 같은 자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할 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주를 위한다면은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나 죽으니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삶의 의미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살아도 죽어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학자는 르불랑은 화학 공정에는 소다가 많이 필요했는데 그러나 소다를 만들기가 당시에는 대단히 어려웠다. 자연히 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그래서 정부는 수백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고 싸게 소다를 만드는 법을 찾았다. 응모에 당선된 이가 바로 르블랑 교수였다. 획기적인 공정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정부의 지원으로 공정탑을 만들었다. 이제 소다는 싼값으로 대량생산하게 되었다. 그는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위대한 학자였다. 이제 며칠 있으면 수백만 프랑의 거액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뿔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대 혼란이었다. 돈을 약속한 정부는 넘어지고 르불랑의 계획은 수포고 돌아가게 되었다. 어느 날 르불랑 박사는 사라졌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온 가족과 제자들이 며칠 걸려서 겨우 그를 발견했다. 어디서? 그가 설계하고 만든 공정탑 속에서, 어떻게? 권총으로 자기 이마를 쏴 자살한 시체로. 그는 돈과 명예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좌절과 낙망에 빠져 탑 속에서 발견되고 만 것이다.
그처럼 극적으로 끝나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결국에는 그와 같은 운명에 도달한다. 좌절과 낙망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결과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목표와 길이 같다면 결국에는 같은 경험에 도달할 것이다. 돈과 명예와 사랑의 신기루가 사라진 뒤에 허무 속에서 미치며 돌아가는 것이 모든 인생의 길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아는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내게 베풀어주실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림픽때 우리 나라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는 뒤에 소감을 말하기를, 뛰는 도중에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고 싶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고 싶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왜 끝까지 뛰었습니까? 바로 상 때문입니다. 그 상이 그를 뛰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그때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종 신앙인을 경주자에 비유를 했습니다. 경주자는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푯대를 향하여 방향을 잡아 놓고는 쉬지 않고 뛰어갑니다. 그래야 우승을 할 수 있고,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급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함부로 목표를 바꾸거나 잃지 않게 해줍니다. 가끔 보면 권투 선수들 중에 생활이 무절제한 선수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면 한결같이 선수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타이틀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상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선수들은 생활에 절도가 있고, 분별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선수로서 생명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늘의 상급과 땅의 상급을 기대해도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반드시 거두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못한 자에게 벌을 잘한 자에게 상을 내리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사는 자는 얼마나 소망된 일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
미국의 팝송 가운데 젊은이들이 세태를 풍자한 노-바디(Nobody)라는 노래가 유행한 적이 있었다고 합니다. 그 노래의 가사와 꼭 같은 것은 아니지만 대충 이렇다고 합니다. 대통령 감이 있는가? Nobody. 전쟁을 쉬게 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존경할 사람이 있는가? Nobody. 이 Nobody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해 주는 것입니까? 도대체 믿을 만한 것이 없다는 것입니다. 믿을 만한 신조도 없고 하나님도 없습니다. 이들은 No족속입니다. 하나님이 없으니까 모든 것이 가치가 없고 의미가 없으며 목표도, 초점도 없습니다.
이와 같은 현상이 믿음을 갖지 못한 분들에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왜? 사느냐고 물으면, 그냥 사는 거지요. 그럽습니다. 또 어떤 이는 그냥 열심히 살다가 깨끗하게 가는 것이다. 이렇게 생각합니다. 어디서 왔으며 어떻게 살아가며, 어디로 갈 것인지에 대한 깔끔한 해답 없이 그냥 열심히 삽니다. 그 뒷일은 모르겠다는 것입니다. 물론 믿지 않는 분들에게 가치가 없다거나 삶의 고상한 목표가 없다는 것이 아닙니다. 말하자면 분명한 존재의 목표가 흐리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의 사람들은 주님에게로 와서 주님에게로 돌아간다는 단순 명쾌한 해답을 가지고 있습니다. 예수를 만난 사람은 창녀가 되었든지 세리가 되었든지 탕자가 되었든지 간에 자기의 길을 또박또박 걸어갈 줄 압니다. 푯대가 있고 초점이 있고 목표가 있습니다. 할렐루야!
분명한 목표가 있는, 올바른 인생의 삶의 의미를 찾는 그런 사람이 우리 그리스도인 입니다.
세상의 사람들은 역시 그들이 살아가는 세상 적인 의식주의 생활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해야겠다는 그런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소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가 전부였습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들이 이러한 것을 추구하여 살아가면서 만족을 얻고 있느냐?고 반문해 본다면 만족하기는커녕 불만이 가득하고 피곤해하며 모두가 우울 증세를 가지고 있으며 오히려 알 수 없는 장래를 두고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들의 삶의 영역이 자기라는 조그마한 하고 불완전한 그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니 어찌 그기에 하나님이 함께 자리 할 공간이 있겠습니까?
