떠나야만 하는 자와 남아야만 하는 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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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화평 댓글 0건 조회 419회 작성일 2012-09-16 08:57본문
룻기 1:11-18 떠나야만 하는 자와 남아야만 하는 자
본문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라는 믿음이 좋은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아내 이름은 나오미인데, 그 뜻은 나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하나는 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룐입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혐오스러운 불쾌한
기룐은 우울, 침울 이란 의미로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이 신통찮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귀한 자녀에게 천한 이름 개똥 소똥이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았는지
그런데 베들레헴을 포함한 온 유대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들 가족 모두는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소이 먹고 살기 위하여 이민을 갔어요. 그렇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편 엘리멜렉이 이 이방 땅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은 이방 여자인 모압 여자들과 결혼을 했는데, 그 자부의 이름이 하나는 오르바이고 다른 하나는 룻입니다.
얼마 안 있다가 두 아들이 또 세상을 떠났어요.
이민 온지 10년 만에 상황이 바뀌어 그래서 이 나오미의 가정에는 여자만 세 사람이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극단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나이도 있고해서 시집가기는 그렇고 해서 자기의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과 함께 살려는 마음을 먹었지만 며느리들은 아직 젊었으니 재가를 하도록 권유를 했습니다.
남편도 없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지금까지는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어서 함께 할 조건이 충족이 되어서 같이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도 죽고 남편도 죽고 하니 더 이상 함께 할 그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이 없는데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잘 못된 일이고 그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르바 그 이름의 의미는 반항적인데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음을 알고 제 살길을 찾아 친정으로 갔습니다.
친정으로 갔는지 다시 시집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시집을 간 것 같아요 하여튼 나오미와는 해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오르바를 가리켜 불효를 했다고 하는데 불효가 아닙니다.
그리고 향락을 찾아갔다고 못된 여자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보면 안 되지요 가장 합리적이요 이성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가지 말라고 잡아 두는 자가 문제이지요 이 오르바 누구 한 사람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여자 룻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소이 디른 이들이 볼 때에 몰상식한 선택입니다.
너 미쳤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로마의 총독 베스도에게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너 미쳤구나 너 지금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아, 이성적이지 않아,
행26:24-25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복음을 얻게 된다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깁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좀 말려 줘요 죽어도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 특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적인 그 무엇을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야
더 이상 세상적인 그 무엇을 위하여 사는 삶은 의미가 없어
비록 고향 산천을 떠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살고 싶어 이것입니다.
물론 그 나머지의 인생의 그 결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인간적으로 살기를 택한 오르바는 더 이상 그 믿음의 족보에는 그 이름조차도 거론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이름을 더 이상 이야기 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지금까지 그 이름은 교회사가 아니 역사가 계속되는 이상 그 공로가 지대하기에 모든 이들의 그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17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의 삶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번 정립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르바의 삶으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가장 무난하겠지요
그러나 삶의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내 자신의 조건에만 충실한 자입니다.
지적이고 의지적이고 또는 똑똑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오미는 떠나기에 앞서 두 자부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선택은 자유입니다. 억지로 할 수 있다면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이 신앙은 억지가 되어서 안 되며 주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환경이나 인정 때문에 마지못해 그분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기꺼이 단 마음으로 그분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을 기뻐하신다.
오르바는 나오미와의 관계가 오로지 주어진 환경과 여건이요 조건이 엇습니다.
그렇기에 그 조건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며느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나오미는 자기를 따라와도 달리 좋은 수가 없다는 것, 즉 그들이 다시 결혼할 새 남편을 그녀가 낳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면서 설득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치셨으므로 마음이 더욱 아프다고 말했다.
뭐라고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았어 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 것입니다.
이 같은 말에 오르바는 더 이상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아 마음이 아프지만 더 이상의 교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기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14절 오르바라는 여인은 그 말을 듣고 그 시모에게 입맞추었다.
죽음의 키스. 이별의 키스를 하였습니다. 마치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키스가 생각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귀하게 여기시고 자의적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따를 만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오르바는 인간적으로 말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도 할 만큼 했다. 죽은 남편을 위해서나 시어머니를 위해 그 마음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어미를 따를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인을 나오미가 억지로 데리고 들어갔다면 그녀는 그 식구들 모두에게 커다란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진심으로 시모를 따라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오르바 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신앙조차도 섬김의 정신까지도 인간적인 그 한계에 머물러 잇다는 것입니다.
늘 이런 인물은 불안 할 것입니다. 언제 돌아 설지 모르는데
오르바 돌아 서보았자 그녀는 저주 받은 모압의 여자요 그리고 그의 자녀 또한 그 이름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주도 옆에 우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외어머니 밑에 외아들로 자란 농사꾼 총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외지 부산에서 미술을 전공한 한 처녀가 들어와서 두 사람이 눈이 맞아 함께 살기를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아내 된 그 여자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 여자가 언제 바람같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조건이 맞지 않으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인정과 체면이 많이 작용했고 의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함께 살다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리나 인정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의리도 인정도 더 이상 묶어 둘 수가 없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떠나라 떠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에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룻은 왜 떠나지 않고 죽고 살기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관계가 의리 인정에만 있었던 아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룻이 효부라서 시모를 따라 왔다고 효심만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효심만으로는 자기 부모와 민족을 버리고 먼 길을 따라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효심이 밥 먹여 줍니까?
효를 지키다가 얼마나 한을 품고 인생을 살다간 열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을 윤리 도덕으로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또한 새로운 짐이 될 뿐입니다.
윤리와 도적이 룻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을 함께하게 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결코 짐도 아니요 후회도 아닙니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결국 룻의 행동은 인간적인 것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가 아니라 모압 땅의 우상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택한 결단과 용기가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오르바를 두고 나오미가 말하기를 그가 떠난 것은 결국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15절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성으로는 불가능 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이루어짐
17절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달랐다. 그 여자는 시어머니에게서 본 것이 있었다.
즉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 백성이 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은 백성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비록 나오미가 자신이 잘못해서 징계를 받아 하나님이 그녀를 치셨다고 고백했으나 룻에게는 그런 말이 오히려 복음으로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인생 세상적인 조건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함께 신앙 생활하면서 아직 이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조건이 상실 되면 언제든지 믿음에서 떠나겠다는 자세를 가질 수가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바에게는 아무리 잇고 싶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조건을 제시 했을 때에 울면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룻은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한 하나님을 발견했기에 하나님이 조건이시기에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떠나라고 말 할 이유가 없었고 그를 데리고 베들레헴 축복의 땅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18-19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방인이 가지지 않은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비록 그 남편은 죽었지만 그 가정에 시집온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왔다는 큰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남은 자에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 결국 믿음은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사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결국에 나의 삶은 믿음으로 남느냐 아니면 인간적으로 돌아 가느냐 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그리스도 왕가의 족보에 들어갔다.
여기서 복된 성도는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은 어두움 가운데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풍지박산 난 집안에 오르바는 그 모습대로 자신을 처신했지만 룻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었습니다.
현숙한 여인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보아스는 엘레멜렉의 친족으로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낯선 땅까지 따라온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줍는 룻을 선대합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보아스에게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보아스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참으로 겸손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보아스는 기생 라합이 유다 족속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자기 가족을 살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라합의 영향인지 아들 보아스도 참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룻을 축복하면서, 롯2:11-12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내개 맺은 모든 관계는 인간적인 관계만을 했는가 아니면 믿음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룻은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서는 아버지와 딸과의 사이에서 얻는 불륜의 후손이며 외국인과 결혼하여 동족에게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며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이 여자가 그렇게 산다면 그 여자는 죽을 때까지 불쌍한 여자로 살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로 삶을 살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아직도 인간적인 관계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새로운 축복의 시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
본문의 이야기는 지금으로부터 약 3000년 전의 이야기입니다. 이때에 유대 땅 베들레헴에 엘리멜렉이라는 사람이 살았습니다. 이 사람의 이름의 뜻은 하나님은 왕이라는 믿음이 좋은 사람 같습니다.
그리고 아내 이름은 나오미인데, 그 뜻은 나의 즐거움이라는 의미를 가졌습니다.