순전히 인간적이고 너무 나도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 할 뿐입니다.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상태를 두고 육신의 생각을 따라 사는 자라고 말하였습니다.
이 육신의 생각은 그 결론부터 먼저 내린 다면 사망입니다. 사는 것이 죽음을 향하여 가는 것입니다.
육신을 좇는 자는 육신의 일을 생각하나니 육신의 생각은 사망이요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 이는 하나님의 법에 굴복치 아니할 뿐 아니라 할 수도 없음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런 육신 적인 생각은 생각하면 할수록 사람을 행복하게 하거나 살맛이 나도록 하기보다는 우리를 우울하게 만들고 헛되게 하고 허무하게 할뿐입니다.
인생은 5-60이 넘으면 목표가 엷어집니다. 그저 곱게 늙고 죽을 날을 기다리는 것이지요. 그러나 믿음의 사람들은 생을 마감할 마지막 순간까지 푯대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입니다. 이것이 행복입니다. 목표가 없어지면 불행해 집니다.
삼손은 참으로 그가 죽은 순간까지 참으로 아름다운 믿음의 목표를 가지고 이룬 사람입니다.
삼손이 여호와께 부르짖어 가로되 주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나를 생각하옵소서 하나님이여 구하옵나니 이번만 나로 강하게 하사 블레셋 사람이 나의 두 눈을 뺀 원수를 단번에 갚게 하옵소서 하고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고 하였습니다.
이 얼마나 확고한 삶의 모습입니까? 죽은 순간까지 선을 위하여 무엇인가?를 이룰 수 있는 그 모습이
저에게 요사이 와서는 더욱 호감이 가는 모습입니다. 제가 인생을 어느 정도 살았다고 생각하니 더욱 삼손이 아름다워집니다.
어떤 부인이 한 분 있었습니다. 아파트 한 체를 마련하려고 지독하게 내핍생활을 했다는 겁니다. 남들에게 초대를 받아도 초대하는 걸 자제하고, 남들에게 대접을 받아도 입을 닦고 모르는 척 하고 이렇게 억척스럽게 노랭이 생활을 해서 드디어 아파트를 한 채 마련했다는 거지요. 그런데 그 뒤에 문제가 생긴 것입니다. 이 때 까지 아파트 내 집 마련을 위해 지독하게 달려 왔는 데 막상 그 목표에 도달하고 보니 갑자기 허무해 지더라는 겁니다. 그래서 요즈음은 통 살맛이 없어지고, 무얼 해야 하나 하고 허망하다는 생각뿐이 라고 합니다.
어디 이 부인만의 생각입니다. 모든 이들이 그런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이루어도 허무해 질 것을 위해 사는 것 말입니다.
그러나 우리 믿음을 가진 자는 결코 그런 생각에서 매여 있기보다는 자유 하는 자이며 오히려 하나님의 생각을 품는 자입니다. 결코 허무하지 않는 것이지요
사도 바울은 이러한 생각을 두고 영의 생각이라고 했습니다.
영의 생각의 결론은 생명과 평안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하였습니다.
이러한 자의 삶은 제한된 인간의 영역에서 헤매는 자가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으니 그 삶이 날마다 새로워 질 뿐만 아니라 참으로 행복한 삶이 되지 아니 할 수가 없습니다.
예수님도 이와 유사한 말씀을 하셨습니다.
염려하여 이르기를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지 말라 이는 다 이방인들이 구하는 것이라 너희 천부께서 이 모든 것이 너희에게 있어야 할 줄을 아시느니라 너희는 먼저 그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그리하면 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더하시리라 고 하셨습니다.
이제는 우리 성도들이 이 세상을 살아가되 지혜로워야 할 필요가 있습니다.
육신적인 생각에서 영의 생각을 가지고 살기를 소망하고 그러한 삶을 기뻐해야 합니다.
그래야만 하나님께도 영광이 되고 여러분 자신들에게도 축복이 될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살아가는 것이 하나님의 생각을 품고 살아가는 생활이라 할 수 있습니까?
내 중심적인 삶에서 이제는 벗어나서 자유 하는 자가 되셔야 합니다.
그러한 삶이나를 살린 것이 아니라 오히려 나를 죽이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내 중심적인 삶이 가장 추하고 헛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절대로 그기에 메이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나의 유익만을 위한 삶이 더 이상 나를 위할 수가 없는 이제는 아무 짝에도 쓸모가 없는 배설물과 같이 여긴다고 했습니다.
얼마 전에 어떤 사람과의 만남이 있었습니다.
그는 그 나름대로의 자기 중심적인 삶을 열심히 살아 왔습니다. 그래서 어느 정도 인생을 무난하게 살아 왔다고 해도 좋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가 크게 깨달은 것이 하나 있었습니다. 여태까지 내 중심적으로 내가 아니면 안 된다고 살아 왔는 삶이 얼마나 어리석은지를 그리고 그 삶이 얼마나 피곤하게 하였는지 내가 아니어도 인생이 잘 굴러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또 하나 깨달은 것이 있었다고 합니다.
나만을 위하고 나 중심적인 삶을 살아오다 보니 참으로 내가 약하고 지쳐버릴 때에 어디에다 의지하고 바라 볼 만한 곳, 안식을 얻을 곳이 아무데도 없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너무나도 괴롭다는 것입니다.
이 얼마나 나를 위한 삶이 한계를 들어내고 그리고 나를 피곤케하며 허무하게 하며 얼마나 절망적으로 몰아 넣습니까? 이 문제 해결하지 못하면 그 사람은 불행한 삶을 살 수 밖에 없습니다.
오늘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아직도 나만을 위한 삶이 최고로 알고 나 중심적인 삶이 완전하다고 그렇게 고집을 부리고 있지 않습니까?
먼저 인생을 삶을 살아보고 깨달은 자가 일러 줄 때에 아멘 하고 감사하게 여기고 받아 드리는 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은 삶의 모습을 이렇게 표현하기도 했습니다.
자신을 부인하는 삶이요 자신을 버리는 삶이요 한 알의 섞어지는 밀 알이 되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갈라디아서에 말하기를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라는 소극적인 면에서 머무는 것이 아니라 더 적극적으로 표현하기를 나를 사랑하사 자기 몸을 버리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하는 사는 삶이라고 했습니다.
참으로 그렇습니다.
삶을 살아가는 주체가 바뀌고 이유가 바뀌는 것입니다.
그리고 더욱 적극적인 삶을 살아가야 합니다.
오늘날 문제가 되는 신앙인 은 무조건 나는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다고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거기에서 머물러 있어서는 안됩니다.
이것은 참으로 무기력하고 소극적인 자로 만들어 버립니다.
아무 것도 할 수가 없는 자가 되고 맙니다.
술에 술탄 듯이 물에 물탄 듯이 이것은 신앙이 아닙니다.
차지도 않고 뜨겁지도 않는 미지그한 신앙은 토하여 내쳐버린다고 했습니다.
자기를 자포 자기 하는 자요 그리고 아주 무능력한 신앙인이 되고 맙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자는 자신을 포기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내가 그리스도께 잡힌 바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분명한 푯대를 향하여 나아가는 것입니다.
아메리칸 인디언의 한 추장이 늙어서 자기의 추장직을 아들에게 물려주기 위하여 세 아들을 데리고 사냥을 나갔다고 합니다. 눈앞에 큰 나무가 있고 그 나무 가지에 독수리가 앉아 있었습니다. 추장은 맏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맏아들이 대답합니다. 하늘이 보이고 나무가 보입니다. 추장은 실망하 여 둘째 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둘째 아들이 대답했습니다. 나무가 보이고 나뭇가지에 앉아 있는 독수리가 보입니다. 추장은 역시 실망한 빛으로 막내아들에게 물었습니다. 저 앞에 무엇이 보이느냐? 막내아들이 대답했다. 독수리가 보이는데 두날개가 있고 그 날개들이 마주치는 곳에 독수리의 가슴이 보입니다. 추장은 기쁨으로 외쳤다. 그곳을 쏴라. 막내아들의 화살은 독수리의 가슴을 명중시켰습니다. 물론 추장은 막내아들에게 추장의 위를 물려주었습니다.
목적은 사냥인데, 하늘을 보거나 나무를 보거나 막연하게 독수리를 보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않지요. 목적이 사냥이면 화살이 꽂힐 곳 독수리의 가슴 그 과녁을 목표로 확고히 바라봐야 하는 것이지요.
우리 주님이 모든 구원받은 그리스도인에게 주신 확고한 과녁의 목표는 복음증거와 사랑의 실천을 위한 일을 위하여 곧 그를 부르신 이를 위하여 사는 것입니다.
내가 유익한 것을 버리는 이유는 그리스도를 위함이요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고 버리는 것도 그리스도를 얻기 위함입니다. 할렐루야!
내가 이미 얻었다 함이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이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좇아가노라 고 하였습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를 향하여 이런 말을 하였습니다.
내가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그리스도의 영광을 위한다고 하였습니다.