아내를 사랑하는 자입니다. 그리고 두 아들이 있었어요.
하나는 말론이고 다른 하나는 기룐입니다. 말론의 뜻은 병약한, 혐오스러운 불쾌한
기룐은 우울, 침울 이란 의미로 나는 행복하지 않아요 라는 뜻입니다.
자녀들이 신통찮지 않는 것 같기도 합니다.
아니면 귀한 자녀에게 천한 이름 개똥 소똥이 이름을 붙이는 것 같았는지
그런데 베들레헴을 포함한 온 유대 땅에 기근이 들었어요.
그래서 이들 가족 모두는 모압이라는 이방 나라로 소이 먹고 살기 위하여 이민을 갔어요. 그렇게 이민 생활을 시작했습니다.
그런데 불행하게도 남편 엘리멜렉이 이 이방 땅에서 세상을 떠났습니다. 두 아들은 이방 여자인 모압 여자들과 결혼을 했는데, 그 자부의 이름이 하나는 오르바이고 다른 하나는 룻입니다.
얼마 안 있다가 두 아들이 또 세상을 떠났어요.
이민 온지 10년 만에 상황이 바뀌어 그래서 이 나오미의 가정에는 여자만 세 사람이 남게 되었습니다.
사람이 살다가 보면 극단적인 일이 아니더라도 이렇게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죽은 사람은 죽은 것은 것이고 산 사람은 살아야 합니다.
나오미는 나이도 있고해서 시집가기는 그렇고 해서 자기의 고향으로 가서 친척들과 함께 살려는 마음을 먹었지만 며느리들은 아직 젊었으니 재가를 하도록 권유를 했습니다.
남편도 없는 젊은 여자들을 데리고 가는 것도 문제입니다.
그래서 서로 서로 지금까지는 아들이 있고 남편이 있어서 함께 할 조건이 충족이 되어서 같이 살 수 있었지만 이제는 아들도 죽고 남편도 죽고 하니 더 이상 함께 할 그 무엇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함께 할 수 있는 조건이 없는데 끝까지 함께해야 한다고 우기는 것은 잘 못된 일이고 그 자체가 큰 문제입니다.
그래서 오르바 그 이름의 의미는 반항적인데 더 이상 함께 할 수가 없음을 알고 제 살길을 찾아 친정으로 갔습니다.
친정으로 갔는지 다시 시집을 갔는지는 모르지만 시집을 간 것 같아요 하여튼 나오미와는 해어졌습니다.
이 모습을 보고 사람들은 오르바를 가리켜 불효를 했다고 하는데 불효가 아닙니다.
그리고 향락을 찾아갔다고 못된 여자라고 합니다.
그렇게만 보면 안 되지요 가장 합리적이요 이성적인 선택을 한 것입니다.
가지 말라고 잡아 두는 자가 문제이지요 이 오르바 누구 한 사람 나무랄 수 없습니다.
그런데 또 한 여자 룻은 합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는 선택을 하는 것입니다.
소이 디른 이들이 볼 때에 몰상식한 선택입니다.
너 미쳤서입니다. 사도 바울이 복음 전하다가 로마의 총독 베스도에게 들은 소리가 있습니다.
너 미쳤구나 너 지금 행동이 합리적이지 않아, 이성적이지 않아,
행26:24-25 바울이 이같이 변명하매 베스도가 크게 소리 내어 이르되 바울아 네가 미쳤도다 네 많은 학문이 너를 미치게 한다 하니 바울이 이르되 베스도 각하여 내가 미친 것이 아니요 참되고 온전한 말을 하나이다
내가 모든 것을 다 버려도 복음을 얻게 된다면 다른 것은 배설물로 여깁니다
나오미를 따라 베들레헴으로 가겠다는 것입니다.
누가 좀 말려 줘요 죽어도 따라 가겠다는 것입니다. 이성의 한계를 벗어나 특별한 것입니다.
거기에는 무슨 사연이 있기 때문입니까? 하나님이 살아 계시기 때문입니다.
나는 세상적인 그 무엇을 위하여 있는 자가 아니야
더 이상 세상적인 그 무엇을 위하여 사는 삶은 의미가 없어
비록 고향 산천을 떠난다 하더라도 믿음으로 살고 싶어 이것입니다.
물론 그 나머지의 인생의 그 결과는 상당히 달랐습니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인간적으로 살기를 택한 오르바는 더 이상 그 믿음의 족보에는 그 이름조차도 거론이 되지 않았습니다.
아니 그 이름을 더 이상 이야기 할 가치가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나 룻은 지금까지 그 이름은 교회사가 아니 역사가 계속되는 이상 그 공로가 지대하기에 모든 이들의 그 이름은 잊혀지지 않고 있습니다.
그녀가 다윗의 증조할머니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3:17절 그의 이웃 여인들이 그에게 이름을 지어 주되 나오미에게 아들이 태어났다 하여 그의 이름을 오벳이라 하였는데 그는 다윗의 아버지인 이새의 아버지였더라
나의 삶은 과연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한번 정립하는 계기가 되시기 바랍니다.
오르바의 삶으로 살고 싶습니까?
아니 그렇게 살아 왔고 그렇게 사는 것이 가장 무난하다고 생각하십니까?
물론 가장 무난하겠지요
그러나 삶의 의미는 없을 것입니다. 삶의 의미는 하나님과의 관계성입니다.
내 자신의 조건에만 충실한 자입니다.
지적이고 의지적이고 또는 똑똑하다고 할 수도 있겠습니다.
나오미는 떠나기에 앞서 두 자부에게 자유로운 선택을 하게 했습니다.
여러분 선택은 자유입니다. 억지로 할 수 있다면 억지로라도 해야 합니다.
그러나 더욱이 신앙은 억지가 되어서 안 되며 주께 드려지는 모든 것은 억지가 아니라 자원이 되어야 합니다.
주님은 사람이 환경이나 인정 때문에 마지못해 그분을 따르는 것을 원치 않으시고 기꺼이 단 마음으로 그분을 선택하여 따르는 것을 기뻐하신다.
오르바는 나오미와의 관계가 오로지 주어진 환경과 여건이요 조건이 엇습니다.
그렇기에 그 조건이 상실되었기 때문에 그 관계는 더 이상 유지되지 않는 것입니다.
두 며느리는 어머니와 함께 어머니의 백성에게로 돌아가겠다고 말했지만 나오미는 자기를 따라와도 달리 좋은 수가 없다는 것, 즉 그들이 다시 결혼할 새 남편을 그녀가 낳아주지 못한다는 것을 자세히 말하면서 설득한다. 그리고 여호와의 손이 자신을 치셨으므로 마음이 더욱 아프다고 말했다.
뭐라고 하나님께도 버림을 받았어 라고 생각이 들기도 한 것입니다.
이 같은 말에 오르바는 더 이상 함께 한다는 것은 그 자신이 용납이 되지 않아 마음이 아프지만 더 이상의 교제가 있을 수 없었습니다.
자신의 기대치가 없어진 것입니다.
14절 오르바라는 여인은 그 말을 듣고 그 시모에게 입맞추었다.
죽음의 키스. 이별의 키스를 하였습니다. 마치 유다가 예수님께 입을 맞추는 키스가 생각이 나는 것 같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은 사람의 자유 의지를 귀하게 여기시고 자의적으로 그분을 따르기를 원하신다.
하나님은 사람이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따를 만한 인격의 하나님이시다
오르바는 인간적으로 말해 그렇게 나쁘게 보이지 않는다. 그녀도 할 만큼 했다. 죽은 남편을 위해서나 시어머니를 위해 그 마음이 그렇게 나쁘지 않았다. 어느 정도 시어미를 따를 마음도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여인을 나오미가 억지로 데리고 들어갔다면 그녀는 그 식구들 모두에게 커다란 짐으로 작용했을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진심으로 시모를 따라 나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나에게도 오르바 같은 요소들이 있습니다.
신앙조차도 섬김의 정신까지도 인간적인 그 한계에 머물러 잇다는 것입니다.