여러분 우리의 신앙은 결코 우리를 소극적인 자리에 두지 않습니다.
주를 위하여 적극적인 삶을 살도록 하십니다.
에스더와 같은 자는 죽으면 죽으리라고 할 수가 있지 않았습니까?
주를 위한다면은 내 생명을 조금도 귀하게 여기지 않겠노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사나 죽으니 내가 그리스도의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까?
이것이 삶의 의미요 생명이요 구원이요 축복이요 살아도 죽어도 의미가 있기 때문입니다.
18세기 프랑스의 대표적인 화학자는 르불랑은 화학 공정에는 소다가 많이 필요했는데 그러나 소다를 만들기가 당시에는 대단히 어려웠다. 자연히 값도 엄청나게 비쌌다. 그래서 정부는 수백만 프랑의 현상금을 걸고 싸게 소다를 만드는 법을 찾았다. 응모에 당선된 이가 바로 르블랑 교수였다. 획기적인 공정식을 찾아낸 것이다. 그는 정부의 지원으로 공정탑을 만들었다. 이제 소다는 싼값으로 대량생산하게 되었다. 그는 명예와 부를 한꺼번에 차지하는 위대한 학자였다. 이제 며칠 있으면 수백만 프랑의 거액이 주어지게 되었다. 그러나 아뿔싸.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났다. 대 혼란이었다. 돈을 약속한 정부는 넘어지고 르불랑의 계획은 수포고 돌아가게 되었다. 어느 날 르불랑 박사는 사라졌다. 아무도 그를 찾을 수가 없었다. 온 가족과 제자들이 며칠 걸려서 겨우 그를 발견했다. 어디서? 그가 설계하고 만든 공정탑 속에서, 어떻게? 권총으로 자기 이마를 쏴 자살한 시체로. 그는 돈과 명예 속에서 자신을 찾으려고 하였다. 그러나 결국은 좌절과 낙망에 빠져 탑 속에서 발견되고 만 것이다.
그처럼 극적으로 끝나지 않아도 인간은 누구나 결국에는 그와 같은 운명에 도달한다. 좌절과 낙망이 세상 사람 누구에게나 해당되는 결과이다. 신자라 하더라도 세상 사람들과 목표와 길이 같다면 결국에는 같은 경험에 도달할 것이다. 돈과 명예와 사랑의 신기루가 사라진 뒤에 허무 속에서 미치며 돌아가는 것이 모든 인생의 길이 아닌가!
그러나 우리가 아는 또 한가지 확실한 것은 앞으로 내게 베풀어주실 상급이 있다는 것입니다.
올림픽때 우리 나라 선수가 마라톤 경기에서 우승을 했는데 그는 뒤에 소감을 말하기를, 뛰는 도중에 고통을 견딜 수가 없어서 차라리 죽고 싶더라는 말을 했습니다. 죽고 싶도록 고통스러웠지만 왜 끝까지 뛰었습니까? 바로 상 때문입니다. 그 상이 그를 뛰게 만든 것입니다. 그것이 없었더라면 아마 그는 그때 인내하지 못하고 그만 주저앉아 버렸을 것입니다.
그래서 사도 바울은 종종 신앙인을 경주자에 비유를 했습니다. 경주자는 자신이 목표로 하고 있는 푯대를 향하여 방향을 잡아 놓고는 쉬지 않고 뛰어갑니다. 그래야 우승을 할 수 있고, 마침내 승리의 월계관을 쓰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고린도전서 “(고전9:24) 운동장에서 달음질하는 자들이 다 달아날지라도 오직 상 얻는 자는 하나인줄을 너희가 알지 못하느냐 너희도 얻도록 이와 같이 달음질하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이 같은 상급 의식은 사람들로 하여금 모든 일에 자기를 절제하게 해줍니다. 그리고 함부로 목표를 바꾸거나 잃지 않게 해줍니다. 가끔 보면 권투 선수들 중에 생활이 무절제한 선수들이 있는데 그들을 보면 한결같이 선수 생명이 길지가 않습니다. 얼마 못 가서 타이틀을 빼앗겨 버립니다.
그렇지만 주어진 상을 잃지 않으려는 의지가 있는 선수들은 생활에 절도가 있고, 분별이 있고, 열심히 노력하는 것을 게을리 하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런 사람들은 선수로서 생명이 길 수밖에 없습니다.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좇아가노라
하늘의 상급과 땅의 상급을 기대해도 좋은 사람이 될 것입니다.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반드시 거두기 마련입니다.
하나님은 공의로운 분이시기 때문에 못한 자에게 벌을 잘한 자에게 상을 내리시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러니 바르게 사는 자는 얼마나 소망된 일이 많이 있을지 모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