늘 이런 인물은 불안 할 것입니다. 언제 돌아 설지 모르는데
오르바 돌아 서보았자 그녀는 저주 받은 모압의 여자요 그리고 그의 자녀 또한 그 이름에서 벗어 날 수가 없었습니다.
제주도 옆에 우도라는 섬이 있는데 그 섬에는 외어머니 밑에 외아들로 자란 농사꾼 총각이 있었는데 어느 날 외지 부산에서 미술을 전공한 한 처녀가 들어와서 두 사람이 눈이 맞아 함께 살기를 7년이라는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런데 이 남자는 그 아내 된 그 여자를 볼 때마다 이런 생각이 든다는 것입니다. 바람처럼 왔다가 이 여자가 언제 바람같이 사라지지 않을까 하는 불안하다는 것입니다.
무엇인가 조건이 맞지 않으면 떠나는 것입니다.
그녀에게는 인정과 체면이 많이 작용했고 의리도 어느 정도 작용했을 것이다. 어떻게 사람이 함께 살다가 그렇게 쉽게 헤어질 수 있는가 하는 의리나 인정이 작용했을 것이라는 말이다.
그러나 의리도 인정도 더 이상 묶어 둘 수가 없고 떠나는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떠나라 떠나라고 했던 것입니다.
동시에 더 이상 하나님의 나라에 그의 이름은 존재하지 않는 것입니다.
룻은 왜 떠나지 않고 죽고 살기를 함께 하겠다는 것입니까?
그들의 관계가 의리 인정에만 있었던 아니지요 하나님과의 관계입니다.
사람들이 흔히 룻이 효부라서 시모를 따라 왔다고 효심만을 이야기하지만 결코 효심만으로는 자기 부모와 민족을 버리고 먼 길을 따라나설 수는 없을 것이다.
효심이 밥 먹여 줍니까?
효를 지키다가 얼마나 한을 품고 인생을 살다간 열녀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인생을 윤리 도덕으로 묶어 두어서는 안 됩니다. 이게 또한 새로운 짐이 될 뿐입니다.
윤리와 도적이 룻을 붙잡은 것이 아니라 그녀가 믿는 하나님과의 관계가 그들을 함께하게 하게 한 것입니다.
여기에는 결코 짐도 아니요 후회도 아닙니다.
롬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결국 룻의 행동은 인간적인 것을 따르는가 따르지 않는가가 아니라 모압 땅의 우상을 버리고 나오미의 하나님을 믿고 택한 결단과 용기가 있는 강하고 지혜로운 행동입니다.
오르바를 두고 나오미가 말하기를 그가 떠난 것은 결국 인간적인 조건이 아니라 15절 그의 백성과 그의 신들에게로 돌아갔다고 했습니다.
인간적인 관계성으로는 불가능 이지만 하나님과의 관계성으로 이루어짐
17절 내가 죽는 일 외에 어머니를 떠나면 여호와께서 내게 벌을 내리시고 더 내리시기를 원하나이다 하는지라
룻은 달랐다. 그 여자는 시어머니에게서 본 것이 있었다.
즉 시어머니가 섬기는 하나님이 참 하나님이시라는 것, 그 백성이 그 하나님의 긍휼과 은혜를 얻은 백성이라는 것을 안 것이다.
비록 나오미가 자신이 잘못해서 징계를 받아 하나님이 그녀를 치셨다고 고백했으나 룻에게는 그런 말이 오히려 복음으로 들린 것입니다.
하나님 앞에 놓여 있는 인생 세상적인 조건으로 사는 것이 아님을 알고
하나님을 믿음으로 사는 것을 알았다는 것입니다.
여태까지 함께 신앙 생활하면서 아직 이것을 발견하지 못합니다.
그래서 인간적인 조건이 상실 되면 언제든지 믿음에서 떠나겠다는 자세를 가질 수가 잇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르바에게는 아무리 잇고 싶다고 하지만 인간적인 조건을 제시 했을 때에 울면서 가버렸습니다.
그러나 룻은 인간적인 조건을 초월한 하나님을 발견했기에 하나님이 조건이시기에 떠나지 않고 죽을 때까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래서 나오미는 룻에게 떠나라고 말 할 이유가 없었고 그를 데리고 베들레헴 축복의 땅으로 함께 가는 것입니다.
18-19절 나오미가 룻이 자기와 함께 가기로 굳게 결심함을 보고 그에게 말하기를 그치니라 이에 그 두 사람이 베들레헴까지 갔더라
룻은 하나님의 백성들에게 이방인이 가지지 않은 뭔가 특이한 것이 있다는 것을 발견했으며 비록 그 남편은 죽었지만 그 가정에 시집온 것이 우연한 일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들어왔다는 큰일임을 깨달은 것이다.
남은 자에게 이루시는 하나님의 뜻 결국 믿음은 남은 자의 사상입니다.
사10:21 남은 자 곧 야곱의 남은 자가 능하신 하나님께로 돌아올 것이라
결국에 나의 삶은 믿음으로 남느냐 아니면 인간적으로 돌아 가느냐 입니다.
믿음의 결과는 놀라운 일입니다.
이방 여인인 룻이 그리스도 왕가의 족보에 들어갔다.
여기서 복된 성도는 그의 삶에서 하나님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빛은 어두움 가운데 그 진가가 드러납니다.
풍지박산 난 집안에 오르바는 그 모습대로 자신을 처신했지만 룻은 그 가운데 하나님의 의를 드러내었습니다.
현숙한 여인
잠31:10 누가 현숙한 여인을 찾아 얻겠느냐 그의 값은 진주보다 더 하니라
잠31:30-31 고운 것도 거짓되고 아름다운 것도 헛되나 오직 여호와를 경외하는 여자는 칭찬을 받을 것이라 그 손의 열매가 그에게로 돌아갈 것이요 그 행한 일로 말미암아 성문에서 칭찬을 받으리라
보아스는 엘레멜렉의 친족으로서 룻이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일을 들어서 알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자기 부모와 고국을 떠나 낯선 땅까지 따라온 것을 잘 알고 있었기 때문에 이삭을 줍는 룻을 선대합니다. 긍휼과 사랑을 베푸는 보아스에게 룻이 엎드려 얼굴을 땅에 대고 절을 하면서 보아스에게 대답합니다.
나는 이방 여인이거늘 당신이 어찌하여 내게 은혜를 베푸시며 나를 돌보시나이까?
참으로 겸손하고 아름다운 모습입니다.
보아스는 기생 라합이 유다 족속 살몬과 결혼하여 낳은 아들입니다.
라합은 하나님을 경외하여 이스라엘 정탐꾼을 숨겨주고 여리고 성에서 유일하게 자기 가족을 살렸던 여인이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했던 라합의 영향인지 아들 보아스도 참 믿음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룻을 축복하면서, 롯2:11-12 보아스가 그에게 대답하여 이르되 네 남편이 죽은 후로 네가 시어머니에게 행한 모든 것과 네 부모와 고국을 떠나 전에 알지 못하던 백성에게로 온 일이 내게 분명히 알려졌느니라 여호와께서 네가 행한 일에 보답하시기를 원하며 이스라엘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의 날개 아래에 보호를 받으러 온 네게 온전한 상 주시기를 원하노라 하는지라
내개 맺은 모든 관계는 인간적인 관계만을 했는가 아니면 믿음의 하나님과의 관계입니까?
룻은 인간적인 것만으로는 복을 받을 수 없는 사람이다.
합리적으로 이성적으로 해서는 아버지와 딸과의 사이에서 얻는 불륜의 후손이며 외국인과 결혼하여 동족에게 따돌림을 받는 사람이며 시아버지와 남편마저 잃어버린 사람이다.
그런데 이런 인간적인 조건을 가지고 이 여자가 그렇게 산다면 그 여자는 죽을 때까지 불쌍한 여자로 살겠지만 하나님과의 관계로 삶을 살 때에는 세상에서 가장 큰 복을 받은 사람이 되었다.
아직도 인간적인 관계를 고집하며 살아가는 자에서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어 새로운 축복의 시작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벧전2:10 너희가 전에는 백성이 아니더니 이제는 하나님의 백성이요 전에는 긍휼을 얻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긍휼을 얻은 자니라